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8장 (나막신 공화국) 사절 시기
1521년 5월의 어느 날, 마키아벨리는 아펜니노 산맥의 정상을 뒤로한 채 볼로냐 쪽으로 말을 몰아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안장 주머니속에는 공화국 시절의 10인위원회를 대체한 8인집행위원회 gli Otto di Pratica의 명령서가 들어 있었다. 그 문서는 그가 오랫동안 근무하던 바로 그 부서에서 씌어졌고, 그것에 서명한 사람 역시 그를 대신하여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니콜로 미켈로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시 한번 정부 신임장을 들고 공화국의 경계 너머 토스카나를 벗어나 사절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의 조국이 그 날카로운 관찰자이자 예견력 있는 정치가인 그를 다시 기억해 냈단 말인가? 그리하여 그는 지금 또 다시 프랑스 왕과 황제에게로 가고 있는 것인가?
오 가엾은 마키아벨리여! 그는 단지 카르피에서 열리고 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총회 모임 참석차 가고 있었을 뿐이었따. 그는 그곳에서 정무위원회 및 피렌체의 실질적인 군주인 메디치 추기경의 이름으로, 피렌체 영내의 프란체스코 수도원들은 여타 토스카나 지방의 수도원과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전할 것이었다(피렌체 내의 프란체스코 수도원들을 좀더 쉽게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정책이었음-옮긴이). 간단히 말해서, 추기경은 전용 교서로 자신의 뒤를 밀어주는 교황의 승인 아래, 일찍이 사보나롤라가 도미니쿠스 교단의 대역을 함으로써 안렉산드로 6세로 하여금 그를 파멸시킬 핑계를 주었던 그러한 일을 피렌체 영내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을 대신하여 해줄 심산이었다. 이러한 임무는 정치가에게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고, 더욱이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의 위대함과 천재성과 품성들, 그리고 (만드라골라)의 작자로서의 평판을 감안할 때, 그가 이러한 임무를 맡았다는 것은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결코 그것을 거절할 리 없었다. 그는 바로 그 메디치 군주들에게 (하찮은 일)이라도 좋으니 제발 자신을 써주십사고 간청했던 바 있었고, 그래서 이제 그들은 그에게 하찮은 일 하나를 내려준 셈이었다. 다시 한번 그는 운명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짓밟아 스스로를 부끄렇게 만들어보려는 심술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 길은 그를 어느 순간에 프란체스코 수도외의 총회장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 일은 그에게보다는 그것을 그에게 맡긴 사람들에게 더 부끄러움을 안겨줄 만한 그런 것이었다. 그는 세상의 부조리에 억눌렸던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는 더 나아지겠지 기대하면서 자신의 쓰라린 고통을 우스갯소리와 웃음 속에 감추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마키아벨리는 이 감미로운 계절에 아펜니노 산맥의 마지막 구릉지 사이를 막 감아돌아 내려가는 길이었고, 그의 발 밑에는 풍요로운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이 길을 잘 알았다. 그것은 이전에 다른 기대 속에서 수없이 오고 갔던 길이었다. 그는 이러저러한 곳을 알아보았고, 더 자신만만했던 당시의 여행들 도중에 자신이 했던 생각들을 되새겨 보았다. 여기는 그가 황제를 배알하려고 독일로 가는 길에 잠깐 묵었던 농가 오두막이었지. 그리고 또 여기는 1510년 무더웠던 여름날 그가 프랑스 궁정으로 가는 세 번째 사행길에 산등성이로부터 이리저리 급하게 말을 내리몰아 찾아왔던 그 시원한 냇물이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 그는 탁발승들과의 협상을 위해 카르피로 가는 길이었고, 주머니 속에는 (나막신 공화국 la repubblica degli Zoccoli)(탁발승들이 신는 (나막신 zoccolo)에다 비유한 말. 여기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가르킴-옮긴이)에 관계된 훈령과 신임장이 들어 있었다.
