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20장 역사가이자 희극 작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이제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에게 다시 힘을 주는 무언가가 그이 상상력과 지성을 자극하면서, 그를 축 늘어진 시골의 분위기 속에서 끌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개똥지빠귀와는 사뭇 다른 어떤 것이었다! 그는 마치 고목에 다시 싹이 돋은 듯한 기분에서 시내 출입이 더 잦아지고 그곳에 더 기분 좋게 머물렀다. 루첼라이 원은 영원히 문을 닫아버렸지만, 이제 또 다른 정원이 그에게 열려 있었다. 산 프레디아노 성문 밖의 야코포 르노차이오 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곳은 문인도 펄학자도 자주 들리는 곳이 아니며, 학식 있는 쟁론이 들려오는 곳도 아니었다. 대신에 그곳에서는 향연이 열리며, 음식도 말로만이 아니라 진짜였다. 포르나차이오는 하층 시민plebeo 출신의 부자였지만, 귀족들이라고 해서 그의 집을 멸시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특히 피렌체에서라면 편견까지도 맛있는 음식과 함께 삼켜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맛있는 음식은 카르피에서의 농담들에도 불구하고 미식가인 마키아벨리에게는 그 자체가 큰 매력이었으리라. 그리고 또한 바르베라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녀는 매력 만점의 젊은 가인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그녀와 벗하고 싶어했으며, 친구들도 한동안 그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이에 대한 첫 언급은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신임 교황에게 하례를 드리러 갔던 베토리가 프란체스코 델 네로에게 쓴 1524년 2월 5일자 편지에 나타난다. (니롤로 마키아벨리에게 안부 부탁하네. 그리고 그에게 전해 주게나. 저녁 시간에 오랫동안 기다려도 종내 열리지 않는 여기 이 문옆에 서 있는 것보다는 때때로 포르나차이오가 내는 저녁 식사를 바르베라와 함께 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말일세. )
사실 마키아벨리는 친구나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그녀에게 끌려들고 있었다. 바르베라는 가까이하기 어려울 만큼의 큰 매력을 지닌 그런 여자는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가난한 처지의 몰락한 (신군주) 같은 그에게는 그것이 다만 한동안이나마 자신이 무엇을 정복하며 지배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을 법하다. 그는 그러한 환상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아는 시인이었고, 게다가 불우한 시절을 보내면서 그러한 생각을 연장하며 그것으로 살아가는 기술을 터득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것은 56세의 남자가 겪을 수 있는 , 때로는 활기차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작은 연애 사건이었다. 혹은 스스로의 기분과 여인의 기질에 따라 환히 타오르는 듯하다가도 금방 사그라드는 조그만 모닥불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그녀는 중년의 연인인 그가 비록 재능 외엔 가진 것이 없어도 다정하게 굴었다. 물론 가끔은 애정 어린말로 그를 놀려대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의 재치를 좋아했고, 그의 재능에 이끌렸다. 위대함이란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소원하게도 하지만, 또 때로는 사소한 일에서조차도 빛을 발하면서 사람들을 끌어당기기도 하는 법이다. 이들 둘 사이에는 보통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키아벨리가 죽은 지 17년이나 된 1544년에 와서 어떻게 바르베라가 (니콜로 마키아벨리와의 좋은 추억 속에 담긴 애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녀의 소송 사건을 도와달라고 로렌초 리돌피에게 청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복잡한 것이긴 해도,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니콜로는 자신의 양처 마리에타를 사랑했다. 그녀는 다정한 아내이자 부지런한 주부였으며 동시에 사랑하는 아이들의 엄마였던 것이다. 하지만 칼리말라의 옷감 장수에게도 언제나 충분한 것은 아니었던 이러한 역할들만으로 마키아벨리라는 사람을 만족시키기는 힘들었다. 