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9장 역사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는 시골집에 틀어박혀 (피렌체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그 자신과 그가 갈망하던 생활 사이에 또다시 옛날의 그 숲과 올리브 동산과 사람들과의 절연이 들어서 있다. 날이 밝으면 이전에 베토리에게 적어 보낸 대로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런 생활이 시작된다. 끈끈이로 잡을 개똥지빠귀는 없지만, 그물로 잡을 만한 꾀꼬리는 있다. 또한 숲이 있고 술집이 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나른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자신이 모데나에서 귀차르디니와 나누었던 그 유쾌했던 이야기들과, 총독 친구의 그늘에서 며칠 간이나마 맛볼 수 있었던 공사의 기분 좋은 향내를 다시 기억해 낸다. 그러다가 저녁이 오면, 그의 고독은 다시 위대한 영혼들로 둘러싸이고, 그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는 사람들은 근대의 피렌체인들이며, 일찍이 그에게 위대했던 업적들을 일러주었고 또 그 자식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귀기울였던 고대의 로마인이 아니다. 이제 그는 메디치 추기경에 의해 공화국의 역사가로 명 받았기에, 더 이상 아무 거리낌 없이 스스로의 영감에 따르던 때만큼 자유로움을 느끼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는 원래 역사가이기보다는 정치 저술가이자 역사 철학자였기 때문에, 역사를 쓰는 것보다는 역사로부터 정치과학적 법칙을 추출해 내는 데 더 익숙하다. 비록 그가 역사를 쓴다 해도, 그에게 이는 다만 그것을 정치과학적 법칙으로 환원하는 과정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바로 그 시작부터 모호함과 난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틴어로 쓸 것인지 아니면 이탈리아어로 할 것인지 언어를 택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게약시 그 문제에 관해서는 백지 상태로 모든 것을 일임해 달라고 말했을 때, 이미 답이 심중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쓰는 역사는 결코 낡은 옷으로 몸을 감싼 죽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자신이 묘사하는 행동의 주체인 바로 그 사람들의 살아 있는 언어로 된 살아 있는 존재이어야만 했다.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도 문제였다. 그가 원래 생각했던 시점은 코지모의 복귀와 함께 메디치 가가 피렌체에서 세력을 잡게 된 1434년이었다. 일찍이 레오나르도 아레티노가 쓴 역사는 이 해보다 약간 앞서 끝을 맺었고, 포초의 역사 또한 그 해를 약간 넘긴 때까지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역사 서술의 시점을 이렇게 설정하는 것이 지금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무난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자신에게도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렇게 하는 편이 시간도 근접하고 자료 조사도 용이할 뿐 아니라, 행복했던 서기장 시절 이후 줄곧 계획해 온 이 일을 위해 그 동안 자신이 정리한 자료들을 이용하기에도 좋으며(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이 문제를 해명한 바 있다), 그의 전임자들이 이미 밟았던 길을 다시 가지 않으려는 자신이 생각에도 부합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아첨한다는 악평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와, 다른 역사가들이 지금까지 도시의 내부사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려 하지 않았던 관례, 그리고 새롭고 차별성을 가져야 할 자신의 저술이 전임자들의 역사를 계승치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기댐으로써 중요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는 결국 도시의 기원으로 돌아가서 그로부터 1434년까지의 내부적 사건들을 요약하고는, 이를 서론격인 1권에 담기로 작정하였다. 즉 로마 제국의 화해로부터 그가 원래 생각했던 시간까지를 거의 포괄하는 이탈리아 역사의 윤곽을 그리려는 것이었다. 이로써 그의 서술을 더 넓은 범위에다 더 충실한 내용을 가지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드디어 일에 착수한다. 우리는 서문의 첫머리에서 그가 (두명의 훌륭한 역사가) 레오나르도와 포초의 유명한 역사서들을 조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역사 쓰기에 새로운 서술 형식과 통일성과 가치를 부여한다. 그는 휴머니스트 학파의 전통과 양식, 자료의 집적에 불과한 연대기들, 그리고 대중 연대기를 뒤로 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섬으로써,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마련한다(마키아벨리가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리돌피의 견해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도 같다. 