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강불욕
담원 정인보는 동래 정씨 명문의 후예로 고종 30년(1893년)에 낳아 6,25사변 중 납북 당한 채 소식이 끊긴 분이다. 그가 왜정아래 처신의 굴호로 삼은 것이 위의 글귀이다. 불강기지 불욕기신(그 뜻을 낮추지 말며, 몸을 욕되이 하지 않는다)은 굳은 신념의 표시이다.
조상의 이룩한 가풍과 타고난 천품으로 일찍이 학문의 기반을 이루었고 스물 하나라는 젊은 나이로 중국으로 망명, 동지들과 광복 운동을 하다가 가정 형편으로 중도에 귀국, 1923년 이래 연희 전문학교를 위하여 각 전문학교에서 국학과 동양사를 강의하며 시대일보,동아일보의 논설위원으로도 진력하였다.
일제 말엽 어두운 시절을 용하게 겪고 해방을 맞아 국학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는 서글픈 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허어 책이 있어야지"
지조를 지키러 그 뜻을 낮추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 생명같이 여기는 서책을 모조리 손놓았던 것이다. 왜놈 아래 본의 아니나마 협조하면서 13만 권이라는 장서를 지킨 최남선과는 그렇게 성격상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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