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22장 결말 1/2
제23장 결말
육십 세 가량의 나이에, 머리는 기울어졌고 얼굴은 심적, 정신적 고뇌로 찌들린, 지치고 불행해 보이는 한 가엾은 남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라고 알려져 있는 피렌체 소재 채색 테라코타 흉상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모습니다. 지치고 고뇌에 찬 얼굴 아래로 예리하면서도 재기 어린 조소를 날리는 그 애수에 찬 표정은 바로 그의 특징 그대로이다. 만약 이 초상이 그의 것이라면, 어떠한 작가의 글도 마키아벨리의 비극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설사 그의 모습이 아니라 해도, 그것은 그의 생애와 나의 책이 이르른 바로 이 시점에서 내가 상상한 그의 이미지 그대로이다.
그의 서간집을 읽을 때, 특히 그가 마지막 순간에 쓴 편지들을 읽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마음속으로 이 고통스런 모습을, 삶의 활력과 드넓은 포부로 가득한 그를 보여주는 다른 모습과 함께 떠올리게 된다. 감옥에 갇혀서 팔다리는 고문으로 뒤틀린 채 그래도 농담과 웃음을 잃지 않았던 인물. 바로 그러한 미소로 생애 내내 자신을 모른체한 군주들의 부당한 행동과 동료들의 무관시을 감내했던 인물. 그가 같자기 웃을을 잃고 스스로를 내팽겨쳤다. 심지어는 바르베라에 대해서도 한마디 말이 없었다. 그의 (참회 권유)는 밀라노의 군 막사에서 돌아온 뒤인 바로 이 시기쯤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여하튼 그의 편지에서나 얼굴에서나 마찬가지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그 글 말미의 다음과 같은 페트라르카 풍 시구에 담긴 고원한 깨달음이 아닐지.
이제 분명히 알겠네.
세상을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이 한바탕 잛은 꿈일 뿐이라는 것을.
한편, 당시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그 끔찍한 전쟁이었다. 적군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고, 동맹군 역시 그러하였다. 총가독관에 의해 등을 떠밀린 그들은 이미 피렌체의 방어를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먼저 귀도 랑고니 백작의 군대가 왔고, 그 뒤를 이어 조반니 데 메디치 휘하에 있었던 보병들과 카이아초 백작의 보병 및 기병대가 차례로 도착하였다. 마지막으로 그 느려빠진 우르비노 공조차도 피렌체인들이 산 레오를 탈환한 데 자극받아 행국 속도를 높여 이동을 개시하였다. 18일 마키아벨리는 귀차르디니와 살루초 후작의 프랑스 군을 따라 브리시겔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베토리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의 어린 귀도가 17일에 포를리에서 보낸 짤막한 편지를 받았던 것도 바로 그곳에서였음이 틀림없다. 여기서 귀도는 아버지가 돌아올 때면 오비디우스의 (변신 Metamorphoseos) 첫 권을 암송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약속하면서, 공부에 진전이 있음을 자랑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편지들만으로도 (그중 많은 수가 kan런 흔적도 없이 유실되어 버린 상태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니콜로가 그 불안의 와중에 가족에게 이례적일 만큼 자주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귀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르나르도 앞으로 된 두 통의 편지를 언급하고 있는 외에도, 귀도의 17일자 편지 속에는 그가 마리에타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 대한 언급과 함께, 그것에 대한 답의 일부가 들어 있다. 군대가 가까이 다가오면 올수록, 커다란 시련의 시간도 가까워졌다. 애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가족과 재산과 수확물들을 보호할 수 있을까에 대한 오만 가지 생각들이 교차하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골 농장들과 무방비 상태의 마을들은 언제나 군대의 첫 번째 희생물이었고, 더군다나 알베르가초는 큰길 가에 있었다. 따라서 수확물을 일부라도 도시 안으로 옮겨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혹시 도시가 포위되더라도 그것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정무위원회에서 무슨 포고령이라도 내리게 되면 그것을 세금 조로 낼 수 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가재도구도 좋은 것들은 도시 안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근처의 성벽 도시 산 카쉬아노에 갖다놓아야만 했다. 니콜로는 마치 자상한 가장처럼 편지를 통해 때로는 부탁하고 때로는 지시하기도 하면서, 시시콜콜 이러저러한 주의를 주었다. 가족들의 이수선하던 마음도 이제는 안정되었고, 그리하여 어린 귀도는 (우린 더 이상 란치 군에 대해 생각 않기로 했어요.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여기 게시기로 약속하셨으니까요)라고 썼다. 사실 그는 22일, 귀차르디니보다 하루 먼저 피렌체에 가 있었다.