바로 아래에서 저자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는 사실의 검증을 더 중시하는 현대의 역사가들과는 달리 역사를 관통하는 인간 행위의 규칙성을 찾아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역사학보다는 일종의 역사정치학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그 이전의 연대기적 역사 서술과 비교할 때, 그는 분명히 수사적이고 장식적이기보다는 더 실용적인 역사의 길로 가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옮긴이). (리비우스 논고)에서 그랬듯이, 그는 지금까지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사가로서보다는 정치가로서, 정치학이라는 목적을 위해 역사를 쓴다. 그는 정반대의 측면에서 귀차르디니의 더 역사다운 역사를 유명하게 만든 성실하고도 세밀한 사실 추구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사실들로부터 교훈과 법칙과 이론을 추출해 내고 싶어하며, 때로는 사실을 이론에 맞추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래서 더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의 저술에서 여태까지와는 다른 점을 찾아야만 한다. 피렌체와 이탈리아에는 이미 부지런한 연대기 작가들이 다수 있었고, 나중에라도 칼 5세의 시게보다 훨씬 맞지 않는 사료와 문서 속에서 참을성 있게 진실을 캐내는 진정한 역사가들을 보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을 없었고, 또 그 후로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이 어딘지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바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그는 자신의 소략한 사료를 앞부분의 경우 비온도, 빌라니, 브루니와, 뒷부분에서는 포초, 마르키온네 디 야코포 스테파니, 또는 카발칸티와 대중없이 섞어놓은 채로 결코 그것을 면밀히 비교해 보려 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데. 그러소는 한번에 한 사람씩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는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되, 뒤죽박죽으로 샇여 있는 자료들을 끼워맞추고, 다양한 사건들간의 관계를 찾아내고, 갑작스런 예지력으로 길을 밝히고, 힘차고도 눈부신 문체 속에서 모든 사물을 되살려내면서, 그가 손대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역사 속의 사람들과 사건들이 한 인간이자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에게 무심하게 보일 때에는, 그의 이야기는 마치 꾸벅꾸벅 졸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는 식의 두서없는 모양새를 보일 뿐 아니라 문체까지도 그를 인도하는 사료의 수준으로 하락한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나 영웅이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그가 태오도릭 같은 인물의 모습 아래로 자신의 신국주상을 드리울 수 있을 때, 그의 문체와 사상은 작은 날갯짓에도 놀라울 만한 힘으로 솟아오르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역사 서술 방식을 취함으로써 굳이 새로운 사료를 힘들게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자료는 알베르가초의 서재안에 다 있었다. 우리는 이미 1485년네 비온도의 역사서가 마키아벨리의 집에 있었던 것을 안다. 브루니와 포초의 라틴어 사서들도 (아차이우올리와 야코포 브라촐리니의 이탈리아어 번역으로) 그 당시 인기리에 여러 판으로 간행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장서 속에 들어 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 속에 빌라니의 필사본이 빠져 있긴 했지만, 당시 피렌체에서라면 그 책 한 부 정도 사거나 빌리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테파니와 카발칸티의 필사본 경우에는 그 당시로도 구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리라. 물론 그가 이 외의 다른 사료들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전혀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피에로 미네르베티의 (피렌체 연대기) 필사본을 빌려다가 읽고는 책표지 안쪽의 여백 면에다가 자필로 주석까지 달아놓았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재치 있는 책주인이 이 여백 면에다 당시의 유행에 따르되 각각의 경우와 빌린 사람에 맞추어 3행 시절로 된 상용적인 주의문을 붙여놓았다는 점이다.
오 마키아벨리여, 저와 더불어 즐기기되
제발 등불은 가까이 대지 마시고
곧 돌려주시며 아이들에게서도 멀리해 주시기를.
그래서, 책을 구하기 위해, 아울러 여자도 보고 좀더 격조 있는 대화도 나누기 위해 그는 때대로 도시에 들르곤 했다. 그는 잠깐이었지만 자신의 (전술론)이 준티 출판사에서 간행되기 직전인 1521년 8월, 교정을 보기 위해 다녀가기도 하였다. 그는 정오표에서 보이듯이 아주 깔끔하게 교정을 보았던 것 같다. 만일 (만드라골라)의 경우를 일단 제외한다면, 이는 그의 주저들 중에서도 처음 빛을 보아 간행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금방 인쇄된 책 한 장 한 장을 애정 어린 손길과 눈빛으로 어루만지고, 원회의 친구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즐거움을 마다하지 않았으니라.
