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10장 독일 사절의 시기. 피사 전쟁과 탈환 2/2
새로운 군대의 도착으로 그의 계획이 힘을 얻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미 그를 떠나가는 다른 군대로 인해 분위기는 냉각되고 있었다. 그의 각료 한 사람이 황제를 한 번은 속일 수 있어도 두 번은 속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을 때, 마키아벨리는 이에 빈정거리는 어조로 되받기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일을 통해 매번 알면서도 속는 수가 허다한데, 궁정의 기류가 수시로 바뀌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탈리아 원정을 향한 바람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프랑스 사람들의 수다에 익숙해 잇던 피렌체인으로서 더 어리둥절한 것은 아주 사소한 일에조차 쉬쉬 하며 감추는 이곳의 거의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비밀스런 분위기였다. 공대한 크기의 영토와 원거리로 인한 자국과의 통신상의 난점에다 이러한 비밀주의까지 겹치자, 마키아벨리와 베토리는 (마치 자신들이 무슨 잃어버린 고도(고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두 피렌체인은 다른 사람들과 함계 황제를 따라 모든 사절들이 모여있던 트렌토에서 볼차노와 메라노로 차례차례 옮겨갔는데, 알려지기로는 군대의 이동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황제의 첫 움직임은(왕의 군대라기보다는 차라리 소제후의 군대)에 더 가까울 정도였다. 특히 베네치아가 카도레에서 그의 수염을 멋있게 뽑아버린 이후로는 더욱 그렇게 보였다.
그러자 막시밀리안은 도움을 청하려고 울름에서 의회를 소집했는데, 당시 베토리가 병중에 있였기 때문에 마키아벨리 혼자 그곳에 보내기로 결정이 났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가지 않았다. 그는 볼차노에서 궁정이 있던 트렌토까지의 짧은 여행을 빼고는 죽 베토리 옆에 남아 있었다. 이는 우리 후세인들에게는 손실이겠지만, 둘 사이로 보아서는 좋은 일이었다. 바로 이 사절 시기를 시작으로 피렌체 서기장의 삶이 끝날 때까지 이어질 우정이 싹튼 것이다. 그가 비록 이러한 관계로부터 자신에게 이익이 될 만한 어떤 것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둘 사이의 우정은 그에게 자신의 훌륭한 편지글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억될 만한 것을 쓸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베토리에게는 바로 그 당시의 마키아벨리라는 존재가 너무 소중한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도착 당일 바로 10인위원회에다 동료를 데리고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베토리는 자필로 오히려 반대의 뜻을 전하였다. (원컨데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우리를 머물게 해주십시오. 그는 여기에 있어야만 합니다.) 이윽고 3월 13일 그들 둘은 함께 인스브루크로 이동했다가, 볼차노를 거쳐 트렌토로 되돌아왔고, 바로 그곳에서 황제의 최종 대답을 들었다. 그의 요구는 육만 두카토를 세 번으로 분할해서 지불하되, 각각의 시간 간격은 짧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0인위원회로부터 특히 돈 문제를 포함하여 확고하고도 분명한 훈령을 받아내기 위해, 마키아벨리는 다시 편지 쓰는 작업에 노력을 쏟아부었다. 5월 30일자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경애하는 여러 정무위원님들게 말씀 올립니다. 정부가 짜아놓은 실이 이처럼 너무 가늘어 정작 베를 짤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 (저는 이미 아무도 그의 침입을 막을 도리가 없다는 점을 써 올린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은 그럴 수 잇고 또 의지에 따라서는 그러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누구도 그가 침입하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은 한번도 그런 결정을 내린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도 그러리라는 징후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결론은 이러하였다. (필요한 것은 두 길 중 하나를 택하되, (...) 어느 쪽이 덜 위험한가를 살피고, 일단 그 길에 들어서면 신의 이름으로 마음을 단단하게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릇 이처럼 큰 일을 콤파스로 어설프게 재려고 덤비다가는 단지 실소만 범하게 될 뿐인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은 다시 한번 이른바 (사간의 이점)을 택한 피렌체 사람들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황제는 또다시 베네치아 군에 패배햐였고, 수중에 고리치아, 트리에스테, 프리울리 전 지역과 끝으로 피우메만이 남았을 때, 베네치아와 휴전 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말해서 쌍방은 빼앗은 만큼 가진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모든 영토는 베네치아에 돌아갔고, 그가 얻은 것이라고는 손실과 치욕뿐이었다. 이탈리아 원정도 로마에서의 대관식도, 프랑스에 대한 응징도 제국 권위의 회복도, 모두가 허망한 꿈으로 남게 되었다. 피렌체인들은 결코 허깨비를 현실로 잘못판단하지 않았고, 그래서 주어야 마땅한 액수 이상의 돈을 주는 일도 없게 된 셈이었다.
