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3장 (비탄에 잠긴 마키아벨리)
그를 시들하게 만드는 것은 어떠한 노고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에게 주어진 무위도식적 삶이었다. 그의 정신은 훼속되고, 궁핍은 먹여 살려야 할 입들이 기다리는 그의 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으며, 형편이 좋았던 때에 토토와의 거래를 위해서 별 무리 없이 빌렸던 빚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처럼 자신이 품은 단 하나의 희망으로 옮아간다.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내가 만일 피렌체 영토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교황이 잘 있는지 어떤지를 물어볼 수 있을 텐데.) 한때 마키아벨리를 후원하고 칭찬해 주었던 소데리니 추기경도 로마에서 호의를 보여준 바 있었다. 지금은 (교황과 매우 껄끄러운 처지가 되어 있긴)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교황 레오네에게 추천해 주십사고 추기경에게 글을 써야 하는지, 혹은 베토리가 말로 전하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안하는 편이 좋을지를 물었다. 베토리는 아무것도 안하는 쪽이 낫다고 조언하면서, 추기경의 호의는 행동이 귀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말 뿐이었고, 설사 그가 추천해 준다 해도 그것은 공연히 소데리니 가와 서기장 사이의 옛 관계를 되새기게 해서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현명한 조언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더 이상 자신을 가두어놓을 수 없었다. 그는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4월 16일, 그는 친구에게 줄리아노가 로마로 가고 있음을 알리면서 다시금 자신의 존재를 생각게 한다. (물론 자네는 그로 하여금 나에게 호의를 가지도록 할 만한 길을 알고 있겠지. (...) 확신컨데, 나의 경우를 솜씨 있게만 다루어준다면 내가 어떤 일에서든 쓰임새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걸세. 피렌체가 아니라도 좋네. 아니 의심을 덜 받는 로마나 교황청에서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 일단 교황 성하가 나를 써주기만 한다면 내가 왜 나 자신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이익이 되도록 처신하지 못하겠나. 내 이 글을 쓰고 있네만, 그렇다고 내가 꼭 이러한 것들을 열렬히 바라서는 아니네. 또 자네가 나로 인해 어떤 손해나 괴로움을 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네. 하지만 이런 내 기분은 헤아려주었으면 고맙겠네.)
그러나 베토리는 이렇게 집요한 마키아베리의 요청에 당황했고, 답장에서 이야기 주제를 얼른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가엾은 친구의 마음을 푸는 길은 정치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길뿐이었다. 편지는 골치 아픈 문제는 제껴두고 온통 정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그것에 빠져 들어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궁핍을 잊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리스도교국의 군주들은 여전히 심하게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베토리 역시 그 결과의 에측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터라, 마키아벨리를 부추겨서 그의 날카로운 판단을 듣고 싶어하였다.
(에스파냐 황)의 행동을 둘러싼 많은 추측들이 있었다. 프랑스 왕은 알프스 너머에서 영국 군과 에스파냐 군에 패하여 이탈리아 내에 겨우 소수의 성만을 남기고 축출된 데다 황제와 스위스와 베네치아를 여전히 적으로 돌리고 있던 중에, 그와 에스파냐 왕 사이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줄리오가 크게 분노함으로써 그는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사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거의 믿지 못할 대 사건이었다. 이는 프랑스로 하여금 알프스 이쪽을 칠 수 있도록 손을 풀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직후, 베네치아와 프랑스 간에도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로써 프랑스는 이탈리아로 진입하여 밀라노 공국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한 셈이었다. 당시 밀라노는 명목상 마씨밀리아노 스포르차의 이름을 내건 교황 연합군의 지배 아래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스위스가 주인이었다.
베토리는 여우 같은 에스파냐 왕이 아무런 이유 없이 협정에 서명했을 리는 없기 때문에, 그 속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커다란 음모가 숨어 있으며 따라서 이 협정은 가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평상시보다 두 시간이나 더 침대에) 머물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도 여전히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자, 결국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눠본 어떤 사람보다도 나은) 자신의 친구에게 의견을 물어보기로 작정하였다. 마키아벨리에게 그와 같은 것을 묻는다는 것은 곧 그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러한 재능을 인정해준다 함은 곧 그에게 새 생명을 주는 일에 진배없었다. 그가 자신을 되살려놓을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당시 그는, 정무궁의 계단을 오르락거리며 그 귀찮고 쓸데없는 장부 계산 일에 시달린 이후, 로마에서의 희망조차도 친구가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가슴이 스렸던 데다 도시에서의 생게 비용도 대기 힘들고 매일같이 빈둥거리는 것도 싫어서, 산탄드레아에 있는 자신의 허름한 시골집으로 물러나 있던 참이었다. 그는 이제 정치에 관해서는 생각도 얘기도 하지 않으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뱃사람의 맹세에 불과하였고, 대사 친구의 편지를 받자 그는 한순간에 옛날의 그로 다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이렇게 실토하였다. (내가 그것을 읽고 또 읽는 동안, 나는 지금의 불행한 처지를 깡그리 잊은 채, 내가 노고를 마다 않고 헛되이 쫓아다녔던 옛날의 사건들 속으로 되돌아간 듯했다네.)