비록 코지모 루첼라이는 죽었지만, 친구들은 흩어지지 않았고, 마키아벨리는 이들과의 격조 높은 만남 속에서 산 카쉬아노에서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모두 잊어버린 채 스스로 되살아나는 듯한 기분에 젖었다. 그곳에서 (피렌체사)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옛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평시민 가문 출신이지만 세련된 몸가짐과 총명한 머리를 가진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도나토 잔노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결코 그리 잘 알려져 있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이러저러한 글들 가운데, 우르비노 공 로렡오 데 메디치를 가리는 (월계시집 Lauretum)안에 들어 있는 것으로 (신군주)에게 군사적 덕성을 갖출 것을 촉구하는 라틴어 2행 시적이 눈에 띌 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와 라틴 작가들 연구에 큰 힘을 쏟았고, 그리하여 이 방면에 상당한 명성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당시 피사 대학에서 그리스 어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겸손함과 아울러 반듯하면서도 사교적인 성품에 매료되어 그를 각별한 마음으로 대하였다. 마치 그 젊은이가 얼마 후 10인위원회 서기국의 옛 직책에 앉아 민병대에 대한 자신의 궁을 계승 발전시키리라는 것, 그리하여 결국은 당대의 정치 저술가들 가운데 자신과 귀차르디니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명예의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잔노티를 신뢰하고 있었다(물론 그만을 신뢰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는 (피렌체사)의 일부가 씌어지는 대로 그에게 읽혔을 정도로 그와는 허물없는 사이였다. 그리고 그들간의 대화는 언제나 역사가 그 일을 맡긴 메디치 가에 관련될 때 부딪히는 서술의 진실성이라는 고민으로 되돌아갔다. 마키아벨리의 요점은 이런 것이었다. (도나토, 난 결코 코지모가 권력을 장악한 그때부터 로렌초 사후까지의 역사를 내가 모든 짐에서 벗어난 상태에서처럼 쓸 수는 없어. 물론 그들의 행위 자체는 무엇이든 배제하지 않고 그대로 쓸 것이네. 다만 사건의 전반적인 원인들을 논하지 않으려 할 뿐이야. 그래서 나는 코지모가 정권을 잡았을 때 일어난 일들을 기술하되, 그가 어떤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여 그 높은 곳에 다다르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으려네. 이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내가 그의 적을 통해 하는 말을 눈여겨 보아야만 할걸세. 난 내가 직접 말하기보다는 그의 적의 입을 빌려 말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지.)
잔노티가 직접 마키아벨리로부터 여러 번 들었다는 이 말 또는 이와 비슷한 말들은 (피렌체사)의 서술이 아직 문제의 1434년에까지 도달하지 않은 때에 나왔음이 분명하다. 물론 저자가 시험적으로 미리 써보곤 했던 몇몇 단편적인 글들은 이미 그 시기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일단 제외한다면 그러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저작의 저술 단계를 시간적으로 비정하고자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뿐 아니라 그 결과도 시원치가 않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내 생각으로는 통상 후닥닥 초고를 쓴 다음 차후 그것을 꼼꼼히 되쓰곤 했던 마키아벨리이지만, 이 저작의 경우에는 다른 것에 비해 좀더 천천히 작업을 진행시켰을 것 같다. 그에게는 자료 조사의 문제가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미 앞서 언급했던 바이지만, 그래도 이 때문에 글 쓰는 것이 주춤거렸을 수도 있다. 또는 생각이 순조롭게 잘 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기하학적 삶에서 마지막 사사분기 전체를 차지한 (여가)의 시간을 온통 주요 저작들의 생산에 쏟아부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계속적인 독서) (전반기 29년)와 (오랜 경험) (삼사분기 14년 반)으로쿼 배운 모든 것을 토해 내었다. 