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5장 사랑과 고통
마키아벨 리가 베토리에게 보낸 8월 3일자 편지는 사실 베토리의 7월 27일자 편지에 대한 답장이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더 이상 도나토의 일도 자신의 불행한 처지도 입에 담고 있지 않다. 그가 지금 빠져 있는 사랑이 가져다주는 행복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리차와의 육체 관계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니콜로가 스스로의 열정을 모두 쏟아부은 그러한 일이었다. 이는 감히 말하건대 그가 (군주론)을 쓰기 직전에 가졌던 거의 그런 정도의 열정이었다.
시골에서 나는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났다네. 그런데 그녀는 그 천성이나 됨됨이가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나 섬세하고 너무나 고귀해서 어떤 찬사와 사랑도 그녀에겐 그저 모자랄 분이라네... 내 나이 이제 거의 오십을 바라보네만, 뭐랄까 이글거리는 태양에도 끄덕없고 험한 길에도 지침이 없으며 밤의 어둠에도 놀라지 않는다고나 할까. 만사가 편안하게 느껴진다네. 난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맡기지. 때로는 나의 감정과는 다르고 심지어 반대되는 경우까지도 말이야. 내가 지금 커다란 고통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속에서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네. 그건 바로 그녀의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용모 때문이기도 하고, 나의 고통을 모두 잊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 세상의 어떤 것을 준다 해도 난 여기서 벗어나지 않겠네. 그래서 위대하고도 중차대한 문제 같은 것은 생각지 않기로 했네. 이제 더 이상 옛 역사를 읽는 것도 우리 시대의 사건들을 숙고하는 것도 즐겁지가 않다네. 이 모든 것이 감미로운 생각들로 바뀌어버린걸세...
마키아벨리를 이처럼 행복하게 만든 당사자는 시골의 이웃 여인이었다(니콜로 타파니의 여동생. 당시 그녀는 조반니라는 남자와 정혼하고 반지와 지참금까지 주고받은 사이였으나, 그가 별 이유 없이 로마로 가버리는 바람에 과부 아닌 과부 신세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서는 마키아벨 리가 베토리에게 보낸 1514년 12월 4일자 편지와 본문 257-258쪽을 참고할 것-옮긴이). 그러나 이글거리는 땡볕 아래서나 밤의 어둠 속에서도 그녀와 동행하여 험한 길을 마다 않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결코 아니었다. 친구들이라면 그의 연애에 대한 충동과 그에 쏟는 열정이 어떤 것인지를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토록 힘들고 쓰라렸던 나날 뒤에 온 이러한 연애의 감정은 만년의 그를 사로잡았다. 궁중의 법복이여, 안녕! 알베르가초의 서재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대화를 나누던 고명한 이들의 그림자여, 안녕! 45세의 나이에 이르른 마키아벨리는 이제 더 이상 정치에 대해서도 (역사의 풍미)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다. 다만 사랑의 시를 쓸 뿐이었다. (동안의 궁수여, 넌 수없이 쏴댔지...)
이러한 것 모두가 단지 허울분인 통상의 문학적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는 만사에 언제나 문학적 기교를 싫어했으며, 더욱이 사랑에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으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실 우리는 이 시기에 그가 어떤 주요한 저술을 하고 있었다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는 이 편지의 진실성을 일부 확증해 준다. 물론 그것은 그의 성격으로 보아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리비우스 논고)를 채워놓은 자료들 중에서 시일이 확실한 것 어느 것도 이시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군주론) 역시 그가 다시 손대지 않았다는 사실이 입증된 바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랑 사건이 그에게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었으며, 적어도 해가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덕분에 그 절망의 나락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비록 새 걱정이 생긴 셈이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가장 잔인했던 고통을 잊어버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릇 격력한 사랑은 언제나 사람의 정신을 풍부하게 하는 법이다. 흔히 그렇듯이, 마키아벨리의 사랑 역시 곧 일에 대한 자극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이 때가 오면 힘을 발휘하리라는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다. 마치 홍수가 휩쓸고 간 들판에 기름진 흙이 쌓이듯이 말이다.
이 시기 동안에도 베토리와는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다. 이는 단지 우리가 당시 오고간 편지들의 흔적을 잃어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서기장이 시골집에서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그러한 사랑의 정열로 녹이고 있었던 12월 어느 날, 대사 친구로부터 온 한통의 편지는 그의 마음속에서 꺼져 가던 정치에 대한 불시를 되살려놓았다. 그는 앞서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하면서, 정치란 그에게 (고통 외엔 아무것도 주지 않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그것에 관해 논하지 않으리라고 언약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조차 그러한 언약을 쉽사리 깨뜨려버렸다. 그가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친구는 어떤 문제를 던지고는, 분명히 말하되 바로 교황이 그 답을 읽을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가 일을 그만든 지 이태가 지났지만 그렇다고 그 기술까지 잊어먹을 사람은 아니라는 점 정도는 내가 잘 아네.)
