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4장 (비탄에 잠긴 마키아벨리)
그의 성격이 꼭 그렇듯이, 행복과 불행, 꿈과 현실, 저열함과 위대함 등이 뒤섞인 속에서 (리비우스 논고)와 (군주론)이 태어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같은 1513년 12월 10일자 편지에서 만족감과 애정과 기대가 묻어나는 말로 친구에게 (군주론)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이 책의 내용을 늘리고 가다듬는 중이긴 하지만, 필리포 카사베키아에게 그것을 읽어봐 달라고 부탁했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그가 책을 늘리고 가다듬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책의 판본이 두 개 일것이라고 믿는 일단의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 내용을 완전히 바꾸어놓지는 않았다. 그는 또 그 책을 줄리아노에게 헌정했으면 하는데, 과연 그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저하고 있다는 말도 하고 있다. 헌정하지 않는 쪽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유로는 (줄리아노가 아예 읽어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문제가 있었고, 헌정하고자 하는 것은 (빈궁함으로 인해 받게 될 경멸)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신만의 절박한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메디치 군주들이 나를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네. 설사 돌 나르는 일부터 시킨다고 해도 상관없네. 어쨌든 내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다름아닌 내 탓이기 때문일세. 그들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내가 국정술 연구에 바친 지난 15년을 결코 잠과 놀이만으로 헛되이 보내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노고를 길잡이 삼아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의 봉사를 받는 데야 그 누군들 기쁘지 않겠는가. 그들이 나의 진실됨을 의심할 필요는 없네. 나는 지금까지 줄곧 진실된 길을 걸어왔고, 그것을 이제 와서 새삼 깨뜨릴 생각은 없네. 나처럼 43년 간이나 진실되고 바른 삶을 살아온 사람은 결코 그 본성을 바꿀 수가 없는 법이지.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이 바로 내가 진실되고 바르다는 증거가 아니고 뭔가.
베토리는 이 멋진 편지에 대해 처음에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다시 그 일을 되새기게 하는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대답을 받기 위해 친구인 도나토의 야심찬 계획(돈을 써서 하층 계급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계획을 말함 본서 15장의 관련 부분을 볼 것-옮긴이)을 도와달라고 그에게 부탁하는 내용에다 슬적 얹어서 보낸 것이었다. 베토리는 이에 대해 12월 24일자로 답장을 보냈는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신변잡담만 잔뜩 늘어놓았다. 물론 우리의 가엾은 서기장은 이를 분명히 유쾌하게 보았으리라. 그가 처한 가난으로 이름이 땅에 떨어질 처지에 놓인 때라 그 재미는 덜했겠지만 말이다. 그가 가장 마음을 쓰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 대사 친구는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데 익숙해 있는) (리돌피의 책에는 이 구절이 (sendo a secco a faccende e a guadagnare)로 되어 있으나, 이는 (sendo asueto afaccende e a guadagnare)의 잘못으로 보인다. 베토리가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1513년 12월 24일자 편지의 원문을 볼 것. Machiavelli, Tutte le opere, a cura 야 M. Martelli ( Firenze: Sansoni, 1971), Lettera 218, p. 1163b; Machiavelli, Lettere, a cura 야 F. Gaeta (Torino: UTET, 1984), Lettera 226, p. 434-옮긴이) 마키아벨리로서는 아직 막연한 상태에 있는 줄리오 데 메디치의 프랑스 사행 계획이 구체화된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로마에서 그가 할 만한 일이 없다는 말만 남겼을 뿐이었다. 줄리오는 노 줄리아노의 사생아로서, 최근 교황에 의해 추기경 직에 오른 바 있었다(줄리아노는 피에로의 아들이자 대 로렌초의 도생이다. 그를 노 줄리아노로 부르는 것은 대 로렌초의 셋째아들 역시 줄리아노이기 때문이다. 줄리오를 추기경으로 임명한 교황은 다름아닌 그의 조카 레오 10새 (대 로렌초의 둘째아들 조반니)였고, 그 또한 1523년에 교황 클레멘테 7세가 된다-옮긴이). 프랑스에서 옛 서기장은 그 나라와 말에 대한 지식 덕분에 쓰임새가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군주론)에 관해서는 단지 다음과 같이 차가운 말 한마디뿐이었다. (자네가 그 책을 나에게 보내게 될 때, 그것을 헌정하는 것이 좋을지 어떨지를 말해 주겠네.)
그래도 마키아벨리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책을 가다듬는 일을 계속하였으나, 그의 고상한 관념들은 여전히 극히 대중적인 표현 속에 갇혀 있었다. 그는 치구들과의 서신 교환을 끊지 않았고, 심드렁한 편지들에는 역시 심드렁하게 답하였다. 베토리는 손님으로 초대받은 카사베키아와 브란카치가 그에게 집을 손질해서 좀 더 점잖은 분위기로 바꾸어보라고 훈계한다며 농담 섞인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그러면 그들에게 사순재식의 소반을 대접해서 잃어버린 사육제를 아쉽게 만들라고(예수가 광야에서 단식 수행한 것을 기려 부활제를 앞두고 6주 동안 술과 육식을 금하는 계율이 사순재인데, 그것이 끝날 때쯤인 사순절 직전 사흘 동안 벌이는 환락의 축제가 곧 사육제이다. 여기서는 손님들이 괜한 점잔을 빼면 아예 소식을 내놓아 그들을 골려주라는 뜻-옮긴이) 일러주었다. 베토리는 이러한 조언이 정말 참신하다고 즉각 반기면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매사에 대한 판단력만큼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처럼 작은 일에도 끼어들기를 마디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큰 포부를 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을 멋있게 필사하기 시작했고 작업이 끝나는 대로 그 중 몇 장을 서둘러 베토리에게로 보냈다. 하지만 베토리는 답장에서 늘 하던 대로의 신변잡사와 이런저런 애정 행각들만 잔뜩 늘어놓고는, 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짤막한 말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자네 책의 몇 개 장들을 보았네. 나에게는 비할 바 없이 마음에 드는구먼. 그러나 최종적인 평은 나머지를 다 볼 때까지 접어두고 싶네.) 이 침착하고 조심성 많은 대사에게는 자신이 (비할 바 없이)라고 평한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말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아직도 저술을 향한 열정에 휩싸여 있었을 마키아벨리에게는 이러한 평이 우유부단하고 차가운 것으로 느껴졌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었기에 베토리의 태도를 그리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때쯤 그는 가족과 함께 거처를 시내로 옮겼는데, 이렇게 한 데는 남은 겨울의 나날들을 좀더 편하게 보내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겠고, 더불어 자신의 책을 출판해 줄 친구들을 찾아 베토리에게 기대기보다는 좀더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 보겠다는 마음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빈 손에다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시골에 틀어박힌 지 8달 만에 가슴에 가득 희망을 품고 다시 돌아왔다. 그가 알베르가초의 서재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다름아닌 (군주론)과 (리비우스 논고)의 일부를 담은 어떤 너트 같은 것이었겠지만, 그것은 아직 사람들의 악의와 냉담함을 맛보지는 못한 상태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