시골집이며 숲이며 새 잡는 여흥이며 모두가 그에게 즐거움을 주었지만, 그것도 그에게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아꼈지만 마음이 넓을 수는 없었던 마리에타 역시도 바로 그런 집이며 숲이며 새 잡기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자주 포르나차이오의 만찬 모임에 나갔다. 그리고 바르베라도 그곳에 있었다. (클리치아 Clizia)가 탄생한 곳도 바로 이러한 만찬과 모임에서 였다. 그 얼마 전, 카추올라 극단이 몬텔로로에 있는 베르나르디노 디 조르다노의 저택에서 (만드라골라)를 상연한 적이 있었다.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바스티아노 다산 갈로가 배경을 그린 무대였다. 포르나차이오는 자신의 연금 상태가 풀린 것을 축하할 목적으로 1525년 1월 13일에 열기로 한 잔치 마당에서 이 장관을 재연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만드라골라)를 무대에 올리는 데 대한 얘기가 오가고 있을 때, 마키아벨리는 인심이 후한 주인에 보답하려고 했건 또는 바르베라를 즐겁게 해주려고 했건 간에,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새로운 희극 작품을 선보이는 쪽이 어떻겠느냐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곧 작품을 쓰기 시작했으나, 잔칫날은 멀지 않았고 시간은 빠듯했다. 불쑥 제의를 하긴 했으나 써놓은 것이라곤 아직 한 자도 없는 데다 무엇을 쓸 것인지도 정하지 않은 상태인지라, 이번 같은 경우라면 고전 시대의 희극을 토대로 각색하는 도리밖엔 딴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플라우투스의 (카시나 Casina)를 모형으로 삼게 되었는데, 나에게는 이것이 그냥 우연한 선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포함해서 모든 것 모든 사람을 놀려대곤 했는데, 이 새로운 희극에서는 바로 자신의 애정 행각들을 재미의 도마위에 올렸다. 비록 그가 자신에 의해 피렌체인 니코마코(이름의 아이러니라니! 그 첫 음절들은 바로 자신으 것과 같지 않은가)로 둔갑한 스탈리노네 만큼 나이가 들지는 않았지만, 그가 바르베라에게 보낸 몇몇 편지와 시구들 속에는 약간 우울한 어조로 자신의 뒤늦은 연애 사건을 희롱하고자 하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못마땅한 건
당신이 아니야 차라리 나 자신이지.
내가 알고 실토하건대
그 같은 아름다움이라면
더 싱싱한 젊음을 사랑해야 해.
이 시구들은 운율은 다르지만 거의 같은 표현을 빌려 희극의 칸초네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래, 이사랑에 빠진 늙은이야
그 일은 불타는 젊은이에게 맡겨두는 쪽이 더 나았을 텐데.
전기 작가든 문학사가든 여태까지 고려에 넣지 않았던 작품의 이러한 기원은 지금까지도 해명되지 않고 있던 (만드라골라)와 (클리치아)간의 예술적 가치의 큰 차이를 쉽게 설명해 준다. 앞의 경우는 솟구치는 감흥으로부터 분출되어 나온 것이었고, 뒤의 경우는 포르나차이오가 열고 싶어하는 잔치에 시간을 대어야 하는 상황에서 비교적 냉정한 마음으로 씌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작품의 도덕적 목적성을 상정하여 고안되었던 둘로 접은 글판의 가설은 완전히 무너져버린다.
(클리치아)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그는 플라우투스를 그대로 옮기기도 하고, 당시의 풍취에 따라 자유롭게 그것을 따오기도 하며, 때로는 내용을 지어내고 새로이 바꾸기도 하면서, 짧은 시간 안에 급히 작품을 써내려갔다(그의 이러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작품속에서 진정 새롭고도 신선한 것은 그 문체이며 피렌체인 특유의 재치이다. 그것은 비록 (만드라골라)의 기지와는 비할 수 없다 해도, 원본의 고전극보다는 종종 더 나은 데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야말로 그 작품이 영감의 세례를 별로 받지 않고 급히 씌워졌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마키아벨리는 몇 주 동안 (피렌체사)를 한쪽으로 제쳐놓았을 것이다. 아니면 둘을 동시에 쓰고 있었을 수도 있다. 역사를 쓰다가 싫증이 나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을 때 희극으로 가는 식으로 말이다.
공연의 밤이 왔다. 포르나차이오는 호화찬란한 연회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여기에는 물론 몇 달 전 교황이 공화국의 수반으로 내정하여 보낸 어린 이폴리토 데 메디치를 필두로, (도시의 저명 인사들과 당시 권력층에 있던 고위 공직자들이 모두 초청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 주요 인사들에 뒤이어 중간층 시민들 cittadini mezzani과 그보다 하층 시민들도 함께 초대되었다. (이미 퍼진 명성으로 인해 모두가 보고 싶어했던 )그 연극이 드디어 막을 올렸다. 무대 배경과 무대 면은 바스티아노 다 산 갈로, 일명 아리스토텔레라 불린 바로 그 사람이 맡았고, 바바리에 따르면 이는 (모두에게 만족스러웠다).
