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21장 (역사가이자 희극 작가이며 비극 작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가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이탈리아가 겪고 있던 모든 우환들은, 바로 이처럼 지나치게 간교하고 예민한 데 집착하다 오히려 빈약하고 우둔해져 버리는 인물들의 정책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든 또는 그같이 오랜 기원의 실마리들을 다시 묶든 간에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황제와 왕 사이의 협저에 체결된 것은 바로 그때쯤이었다. 2월 20일, 그 소식이 이탈리아에 알려지자마자, 사람들은 과연 황제가 약속대로 왕을 풀어줄 것인지 또는 만일 왕이 풀려난다면 그는 또 약속을 지킬 것인지를 두고 입씨름을 시작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이 문제에 대해 (오만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한채) 친구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에게는 그토록 신뢰성 없는 협상 조건들을 따로 살피지 않고도, (왕이 똑똑하게 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황제는 멍청이가 될 수밖에 없음)을 입증하는 수많은 이유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 유명한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왕이 협정을 준수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아들들이 인질로 잡힌 데다가 그처럼 힘든 시간을 보낸 뒤라 조용히 지내고 싶은 생각도 있을 테고, 여기에 교황과 베네치아인들의 믿음 없는 정책으로 이탈리아인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증오심이 솟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렇게 불확실한 정국의 와중에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였다. 사태가 어떻게 되더라도, 전쟁은 즉각적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고 이탈리아는 피로 뒤덮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이탈리아인들에게 남겨진 일이라고는 좋은 군대와 용기 있는 마음으로 무장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자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말을 하나 하겠네. 아마 자네는 이 제안을 경속하고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은 무언가 대담하고도 통상적이 아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그러한 결정을 요구하고 있다네. (...) 며칠 전 피렌체에선 조반니 데 메디치 대인께서 어디든 유리한 쪽에서 싸우고자 과감히 깃발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네. 이 소문을 듣고 나는 정작 일반 사람들은 과연 그가 지금 해야 하는 행동에 관해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따져보게 되었다네. 물론 누구나가 믿고 있는 바이지만, 이탈리아인 가운데서 그 분만큼 병사들이 기꺼이 그 뒤를 따르려 하고 그 분보다 더 에스파냐 군이 두려워하거나 경계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은 사실일세. 그리고 모두가 조반니 님이 용기 있고 과감한 성격에다 원대한 야망을 가지고 결단을 내릴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도 알고 있네. 그러므로 우리는 비밀리에 그 분을 도와 그 휘하에 최대한의 기병과 보병을 결집시켜서 그 분으로 하여금 이 깃발을 휘날릴 수 있도록 할 수 있다고 보네.) 사람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어떤 목적이 있음을 에스파냐인들이 안다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들은 그것이 교황이나 왕의 계획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들과의 약속을 파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좋고 나쁘고를 떠난 마키아벨리 그대로의 솔직한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큰 생각을 하다가도 다음과 같은 마음르로 후닥닥 넘어가는 것 역시 그보다 덜하지 않은 그의 특징이기도 하다. (바르베라가 그곳에 있네. 만일 자네가 그녀를 어떻게든 보살펴줄 수가 있거든, 그녀더러 자네에게 가라고 하겠네. 나에게는 황제보다도 그녀가 훨씬 소중하기 때문이네.)