그리고 그는 생의 마지막 8분의 1에 해당하는 7년을 거의 모두 (피렌체사)의 서술에 할애한 반면, 그 바로 앞서의 7년 동안에 (군주론), (만드라골라), (카스트루초 전), (리비우스 논고), (전술론)을 모두 써내는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현시점에서 몇몇 문서를 통해 당시를 되돌아볼 때, 사람들에게는 마키아벨 리가 (피렌체사)를 쓰고 있던 시기, 특히 이 초기의 시간이 마치 그가 오직 이 일에만 진력한 듯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명상적이고 고립적인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시기는 그의 전기와 서신들에서 기묘한 공백기에 해당한다. 그것은 적어도 상징적 의미에서, 저작의 방대함과 집필의 어려움에 압도된 저자의 명상과 은둔의 모습을 보여주는 공백기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전기 작가라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에서 멋대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는 하다. 이러한 지식의 공백은 단순히 자료가 우연히 망실된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비록 시골의 고적함 속에서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통해 이탈리아 정치판의 뒤엉킨 실타래를 풀게 해줄 사건의 실마리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한때 정무궁에서 외교 서신들을 열람하곤 했던 그는 이제 시내로 갈 때면(그가 1521년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그곳에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술집이나 원회에 들러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시골에 있을 때면, 유럽의 다양한 면모들이 스쳐 지나가는 로마 행 가도 부근에 자리한 술집 밖에 앉아 새 소식을 나꿔챘다. 혹은 친구들로부터 세상 형편을 전해 듣기도 했는데, 변화의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서도 구경꾼이 아니라 행위자로 남게 된(운 좋게도 말이다) 귀차르디니도 그러한 친구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때쯤, 인생에서나 정치에서나 마찬가지로 큰 도박꾼이었던 교황 레오네는 또다시 대도박을 감행하고 있었다. 베토리가 편지에서 쓰고 있듯이, 운명이 그의 조카를 앗아감으로써(1519년에 죽은 우르비노 공 로렌초 데 메디치의 경우를 말함-옮긴이), 그가 가문의 영화를 추구할 명백한 동기는 사라진 셈이었다. 이 상태에서 그가 단지 교회에 대한 권력의 확대만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더 원대한 전국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명확지 않다. 조만간 추기경 직에서 물러나야 될 사촌 줄리오에게 한몫 떼어줄 심산이었다는 말도 있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그가 최근 몇 년 동안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와 에스파냐의 왕 칼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다가, 칼 몰래 프랑수아와 조약을 맺고는 제위 게승 문제를 둘러싼 분쟁에서 프랑수아 편을 들었으나, 결국 칼의 승리로 끝나자 갑자기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칼 쪽으로 선회했다는 사실이다.
1521년 5월 8일 조약이 체격되고 29일 비준이 끝나자(당시 마키아벨리는 카르피에서 돌아와 있던 상태였다),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교황, 황제 동맹국 주재 사절은 메디치 추기경이, 총감독관은 귀차르디니가 맡았다. 운명은 다시 한번 레오네 편이었다. 프랑스군은 아다 강 유역 바우리에서 에스파냐 군에 일격을 당했고, 이 전투에서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막내아들 조반니 데 메디치는 명성을 얻었다. 프랑스는 이로 인해 밀라노마저도 곧 내주고 말았다. 레오네는 이 승리로 크게 기뻐하였으나 그것이 가져다줄 과실을 맛보지는 못했다. 12월 초하루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던 것이다. 이는 늘 좋은 운세에 편승해 온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운명의 장난 같은 것이었다.