6월 10일, 베토리가 궁정에 다시 합류할 채비를 하고 있는 동안, 마키아벨리는 이제 독일 문제에는 식상한 데다 결석(결석)까지 있어서 치료차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하고는 트렌토를 떠났다. 그는 귀향길을 재촉한 끝에, 14일에는 이미 볼로냐에 도착하였고 16일에는 피렌체에 닿을 수 있었다. 그가 그처럼 빨리 도착할 수 있었던 데는 결석증 말고도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작용했을 것임이 틀림없을 테지만, 그는 귀향 직후 또다시 전장의 고달픔을 참아야만 하였다. 공화국은 피사 문제를 이번에는 확실히 끝낸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팔망미인인 서기장은 먼저 산 미니아토와 페쉬아로 가서 민병대를 모집하고는 그들을 대동하고 폰테데라에서 다시 모병한 뒤, 그곳으로부터 피사로 갔으며, 8월 21일에는 포위 상태에 있는 도시 주변을 초토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처음에는 프랑스 왕아. 그리고 이어서 아라곤의 왕이 불쌍한 피사인들을 어여삐 여겨 이리저리해서 결국 150,000두카토를 받고 그들의 손을 들어준 후에, 피렌체는 피사 공략에 훨씬 더 열성을 보이게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그들의 새로운 민병대를 시험하여 소득을 올릴 기회였다. 마키아벨리에게는 희열의 순간임과 동시에 우려의 순간이기도 했다! 10월에 시작하여 11월과 12월에 연이어, 그는 모병과 사열을 위해 산 미니아토와 발디니에볼레, 키안티 교구와 발디체치나 등지를 돌아다녔다. 1509년 1월말, 이미 그는 민병대와 함께 물러나 디 쿠오사에서 경계 근무에 들어가 있었다. 2월 중순에는 포위된 도시에 대한 외부 원조를 끊기 위해서 피우메모르토 강 하구에 배치된 천 명의 민병대를 이끌고 있었다. 아르노 강과 모든 운하는 다리와 말뚝과 성채로 차단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군대의 훈련과 경계 근무와 노역과 그 외 모든 일을 감독하고 있었다. 이 편지들이 80인회에서 읽혀지자, 부오나코프시는 그에게 평상시에 쓰던 그런 편지를 보내다라고 부탁했으나 소용 없었다. 10인위원회는 (군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다니던) 서기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당신의 어깨 위에 이 모든 일을 맡겼다)고 썼다.
그러나, (준둔지에서 정부를 대표하는 인물은 오직 니콜로 마키아벨리 외에는 없을 정도로), 그가 어깨에 진 짐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알라만노 살비아티와 안토니오 다 필리카이아가 감독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인 3월 4일, 마키아벨리는 포위된 도시를 돕지 않는다는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자청하여 루카 공화국으로 갔다. 감독관들이 도착하자, 10인위원회는 그를 피옴비노의 군주에게로 보냈다. 소문에 의하면 피사인들이 그에게 피렌체와의 협상을 중재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임무는 그 소문이 과연 사실인지, 아니면 (시간을 벌기)위한 술책인지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대 전쟁의 조짐이 일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서는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무언가 실낱같은 것이라도 기대할 여지가 있었다. 반면 피렌체인들로서는 이미 밥을 한 술 뜬 상태에서 지금은 결코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갔다. 그리고 3월 14일 야코포 다피아노(피옴비노의 군주 - 옮긴이)와 피사의 사절단을 만났다. 사절은 일반적인 말로 말머리를 뗐으나, 자신들의 정무위원이 동석하지 않는 한 어떤 결론적이 말도 할 수 없다고 나오자 논쟁은 격화되었다. 이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들어 보자.
(저는 앞부분의 말에 대해서는 제 생각에 따라 대답했습니다. 뒷부분에 대해서는, 그들이 사실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셈이기 때문에 저 역시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으며, 저의 대답이 듣고 싶다면 그들부터 무언가 알맹이 있는 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생명과 명예와 재산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었고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대답을 원한다면 먼저 어떤 정도의 보장을 바라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고, 만약 그 요청이 합리적이고 존중해 줄 만하다면, 우리 정부는 단지 복종을 바라는 것뿐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과 재산과 명예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협상은 깨어졌으나, 마키아벨리는 피사의 사절들간에 의견 차이가 나도록 유도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이 과정을 피옴비노에서 10인위원회에 편지로 보고했으며, 그 뒤 피렌체에 돌아와서 직접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전장의 생활을 병사들과 나누기 위해 되돌아왔다.