마키아벨리는 4월 29일자로 보낸 답장에서 매우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에스파냐 왕이 휴전 협정을 체결해 준 이유와 그로부터 초래될 결과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이는 역시 날카로운 베토리의 예상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매우 흥미 있게 읽었으나, 그의 생각은 재기가 넘치는 만큼 현실적이지는 않다고 판단한 것 같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말은 많은 사라들에게 그렇게 비쳤고 또 종종 실제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석 달 뒤, 프랑스 왕이 다시 한번 이탈리아로 침입해 들어와서는 또다시 밀라노 공국을 힘들이지 않고 빼앗았다가 어이없이 내주는 일을 반복하자, 베토리는 마키아벨리의 편지를 꺼내어 재차 읽어보고는 칭찬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예언자는 (시골집으로 물러나 사람의 얼굴을 멀리한 채), 외부로부터의 소식과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절연당한 어둠 속에서도 군주 제후들의 생각과 장래의 행동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제14장 산탄드레아의 (여가)-리비우스 논고와 군주론
페르쿠시나 지방의 산탄드레아는 dpt 로마의 우편도로 부근에 자리잡은 조그만 마을로, 피렌체에서는 7밀리오, 산 카쉬아노에서는 2밀리오 떨어져 있다. 작은 교구 성당, 여인숙으로 사용되는 집 한 채, 이와 담을 같이 하고 있으면서 속칭 영주관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오막살이에 가까운 건물, 뒤쪽으로는 옹기종기 농가들이 박혀 있고 길 건너 편으로는 기름 짜는 곳, 빵 굽는 곳, 빵 굽는 곳, 농번기에 쓰는 움막, 외양간 등으로 쓰이는 집들을 거느린 군데군데 허물어진 성벽과 망류들, 농장 일꾼들이 기거하는 오두막집 등이 흩어져 있다. 이 집들, 이 농가들, 그리고 (보르고) 또는 (스트라다)로 불리는 이 농장과 (포초)라 불리는 또 다른 농장, 몬테풀리아노와 폰탈레의 땅들, 이러한 것들이 이제는 시골집에 살며 농장 관리인을 겸한 피렌체 서기장의 작은 왕국인 셈이었다. 영주관은 그 옆의 여인숙을 본따 (알베르가초 Albergaccio)(초라한 여인숙이라는 뜻-옮긴이)라 불렸는데, 이 말은 그 두 건물의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산 카쉬아노로 이어지는 길의 오른편에도 소유지가 있지만, 그 크기는 보잘 것 없었다. 그 소유의 땅과 포도밭, 올리브 과수원, 숲 등 모든 것이 자그마한 마을로부터 그레베란 이름의 개천에 이르는 남쪽 사면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이 모든 광격이 여름에는 물이 말라 하얀 자갈을 해골처럼 드러내는 계곡 낮은 곳에서 바라다보였다.
(모든 것을 잃은 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이제 더 이상 정치에 대해 생각하거나 논하지 않기로 작정하고서) 그곳에 은거하였다. 여기는 그 어두침침한 감옥 생활 이후 자신이 택한 푸른 숲과 햇빛이 있는 유폐의 장소인 셈이다. 그곳은 그가 어린 시절 뛰놀던 땅일 뿐 아나라 조상들에게도 친숙했던 땅이다. 하지만 처음에 그는 자신이 그곳에 있는 것이 어쩐지 즐겁지 않고 오히려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곳은 인생의 황혼기쯤이면 활동에서 은퇴하여 마지막 여가의 나날들을 조용히 즐기기에는 적당한 장소로 보였다. 물론 활력이 최고조에 달한 인생의 절정기엔 어울리지 않겠지만 말이다. 시골의 단순소박한 생활이 그에게는 자신의 재능의 방향과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무릇 사람들이 위대함네 하고 내세우는 생각들이 자연의 눈으로는 얼마나 하찮고 덧없는 것인지를 정작 그들 자신은 알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시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 토스카나의 시골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소박한 듯하면서도 잡다하고 부드러운 듯하다가도 거친 것이 웃음과 울음을 왔다갔다하는 그의 종잡을 수 없는 기질과 꼭 닮지 않았는가! 그와 같이 오랜 부재 뒤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그곳의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도 몰랐던 자기 자신의 한 부분을 되찾게 된다.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것은 단지 해와 바람과 석양과 여명만이 아니다. 가장 소박한 것들, 개천에 깔린 단순한 고동이며 꽃 향기며 들풀 냄새며 새의 지저귐 소리. 바로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무뎌지고 비틀린 우리의 감각을 되살려주는 것이다. 흙을 밟고 만지고 들풀과 나무 뿌리 냄새를 맡음으로써 사람들은 안테오스(Anteo, Anteos, Ant(a)eus 등으로도 표기됨. 그는 포세이돈과 대지의 어머니 사이에서 난 거인으로, 리비아의 왕. 레슬링의 명수였으나 헤라클레스와 싸워 죽임을 당함. 여기서는 그가 대지에 접함으로써 힘을 얻은 사실을 비유한 것-옮긴이)의 신화를 되살려내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것들과 함께 있었다. 그토록 많은 고통과 근심을 겪은 뒤, 그는 이제 그처럼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 자신의 불행은 이제 독침을 거두고 오히려 행동의 활력소로 변했다. 계속 되는 그의 내키지 않는 여가가 그렇게 바뀌었듯이 겨울 동안의 오랜 휴식 끝에 기지개를 켜는 주변의 나무며 들풀들처럼, 이전에는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것들로 가득 찬 그의 마음도 싹을 틔워 나갔다. 베토리의 편지들 역시 그의 생각을 정치로 돌려놓는 첫 번째 자극이 되었다. 휴전 협정에 관한 4월 29일의 유명한 편지로 인해 침묵하겠다는 그의 결심은 흘러가 버리고, 그리하여 5월 모두와 6월 일부 동안의 시간 간격 뒤에 그들은 다시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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