교황의 죽음으로 동맹은 와해되었다. 전쟁은 그의 돈 아니 교회의 돈으로 지탱되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 군 역시 자연히 흩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교회가 빼앗은 파르마 시는 새로 힘을 얻은 프랑스 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귀차르디니의 지휘아래 잘 방비디고 있었다. 롬바르디아에 아무 할 일 없이 남겨져 있었던 메디치 추기경은 교황 선출 회의에 참석하려고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비록 자신이 교황에 오를 수는 없었지만, 공공연히 그 자리를 노리던 소데리니 추기경을 저지함으로써, 이미 전임 교황의 처사에 분개하고 있었던 일단의 사람들에게 새로운지지 기반을 더해 준 셈이 되었다. 1522년 1월 9일, 아드리아노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플랑드르 출신에다 전임 교황이나 로마 교황청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매우 경건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이러한 결과에 대경실색한 사람들이 그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을 무렵, 메디치 추기경은 피렌체 공화국과 그곳의 대주교구를 장악하기 위해 돌아왔다. 마키아벨리는 틀림없이 레오네의 죽음으로 자신의 손실을 입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뒤에 베르니가 비삐에나 추기경에게 전한 다음과 같은 말을 정말로 그 스스로가 했을 수도 있었을 법하다. 그는 결코 그에게 득도 해도 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득보다는 해가 많았든지. 그러나 그저 범상한 재능의 시인과 문인들에게도 그토록 많은 시혜를 베풀었던 교황 레오네는 자신도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피렌체의 위대한 서기장에게도 역시 두 가지 점에서 혜택을 주었던 것이 아닐까. 먼저 그 하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이리저리 바꿈으로써 그에게 환상과 동시에 고귀한 상상력을 촉발시킨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절망적으면서도 생산적인 여가의 상태로 방치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언제나 메디치 가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마키아벨리의 문학은 무엇보다도 그를 도운 적인 없는 레오네에게 더 크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 역시 다른 피렌체인들처럼 레오네의 죽음으로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른 것보다도 그는 언젠가는 로마로부터 좋은 소식이 오리라는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만약 소데리니가 교황 선출 회의에서 승리했다면 서기장의 미래는 확실히 보장되었을 것이다. 쫓겨난 전 곤팔로니에레는 마키아벨 리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보인 당시의 싸늘한 태도보다는 옛날의 충성심을 더 쉽게 기억했을 것이므로. 피에로를 비롯한 이 소데리니 가 인물들은 이제 매디치의 권력에 노골적으로 대항하고 있었고, 이 와중에서 지금은 메디치 가의 후견 아래 있는 그들의 옛 부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야심으로 가득한 추기경은 프랑스 왕과 힘을 합쳐 렌초 다 체리의 지휘 아래 시에나 교회에서 군대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이 고려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면서도 더 신속하게 피렌체 정부를 교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당시에 줄리오는 도시의 유일한 실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구 읍도파와 자유의 애창자들을 적어도 곁으로는 감싸안으며 매우 부드럽게 도시를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다시 한 번 국정 개혁에 대한 의견들을 청취하고자 하였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떠보고 피렌체의 어떤 사람들 머릿속에 무슨 야심들이 들어 있는지를 알압기에 매우 알맞은 방법이었다. 자기 쪽 직계의 적손은 이미 끊어져 버린 상태였으므로, 그의 원래의 의도는 진실된 것이었을 법하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때문이었는지 또는 추종자들의 야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적새심에 의한 분노 때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는 메디치 가의 사생아 두 명을 키우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어버렸는데, 이폴리토와 알레싼드로가 바로 그들이었다. 아폴리토는 줄리아노의 아들이었고, 알레싼드로는 당시 우르비노공 로렌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은 줄리오 추기경 자신의 소생이라 추정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추기경은 그러한 감언이설로 인해 이제는 다시 주워 담기는 쉽지 않을 정도로 욕망과 환상에 사로잡히기에 이르렀다. 이미 다수의 정부 개혁안이 제출되었으나, 그는 내친 김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의견을묻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도 의견을 물었고, 그는 이에 대해 앞서 레오네 10세에게 제시한 개혁안을 약간 수정하여 그대로 올렸다. 다만 이제는 그 일이 곧 결과를 볼 것 같았기 때문에, 그는 안의 형식을 직접적인 포고나 성명의 모양으로 바꾸었다. 알레싼드로 데 파치 역시 의견을 내놓았는데, 여기서 그는 마키아벨리의 안을 가리켜 (이상스럽고도 엉뚱한) 데가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 리가 지금까지 이러한 유의 평가에 익숙해 있었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 사실 그의 안은 세부적이 SAUS에서 다소 인위적인 데다 실제적이지 못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요약하자면 평시민 정부로 돌아가되, 추기경이 살아 있는 동안에느 SAPELCL 가에 따르고 그 뒤로는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또한 추기경이 5월 초하루 축제일에 반포하려고 작성해 놓은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포고의 기초를 이루는 내용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일이 그 정도로까지 갔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11일, 알렌싼드로 데 차치는 적당한 라틴어 연설을 tj서, 자유를 되찾게 한 추기경을 칭송하였다. 작자가 이 글을 그에게 바치려 하자, 추기경은 심복인 숌버그를 통해 이렇게 대답하였다. (자네의 연설문은 정말 반갑네만, 그 내용은 아니라네.) 개혁에 대한 생각들을 희석시키려는 변명이랄까 의도랄까가 처음으로 나타나 것은 렌초 다 체리의 원정에서 였다. 하지만 그것이 피렌체 정부의 준비 상태나 그 일을 계획한 사람의 짧은 생각 때문에 무산되자, 이어서 그것에 연루된 음무계힉이 불거져 나왔다. 그것은 그리스도 성체절(6월 19일)에 메디치 추기경을 암살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는 또한 국정 개혁을 앞당기는 길이기도 했다.