마키아벨리의 이 편지들이 로마로 보내지자, 그것을 받은 사람이 귀차르디니건 필리포 스트로치건 혹은 다른 누구건 간에 모두가 즉시 그것을 친구들에게 회람시키고 교황에게도 보였다. 이를테면 스트로치에게 보낸 3월 10일자 편지가 한 예인데, 여기에서 그는 여전히 황제와 와 사이의 협상 문제를 얘기하면서 그것이 과연 지켜질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교황은 (이를 매우 주의 깊게 듣고는 요소요소 칭찬의 말을 하면서, 세부 사항에 관한 정보 없이도 그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다했다고 크게 흡족해)하였다. 그러나 귀차르디니가 그로부터 받은 3월 15일자 편지를 보였을 때, 교황은 그 내용, 즉 자신이 돈을 대고 조반니에게는 지휘권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깃발을 올리게 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별로 탐탁해하지 않았다. 에스파냐인들이 그 깃발 뒤에 누가 있는가를 쉽게 알아차릴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던 점이었지만. 그러나 클레멘테가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은 것은 조반니에 대한 질시의 감정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단지 그 계획의 대담성이 그의 그릇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드디어 왕이 풀려났다는 소식이 전해짐으로써, 그 동안의 온갖 추측은 사라지고 만사가 분명해졌다. 그리고 곧 그가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라는 것도 확실해 보였다. 그러자 황제로서 (멍청이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책이, 자신이 3월 15일자 편지에서 썼듯이, (황제는 어떤 나쁜 결정을 내려도 스스로 해를 입지 않는 반면 왕은 아무리 좋은 판단을 내려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마키아벨리는 한 풍자시를 통해 당시의 기분을 토로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아르고의 한 인물을 빌려 자신이 지닌 눈은 모두가 그리스도교국의 제후들로부터 빼앗아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이유라네. 그 바보 같은
로마인들이 왕 칼과 그의 총독들이
어찌될 줄도 모르고 왕을 풀어준 것 말이야
따라서 전쟁은 어쩔 수 없었고, 그것을 바라보며 조소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방어하고 공격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였다. 방어의 측면에서 피렌체인 교황과 피렌체의 그 조신들은 무엇보다 피렌체를 최우선으로 todr가하였다. 그곳은 알프스 이북으로부터의 공격에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군사 기술자인 피에트로 나바라 백작이 그에 대비하기 위해 그곳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변절한 에스파냐인이었던 그의 옆에 전술의 이론가이자 피렌체인인 마키아벨리를 두기로 결정되었다. 그는 언제나 움질일 채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귀차르디니가 4월 4일자로 교황의 명령을 그에게 전하자, 그는 코르토나의 추기경과 상의한 뒤, 다음날 이미 성벽에 올라 나바라와 대담한 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마키아벨리가 쓴 보고서와 함께 로마로 보내졌는데, 이는 현대의 군사 사학자들에 의해서도 칭송될 정도이다. 하지만 그 입안자가 즉시 로마로 불려간 것을 보면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칭찬한 사람은 클레멘테 7세와 그 조신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곳에서 그는 교황과 심지어는 귀차르디니까지도 자신의 계획에 찬동케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4월 26일이나 27일 이행해야 할 지시 사항을 들고 머릿속에는 (성벽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채) 다시 길을 떠났다. 그 사이에 피렌체에서는 로마에서의 논의 과정에서 마키아벨리 자신이 발의한 (5인성벽관리위원회 I Cinque Procuratori delle mura)라는 새로운 직제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는 그 감독관이자 서기장으로 임명되었고 아들인 베르나르도를 조수로 쓰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는 다시 한번 정무궁에 근무하게 되었고 또다시 서기장이 되어 (공식 직함으로) 편지를 쓰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그가 이 일로 얼마를 받았는지 혹은 (피렌체사) 에 대한 보수로 그냥 때웠는지 어떤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그 위치를 불문하고 공화국에서 관직 얻기를 고대해 와TEk. 설사 그 직이 별반 중요하지 못한 것이었다 해도, 그는 스스로의 행동과 글과 그리고 필요하다면 상상력을 동원해서라도 그 자리를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그가 맡은 새로운 직은 사실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그가 하는 일은 매우 중차대한 것이었다. 바로 조국이 방어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그가 해야 할 새로운 임무였고, 그는 즉시 적을 막는 보루를 만드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는 시작부터 산 미니아토의 언덕들을 피렌체의 성벽 안에 두고 싶어하는 교황 클레멘테의 마음을 돌리고자 많은 것을 하고 많은 편지들을 써야만 했다. 그리고 이 문제 때문에 하루는 귀차르디니에게 세 통의 편지를 써야만 했던 때도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하지만 이렇게 머릿속이 성벽 문제로 꽉 찬 상태에서도, 마치 공상하듯이 그의 생각과 펜은 이탈리아 사태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당시 국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던 귀차르디니에게 편지를 슨 것도 바로 이때쯤이었다. (나에게는 왕에 의해 버림을 받은 황제가 교황에게 중요한 제의를 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네. 하지만 성하께서는 그것에 귀를 기울이려 하시지 않을걸세. (...) 자네도 알다시피 그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회를 잃어버렸나. 또다시 이번 기회를 놓치거나 사태를 방관하고 있어서는 안 되네.) (군주론)의 마지막 장을 썼던 바로 그 마음으로 그는 같은 편지에서 그 운명적인 기원의 언사를 큰 목소리로 외친다. (그 오랜 근심 거리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시키라!)