연회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 화려함 덕분으로 연극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 소문은 피렌체 밖으로까지 퍼져나갔다. 물론 곧이곧대로 모두 믿을 바는 못 디지만, 당시 모데나의 총독으로 있던 필리포데 네를리는 마키아벨리에게 부친 1525년 2월 22일자 편지에서 농담조의 과장을 섞어 이렇게 쓰고 있다. (자네의 희극 작품은 어디에서나 이름을 날리고 있네. 내가 이러한 소문을 친구의 편지에서 전해 들었다고는 생각지 말게나. 난 그것을 여행객들로부터 들었다네. 그들은 길을 가며 산 프레디아노 성문에서의 그 화려했던 장관과 그 멋있었던 광경들을 외치고 다닐 정도라네. 그러한 장관을 어찌 토스카나 안에서만 보는 것으로 만족하겠나. 여기에서도, 그리고 나아가 알프스너머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일세(...)) 그런데 자신이 도덕적으로 뭔가 낫다는, 위선이랄까 혹은 질시랄까에서 (클리치아)와 그 저자를 구설수에 올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네를리 자신이 바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농담 섞인 축하의 말을 바로 며칠 후, 프란체스코 델 네로에게 바르베라의 (꽁무니를 쫓아 다니면서) (그게 무슨 잘난 일이라고 그 이야기를 희극으로) 썼느냐고 비난하며 (마키아)의 행동을 심하게 나무랐다. 그는 독설을 끝내면서, 델 네로에게 (자신의 이름은 말하지 말고) 무언가 좀 조치를 취해 보라고 촉구하였다. 델 네로는 니콜로의 처남이었으므로, 이는 가계내에서 그를 귀찮게 만들려는 위선적 간계였던 셈이다.
그 무렵 이미 수정 작업이 끝난 (피렌체사)를 직접 헌정하려는 생각에서, 마키아벨리는 (클리치아)의 상연 얼마 후 로마로 돌아가는 친구 베토리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당시 dEjs 다른 생각들을 심중에 품고 있었음이 분명한 교황은 베토리를 보자마자 즉시 마키아벨리의 근황과 함께 책이 끝났는지의 여부를 물어왔다. 베토리는 로렌초의 죽음까지 작업이 완료되었으며, 자신이 그 일부를 읽어보았는데, 좋은 것 같더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의 혼란스러운 정황이 아니었다면 벌써 직접 그것을 헌정하러 왔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교황은 일단 겉으로는 (아무렴, 와야지! 어째 그 책은 반갑고 기쁘게 읽힐 것 같구먼)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베토리는 질시 때문인지 차가운 성격 탓인지는 모르지만, 교황 레오네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마키아벨리의 희망을 서둘러 미리 막아버리려고 하였다. 교황의 말을 전한 3월 8일자 편지에서, 그는 (시기가 책을 읽고 바치기에는 좋지 않기 때문에) 과연 직접 책을 들고 와야 하는지 어떤지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하며 억지로 김을 빼놓았다. 그리고는 이어 이렇게 덧붙였다. (최근 교황의 기분으로 보아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 뻔한 일에 자네를 굳이 오라고 하고 싶지가 않다네.) 그는 프란체스코 델 네로에게도 똑같은 내용을 써보냈다.
책을 읽고 그것을 바치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 얼마 전인 2월 24일, 제국 군은 파비아에서 프랑스 군을 무찔렀고, 그로 인해 결국 교황은 황제의 입장에서 볼 때 프랑스와 연합을 뜻한다고 보이는 몇몇 조약들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왕자신은 포로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막강한 힘을 가진 에스파냐의 위협아래 놓이게 되었다. 클레멘테는 돈도 군대도 잃은 채, 정복자의 뜻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처지에 놓였다. 교황은 레오네에게는 영민함이었지만 자신에게는 다만 소심함과 우유부단함을 의미할 뿐인 갈팡질팡 정책을 밀고 나가, 서둘러 4월 초하루에 황제와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 덕분으로, 교황과 황제는 당시 (카이사르의 그늘 아래) 프렌체스코 스포르차(로도비코 스포르차의 아버지인 프란체스코(1401-66)가 아니라, 로도비코의 둘째아들인 프렌체스 마리아를 가리킨다. 그는 1521-1524년, 1529-1535년 동안에 밀라노 공이었다-옮긴이)가 소유하고 있던 밀라노 공국을 함께 지키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황제는 교회령 국가들 (그가 페라라 공으로부터 빼앗아 주겠다고 약속한 레초를 포함해서)과 피렌체 국 그리고 그곳에서 메디치 가의 세력을 지켜주겠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같은 조약에 따르면, 교회령 국가를 지켜주고 메디치 가의 지배를 인정해 주는 대가로 피렌체인들은 관례가 그렇듯이 황제에게 십만 두카토를 지불해야만 했다.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피렌체에서 교황, 황제 동맹을 축하하기 위해 개최된 축제가 아무런 흥을 내지 못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평화를 희생해서 교황의 안전을 보증받았던 조약도 그 안도감이 오래가지 않았다. 항제는 총독을 통해 자신 명의로 된 조약을 비준하였으나, 헤초 문제를 비롯한 부속 조항들에 대해서는 비준이 연기되었다. 황제의 좋지 않은 성품을 알리는 징후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 가운데에서 교황은 당시 이미 유럽 정치의 중심 축이 되어 있던 마드리드궁에 조카인 살비아티 추기경을 사절로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여기에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동행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과거에 추기경에 대한 충성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 사실 그는 (전술론)이 인쇄되었을 때, 로마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그것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그이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그것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그의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추기경의 궁에서 일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은 그의 부친인 야코포였다. 그는 기품 있는 노인이자 훌륭한 시민이었다. 추기경의 자줏빛 옷조차도 언제나 아버지의 꾸지람을 면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5월 3일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마키아벨리를 거명한 사람도 바로 야코포였다. 그리고 13일에 그는 이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었다. (네가 더불어 자문을 구할 만한 서기관으로 내가 보기엔 니콜로 마키아벨 리가 제일 적임자인 듯하구나. 내가 이에 대해 성하께 말씀올렸으나 아직 결정을 내리시지 않고 계신다. 어떻게 하실지 두고 보자꾸나.)