문제란 이런 것이었다. 즉 교황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교회의 교속 양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고, 프랑스 왕은 왕대로 베네치아와 한편에 서서 황제와 에스파냐 왕과 스위스에 대항하여 밀라노를 다시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때, 교황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프랑스나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는다면, 또는 그냥 중립을 지킨다면, 교황에게 돌아올 이점과 위험은 어떤 것일까? 이 내기의 판돈은 베토리가 흘렸듯이 교황의 호의가 될 수도 있었다. 사실 다시 몸을 일으켜보겠다는 기대가 사랑에 대한 욕망으로 모두 사라져버렸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위의 교황 문제를 제기한 베토리의 편지와 서로 엇갈려 보내졌던, 니콜로 타파니란 사람의 일을 부탁하는 라틴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묵은 근심 거리에 대해 다시 얘기를 꺼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서는 좋은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그는 12월 10일자 편지에서 평소의 지론과 성향에 따라 장문의 답장을 썼다. 그는 일단 중립안을 선택에서 배제한 뒤, 프랑스와의 동맹을 교황에게 권하였다. 왜냐하면, 프랑스 쪽이 이길 가능성이 더 높을 뿐 아니라, 프랑스 왕이 승리하는 것이 적이 승리하는 것보다 (그 파장은 덜해서 좀 더 견딜 만한 데) 반해, 설사 패배하더라도 그 후유증이 그리 크지 않으리라고 생각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조언이 올바른 것이렀다는 사실은 뒤에 밝혀지게 된다. 이 편지를 보내고 난 뒤, 마키아벨리의 기다림은 다시 시작되었고 아울러 베토리와의 서신 교환도 곧 재개되었다. 이틀 사이에 두 통의 편지가 산탄드레아에서 로마 족으로 보내졌다. 타파니에 대한 아니 남편에 의해 버림받고는 혼인 문제를 이렇든 저렇든 해결하고 싶어하는 타파니의 여동생에 대한 부탁의 말을 담은 앞서의 편지는 제외하고도 말이다. 그녀 외에 누가 우리들의 서기장이 사랑한 연인이 될 수 있겠는가? (여기 시골에서 그들만큼 나를 살갑게 대해 주는 사람은 없다네)라는 말은 물론 타파니 일가를 부탁하면서 쓴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일부로 전체를 나타내는 일종의 제유법인 셈이다. 마키아벨리는 각졀히 그 가족 중 한 사람을 달콤하게 생각했던 것이리라. 내가 앞서 이틀 만에 보내졌다고 말한 두 통의 편지 중에서 한 통은 스타킹 한 켤레를 만드는 데 쓸 정도의 푸른색 털실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눈치 빠를 친구는 그것이 누구에게 소용되는지를 묻고 싶지 않아고 썼다. 그것을 짐작하기란 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베토리의 12월 15일자 편지는 마키아벨리에게서 꺼져 가던 희망의 불꽃을 다시 소생시켰다. 왜냐하면, 베토리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답을 읽고 그것에 동조하면서,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프랑스 사절 건을 그에게 지시한 사람이 다름아닌 무소불위의 권력자 메디치 추기경이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거리낌없이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기장의 기다림과 조바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12월 20일,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중립을 지키는 문제와 전쟁에서 승리하는 쪽에 대한 교황의 우려에 대해 무언가 좀더 부언하고 싶다는 핑계 아래, 자신이 보낸 장문의 10일자 편지를 보총하는 역시 짧지 않은 편지를 다시 보냈다. 같은 날, 그는 베토리의 15일자 편지에 답하는 또 다른 편지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피렌체에 관한 일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고) 메디치 가에 봉사하고 싶다는 자신의 심정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내비치고 있다. 베토리는 이처럼 재촉을 받자, 결국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장을 보내왔다. 즉 마키아벨리가 보낸 두 통의 편지 모두를 교황과 메디치 추기경과 비삐에나(메디치 가의 문인 베르나르도 도비치의 별칭이다. 그는 조반니가 교황이 되는 데 큰 역할의 한 덕분으로 추기경 직을 얻었다-옮긴이)가 보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글의 명석함에 놀라면서 그 판단이 옳다고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토리는 곳. (자신은 친구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외엔 아무런 말도 끌어내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결국 이 말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대신 이 초라한 서기장의 마음을 그의 여인을 위한 푸른색 털실로 달래려 하였다. 적어도 이같이 조그만 부탁의 경우에는 그는 (백년동안이나) (베토리는 그렇게 썼다)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다면서 말이다. 나로서는 이 보잘것없는 물건이 그에게 새로이 가해진 타격을 얼마나 완화시켜 줄 수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키아벨리는 지금까지 이런 일에 마음을 다잡아왔기 때문에, 곧 새로운 희망을 가슴 가득히 채울 수 있었다.