그가 보기에, 도시의 분위기는 매우 뒤숭숭했고 폭동의 기미까지 보일 정도였다. 메디치 가에 대한 반감이 전반적으로 커져 가고 있었고, 친정부파들조차 불만을 표시하는 상태였다. 벼릴 없이 평온한 시기에도 정국을 겨우 지탱해 나갈 정도로 무능한 데다 운조차 나쁜 코르토나 추기경의 정부가, 전쟁 비용으로 멀쩡하게 눈 뜨고 껍질가지 벗겨질 판에 사람들로부터 용인될 턱이 없었다. 귀차르디니는 곧 이렇게 예측하였다. (설사 도시가 지켜진다 해도, 정부는 스스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 이렇게 덧붙였다. (이 자만심에 들뜬 코르토나는, (...)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하려들면서도 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입니다.) 최근 클레멘테는 그를 보좌케 하려고 피렌체 대주교인 리돌피 추기경을 보낸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친분상으로나 인척 관계로나 현정부에 적대적인 유력 시민들과 연관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옴으로서 그 결과는 교황의 의도와는 오히려 상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치보 추기경까지 파견되어 왔지만, 그는 원래 외국인이라 아무런 권위도 시민들과의 교감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메디치 가로서는 상황이 더 악화된 셈이었다. 불길한 조짐이 처음으로 감지된 때는 마키아벨리가 돌아오고 4일 후였다. 도시 근교에 병사들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아군이었지만, 적군보다 더 고약한 것이, 절도와 방화와 부녀자 강간을 일삼고 있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러한 수비군을 도시 안으로 들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기백 있는 청년들은 군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코르토나는 그들이 오히려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대면 어쩌나 두려워서 주저했지만, 리돌피와 다른 유력 시민들이 주장에 따라 마침내 4월 26일 군대의 시내 배치를 명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정무궁 광장에는 성급한 청년들로 득시글거렸고, 일부 병사들의 고압적인 자세 때문에 약간의 소요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코르토나, 리돌피, 치보 추기경들과 아직은 어린 이폴리토가 우르비노 공을 맞기 위해 말을 타고 나오자, 당장 메디치 가 사람들이 도망치고 있다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즉각적으로 사방에서 청년들이 몰려들었고, 일순간 정무궁은 그들로 꽉 메워졌다. 원로 명사들과 메디치파 사람들까지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현정부이지 평시민들의 정부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곤팔로니에레로서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의 형인 뤼지까지도 문 앞으로 나와 일부 유력 인사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안으로 들임으로써, 자신이 그들이 편이며 평시민들이 원하는 바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안에서는 이제 통제 불능 상태가 된 청년들이 정무위원들에게 위협과 구타를 가하며 메디치 가를 반역자로 선포하여 추방하고 소데리니 시대와 같이 평시민 정부로 복귀할 것과,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대중을 울릴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정무궁에서 이러한 일들로 격론을 벌이고 있는 사이, 그 소식을 들은 추기경들은 황급히 피렌체로 방향을 돌려 관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동맹국 소속 장군들과 많은 수의 병사들도 함께 들어왔다. 궁 안의 사람들은 돌로 자신들을 지키려 하고 있었고, 궁 밖의 사람들은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만일 정무궁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한다면, 상당수의 피렌체 시민들이 살해당할 것이고, 나아가 도시가지도 약탈될 가능성이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나라의 안위를 염려한 리돌피 추기경과 메쎄르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는 페데리고 다 보촐로로 하여금 정무궁으로 들어가 협상해 보라고 간청하였다. 첫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총감독관과 함께 다시 들어가 관련자 전원의 사면을 약속하고 협상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추기경들과 우르비노 공이 서명하였다.