그가 이러한 선동이 말을 쓰고 있던 바로 그날인 5월 17일, 코냑에서 프랑스 왕, 교황, 피렌체, 베네치아 간의 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리고는 에스파냐 군이 눈치채지 못한 상태에서 왕이 제공하기로 했던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전쟁을 선포하였다. 사실 그의 원군이라고 해봐야 시기상으로나 규모상으로나 기대할 바가 못 되었다. 베네치아는 우르비노 공의 지휘 하에 자국군을 보냈고, 교황군은 귀도 랑고니와 조반니 데 메디치가 이끌고 있었다. 비텔로 비텔리는 피렌체 군을 맡았고, (거의 절대적인 전권을 부여받은0 총감독관 격의 자리에는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가 있었다. 6월말, 이 대군세는 로디에 나타났고 그곳은 곧 점령되었다. 그리고는 밀라노 아래에다 진을 쳤다. 그들은 당시 그곳의 형편이 좋지 않았으므로 비교적 쉽사리 공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하루 낮 하룻밤을 머문 뒤, 우리비노 공은 총감독관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 자신의 군대를 빼내 가버리는 치욕적인 행동을 하였고, 이 때문에 그와 총감독관 사이에는 심한 말들이 오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우리비노 공의 행동과 그로 인한 언쟁은 장차 닥쳐올 비극적 사건들의 전조가 될 것이었다.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가장 좋은 때를 이런 식으로 흘려보내고 있는 동안,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에서 보루를 설계하고 직무에 관한 편지를 쓰는 데 몰두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사실 전기 작가들은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아니었다. 난국에 처했을 때 항상 그랬듯이 그는 첫 군사 이동 속에서 (행운의 동맹군(그렇게 부르도록 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불운의 동맹군) 진영에 와 있었던 것이다. 8인집행위원회가 그 앞으로 발급한 신임장이나 허가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코르토나의 추기경에 의해 보내진 것인지 혹은 그의 총감독관 친구가 그를 휘하에 두고자 한 것인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사실 귀차르디니는 수시로 그를 불러 전쟁에 관련된 자신의 지시 사항들을 이곳저곳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귀차르디니의 편지 한 통을 통해 그가 무슨 일로 그곳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 마키아벨 리가 와 있네. 원래 그는 민병대를 재조직하려고 왔지만, 사람들의 피폐해진 상황을 보고는 엄두가 나지 않는가보네. 달리 어떻게 할 방도가 없으니, 다만 인간의 힘 없음을 웃어넘길 수밖에.) 내가 다른 곳에서 말한 바대로, 이는 마치 한 폭의 초상화를 보는 듯한 일필휘지의 묘사이다. 그가 언제 롬마르디아에 도착했는지 우리는 정확히 모른다. 그가 가지고 있던 성벽관리위원회 기록부는 6월 8일에서 끊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한 편지 단편에 의하면, 7월 13일에 자신이 (전장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전후 사정으로 보아 그는 이미 앞서 꽤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장은 마리냐노에 있었고, 며칠 뒤인 7월 22일에는 밀라노 근처 바디아 아 카사레토로 옮아갔다. 하지만 대군은 아무 하는 일 없이 그저 롬바르디아의 수도격인 그곳의 멋있는 첨탑들을 바라만 보면서 오랫동안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 동안 마키아벨리는 군영을 배회하면서 그곳의 일들을 보고 들으며 군사 문제에 관한 자신의 단상들을 메모하거나, 혹은 (힘과 용맹에서 이 군영의 누구도 당할 자 없어 모두가 두려워하는) 조반니 데 미디치와 귀차르디니 사이에서 이리저리 시간을 쪼개어 그들과 만나고 있었다. 조반니는 거친 성격이었으나, 예컨대 아레티노와 같이 영민하고 재치 있는 사람들과 얘기하기를 즐겼다. 