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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크하르트가 보는 르네상스와 그 문제점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1> 부르크하르트와 르네상스 ②
3) 부르크하르트가 보는 르네상스와 그 문제점
예술품으로서의 이탈리아 도시국가
14-16세기의 이탈리아 반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북부 지역은 많은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중부는 로마교황이 다스리는 교황령이며, 남부는 나폴리 왕국의 영토였다.
북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14세기에는 약 30개 정도의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이 도시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것들로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거의 맞먹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지중해 무역과 모직물 산업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등 봉건국가의 왕들은 권력을 영주들과 나누어 갖고 있었으므로 큰 영토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는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었다.
부르크하르트는 이 시기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유럽 최초의 근대국가라고 주장한다. 그 통치자들이 중세법이나 관습, 기독교 교리에 의지하지 않고 냉정한 정치적 타산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15세기에 들어와 이탈리아의 정세가 혼란스러워지며 수많은 전제군주들이 몰락하고 용병대장들이 권력을 찬탈하는 일도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주들이 더욱 긴장하고 신중하며 계산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이런 근대국가를 만드는 일에 가장 앞선 도시가 베네치아와 피렌체이며 특히 피렌체가 세계 최초의 근대국가라고 믿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정치적 원리와 이론들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실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는 날카로운 현실정치를 주장한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이 중요하다. 그가 자신의 <군주론>에서 군주들에게 사자와 같은 용맹함과 여우의 교활함을 주문하며 정치에서 도덕적인 고려를 제거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가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최초의 근대국가로 규정하고 그것을 예술품으로까지 치켜올렸으나 근대국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단지 도덕에서 벗어나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정치를 했으니 근대국가라는 것인데 그런 식의 막연한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수십 개의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했으므로 권모술수나 계산이 더 따를 수밖에는 없었으나 정치를 하는 데 종교적, 도덕적 명분들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 중세시대에 유럽 다른 지역의 왕이나 봉건 영주들이 반드시 종교나 도덕적 가르침에 따라 행동한 것도 아니다. 종교적, 도덕적인 명분과 정치적 실용주의는 어디에나 섞여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를 특별한 경우로 볼 수는 없다.
또 근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제도 면에서 중앙집권화, 행정의 합리화 등이 따라야 한다. 이념적으로도 국가주권의 개념이 분명하게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근대국가라고 하기는 어렵다.
근대적 개인의 탄생
부르크하르트는 또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조건이 근대적 개인주의가 나타날 완전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근대성을 중세의 지적, 문화적 후진성과 대비시키고 있다.
그는 중세 사람들은 신앙심, 어린아이 같은 선입견, 망상에 싸여 있었고 자신을 오직 종족, 민족, 정파, 가족 등 집단 속의 존재로만 생각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한계가 가장 먼저 사라지고 사람들이 개인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 말부터 인간의 개성이 넘쳐나기 시작하며 개인주의를 향한 길이 열리게 되는데 그것은 이탈리아가 중세의 억압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이 강력하고 다방면의 재능을 가진 본성과 어울려 최고의 개성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부르크하르트가 말하는 '만능인(l'uomo universale)'이다.
단테 같은 시인, 알베르티 같은 건축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화가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렇게 개인주의 위에 서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은 코스모폴리탄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을 가졌고 개인의 업적에 따라 명성을 얻으려고 하는 근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부르크하르트는 '개인'이나 '개인주의'에 대해 분명히 정의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개인성의 개념이 반드시 스스로가 개인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인간의 개인성은 완전성, 명예의 달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기의식이나 자기반성 없이 개인성이 나타나기는 어렵다.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서 사람들이 스스로를 개인으로서 의식했다는 증거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 사람들은 계속 집단 속에서 정체성을 느꼈다. 또 부르크하르트가 일찌감치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길드나 가문, 교회 등은 14, 15세기에도 계속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에 '근대적 자아'가 나타났다는 주장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게다가 이름을 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자아의식과는 별 관계가 없다. 이름을 내거나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태도는 어느 시대 인간들에게서나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개인성을 말하며 그 주된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그들의 천재적인 능력에 의해 크게 유명해진 위의 몇몇 예술가들의 예이다.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개인성을 일반화하고 있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도 자신의 주장에 근거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분명해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한 발을 빼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근거도 부족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슨 심보에서일까.