이 음모의 주모자는 마키아벨리와 가장 가까운 두 친구 자노비 부온델몬티와 시인 뤼지 알라만니였다. 그리고 그 외의 가담자로는 또 다른 뤼지 알라만니를 비롯하여 디아체티노와 브루촐 리가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원회에 드나든 문인들이었다. 이는 가엾은 마키아벨리로서는 조금도 달가울 게 없는 사건이었다. 그야말로 이들의 친구 중 하나이자 앞서의 반메디치 음모 사건에 연루된 인물로 지목되었던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더 나쁜 것은, 부온델몬티가 공모자 한 사람에게 그를 이 계획에 동조할 만한 시민들 중 하나로 거명한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이 계획에 정말 연루되었는지, 그리고 이 사실이 공모자에 대한 신문중에 나온 것인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 공모자란 인물이 자노비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마키아벨리는 처지가 힘든 데다 친메디치파로 알려져 있지도 않기 때문에, 의심을 사지 않고 필요한 일을 해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첫 재판에서 이에 대한 부온델몬티의 심중이 어떠했는지 아무것도 진술된 사실이 없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는 시인 뤼지 알라만노아 함께 앞질러 귀띔을 받고는 미리 몸을 피했기 때문이다. 붙잡힌 사람은 다른 뤼지 알라만니와 디아체티노뿐이었는데, 그들은 신문 끝에 일을 자백하고는, 6월 6일 효수형에 처해졌다. 내가 앞서 언급한 니콜로 마르텔리(서간집 Lettere의 저자와는 다른 사람이다.)라는 이름의 그 공모자는 브루촐리처럼, 그리고 바티스타 델라팔라를 비롯한 다른 공모자들처럼 용케 도망을 갔다. 그러다가 1524년 메디치 정부의 손에 잡혔고, 결국에는 부온델몬티의 그 숨겨진 심중을 밝히게에 이르렀지만, 때는 이미 1526년으로 아르노 강의 다리 밑으로 거친 강물이 넘쳐 흐르고 있는 상태였다.
강물은 테베레 강의 다리 밑으로도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소데리니 추기경은 처음엔 메디치 추기경을 싫어했던 교홍 아드리아노의 편애를 듬뿍 받았으나, 메디치 가쪽에서 그이 음모에 대한 불리한 정보를 부지런히 일러바침으로써 결국에는 카스텔 산탄젤로에 갇히는 신세가 디고 말았다. 그의 형 피에로는 그 음모가 발각된 지 며칠 뒤인 1522년 6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이제 이 헌신적인 시민에 대한 기억도 메디치 정부의 판결에 의해 공개적으로 훼손되어 버렸다. 베네데토 다로베차노가 그를 위해 카르미네 성당에다 만들어 놓은 무덤은 텅 빈채 남아 있었고, 후세를 위한 그의 진짜 묘비명은 마키아벨리가 쓴 그것이었다.
피에로 소데리니가 세상을 떠난 그날 밤
그의ㅡ 영혼은 지옥의 목구멍까지 내려갔지.
그러자 플루토가 소리쳤네. (이 어리석은 영혼아, 지옥엔 왜 왔느냐? 림보로 가서 어린애들하고나 지낼 것이지.)