4월 16일 그는 니콜로 카포니가 감독관으로 전군을 위한 후방 업무와 보급을 관장하고 있던 카쉬나로 자신을 보내려는 것이 10인위원회의 뜻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곳에 있는 것이 덜 위험하고 힘도 덜 든다는 사실을 저도 압니다. 하지만 애초에 제가 위험이나 힘든 일을 마다했다면, 피렌체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정무위원님들게 바라건데, 저로 하여금 이 주둔지에 남아 감독관들과 함께 관련 문제들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여기서는 제가 무언가 소용에 닿지만, 그곳에 가면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좌절감으로 죽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사실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애국심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랄하고 조소적인 그의 또 다른 면모 아래에서 불쑥 솟아나곤 하는 그 열정적인 성격은 또 얼마나 우리를 매혹하게 하는가!
그래서 그는 민병대를 나누어 배치해 놓은 세 군데의 주둔지를 여기저기 돌아보면서, (군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다녔다.) 병사들은 총감독관보다 그의 권위를 더 인정하였으며, 이에 화가 난 살비아티가 어느 날 한 지휘관에게 평상시와는 다른 과격한 언사를 쓰는 일까지 벌어졌다. 마키아벨리가 편지로 이에 항의하자, 그 역시 편지로 답하여, 자신은 그 지휘관을 모욕하고자 한 것이 아니며, 자신이 화를 낸 것은 그가 감독관의 권위에 적절한 존경심을 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들이 자네의 권위를 인정하고 싶어한다해도, 자네가 언제 어디서나 그들을 통솔 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그들이 항상 자신들과 매일같이 생활하는 자제를 좋아하고 따르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복종심을 더 키워야 하고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더 잘 알아야 할 것이네.)
5월 중순께, 마키아벨리는 보급선을 더 효율적으로 짜기 위해 이삼일 간 주둔지를 떠나 피스토이아로 갔다. 하지만 전쟁은 그쯤에서 끝나 있었다. 5월 20일, 그는 감독관들과 함께 피사 사절들을 만나 항복의 첫 단계에 관해 협상을 벌였다. 그가 자필로 10인위원회에 쓴 몇 통의 편지가 남아 있어서 당시의 진행 과정을 말해 주고 있다.) 피사의 항복 사절이 피렌체로 갔고, 어디에나 모습을 빼놓지 않는 그도 행동을 같이하였다. 하지만, 막상 합의에 도달해서 조약이 체결되고 항복 조인식을 하는 자리에 이르자, 그의 이름은 제1서기장 마르첼로 비르질리오 아래에 씌어 있었다. 15년의 긴 전쟁 끝에, 드디어 8일 피렌체 감독관들은 피사에 입성했으며 마키아벨리와 그의 민병대 역시 그들과 동행하였다.
나는 당시 피렌체인들이 승리의 희열을 만끽하면서도 과연 얼마나 이 범상한 지위의 서기장에게 그러한 승리의 몫을 인정해 주고 그에게 마땅히 돌아갈 만큼의 찬사를 해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해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고스티노 베스푸치는 바로 당일 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이처럼 영광된 장소에 당신이 함께 했음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결코 적지 않은 역할을 한 데 대해서도 치하드립니다.)
글은 계속된다.
(감히 말하건데, 당신이 민병대와 같은 훌륭한 조직을 만들어내었기에 그처럼 늦지 않고 신속하게 피렌체의 영토가 회복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얼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신께 맹세컨데, 너무 기뻐서 우리는 당신에게 키케로식 연설이라도 바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필리포 다카사베키아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 고귀한 도시를 정복한 위업을 천번 만번 축하하네. 사실 이 일은 실질적으로 자네 작품이고, 어쨌든 자네의 기여가 컸던 것 아닌가.)
이어 글의 어조는 더 강해진다.
(자네의 철학이 우둔한 사람들에게까지 이해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법이지. 내 말을 이해하리라 믿네. (...) 날이 더할수록 나는 자제야말로 유대인이나 다른 민족들이 가졌던 대예언자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네. 오, 니콜로여,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가 없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라네)
마키아벨리는 그 승리를 입성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한 대리석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결코 볼 수 없었다. 살비아티(그는 입성 직후 말라리아로 피사에서 사망하였다), 피리카이아, 카포니의 이름만이 그곳에 박혀 있었다. 그는 단지 종이에 쓰인 이러한 찬사에 만족했을 따름이다. 언제나 결과를 바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시로는 혹시라도 과장과아첨이었을지도 모를 이러한 찬사는 이제 단순명료한 진실로 바뀌어지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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