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6.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하이힐을 즐겨 신은 남자
부츠는 전투용 신발로 탄생했다. 수메르나 이집트의 병사들은 맨발로 싸우고 있었으나 기원전 1100년 무렵의 앗시리아인은 구두 바닥을 금속으로 보강하고 장딴지까지 올라오는, 끈이 달린 부츠를 신고 있었다. 앗시리아인들은 히타이트인과 함께 구두 제조로 널리 알려졌고 좌우의 모양이 다른 군대용 부츠를 신었다는 증거가 있다. 히타이트어 문헌 중에 농업신인 테리피누가 어리석게도 '오른쪽 부츠를 왼발에 신고 오른발을 왼쪽 부츠에 넣었기'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앗시리아의 보병용 부츠가 바로 그리스나 로마 병사들에게 도입된 것은 아니다. 맨발로 싸우고 있던 그들이 우선 신기 시작한 것은 바닥에 압정을 박아서 미끌어지지 않고 내구성이 있게 만든 샌들이었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튼튼한 부츠를 신은 것은 주로 도보를 하는 원정 때였다. 추운 계절에는 모피로 속을 대고 동물의 발이나 꼬리를 장식으로 매단 부츠가 많았던 것 같다. 부츠는 또한 추운 산악 지방이나 광대한 초원 지대의 유목 기마 민족이 평소에 사용하는 구두가 되기도 했다. 튼튼하고 더구나 약간 올라간 뒤꿈치가 발을 등자(발걸이)에 단단히 고정시키므로 부츠는 전투용 장비로서 안성맞춤이었다.
1800년대에 독일 헤센 지방의 구두 기능공은 무릎까지 오는 '헤시안'이라는 군대용 부츠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광택이 있는 검은 가죽 제품으로 로마인의 부츠와 마찬가지로 동물의 꼬리가 매달려 있었다. 같은 무렵 영국의 구두 기능공은, 전쟁의 승리를 등에 업고 웰링턴 부츠를 유행시켰다. 웰링턴이란 이름은 워터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대파한 장군인 웰링턴 공의 애칭인 아이론 듀크, 즉 아서 웨슬리 웰링턴의 이름을 딴 것이다. 부츠는 몇 세기에 걸쳐서 유행과 퇴조를 되풀이해 왔다. 그리고 부츠의 가장 큰 특징인 유별난 뒤꿈치가 하이힐 구두의 유행을 낳았다. 하이힐은 하룻밤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몇 십 년 동안 조금씩 높아진 것으로, 시작은 16세기의 프랑스다. '하이힐'이라는 말은 요즘엔 뒷굽이 높은 여성 구두의 대명사가 되었으나 원래는 남성의구두를 일컫고 있었다. 16세기에는 여성화에 이렇다 할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여성의 다리는 긴 옷 밑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뒷굽이 높은 구두의 편리함이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사람들이 말을 탈 때였다. 힐 덕택에 발을 등자에 단단히 걸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힐을 붙이는 것이 기정 사실이 된 최초의 부츠는 승마용이었다. 또한 중세에는 위생 시설이 빈약하고 도시가 과밀해서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이 거리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따라서 두꺼운 바닥과 뒷굽이 있는 부츠는 실제로 몇 인치 몫의 보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심리적인 효과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중세에 크록(목화)이 등장한 것은 거리의 오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북유럽에서 크록은 일부 또는 전체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거리의 쓰레기로부터 고급 가죽 구두를 지키는 오버 슈즈로 태어났다. 그리고 따뜻한 계절에는 흔히 작은 가죽 구두 대신 신었다.
'펌프스'라는 독일 구두가 1500년대 중반에 전 유럽으로 확산된다. 이것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보석을 박기도 한 굽이 낮고 헐거운 덧신이었다. 그런데 나무 바닥을 걸을 때 뒷굽이 '뚜걱뚜걱' 하고 소리를 내므로 역사학자는 펌프스라는 이름이 붙여진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훗날 여성의 덧신인 스카프(슬리퍼)의 이름도 마찬가지로 붙여진 것이리라. 160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는 하이힐 신사용 부츠가 예장에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을 유행시키고 굽을 더욱 높인 것은 태양왕 루이 14세다. 유럽 역사상 가장 길었던 73년 동안의 치세 중에 프랑스 군사력은 최강이 되었고 프랑스 궁정은 과거에 없던 세려되고 찬란한 문화를 누린다. 하지만 위업이 아무리 떠받들여져도 루이 14세의 작은 키에 대한 열등감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왕은 어느 날 자신의 키를 조금이라도 크게 보이려고 구두의 뒷굽을 몇 인치인가 높게 만들었다. 그러자 왕을 모방이라도 하듯 궁정의 남녀 귀족들 모두가 구두 기능공에게 자신들의 구두 뒷굽도 좀더 높이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루이 14세는 왕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구두 뒷굽을 더욱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남성들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의 키로 되돌아왔지만 궁정의 여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남자와 여자 사이에 역사적 불균형이 구두 뒷굽에서 나타난 것이다.
18세기에 프랑스 궁정 여성들은 금빛 은빛 자수 모양이 있는 뒷굽 3인치의 구두를 신고 있었다. 미국 여성들은 파리의 유행을 모방하여 '프렌치 힐'이라는 이 구두를 도입했다. 이것이 미국에서 뒷굽의 양극화를 낳는 원인이 된다. 여성의 뒷굽이 점점 높고 가늘어져가는 한편, 남성의 구두는(부츠를 제외하고)반대로 낮아진다. 1920년대에 '하이힐'은 이제 실제의 뒷굽높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매혹적인 여성화의 패션을 나타내는 말이 되어 있었다. 끈이 없는 슬리퍼식 로퍼는 노르웨이의 초기 오버 슈즈인 크록에서 탄생했다고 여겨진다. 좀더 정확히 위전 로퍼는 메인 주 윌튼의 제화공인 헨리 바스가 '노르위전'(노르웨이인의)이라는 말의 끝 두 음절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바스는 뉴잉글랜드의 농부들을 위해 1876년에 발목까지 덮는 튼튼한 구두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후 채벌용 구두나 특별 주문한 구두도 취급했다. 그는 버드 제독이 남극 탐험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 신은 방한 부츠나, 찰스 린드버그가 역사적인 대서양 횡단 비행을 했을 때 신은 가벼운 비행용 부츠를 만든 인물이다. 1936년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슬립 온식 모카신에 주목한 바스는 노르웨이 제조업자로부터 이것을 미국 시장용으로 다시 디자인할 것을 허가 받는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로퍼가 '바스 위전'이라는 상품 라인이 되었다. 1950년대에는 바스 위전이 손바느질한 모카신으로 과거에 없던 인기를 누렸다. 구두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던 옛날의 관습을 따르자면 바스 위전은 대학생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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