파올로 베토리는 당시 로마에 있었고, 대사인 그의 형과 함께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난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의논하곤 했다. 그는 12월말 피펜체로 돌아와 마키아벨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형에 비해 덜 신중하고 덜 이기적이면서도 더욱 온화한 성품을 가졌던 그는 짧은 시간 안에 훨씬 더 나은 성과를 얻어냈다. 당시 (메디치 군주들)은 자유 공화국 시절에 만들어졌다가 그들이 자유를 땅에 묻을 대 성급히 없애버렸던 민병대 조직을 다시 살려내기로 뜻을 모은 상태였다. 하지만 나사로의 경우처럼 큰 소리로 불러내지 않는 다음에야 민병대의 부활이 쉽지 않을 것이었다(나사로 Lazzaro는 성격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오빠이다. 병으로 죽은 뒤, 예수가 큰소리로 부르자 부활하여 걸어나왔다는 이야기를 비유한 것. 요한복음 11장 43-44절 참조-옮긴이). 그들이 이 분제에 대해 마키아벨리의 의견을 물어왔다. 여기에 다름아닌 파울로 베토리가 힘을 썼으리라고 믿지 않을 이유는 없다. 교황의 함대 제독은 어차피 같은 주친을 모시는 터라 피렌체의 입에 개입하게 마련이었고, 해군에 대해 발언권을 가지는 것은 물론 육군에 대해서도 간여할 권한이 있었다(파올로 베토리는 1513년 교황 함대의 제독으로 임명되었다.-옮긴이). 그리하여, 우리는 그가 마키아벨리를 바로 자신의 함대에 태워 리보르노까지 보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민병대에 관한 문제들을 마키아벨리와 상의했음은 물론이다. 그 조직을 만들고 움직였던 전임 서기장보다 그 일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관연 누구였겠는가?
우리는 당시 마키아벨리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는 민병대 건에 관해 구두로 자문에 응한 후, 그것을 원래의 편제대로 다시 조직하는 문제를 최초로 논한 (민병대론 Ghiribizzi d'ordinanza)을 썼다. 해체된 지도 몇 년이 지난 민병대 문제에 그의 조언이 얼마만큼 소용에 닿았는지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그것이 정작 그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는 점뿐이다. 그것은 금방 사그라드는 또 한번의 짚불 같은 것이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쯤으로 물러설 파올로 베토리가 아니었다. 당시 교황 레오네가 가문의 일원들이 지닌 야심을 채워주기 위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다기다변한 계획들 중에서도, 그때까지 대체로 그리 되리라고 보였던 것은 줄리아노가 파르마, 피아첸차, 모데나, 레초의 군주가 되는 길이었다. 줄리아노의 신임과 애정이 깊었던 파올로는 이 새로운 국가에서 틀림없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호의를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던 마키아벨리 역시 나름대로의 몫을 얻게 될 것이었다. 1515년 정월 그믐 그가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는 우리에게 마치 볏을 세운 수탉처럼 꼿꼿하게 되살아난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연인을 위해 쓴 시들을 보내고, 사랑과 눈물과 웃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사이의 편지들을 누가 보게 된다면, 내 소중한 친구여, 그것들간의 차이를 누가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히 크게 놀랄 것이네. 왜냐하면, 우리는 때로 중차대한 문제들만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고상하고 위대한 어떤 것을 담고 있지 못하면 결코 우리의 머리에 넣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이다가도, 장을 넘기면 어떻게 같은 사람이 그토록 경박하고 불안정하고 음탕하며, 그토록 덧없는 일에 빠져들 수 있는지 궁금해할 지경이기 때문일세. 이러한 행동거지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칭찬 받을 일로 보이네. 우리의 모습이 변화무쌍한 자연을 닮았기 때문이지. 자연을 닮고자 하는 사람을 옥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우리가 이렇듯 들쭉날쭉한 내용의 편지들을 주고받아 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 편지에서도 다음 장을 넘겨보면 알게 되겠지만 난 초지일관하겠네. 몸이나 잘 추스르게나.
