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9장 마키아벨리와 피렌체사. 줄리오 2세에 대한 두 번째 사절 시기 (1/2
문필가에서 갑자기 군사를 다루는 위치에 서게 된 마키아벨리를 두고, 역사가든 전기 작다든 모두가 한 목소리로 그의 애국심을 노래하고 있다. 나라고 남보다 앞서 그의 이러한 덕성을 부정하는 인물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당대인들조차도 인정했던 대로, 자신의 조그만 도시국가와 자신의 자유를 향한 애정은 말할 것도 없이, 그때로서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았던 더 넓고 큰 조국 (이탈리아를 말함 - 옮긴이)에 대한 애국심을 당시의 다른 이탈리아인 누구보다도 더 확실히 보여준 인물로서 그를 지목하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좀더 공평하게 평가하자면, 피렌체의 서기장이 민병대에 기울인 열성과 관심은 무엇보다 스스로의 재능을 믿고, 더불어 반대자들에 의해 그토록 심하게 공격당한 계획을 성사시키기코자 한 한 인간으로서의 열성과 관심이었다고 보는 쪽이 더 나을 거이다. 우선 스스로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손상될 순간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운명과 한 배에 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는 그의 성격에서 나타나는 불꽃 같은 열정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 어떤 이론, 어떤 생각은 곧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말을 타고 그토록 열성적으로 여기저기 돌아 다니는) 모습에서 알수 있듯이, 새로운 것을 향한 쉴 줄 모르는 욕망은 그로 하여금 서기국에 앉아서 편지를 쓰고 있는 것보다 군인을 모병하는 일이 더 즐겁다고 느끼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만사에서 승리감을 만끽하고 있었던 당시, 그에게 조그만 행복감을 가져다준 것은 (십년기)의 출간이었다. 그가 무젤로에서의 모병을 끝내고 만 카센티노로 가고 있을 때였다. 그 작품은 서기보인 아고스티노 베스푸치가 자신으 돈으로 출판한 것인데, 그는 여기에다가 지금까지도 훨씬 더 비중 있게 대우 받을 만한 몇몇 피렌체인들에 바치는 헌사를 붙여놓았다. 여기서 그는 그 작품을 칭찬한 뒤에, 그것이 피렌체인들에 대해 저자가 지고 있는 빚을 이제 갚기 시작하는 데 불과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즉 (그는 빚을 다 갚기 위해 지금 일터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더 큰 놈을 두들겨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문맥으로 보아, 그는 여기서 마키아벨리가 지금 좀더 큰 규모의 역사 저술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그냥 막연하고 가정적이 아니라 생생하고 실제적인 어투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의 일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작업은 지금까지 피렌체 서기장들이 써왔던 전통적인 연대기를 계속 이어나간다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 작품은 원사료 수집과 함께 벌써 착착 진행중인 상태에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왜 그렇게 많은 공문서 필사본과 발췌본들이 굳이 바로 그 (십년기)의 시기에 맞추어 나타났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자료들 중에는 마키아벨리의 자필도 있고 그의 서기보들이 쓴 것도 있다. 이러한 필사본과 발췌본들은 분명히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지, 그가 메디치 추기경의 의뢰오 자신의 피렌체사를 쓰게 될 (오랜 시간 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십년기)가 당대인들에게 바쳐진 것이라면 장래의 피렌체사는 후대인들에게 바쳐질 운명이라고 친구인 아고스티노가 말했을 때, 그는 예언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후대들은 이 (십년기)에 대해서도 감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마키아벨 리가 스스로 그 작품 속에 남겨놓은 것 때문에, 그가 쏟았던 애정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첫 출판물이 그에게 가져다준 조그마한 행복감 때문에 그러하다. 그는 책이 나오자 곧 친구들과, 자신이 공무로 만나는 높은 신분의 인물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그들로부터 인사 치레가 아닌 진짜 찬사의 말을 들었다. 그 작품의 우아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를 누구보다도 칭찬한 사람은 피렌체군의 지휘관이었던 데르콜레 벤티보리오였다. 그는 1506년 2월 25일 찬사의 말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마키아벨리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 소책자가 큰 인기 속에 널리 퍼져나간 것은 어떤 찬사보다도 해적판 덕분이었다. 그것은 첫 판이 간행 된지 대략 20일도 채 되지 않아 시중에 유포되었던 것이다.
