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22장 (육십 평생에) 1/2
(기도하라, 유대의 왕이여! 그대에게 사면을 내리노라.) 그 사악한 돈 우고와 에스파냐의 장군들이 공손하지만 완강하게 그 div에서 무릎을 꿇고는 자신들이 저지른 신성 모독적인 무도 행위를 사면해 달라고 요구하자, 클레멘테 7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피렌체식 조소 외엔 메디치 교황이 그 정복자들에게 달리 되갚아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다라서 그는 넉 달 간의 휴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동안 롬바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콜론나파를 사면하고 협정을 준수한다는 표시로 필리포 스트로치를 인질로 넘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트로치는 교황의 인척일 뿐 아니라 몸값이 무려 백만 두카토를 넘는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조약은 체결되었고, 이제 그가 이를 지키려고 하는 한, 그의 편에서 보자면 전쟁은 사실상 끝난 셈이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마키아벨리의 군 병영 생활도 끝났다.
그토록 어리석은 행동이 가져온 그 엄청난 재앙에 귀차르디니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는 교섭이 아니라 강요에 의한 조약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항의도 하고, 이러저러한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끌어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군대를 피아첸치로 철수시키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고, 10월 9일에는 그 자신도 그곳으로 뒤따라갔다. 연하의 친구인 바르톨로메오 카발칸티에게 장문의 편지 한 통을 썼는데, 여기에는 그 스스로 사태의 요점을 간추려두자는 의미도 일부 담겨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일찍이 빌라리가 공식 보고서라고 오인하였던 바로 그 편지였다. 여기서 그는 전쟁 과정에서 장군들이나 교황에 의해 저질러진 실수들에서부터 (그렇게 로마에 머물다 마치 어린애처럼 잡혀버린) 마지막 실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놀라울 정도로 명료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교황 클레멘테는 (어린애들의 림보에) 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전부터 정말 진심으로 그를 그곳에 보내고 싶어했음에 틀림없다.
휴전중인 상태에서 피아첸차에는 마키아벨 리가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동안 비텔 리가 이끄는 피렌체 군은 로마로 향했다. 늦었지만 우선은 교황의 신변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교황이 그와 맺은 협정을 무시하기로 작정하는 대로, 그 신성 모두의 무례함을 안겨준 장본인인 폼페오 콜론나를 추기경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후, 그 가문의 영지를 칼과 불로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피렌체로 돌아갈 시점에 마키아벨리는 야코포 살비아티에게 자신은 군대와 동행했으면 한다는 편지를 썼다. 그것은 분명히 교황 사절의 자격으로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군대가 밀라노 인근에 주둔하고 있을 당시 이미 그의 위치가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강한 추측을 낳게 한다. 어쨌든 친구를 추천하는 귀차르디니의 편지를 받은 체사레 콜롬보가 이 문제를 교황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그에게 오라고 편지하라. 나도 그편이 좋아)라고 답하였고, 살비아티에게도 역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교황의 윤허가 기다리고 있는 피렌체로 곧장 가지 않았다. 그는 교황의 일로 여기저기를 (둘러오라는) 귀차르디니의 부탁을 받고 있었으므로, 먼저 보르고 아 산 돈니노에 들러서 아마도 당시 휴전으로 크레모나를 떠나고 있던 에스파냐 군과 접촉하고는 이어서 모데나로 향한 듯하다. 그는 그곳에서 이틀 동안 머물려, 분노로 가득한 총감독관과 이를 감지하고는 심란해 있던 다른 두 사람의 마음을 친구의 입장에서 위로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 하나는 그 자신 역시 전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귀도 랑고니 백작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심한 질책을 받았던 필리포 데 네를리 총독이었다. 네를 리가 불쑥 (도대체 내가 잘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라고 말을 꺼내자, 니콜로는 익살과 미안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싱긋 웃으며 재빨리 이렇게 말을 받았다. (총독 각하, 그렇게 놀라지 마십시오. 그건 각하의 잘못이 아니라 잘한 일을 한 사람도 잘된 일도 하나 없었던 올해의 잘못이니까요. 황제를 보십시오. 그는 금년 내내 자신의 편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쉽사리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최악의 행동이죠. 에스파냐 군도 우리를 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고, 우리 역시 이길 수 있었음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지요. 교황은 교황대로 천 명의 군사보다 펜 한번 휘두르는 것이 자신을 더 잘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제대로 행동한 것은 오직 시에나 사람들뿐인데, 미쳐서 돌아가는 시대에는 정작 미친 자들이 낫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지요. 그리고, 총독 각하, 실수하는 것보다 무언가 괜찮은 일을 하는 쪽이 오히려 더 불길한 징조일 수도 있답니다.) 이처럼 비극이 희극으로 바뀌는 데야 네를리도 웃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랑고니가 끼어들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총감독관께서는 여전히 화가 나 있으신 것 같은데?) 이에 대한 니콜로의 재바른 대답. (아닐 겁니다. 이젠 더 이상 옆에 화나게 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결국 모든 분노의 감정은 한바탕 웃음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러한 웃음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을 법하다. 마키아벨리는 마침내 피렌체에 도착했으나, 교황이 자신에게 새 임무를 맡기도록 했다는 살비아티의 때 지난 편지를 보고 기뻐한 것도 잠시, 그가 막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출행을 취소하는 또 다른 편지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비텔리는 길을 재촉한 반면, 그는 여정을 너무 지체했기 때문에, 그의 자리는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오직 귀차르디니의 즉석 위로밖에는 없었지만, 그로서는 잃은 것이 그리 많이는 않았다. 왜냐하면 (콜론나가의 초막에) 머문다고 무슨 괜찮은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은 풀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교황을 위시하여 피렌체를 통치하는 사람들이 눈에도 어느 정도 들게 되었기 때문에, 비록 돈과 명예에서 얻는 것에 비해 수고는 많겠지만 소소한 일거리들은 마키아벨리에게 끊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둘 모두를 필요로 했지만, 당분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만으로 만족하고자 하였다. 이제 막 그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던 (피렌체사)의 비극을 다시는 스스로 겪지 않을 것이었다. 이러한 속에서 그는 자질구레한 임무들을 맡고 있었고, 11월 30일에는 8인집행위원회의 명령으로 당시 모데나에 있었던 귀차르디니에게로 보내졌다.