피렌체의 역사가들이 (금요일의 봉기 il tumulto del venerdi라고 부르는 이 잛은 혁명기 동안 마키아벨 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이 마지막 시기에 총감독관 및 교황 군 진영에서 수행했던 역할과 친분이라는 이중적 측면에서 귀차르디니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은 알려져 있다. 귀차르디니는 추기경들에 앞서 그 날 아침 일찍 우리비노 공을 맞으러 갔었고, 마키아벨리 역시 같이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럴 경우, 귀차르디니와 함께 피렌체로 되돌아왔을 그는 공격하는 쪽에 끼어 광장에 있었겠지만, 정작 마음은 정무궁 안의 방어하는 쪽에 가 있었을 법하다. 그 안에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와 바르톨로메오 카발칸티를 비롯한 모든 친구들이 있었고, 또한 자유 피렌체 공화국이 있었다.
한편, 부르봉은 아르노 계곡을 내려와 도시 가까이로 들어왔다. 하지만 피렌체가 성벽과 군대의 측면에서 아주 잘 방비된 상태여서, 과일의 핵처럼 깨뜨리기가 힘든 곳임을 알아차린 그는, 더 신속한 행군을 위해 경포병대까지도 뒤에 암겨놓고는, 몬테바르키에서 갑자기 로마 쪽 길로 방향을 꺾었다.
느림보 우리비노 공은 약간 뒤처져 그를 쫒아 나섰고, 교황 군은 그보다 하루 앞서 있었다.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는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5월 2일 피렌체를 떠났고, 마키아벨리는 그들을 위한 숙영지를 준비하기 위해 이미 길을 떠난 상태였다. 사실 그는 4월 27일 혹은 28일 필리네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2,3일 간격으로 동맹군을 앞서가고 있던 교황 군을 바짝 붙어 따라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누군가 기다릴 만한 사람을 구하러 가는 중인 병사들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질서와 속도를 유지하면서) 행군해 나갔다. 당시 부르봉의 군대는 훌륭한 장군도 규율도 없는 데다 포병까지도 뒤에 남겨놓은 오합지졸들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겨우 2,3일의 시간 동안 로마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오직 랑고니 백작만이 (오천의 보병과 일천의 경기병을 이끌고 급히 로마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부르봉은 필사적으로 말을 달려 5월 4일 저녁 그보다 먼저 로마에 닿았다. 그는 도시가 무방비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다음날 군대를 규합한 그는 6일 아침 보르고와 산토 스피리토의 성문들 사이를 공격하였다. 부르봉은 그 첫 공격에서 벤베누토 첼리니가 자신이 쏘았다고 주장하는 화승총 한 발을 맞고 죽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막 승리하려는 순간 스스로의 배반에 대한 대가를 치른 셈이 되었다. 이후 그 광란의 무리는 오직 강탈과 강간의 탐욕에 사로잡혀 두 시간동안 매우 거칠게 싸웠다. 그들은 공성용 포대도 없이 거의 맨손으로 취약한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결국엔 그곳에 모여 있던 소수의 수비군들을 제압하였다. 교황은 황급히 카스텔로 안으로 피신하였고, 그 사이 더 이상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카톨릭교도인 에스파냐 군과 루터파인 란치 군은 서로 앞을 다투어 그 도시를 짓밟아버렸다. 과거 황제들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지금은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그곳을 말이다. 당시 행해졌던 인명 살상과 성물 파괴, 잔인함과 모욕과 강탈과 강간 행위들을 여기서 새삼 되새기는 것은 오직 마키아벨리가 일찍이 예언했던바, 그 묵시록적 종말을 미완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일 분이다. 몇 달 사이에 두 번째로 (당신의 대리인 안에서 그리스도는 포로가 되었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불경함이 더욱 길고 더욱 잔인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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