마키아베리가 이 해적판의 간행 소식을 들은 것은 카센티노에서의 모병 작업중 2워 28일 포피에 도착해서였다. 그는 즉시 자신의 서기보와 편집자인 베스푸치에게 연락을 취했다. 베스푸치는 전략을 기울인 끝에 경우 안드레아 기를란디 피스토이아란 출판업자르 찾아낼수 있었다. 그는 세르 안토니오 투비니의 동업자였다. 이 두 사람은 베스푸치에게보다는 근 현대의 서지학자들에게 더 친숙한 이름이다. 베스푸치는 이들이 찍은 책 한 부를 확보하고는 마키아벨리에게 (인쇄가 형편없다)고 편지를 썼다. (이건 완전히 사기야, 행간도 없고 종이크기도 너무 작은 데다, 책 앞뒤에 여백 페이지도 없어 활자는 또 어떻고, 온통 잘못투성이네.)
베스푸치는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고 친구의 명예를 손상시킨 데 대해 분노와 열성이 뒤섞인 상태에서 그 (형편없이 인쇄된 책자)를 흔들어대며, 8인감찰위원회로 달려가 기르란디에 대하여 항의했을 뿐 아니라, 이어서 대주교 대리에게 투비니 사제의 일을 고하였다. 양쪽 다에서 그가 이겼다. 문체의 판본은 원래 판매가 금지되었다. 대주교 교리는 투비니르 심하게 질책하면서, (이 사제에게 벌을 내리고) 그가 행한 (여타의 사행(사행)까지도 후회하도록)만들겠다고 말하였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이러저러한 사실들을 베스푸치의 유쾌한 편지에서 읽는 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또한 서지학자들은 이 편지로부터 몇 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잘 알려진 바가 없는 이 두 개의 (십년기) 판본에 관해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두 명의 출판업자에 대한 약간의 정보도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안토니오 투비니 사제가 범한 (여타의 사행)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은 여전히 가라않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복수를 한 마키아벨리는 눈으로 뒤덮인 산중의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포피에다 본부를 차려놓은 뒤 카센티노에서 모병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는 신병에게 지급할 무기가 늦어 도착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무기와 갑옷을 만든는 피렌체의 대장장이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할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3월 5일 그는 10인위원회에 다 (만약 무기가 제때 오지 않는다면, 여기서 아물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함므로) 빨리 서둘러달라느 편지를 보냈다. 하여튼 이러한 상황이 곤혹스러웠던 그는 큐시 지역에서의 모병 작업을 당분간 포기하였다. 그곳은 넓은 구역이라 (눈이 어지간히 오고 난 후에 가는 것으로 남겨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눈밭을 뒤고 하고 돌아와 다시 서기국 일에 매달렸다. 이제 3월도 끝나가고 있었고, 지난 10월 에스파냐와 프랑스 간의 화약으로 더 굳건해진 니탈리아의 평화는 그렇게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펠리페 대공(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1506년 카스티야의 왕이 된 미남왕 펠리페 1세를 가리킨다. 신성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이자 페르난도 2세의 사위 - 옮긴이)은 카스티야를 통치하고 페르난도 다라곤과 왕국을 분담하기 위해 에스파냐로 가버렸다. 페르난도 다라곤(가톨릭 와 페르난도 2세를 가리킨다. 그는 1504년 16년에 페르난도 3세로서 나폴리를 통치했다. - 옮긴이)은 나중에 이탈리아로 와서 나폴리 왕국을 다스리게 되는 인물이다. 이러한 사태 변화에 대한 논의와 염려가 있었다. 그러나 더 당면한 전쟁의 위험은 마키아벨리가 (십년기)에서 예견했듯이, 그 경박하고도 변덕스러운 막시밀리안의 존재와,
상처받은 교회를 되살려놓기를