이 넉줄밖에 되지 않는 시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너무 많은 말들이 있었다. 다른 어리석은 영혼들은 tepfl니에 대한 동지애적 입장에서 이에 분개하였다. 심지어는 마카아벨리를 비난에서 구하려는 목적으로 그가 이 작품을 썼다는 증거들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기에 옛 서기장이 자신에게 항상 친절과 호의를 보여주었던 곤팔로니에레를 조롱하는 듯한 모습은 마땅찮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진실과 마키아벨리의 진정한 성격을 왜곡하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라는 사람이야말로 농담을 좋아하는 데다가, 몰락한 영웅들, 특히 발렌티노처럼 사악한 인물이나 소데리니 같이 유약한 인물에는 더 정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지 않는가 말이다. 결국 이 유명한 묘비명은 피렌체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어떤 상황에서라도 내뱉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신랄한 농담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무릇 농담이라면 날카로워야지 결코 애처롭거나 너그러워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인, 완전히 말로 하는 농담일 뿐이며, 마키아벨리 자신이 그를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거 뭐, 별로 얼얼하지도 않구먼)이라고 말했던 그런 유의 농담인 것이다. 농담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현대인들보다, 자신의 위대한 숙부는 (시인의 입장에서) 그냥 재미로 농담삼아 이 묘비명을 썼을 뿐이라고 한 줄리아노 데 리치의 16세기 주석이 사실 더 진실에 가깝다.
그 음모 계획에 뒤이은 재판 과정과 판결 이후에 마키아벨리의 기분이 어떠했는지는 어떤 문서도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문서가 가르쳐줄 수는 있는것보다 더 쉽사리 그의 기분을 상상할 수가 있다. 바로 그 당시, 그는 또한 선량하고 경건한 사제로서 모두가 좋아하던 동생 토토를 잃는 슬픔까지 겪었던 것이다. 니콜로는 그의 옆에있어주려고 피렌체로 돌아왔다. 당시 그 자신은 사절로 나갈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피렌체로 와보았자 그는 다만 사절로 예정된 사람들에게 도움말을 주는 데 만족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한때는 그렇게 좋았던 이도시로의 여행도 이제는 왠지 가슴 아프고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그의 인생에서 남아 있었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의 하나인 원회 출입도 끝이 났다. 죽거나 도망간 친구들에 대한 슬픔에다 그 스스로도 어찌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봉착한 그는 한때 귀양지 같은 곳이었다가 지금은 도피처가 된 자신의 시골집에 그 어느 때보다도 깊숙이 몸을 숨겼다. 이는 또한 바로 그 무렵 피렌체에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돌림병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길이기도 했다. 1522년 11월 27일, 그는 자신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그 무렵, 부온델몬티와 알라만니가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다시 들어오려다가 붙잡혔다는 소식이 피렌체에 알려졌다. 두 명의 망명객은 결국 풀려날 것이므로 이 사건이 그들에게는 별반 위험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원회에서의 추억을 일깨우는 모든 것이 그로 하여금 두려움과 참담함을 새삼 느끼게 만들었다. 자신이 또 다른 메디치 추기경(조반니 데 메디치를 말함. 1513년에 레오네 10세가 됨-옮긴이)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감수해야만 했던 고문과 투옥으로 인한 고통이 마음과 육신 양쪽으로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는 자신이 인생사에서 (두 음모 계획 사이에서 끼어 있던) 마지막 세월들을 낙담 속에서 쓸쓸히 되돌아보았다. 그것은 마치 그 해말이나 1523년초쯤에 그 가까이 가고 있었음이 확실한 (피렌체사) 제 8권 서두와 흡사했다. 그의 쓴 술잔을 가득 채우느라고, 아고스티노 니포의 유명하고도 악명 높은 표절이 간행된 것도 바로 이때다. 그 볼썽 사나운 (군주론)의 모조품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내가 발견한 베토리의 한 편지에서 그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걱정을 안겨다주는 아들 로도비코에 대한 새로운 근심으로 심란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는 결국 8월초까지 갈 돌림병이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던 때였다. 시민들은 피렌체를 떠나 시골로 흩어졌다. 그러나 역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다. 롬바르디아에서는 에스파냐와 프랑스 간의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프랑스 군은 밀라노를 잃은 후, 본니베 장군의 지휘 아래 새롭게 정신을 다진 군대로 되돌아왔다. 이에 맞선 것은 칼 5세 휘하의 샤를이란 이름을 가진 두 인물, 즉 나폴리 총독인 란노아와 프랑스 왕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킨 부르봉이었다. 바로 이대(1523년 9월 14일) 교황 아드리아노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오히려 그의 주치의에게 도시를 구한 은인이라며 화관과 치하의 글을 바치면서 기뻐하였다. 교황 선출 회의는 길어졌고, 줄리오 데 메디치가 이끄는 노장파와 폼페오 콜론나를 앞세운 소장파가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문인들에게는 이 상황이 마치 옛날 또 다른 줄리오와 또 다른 폼페오 간에 있었던 대립의 재판으로 보였다(이탈리아어 이름인 줄리오와 폼페오를 라틴어식으로 바꾸면 율리우스(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된다-옮긴이). 이 투쟁은 마침내 줄리오의 승리로 끝났고, 그는 클레멘테 7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11월 18일). 메디치 추기경들은 오히려 음모 사건들의 덕을 본 셈이었다.