고대의 부활과 인문주의
우리는 보통 르네상스에 있어 고전고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대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르네상스 문화가 새롭게 꽃 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가 반드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고대의 부활과 고전세계의 재발견이 르네상스의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며 그리스 · 로마 문화는 이탈리아인들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르네상스는 단편적인 모방이나 편집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르네상스인의 창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사실 르네상스 문화에서는 그리스 · 로마 시대의 고전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인문주의가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문법, 수사학, 시, 역사, 도덕철학의 5개 주제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당시에 이런 주제를 연구하고 가르친 이탈리아의 학자, 시인, 성직자, 법률가, 관리, 공증인 들을 인문주의자(humanist)로 불렀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의 모든 주요 인물들은 이런 인문주의자들이거나 그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동안 인문주의는 상당히 잘못 이해되어 왔다. 그것을 신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고 종교가 아니라 세속성을 강조하는 '철학'으로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인문주의는 결코 세속적인 경향을 가진 것은 아니다.
14세기 시인인 페트라르카를 포함해 지도적인 인문주의자들은 거의 모두 종교적인 가치에 의해 행동했다. 또 르네상스 시대에 인문주의는 실용적인 교과목이었다. 결코 철학으로 생각되지도 않았고 심각한 학문적인 주제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인문주의가 등장하고 호응을 받은 것은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체제가 로마 공화정과 비슷한 면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지배계급의 자식이나 형제들을 위한 교육에 그리스나 로마의 많은 저술들이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대의 문헌들이 다시 각광을 받아 수집, 번역되고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대 문물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대학에서 가르친 것은 주로 중세 기독교 철학인 스콜라 철학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17세기까지도 유지되었다. 인문주의가 중세 철학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부르크하르트나 그 제자들처럼 인문주의를 철학으로 보고 철학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의 산물이다. 인문주의는 당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이나 사회적 이상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자연의 과학적 인식
부르크하르트는 또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인들이 세계와 인간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역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깃들어 있는 타고난 재능 덕이었다. 제노바 사람들은 이미 1291년에 대서양의 카나리아 군도를 발견했고 또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으려는 시도를 했다.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고대 문헌을 잘 알기 전에도 이 세상의 사물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고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부르크하르트는 고대의 지리학자들이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렇게 빨리 완전성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이것은 지리학뿐 아니라 자연과학 전체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제 책과 전통의 억압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자연의 탐구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당시의 세계관에서 벗어난 이런 사이비 과학들에 대해 대체로 관용으로 대했다는 것이다.
또 그는 이탈리아인들이 자연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낀 첫 번째 근대인들이라고 믿었다. '신곡'을 쓴 단테가 첫 인물이고 서정시인인 페트라르카,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발견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기에 개인과 인간 본성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고대 문헌의 영향을 통해 새롭게 정의되고 채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는 과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인물이었으므로 이러한 그의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은 중세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물활론적(物活論的)으로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생물체로 본 것이다. 근대인처럼 기계론적으로 본 것이 아니다. 이는 다빈치나 단테, 알베르티 모두 마찬가지이다.
또 이들은 자연도 중립적으로 보지 않고 가치 판단을 집어넣어 생각했으며, 따뜻한 것이 추운 것보다 좋고 나무가 돌보다 좋으며 변화하지 않는 것이 변화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르네상스 말기에 들어서서 수학적 방법에 의해 자연현상의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자연현상 안에 숨어 있는 수학적 구조를 밝히려는 의도가 아니라 간결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인문주의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도 17세기 이후의 수학적 정신이 아니라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전통 속에 있으며 당시 유행하던 점성술을 믿은 인물이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이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 체계가 천체의 움직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믿어 아리스타르쿠스의 태양중심설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다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가 후대의 천문학자들에 의해 너무 복잡하게 변형된 것을 단순화, 순수화하려 한 것뿐이다.