원하는 줄리오 2세의 계획에 있었다. 그는 교황이 도기 전까지는 (언제나 원모(원모)로 가득 차 있었던) 인물이었으나, 즉위 후에는 그 꿈이 다소 사그라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바뀌지 않았다. 단지 힘을 비축하고 자금을 모으면서 (권력을 다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1506년 봄, 서기국에서 작성된 공한들이 주로 다루고 있던 문제는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얼마나 예리하게 이 문제들을 논하고 있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는 6월 중순 당시 피사 공략을 전담하고 있던 조반니 리돌피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 속에서 이를 피력하고 있다. 항상 그렇듯이, 군대로써 펜을 움직이게 하지는 못하는 법이며, 또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렇게 될 때까지는 펜이 군대를 움직이게 만드는 법이다. 모두의 기대대로 먼저 군대를 움직인 쪽은 교황이었고, 마키아벨리는 이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기 위해 그곳으로 보내졌다. 줄리오 2세는 피렌체인들에게 자신의 목적이 (폭군의 제거)에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용병 대장인 마르칸토니오 콜론나의 부대를 벤티볼리오를 치기 위한 그의 작전에 참여시키라고 요구하였다. 공화국으로서는 이 요구가 별로 마땅치 않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당장 피사로부터 전력을 빼와야 한다는 것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곤팔로니에레는 교황으 거스르지는 말되 초대한 시간을 끌어보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이는 조밤바티스타 리돌피의 지지를 받아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이 임무는 마키아벨리에게 맡겨졌다. 그는 이제 이러한 임시변통성 임무에 익숙해 있었다. 그락 줄리오 2세에게 그 대가로 준 것은 (그의 선하고도 경건한 의도를 칭찬하는) 듣기 좋은 말 한 보따리였다. 마키아벨리는 8월 25일과 26일 사이의 밤에 출발하여, 27일 테리에서 교황 일행과 만났다. 그는 전날 대규모의 추기경, 조신, 병사들을 이끌고 로마에서 그곳으로 오던 길이었따. 마키아벨리는 치비타 z,스텔라나에서 그를 접견하여 멋진 논변을 보여주었다. 그는 우선 찬사와 감축의 말으 놀어놓은 뒤 콜론나의 참전이 어려운 이유를 그 어느때보다도 힘 있게 설명하였다. 그의 열성은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교황은 그의 말을 (주의깊게 그러면서도 유쾌한 기분으로)들었다. 그리고는 대답하였다. 자신이 듣기로 피렌체인들은 세 가지 점을 걱정하는 듯이 보이는데, 그것은 첫째 프랑스가 이 작전에 동참하고 있지 않으며, 둘째, 그 스스로가 이 일에 열성을 보이고 있지 않으며, 셋째, 결국은 벤티볼리오를 쫓아내지 않고 그와 협정을 맺든지 혹 쫓아낸다 해도 그를 다사 복귀시키리라는 것이었다.
피렌치인들이 이 세가지 점을 우려하고 있으며, 군대의 손실보다는 그것을 참전의 더 큰 걸림돌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선 첫째번의 경우, 그들로서는 벤티볼리오를 자신의 후견 하에 둔 프랑스 왕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나머지 두 가지 점에 있어서도, 그들은 지금까지 우호 관계로 잘 지내오던 이웃에게 칼을 들이댄다는 사실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을뿐더러, 만일 교황의 무관심이나 관용으로 인하여 벤티볼리오가 뒤에라도 자신의 영토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면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사절에게 이 일에 찬성하고 도와주겠다는 프랑스 왕의 편지를 보여주며, 첫 번째 문제를 안심시켰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그 스스로가 앞장서서 이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상태가 아니냐면서 그의 열성을 의심치 말라고 하였다. 또 세 번째 문제의 경우에도, 벤티보리오는 일개 (사인)으로서 볼로냐에 머물도록 할 것이며, 다른 조치는 생각지 않고 있다면서 염려를 불식시키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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