마키아벨리 역시 그에 못지않게 당돌하고 재치가 넘치는 데다가 조반니에게는 스스로가 지닌 유일한 기술인 전쟁술에 관한 유명한 책까지 슨 인물이었으므로, 그가 그를 좋아하지 않았을리 만무하였다. 그들간의 대화가 그저 담소 정도였다면, 그 마상 시합을 이끈 쪽은 분명히 마키아벨리였다. 화제가 군사 문제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조반니와 당당히 겨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어느 날 이 위대한 장군은 마키아벨리에게 그가 (전술론)에서 훌륭히 기술해 놓은 방식으로 삼천 명의 병사들을 한번 직접 지휘해 보라며 도발적으로 나왔다. 무릇 남을 속이려다가 자기가 속는 법. 마키아벨리는 두 시간 동안이나 몸이 달아서 이리저리 고함을 쳐댔으나, 도무지 제대로 대오를 갖추게 할 수가 없었다. 가엾은 병사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렸다. 마키아벨리도 땀은 났으나 긴장하여 오히려 오한이 들 지경이었다. 조반니가 마침내 싱긋이 웃으며 말하였다. (자 이제 골치 아픈 일은 그만두고 식사나 하러 갑시다.) 그는 그리고는 드럼 소리에 맞추어 순식간에 군대를 여러 거지 진행으로 만들어 보였다. 그것은 이론가에 대한 실천가의 빛나고도 잔인한 복수인 셈이었다. 하지만 식사를 하면서 니콜로는 니콜로대로 익살맞고 질척거리는 이야기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의 앙갚음을 하였다. 그곳에서 마테오 반델로라는 조반니의 손님이 또 한 사람 있었는데, 그도 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미식가일 뿐 아니라 음담패설을 즐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느 유명한 도메니코 수도회 총장의 조카이면서 그 자신이 그 수도사이기도 한 그는 우리에게 그 음담을 전해 주었다. 비록 이야기한 사람의 재치와 스타일까지 전해 주지 못한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
당분간 전투는 롬바르디아 평원의 땡볕 아래서 멈추어 서 있는 상태였다. 마키아벨리는 그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틀림없이 피렌체의 부드러운 언득과 유괘한 친구패들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는 또한 바르베라 생각도 하고 있었고, 그녀의 편지가 끊기자 상심하여 포르나차이오에게 편지로 그녀의 안부를 물엇다. 그러자 고맙게도 포르나차이오는 바르베라에게 달려가 (욕을 한 무더기) 퍼부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그녀로부터 자신이 피렌체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답을 못했다는 사과와 함께, 멀리 있는 특별한 친구에 대한 사랑의 서약과, 매주 편지하겠다는 약속과, 그가 하루바삐 피렌체로 돌아왔으면 하는 소망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그가 그곳에 있을 때면 (그녀는 마치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잠드는 것 같은 기분)이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그를 바쁘게 만들고 그를 마음르로나마 피렌체로 돌아오도록 한 친구들과의 편지 교환이 있었다. 베토리는 그가 남긴 장문의 편지들 중 일부를 그에게 보냈는데, 자신의 (이탈리아사 대요 Sommario della storia d'Italia)에서처럼 사건들을 힘찬 필치로 그리고 있다. 여기서 그는 최근 들어 황제의 운세가 지나칠 정도로 좋았다는 것, 이탈리아와 교황의 행로는 이와 반대로 불운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교황은 최근에 시에나 정권을 무력으로 바꾸어놓으려 하다가, 보병 오천과 기병 수백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군대가 불과 사백 명에 지나지 않는 시에나 군에 의해 패퇴하는 꼴을 보기까지 하였다. 재치있는 생각들로 가득 찬 이러한 편지들을 읽고는 똑같이 재치 있는 답장을 쓰는 것이야말로 그토록 오랫동안 전장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마키아벨리로서는 가장 즐거운 일들 중 하나였다. 