그가 1543년에 쓴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이 당시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진 것은 이렇게 그의 우주론이 중세적 우주론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천동설이나 그의 지동설이나 결함이 많아 천체의 움직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태도는 17세기에 실험과 관찰을 보다 중시한 갈릴레이나, 자연세계를 수학적 원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본격적으로 한 데카르트와 뉴턴에 오면 달라진다. 이렇게 르네상스 과학은 17세기의 과학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계급의 해체와 종교적 요소의 쇠퇴
부르크하르트는 신분의 해체가 분명히 그 시대의 일반적인 특징이라 믿었는데 그것은 특히 12세기 이후 귀족과 시민이 도시의 성벽 안에서 함께 살며 그렇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주교직이나 수도원장직, 수녀원장직들이 본질적으로 출신에 따라 주어지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또 그는 최고 수준의 사교생활에서는 신분의 구분이 모두 무시되었고 교육수준과 교양이 중요했다고 말한다. 어느 신분이나 가문에서 출생했느냐 하는 것은 그가 상속재산을 받아 노닥거릴 여유를 갖는 것 외에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 여성은 남성과 대등한 지위에 있었고 교육을 받은 상층계급의 여성은 남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이 시기 이탈리아의 사회적 지위가 신분과 가문이라기보다 교육과 능력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근대적인 평등한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가 신분 대신 계급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런 이유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사실과는 맞지 않다. 당시의 이탈리아가 이웃 국가들보다 발전된 경제를 가졌고 더 복잡한 사회였던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신분제도에 크게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도 여전했다. 여성은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이것은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하는 여성 인문주의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군주나 귀족 가문의 교육받은 일부 여성들도 결혼을 하면 그것으로 글 쓰는 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러니 여성이 남성과 같이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남녀가 평등했다는 말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이런 면을 아는 데는 개인의 일기나 세금장부, 여러 기관들의 사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피렌체가 도움이 된다. 그런데 실제 연구에 의하면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는 별로 진보적인 변화를 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경제의 발전이나 자선 단체 같은 데에서 약간의 근대적인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옛날 모습이 대체로 유지되었다. 대가족제는 일반적이었고, 귀족들과 평민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피호관계라는 독특한 사회제도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 피렌체인의 가치관이 더 세속화된 것도 아니고 더 합리화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15세기 피렌체 시를 근대화나 진보라는 단순한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 이탈리아에서 종교적 요소가 약화되고 세속성이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르네상스인들이 고대를 알게 된 이후 신성한 기독교적 이상을 위대한 역사를 숭배하는 것으로 대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사람들을 비 신앙과 절망의 품으로 내몰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점성술, 마법 같은 미신적인 행위에서 구원을 얻으려 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인문주의자들이 고대의 비기독교적 문화에 접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비종교적인 인물들은 아니었다. 일반인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종교개혁 이전 이탈리아의 교회가 많이 부패하고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에 있었다. 그의 이런 반종교적 태도는 자신이 무신론자였던 것과 함께 19세기 후반 유럽의 일반적인 탈 기독교적 풍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상으로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문화>에서 주장하는 여러 내용들이 많은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의 책에서 다루지는 않았으나 르네상스의 근대성을 뒷받침하는 다른 두 주제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 문제와 르네상스 미술에 관한 것이다. 그것들을 살펴보자.
부르크하르트가 보는 르네상스와 그 문제점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1> 부르크하르트와 르네상스 ②
3) 부르크하르트가 보는 르네상스와 그 문제점
예술품으로서의 이탈리아 도시국가
14-16세기의 이탈리아 반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북부 지역은 많은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중부는 로마교황이 다스리는 교황령이며, 남부는 나폴리 왕국의 영토였다.
북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14세기에는 약 30개 정도의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이 도시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것들로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거의 맞먹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지중해 무역과 모직물 산업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등 봉건국가의 왕들은 권력을 영주들과 나누어 갖고 있었으므로 큰 영토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는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었다.
부르크하르트는 이 시기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유럽 최초의 근대국가라고 주장한다. 그 통치자들이 중세법이나 관습, 기독교 교리에 의지하지 않고 냉정한 정치적 타산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15세기에 들어와 이탈리아의 정세가 혼란스러워지며 수많은 전제군주들이 몰락하고 용병대장들이 권력을 찬탈하는 일도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주들이 더욱 긴장하고 신중하며 계산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이런 근대국가를 만드는 일에 가장 앞선 도시가 베네치아와 피렌체이며 특히 피렌체가 세계 최초의 근대국가라고 믿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정치적 원리와 이론들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실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는 날카로운 현실정치를 주장한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이 중요하다. 그가 자신의 <군주론>에서 군주들에게 사자와 같은 용맹함과 여우의 교활함을 주문하며 정치에서 도덕적인 고려를 제거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가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최초의 근대국가로 규정하고 그것을 예술품으로까지 치켜올렸으나 근대국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단지 도덕에서 벗어나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정치를 했으니 근대국가라는 것인데 그런 식의 막연한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수십 개의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했으므로 권모술수나 계산이 더 따를 수밖에는 없었으나 정치를 하는 데 종교적, 도덕적 명분들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 중세시대에 유럽 다른 지역의 왕이나 봉건 영주들이 반드시 종교나 도덕적 가르침에 따라 행동한 것도 아니다. 종교적, 도덕적인 명분과 정치적 실용주의는 어디에나 섞여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를 특별한 경우로 볼 수는 없다.
또 근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제도 면에서 중앙집권화, 행정의 합리화 등이 따라야 한다. 이념적으로도 국가주권의 개념이 분명하게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근대국가라고 하기는 어렵다.