그러면서 그는 다음 장에서 새로운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파올로의 입을 빌려 줄리아노에게 올리는 조언을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일은 이제 해결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일에서조차 제안은 피렌체가 결정은 로마가 하는 상황에서, 이 일의 내용이 알려지자 죠황 비서인 피에로 아르딩겔리는 줄리아노에게 이렇게 썼다. (메디치 추기경께서는 어제 저에게 대인께서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휘하에 두시었는지 어떤지를 제가 아느냐고 은밀히 물어오셨습니다. 저는 그에 대해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믿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답하자, 추기경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 역시 그러리라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피렌체에서 그런 말이 들려오니, 그것이 그에게나 우리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이는 파올로 베토리의 짓임이 분명하다. ... 나 대신 그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니콜로와는 일체 관계하지 말라고 충과더라는 말을 전하라.) 만약 그의 말이 이 분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꾸밈없이 표현되지 않았더라면, 미움의 감정이 그토록 깊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으리라!
아마 미콜로는 파올로라는 은밀한 통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이러한 공식적 반대에 대해 알지 못했던 듯하다. 만약 알았다면 그는 극도의 경악과 절망감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물론 오래지 않아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차리게 되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 시기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를 모른다. 이와 같은 정보의 부족은 단지 사고로 문서들이 유실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구든 모든 도움이 끊기다시피 한 상태에서 저 멀리 시골집에 틀어박혀 자기 자신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두지 않으면 안되었던 때, 그래서 잊으려 애쓰고 또 잊어버린 그런 때에 관해 말문을 닫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의 결핍은 오히려 마키아벨리에게서 바로 이 시기야말로 인생 역정의 최저점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우리에게는 그가 투르크에서 장사를 하는 생질 조반니 베르나치(조반니는 니콜로의 큰누나인 프리마베라의 아들임. 1500년 젊은 나이에 누나가 죽자, 외숙부인 니콜로는 생질인 조반니를 돌본 것으로 생각됨-옮긴이)에게 보낸 편지 몇 통이 남아 있다. 내용이 단순소박하고 주로 가내의 일을 담은 이 편지들의 일부는 마키아벨리의 인물 됨됨이라는 더 중요한 문제를 다루느라 미처 돌아볼 틈이 없었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 무시해 왔던 점들은 이 책의 주를 통해 간단히 밝혀놓는 것으로 충분할 듯싶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갑작스레 이 편지들이 귀중한 것은 다른 사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울러 가엾은 서기장이 불행에 쫓기면서 더욱더 가족적 유대감에서 도피처를 찾으려는 듯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베토리처럼 신분과 운세에서는 위에 있지만 재능에서는 동류라고 그가 스스로 믿는 인물 앞에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상투적인 가면, 즉 조롱하는가 하면 곧 거만해지고 이어 냉소적이 되었다가 때로는 궁중의 법복으로 몸을 감싸는 그러한 가면 뒤로 숨어버리곤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생질과 함께라면 그는 언제나 자신의 불행을 숨기지 않고 아무런 부끄럼 없이 모두 드러내 보였다. 그는 1515년 8월 18일, 생질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좀더 일찍 소식 전하지 않았다고 나나 다른 사람들을 고깝게 생각지는 말기 바란다. 그건 단지 시간이란 놈 때문이니까. 세월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 자신조차도 잊어먹게 만드는구나.) 그로부터 몇 달 뒤인 11월 19일, 그는 다시 이렇게 썼다. (운명은 나에게 가족과 친구외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았구나.)