그의 답장은 군대와 장군들의 상황에 관해 많은 것을 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군대와 정치상의 사건들에 대한 날카로운 판단을 재기발랄한 문체로 써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피렌체의 친구들은 목을 빼고 편지를 기다렸다. 예컨데 베토리는 답장을 받자마자(그는 7월 31일자로 편지 한 통을 받았으며, 그러보터 8월 24일 사이에 적어도 세 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으나 지금은 모두 유실되고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을 이폴리토 데 메디치에게 보내 읽도록 하거나, (그것이 전쟁에 무언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는) 로마의 필리포 스트로치에게 보내 교황이 보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편지들을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칭찬하였다. 오직 한 가지, 나폴리 왕국을 전쟁에 끌어들이자는 제안만이 소심한 클레멘테에게는 못마땅했을 뿐이었다. 니콜로는 결코 이 오랜 지기들과의 편지에 열중하느라 자신의 더 젊은 친구들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 우리는 바르톨로메오 카발칸티를 보게 된다. 그는 이제 곧 자신이 봉직할 두 공화국에서 드높은 명예를 얻게 될 것이었고, 그것은 다름아닌 피렌체 공화국과 문필 공화국이었다.
바로 그때쯤, 동맹군의 일단은 크레모나를 죄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성을 공격하는 기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9월 10일 귀차르디니는 (대단히 유능한 사람)인 마키아벨리에게 신임장과 훈령을 주어 그곳으로 보냈다. 그가 할 일은 그곳 상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과연 무슨 희망이라도 보이는지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보기에 신속한 승리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면, 베네치아 군 지휘관인 페사로를 설득하여 포위를 풀고 제노바를 공략하도록 해야 할 것이었다. 그는 갔고 보았다. 페사로는 물론 우르비노 공과도 일을 논의했는데, 그라는 작자는 적 앞에서 소심하고 굼뜬 것만큼이나 이야기를 나눔에서는 생기 있고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마키아벨리는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총감독관 앞으로 수많은 편지를 썼다. 간단히 말해서, 늘 그렇듯이 그는 힘 닿는 대로 일을 해나갔다. 9월 14일 저녁, 그는 밀라노 성벽 아래의 아군 진영으로 돌아왔고, 장군들뿐 아니라 그 자신까지도 신속한 승리를 얻을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전할 수 있었다.
사실 실제적인 접수는 그달 말로 늦추어지기는 했지만, 그 도시가 함락된 때는 23일이었다. 그러나 동맹군 진영에서 이 희소식을 자축하고 있을 무렵, 로마에서 다른 최악의 소식이 전해졌고 이는 환호를 일시에 쓰라림과 비탄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어리석은 교황 클레멘테는 제국의 장군이자 대리인으로서 자칭 발렌티노의 사도인 돈 우고 다몬카다와 말을 맞춘 콜론나파에 속아서, 그가 제의한 기만적인 휴전 협정을 받아들이고 말았던 것이다. 꼬임에 빠진 교황은 자신이 주변을 지키던 소수의 경비병들마저 해산시켰다. 9월 19일 밤, 그는 콜론나파의 군대에 의해 공격을 당했다. 그는 미처 몸을 숨길 시간도 없이 붙잡혀 가스텔 산탄젤로에 갖혀버렸고, 보르고 Borghi(단수는 Borgo. 도시 성벽 밖의 전원 지역 혹은 이전에 성벽 밖에 있었던 거리를 말함-옮긴이)와 교황궁과 심지어는 산 피에트로 교회까지도 처참하게 약탈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신의 대리인 안에서 그리스도는 포로가 되었네)라고 읊은 마키아벨리의 예언은 놀라울 정도로 적중한 셈이다. 하지만 극적인 이 모든 사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는 단지 비극 마지막 장면의 예고편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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