한편, 당시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던 프룬치베르크 휘하의 독일 (란치 군 Lanzi) (Lanzichenecco(=Landsknecht)의 준말로, 16, 7세기 독일 황제력 Land 출신 용병을 일컫는다. Georg von Frundsberg가 그 지휘관이었다-옮긴이)은 베네치아 군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알프스 고갯길을 지나 포 강의 도하 지점에 이르렀고, 우르비노 공이 그곳에서 어떻게든 그들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기 어려운 형평이었다. 결국 모든 희망은 조반니 데 메디치가 이끄는 소수의 군대와 그의 용감무쌍한 기개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11월 25일, 그는 평소 하던 대로 장군으로서보다는 병사의 한 사람으로서 싸우던 도중, 포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다리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귀차르디니는 곧 이것이 단지 조반니 개인에 대해서뿐 아니라 전황 전체에 치명적 타격이 되리라는 점을 간파하였다. 이처럼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그 용감한 전사가 상처의 고통과 그것을 치료할 의사만으로 싸우고 있는 동안, 란치 군은 이탈리아의 심장을 향해 창 끝을 겨누면서 포 강을 건넜다. 그때가 11월 28일이었고, 30일에는 조반니데 메디치가 죽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같은 날 훈령을 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 내용은 별 것 없었고, 단지 (그러한 위치의) 사절에게 (형식적으로) 주어지는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행간을 잘 읽어보면 피렌체 정부는 당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니콜로의 임무는 총감독관에게로 가서 도시의 상황과 분위기를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 점에서는 이미 귀차르디니가 그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 피렌체 시민들이 많은 돈을 주겟다는 제의보다는 조약의 체결 쪽으로 기울고 있지만, (협상 내용과 시기는 각하의 생각에 일임하겠다)는 말을 전할 예정이었다. 사절 임무치고는 참 희한한 것이 아닌가!
서둘러 말을 달리는 것이 이제는 괴로울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해로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펜니노 산맥의 세찬 겨울 바람을 헤치고 밤낮으로 말을 몰아 12월 2일 아침 일직 모데나에 도착하였다. 그는 즉시 총감독관을 만나 현안들을 상의한 뒤에, 8인집행위원회 앞으로 보낸 당일자 편지에서 그 내용과 의견들을 수합하여 보고하였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은 한 점도 더하지 않고, 오직 귀차르디니의 말만을 의도적으로 옮겨 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일은 그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특이한 경우이다. 간단히 말해서 결론은 이러하였다. 즉 적군의 공격이 임박한 상황에서 피렌체인들에게 희망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육칠천 명 정도의 교회 군 보병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설사 조약을 맺는다 해도, 그것은 전장에서가 아니라 로마나 피렌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엇다. 이 지루한 편지의 말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이 덧붙여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위원님들께서는 조반니 님의 죽음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 소식은 이미 늦은 것이었지만, 무릇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을 그냥 눌러놓고 있기란 어려운 법인 것이다.
그는 다음날 8인집행위원회에다 새로운 사실을 약간 더한 다른 편지 한 통을 써 보냈다. 페라라 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자신이 황제 편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 란치 군은 피아첸차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 총감독관은 전쟁의 방향이 그쪽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 파르마로 갔다는 것, 그래서 그 자신 역시 내일 귀향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그가 이 편지를 쓴 때는 3일이었지만, (쓸데없이 힘을 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5일까지 기다렸다가 그날 느긋하게 말에 올랐다. 그는 더 이상 옛날의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1527년 2월 3일, 유난히도 눈비가 잦던 그 해 겨울도 한창일 무렵, 8인집행위원회의 지시로 그는 다시 한번 말을 타고 귀차르디니에게 갔다. 밀라노에서 나온 에스파냐 군은 이미 트레비아 강 쪽으로 넘어간 독일의 란치 군을 따라 포 강을 건넜다. 제국 군의 목표가 피렌체를 약탈하고, 로마마저도 약탈과 복수의 제물로 삼겠다는 것임이 명확해지고 있었다. 이제 피렌체인들은 얼마 안 되는 교황의 보병 부대와 그의 피렌체인 총감독관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므로, 마키아벨리는 도시 사람들의 생각과 소망을 총감독관에게 생생히 설명해 주어야만 했다. 이제 몸도 늙고 지친 상태였고 마음 역시 그러하였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는 갔다. 밀라노 부근의 진지에 도착할 무렵, 그는 당시 자신이 몇 통의 공한을 긁적이며 작업하고 있던 공책을 이번으로 영원히 덮어버렸다. 이후 그는 (피렌체사)를 다시는 펴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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