그 기품 있는 노인은 바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품행과 풍속에서 매우 엄격한 사람이어서, 아들의 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무뚝뚝하게 꾸짖곤 하였다. 이로 보아, 이러한 측면에서 니콜로에게 붙어다니던 악평은 사람들이 주장하던 바와는 달리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면 야코포가 떠도는 얘기들보다는 사실적 측면을 더 중시했든지. 하지만 교황의 망설임은 결국 그 제의를 거절하는 쪽으로 가고 말았다. 그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정치적인 혹은 도덕적인 생각에서 였는지 아니면 그를 다른 데 쓰기 위함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야코포가 아들에게 보낸 5월 17일자 편지에서 (교황께서 꺼려하니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만 접어야 되겠다)고 한 말이나, 24일자 편지에서 (그래서 이젠 더 이상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말기로 하자)고 한 말뿐이다. 애석할지니! 그가 서기관으로 동행했더라면, 그 사행은 새로운 의미를 가졌을 텐데. 새로운 경험을 한 마키아벨리의 머리에서 또 무엇이 나왔을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처럼 이베리아 행이 좌절되고, 아마 모든 일이 이미 끝난 뒤 이를 알게 되었을 법한 마키아벨리는 결국 로마로 가서 (피렌체사)를 교황에게 바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5월의 마지막 며칠 간을 이용하여 길을 떠났다. 교황이 그를 맞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친절하고 다정한 것이었으리라는 점은 6월 9일 클레멘테가 자신의 사금고에서 그에게 120두카토 금화를 답례로 주도록 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사실 그는 로마에 올 때 책 하나만 들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그 특유의 열정으로 피력하여 교황의 냉정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를 단시간 내에 돌려놓는 데 성공햇던 것이다. 교황은 당시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자신의 정책 어디가 나쁜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스스로 우유부단했던 관계로, 언제나 결단력 있는 정복자의 희생물이었던 것이 지금까지 그의 타성적 행로였다. 인색한 성품 때문에 병사라고 제대로 있을 리 없었고, 레오네가 했던 것과는 달리 관직가 성직록 판매도 주저하니 수중에 돈도 있을리 없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나쁜 교황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훌륭한 세속 군주가 되기를 망설이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미 해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병대 제도였다. 이야말로 그의 위대한 생각이자 오래전부터 내건 깃발이 아니었던가! 교황과 자문관들, 살비아티, 사돌레토, 심지어는 목석 같은 숌버그조차도 설복되어 그의 말에 넘어가버렸다. 로마냐 사람들을 무장시켜라! 그리하여 마키아벨리는 사돌레토가 쓴 교황의 급전을 가지고 당시 파엔차에 머물고 있었던 로마냐 총독, 즉 친구인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에게로 보내졌다. 비상한 질병에는 비상한 치유책이 요구된다는 것이 그 급보의 요지였다. 따라서 총독은 니콜로 마키아벨 리가 말하는 바를 주의 깊게 듣고 즉시 그에 대한 의견을 적어 보내야만 했다. 그것은 중대한 일이었다.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 사안은 매우 중대하며, 바로 여기에 교회령 국가뿐 아니라 전 이탈리아, 나아가서는 거의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의 안위가 달려 있노라.) 이제 남은 일은 이러한 열정과 그것을 전하는 사람의 열정이 과연 총독의 냉담함을 녹일 것이지 아니면 도리어 얼어붙게 할 것인지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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