근대적 개인의 탄생
부르크하르트는 또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조건이 근대적 개인주의가 나타날 완전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근대성을 중세의 지적, 문화적 후진성과 대비시키고 있다.
그는 중세 사람들은 신앙심, 어린아이 같은 선입견, 망상에 싸여 있었고 자신을 오직 종족, 민족, 정파, 가족 등 집단 속의 존재로만 생각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한계가 가장 먼저 사라지고 사람들이 개인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 말부터 인간의 개성이 넘쳐나기 시작하며 개인주의를 향한 길이 열리게 되는데 그것은 이탈리아가 중세의 억압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이 강력하고 다방면의 재능을 가진 본성과 어울려 최고의 개성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부르크하르트가 말하는 '만능인(l'uomo universale)'이다.
단테 같은 시인, 알베르티 같은 건축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화가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렇게 개인주의 위에 서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은 코스모폴리탄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을 가졌고 개인의 업적에 따라 명성을 얻으려고 하는 근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부르크하르트는 '개인'이나 '개인주의'에 대해 분명히 정의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개인성의 개념이 반드시 스스로가 개인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인간의 개인성은 완전성, 명예의 달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기의식이나 자기반성 없이 개인성이 나타나기는 어렵다.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서 사람들이 스스로를 개인으로서 의식했다는 증거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 사람들은 계속 집단 속에서 정체성을 느꼈다. 또 부르크하르트가 일찌감치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길드나 가문, 교회 등은 14, 15세기에도 계속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에 '근대적 자아'가 나타났다는 주장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게다가 이름을 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자아의식과는 별 관계가 없다. 이름을 내거나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태도는 어느 시대 인간들에게서나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개인성을 말하며 그 주된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그들의 천재적인 능력에 의해 크게 유명해진 위의 몇몇 예술가들의 예이다.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개인성을 일반화하고 있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도 자신의 주장에 근거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분명해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한 발을 빼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근거도 부족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슨 심보에서일까.
고대의 부활과 인문주의
우리는 보통 르네상스에 있어 고전고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대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르네상스 문화가 새롭게 꽃 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가 반드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고대의 부활과 고전세계의 재발견이 르네상스의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며 그리스 · 로마 문화는 이탈리아인들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르네상스는 단편적인 모방이나 편집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르네상스인의 창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사실 르네상스 문화에서는 그리스 · 로마 시대의 고전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인문주의가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문법, 수사학, 시, 역사, 도덕철학의 5개 주제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당시에 이런 주제를 연구하고 가르친 이탈리아의 학자, 시인, 성직자, 법률가, 관리, 공증인 들을 인문주의자(humanist)로 불렀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의 모든 주요 인물들은 이런 인문주의자들이거나 그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동안 인문주의는 상당히 잘못 이해되어 왔다. 그것을 신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고 종교가 아니라 세속성을 강조하는 '철학'으로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인문주의는 결코 세속적인 경향을 가진 것은 아니다.
14세기 시인인 페트라르카를 포함해 지도적인 인문주의자들은 거의 모두 종교적인 가치에 의해 행동했다. 또 르네상스 시대에 인문주의는 실용적인 교과목이었다. 결코 철학으로 생각되지도 않았고 심각한 학문적인 주제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인문주의가 등장하고 호응을 받은 것은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체제가 로마 공화정과 비슷한 면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지배계급의 자식이나 형제들을 위한 교육에 그리스나 로마의 많은 저술들이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대의 문헌들이 다시 각광을 받아 수집, 번역되고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대 문물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대학에서 가르친 것은 주로 중세 기독교 철학인 스콜라 철학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17세기까지도 유지되었다. 인문주의가 중세 철학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부르크하르트나 그 제자들처럼 인문주의를 철학으로 보고 철학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의 산물이다. 인문주의는 당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이나 사회적 이상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자연의 과학적 인식
부르크하르트는 또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인들이 세계와 인간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역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깃들어 있는 타고난 재능 덕이었다. 제노바 사람들은 이미 1291년에 대서양의 카나리아 군도를 발견했고 또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으려는 시도를 했다.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고대 문헌을 잘 알기 전에도 이 세상의 사물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고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부르크하르트는 고대의 지리학자들이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렇게 빨리 완전성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이것은 지리학뿐 아니라 자연과학 전체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제 책과 전통의 억압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자연의 탐구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당시의 세계관에서 벗어난 이런 사이비 과학들에 대해 대체로 관용으로 대했다는 것이다.