일단 두려움이 가시자, 언제나 쉽사리 달아오르는 마키아벨리의 가슴은 다시 희망으로 불타기 시작하였다. 그에게 먼저 떠오른 생각은 새 교황이 추기경이었을 때 자신에게 쓰라고 맡긴 작품을 바치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질질 끈다 싶을 정도로 느릿느릿 작업해 오고 있던 그 책이 이제 갑자기 보물 단지처럼 여겨졌다. 내가 알기로 당시 작업의 진도는 바야흐로 8권에 이르러 이야기는 교황의 숙부이자 메디치 군주국의 진정한 창시자인 로렌초의 행적을 다루어야 할 시점에 와 있었다. 이 사건들은 시간적으로도 당시에 가깝고 그 사안도 중요했기 때문에, 그로서는 조심해서 다룰 필요가 있었다.
1524년 8월 30일, 마키아벨리는 재산 문제로 포피아노에서 어떤 일을 해달라고 부탁한 귀차르디니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는 먼저 그 해엔 꾀꼬리마저 잡을 수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은 뒤(이탈리아에서는 꾀꼬리의 일종인(beccafico)를 식용으로 하고 있다-옮긴이) (또 하릴없이 한 해가 지나가는데 식탁엔 맛있는 음식조차 놓을 수 없구나!), 늘 그렇듯이 어조를 싹 바꾸고는 이렇게 썼다. (난 지금까지 시골에서 피렌체사의 저술에 전념해 오고 있었다네. 거두절미하고, 자네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부분을 내 편에서 한번 봐준다면 자네에게 10솔도를 줄 용의가 있네. 난지금 어떤 대목을 세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그게 사실을 과장하거나 폄하하지는 않았는지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단 말일세. 물론 결과는 내 스스로 판단해서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한 아무에게도 불편을 주지 않도록 처리할걸세.)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죽음은 그에게 이 8번째 권을 종결하는 동시에, 당시 그가 교황에게 바치려고 작정한 작품 전체를 끝맺는 데에는 최상의 시점으로 보였다. 그는 책을 서둘러 마무리하고는 이어 전체적으로 글을 다듬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손질을 거침으로써, 그의 글은 쓸데없는 장식을 덧붙이던 당시 문인들의 유행과는 달리 오히려 더욱 명료하고 꾸밈없는 문체를 가지게 될 것이었다. 그는 글을 장식하기보다는 글에 힘을 실어주려 하였다. 그는 일종의 환영 비슷한 기대감 속에서 자신의 위대한 시간들을 작업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러다가 쓰던 글에서 고개를 들고는, 친구들이 전해 오거나 술집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롬바르디아의 평원과 프로방스의 따뜻한 날씨 속에서 경쟁 관계에 놓인 두 강대국이 시시각각 펼치는 전쟁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는 숨을 멈추고 교황 클레멘테의 아슬아슬한 게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레오네 10세만큼의 역량도 운세도 갖지 못했으면서도 게임을 계속하려는 듯이, 이제는 황제를 떠나 프랑스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느라 마키아벨리는 수시로 펜을 멈추었다. 그리고, 꾀꼬리를 잡지 못한 그를 위로나 하려는 듯, 쌀쌀한 가을의 새벽빛 속에 그가 놓은 가시나무 덫 사이로 첫 개똥지빠귀들이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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