그가 이러한 말들을 쓰고 있을 무렵, 피렌체는 교황 맞을 채비로 온통 시끌벅적한 상태였다. 최근에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이 이탈리아의 상황을 또 한번 뒤집어놓았다. 마키아벨 리가 그 귀중한 조언을 로마로 보낸 지 얼마 후, 루이 왕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젊고 호전적인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밀라노를 되찾아 프랑스의 명예를 회복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으나, 레오네의 우유부단함은 오히려 도를 더해 갔다. 이미 처음부터 마키아벨 리가 날카롭게 예측한 것처럼, 교황은 (눈앞의 이익이나 두려움, 또는 그 둘 모두 때문에) 그의 위대한 동향인이 자신 앞에다 펼쳐놓은 간단한 선택을 마다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중립을 지킨다는 생각은 밀쳐둔 채, 에스파냐 왕과의 동맹을 갱신함으로써 나쁜 쪽을 택하고 말았다.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로 들어와 마리냐노에서 스위스 군을 격파하자, 교황은 그제서야 자신이 지는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조카인 로렌초 데 메디치와 피렌체 대사인 프란체스코 베토리의 보좌를 받은 교황이 이중 정책 덕분으로 교황 군이 직접 그 전투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승리를 목격한 레오네는 비록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았겠지만, 마키아벨리의 조언을 따랐더라면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지켰을 수도 있었음을 틀립었지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승리자를 맞아들이기 위해 피렌체를 빠져나가 볼로냐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피렌체의 국정은 로렌초 데 메디치의 손에 있었다. 줄리아노(교황 레오네의 동생으로, 로렌초는 그의 조카임-옮긴이)는 그보다 나이도 더 많고 혈연적으로도 교황과 더 가까운 사이였지만 야심이 별로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피렌체의 국정을 다루는 솜씨가 떨어지는데다 병약해서 (그는 결국 이 때문에 8개월 후인 1516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로렌초는 1515년 5월 스스로 피렌체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첫 작전에서 피옴비노를 장악하는 데 실패하자 이제는 시에나와 루카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레오네는 그로 하여금 우르비노를 공략하게 하여, 1516년 6월, 불과 며칠 만에 그곳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10월 8일, 로렌초는 교황의 서임에 의해 우리비노 공으로 책봉되었다. 이 젊은 군주에 대해서는 이미 그의 (술수가 발렌티노에 거의 버금간다)고 말들을 많이 해왔지만, 이 승리의 열기 속에서 말은 더욱 무성하게 되었다.
그러므노, 2년 전 로렌초의 훌륭한 초상을 그려내었던 마키아벨 리가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 줄리아노보다는 바로 그에게서 갑작스레 자신의 신군주상을 찾았다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과거 우르비노에서 침탈적인 보르자의 족적을 따라다닌 바 있었다. 이제 그는 더 많은 정복의 관경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새로운 환상들을 그에게 쏟아붓고, 그 훌륭한 헌사와 함께 (군주론)을 그에게 바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헌사에서, 자신에게 응당 주어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평소의 당당한 태도로 스스로의 재능에 하당한 자리를 재차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대인께서 앉아계신 높은 자리에서 가끔이나마 이렇듯 낮은 곳으로 눈길을 돌려보신다면, 제가 거대하고도 끊임없는 운명의 심술 아래서 얼마나 부당하게 쓰라림을 당하고 있는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 당시 프란체스코 베토리는 죽 로렌초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보좌관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친구에 가까운 정도였다. 설사 그가 (친구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그처럼 매일같이 만나고 친분을 쌓는 사람에게 책 한 권 헌정하는 일쯤 돕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책을 바치기는 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줄곧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마키아벨리의 불행한 처지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책을 바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깊은 절망에 빠지든가, 아니면 헌정은 했지만 그것에 대한 반응이 앞의 경우에 못지않는 실망감을 불러일으키거나 둘 중 하나였으리라, 만일 그 자신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믿을 수 있다면, 그가 로렌초에게 책을 헌정하던 바로 그때, (동시에 누군가가 사냥개 한 쌍을 바쳤는데, 로렌초는 마키아벨리보다 개를 바치는 사람에게 더 고맙다는 얼굴로 더 친절히 대했고, 이에 분개한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는 것이다.
(원하는 대로 될지어다.) (군주론)을 로렌초에게 헌정한 때는 1515년 9월보다 이르지 않고, 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1516년 9월보다 늦지도 않다. 이 두 시기 사이인 2월 15일, 그는 생질은 베르나치에게 이렇게 썼다. (난 이제 나 자신에게나 가족이나 친구에게나 쓸모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구나. 나의 쓰라린 운명이 그렇게 정해 버린 때문이지. 나는 나와 가족 모두의 건강 말고는 쓸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구나. 아니 그것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편이 더 낫겠다. 나는 행운이 나를 찾아줄 때를 기다리고 있다. 오지 않는다면 참을 수밖에.) 같은 해인 1516년 10월, 그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파올로 베토리가 맡긴 보잘것없는 일을 수락하고 갤리선 전함편으로 리보르노에 갔다. 그는 10일에 도착하여 15일까지도 여전히 그곳에 머물렀다. 우리는 그 뒤로부터 다시 베르나치에게 다음의 편지를 쓴 1517년 6월 8일까지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내가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 불운으로 인해 이처럼 시골에 박혀 있다보니, 어떤 때엔 한달 내내 과연 나란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잊고 살게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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