또 그는 이탈리아인들이 자연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낀 첫 번째 근대인들이라고 믿었다. '신곡'을 쓴 단테가 첫 인물이고 서정시인인 페트라르카,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발견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기에 개인과 인간 본성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고대 문헌의 영향을 통해 새롭게 정의되고 채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는 과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인물이었으므로 이러한 그의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은 중세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물활론적(物活論的)으로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생물체로 본 것이다. 근대인처럼 기계론적으로 본 것이 아니다. 이는 다빈치나 단테, 알베르티 모두 마찬가지이다.
또 이들은 자연도 중립적으로 보지 않고 가치 판단을 집어넣어 생각했으며, 따뜻한 것이 추운 것보다 좋고 나무가 돌보다 좋으며 변화하지 않는 것이 변화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르네상스 말기에 들어서서 수학적 방법에 의해 자연현상의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자연현상 안에 숨어 있는 수학적 구조를 밝히려는 의도가 아니라 간결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인문주의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도 17세기 이후의 수학적 정신이 아니라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전통 속에 있으며 당시 유행하던 점성술을 믿은 인물이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이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 체계가 천체의 움직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믿어 아리스타르쿠스의 태양중심설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다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가 후대의 천문학자들에 의해 너무 복잡하게 변형된 것을 단순화, 순수화하려 한 것뿐이다.
그가 1543년에 쓴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이 당시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진 것은 이렇게 그의 우주론이 중세적 우주론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천동설이나 그의 지동설이나 결함이 많아 천체의 움직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태도는 17세기에 실험과 관찰을 보다 중시한 갈릴레이나, 자연세계를 수학적 원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본격적으로 한 데카르트와 뉴턴에 오면 달라진다. 이렇게 르네상스 과학은 17세기의 과학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계급의 해체와 종교적 요소의 쇠퇴
부르크하르트는 신분의 해체가 분명히 그 시대의 일반적인 특징이라 믿었는데 그것은 특히 12세기 이후 귀족과 시민이 도시의 성벽 안에서 함께 살며 그렇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주교직이나 수도원장직, 수녀원장직들이 본질적으로 출신에 따라 주어지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또 그는 최고 수준의 사교생활에서는 신분의 구분이 모두 무시되었고 교육수준과 교양이 중요했다고 말한다. 어느 신분이나 가문에서 출생했느냐 하는 것은 그가 상속재산을 받아 노닥거릴 여유를 갖는 것 외에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 여성은 남성과 대등한 지위에 있었고 교육을 받은 상층계급의 여성은 남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이 시기 이탈리아의 사회적 지위가 신분과 가문이라기보다 교육과 능력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근대적인 평등한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가 신분 대신 계급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런 이유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사실과는 맞지 않다. 당시의 이탈리아가 이웃 국가들보다 발전된 경제를 가졌고 더 복잡한 사회였던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신분제도에 크게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도 여전했다. 여성은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이것은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하는 여성 인문주의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군주나 귀족 가문의 교육받은 일부 여성들도 결혼을 하면 그것으로 글 쓰는 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러니 여성이 남성과 같이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남녀가 평등했다는 말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이런 면을 아는 데는 개인의 일기나 세금장부, 여러 기관들의 사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피렌체가 도움이 된다. 그런데 실제 연구에 의하면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는 별로 진보적인 변화를 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경제의 발전이나 자선 단체 같은 데에서 약간의 근대적인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옛날 모습이 대체로 유지되었다. 대가족제는 일반적이었고, 귀족들과 평민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피호관계라는 독특한 사회제도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 피렌체인의 가치관이 더 세속화된 것도 아니고 더 합리화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15세기 피렌체 시를 근대화나 진보라는 단순한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 이탈리아에서 종교적 요소가 약화되고 세속성이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르네상스인들이 고대를 알게 된 이후 신성한 기독교적 이상을 위대한 역사를 숭배하는 것으로 대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사람들을 비 신앙과 절망의 품으로 내몰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점성술, 마법 같은 미신적인 행위에서 구원을 얻으려 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인문주의자들이 고대의 비기독교적 문화에 접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비종교적인 인물들은 아니었다. 일반인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종교개혁 이전 이탈리아의 교회가 많이 부패하고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에 있었다. 그의 이런 반종교적 태도는 자신이 무신론자였던 것과 함께 19세기 후반 유럽의 일반적인 탈 기독교적 풍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상으로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문화>에서 주장하는 여러 내용들이 많은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의 책에서 다루지는 않았으나 르네상스의 근대성을 뒷받침하는 다른 두 주제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 문제와 르네상스 미술에 관한 것이다. 그것들을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