피오 가의 고도인 카르피는 모데나로부터 12밀리오 떨어져 있는데, 마키아벨 리가 지나갈 예정이었던 그곳의 당시 총독은 또 다른 피렌체 사람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였다. 이 위대한 정치가 두 사람은 이미 서로간에 안면이 있었다. 1509년 니콜로는 뤼지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베로나 발 편지에서 그의 형 프란체스코에 대해 무언가 친구 사이의 일을 떠맡긴 적이 있었다. 니콜로가 정무궁에서 서기장으로 있고 프란쳇코가 에스파냐 주재 대사로 있을 당시, 둘 사이에 서로 교류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사실 프란체스코는 니콜로가 그에게 라벤나 전투를 (편향된 시각에서) 얘기했다고 불평한 적까지 있었다. 귀치르디니는 1513년말 자신의 임지에서 되돌아온 즉시 교회령 국가내의 명예와 부가 함께 보장되는 자리들에 임용되었던 반면, 마키아벨리는 촌구석에 갇혀서 그에게 그처럼 수많은 불행과 그토록 커다란 영광을 동시에 가져다줄 그 무료한 시간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이후 지금까지 그들은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도 서로 만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탈리아의 폭풍이 그들을 한 배에 태우기 전까지는 이 둘 사이에서 의기상통한 어떤 감정이나 진정한 우정이라는 것을 찾기란 힘든 일이었다는 점이다. 귀차르디니는 귀족적인데다가 차갑도록 이기적이고 진중하며 예의가 깍듯한 인물이었으나, 마키아벨리는 평민적이며 피가 뜨겁고 마음이 너그러운 편인 데다 좀 경박스러울 정도로 활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전자가 실제적이고 현실주의적인 데 반해, 후자는 이론적이고 이상주의적이었다. 둘은 모두 그들의 진정한 위대성을 내밀하게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귀차르디니가 격조 높은 품격이라는 암벽 속에 그것을 가두어놓고 있는 데 반해, 마키아벨리는 일상이라는 옷을 입고 건달 같은 행동을 하고 돌아 다니는 데 개의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일생이 귀차르디니가 풍족하게 누렸던 명성과 권위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해서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시인과 혁신가들에게 흔히 퍼부어지는 비난의 소리는 제쳐두고라도, 바로 이러한 점이 그와 당시의 사람들 사이에 넘기 힘든 물줄기를 뚫어놓았던 것이다. 반면 귀차르디니는 자신의 그 차가운 위엄으로 몸을 감싼 채, 후대의 사람들까지도 포함한 모두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 사람의 행운과 다른 한 사람의 불운 간에는 너무 간격이 져서 생전의 그들 사이에 경쟁이라는 것은 아예 있을 수도 없었다. 경쟁 관계는 그들 사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우리가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시간쯤이면, 마키아벨리는 그 고통스러웠던 여가 속에서 인쇄본으로든 필사본으로든 간에 자신의 가장 유명한 저작들을 이미 쓰고 펴낸 상태였을 뿐 아니라, 지금은 (피렌체사)를 집필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부 일을 비롯한 다른 사무로 바빴던 귀차르디니는 별로 글을 쓰지 못했고 간행된 저작도 전혀 없었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생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것에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재능에 마음이 이끌렸다. 그리하여 그와 편지를 주고받노라면 그의 뜨거운 열정이 자신에게로 옮아오는 덧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마키아벨리에게 쓴 편지들이 그의 서신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인간적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시인과 철학자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치를 하는 데는 그들이 오히려 위험스런 존재로 비쳤다. 카르피로 가는 이 사적 시기에 그가 친구에게 한 말을 들어보면, 마키아베리를 당시의 사람들과 갈라놓은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게 된다. 그는 마키아벨리를 가리켜 (언제나 도에 지나친 주장을 펴고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썼던 것이다. 물론 이 말 속에는 어떤 아이러니컬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표적이 된 사람의 명예에 누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마키아벨리는 귀차르디니를 정말 좋아했으며, 장차 어느 땐가의 편지에서 자신의 이러한 감정을 불쑥 토로하게 될 것이었다. 귀차르디니가 시인이자 혁신가적인 그의 (과장성)을 이해해 주지 않았을 때에도, 그는 슬펐지만 결코 그에 대해서 어떤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그의 성품이 그렇듯이, 그는 오히려 귀차르디니의 덕성을 칭찬하였고 더욱이 그의 행운을 찬탄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메디치 군주들)이 그렇게 큰 일들에 쓴 인물, 조국을 빛낸 피렌체인에게 존경의 염을 표하였다. 그는 자신과 동등한 입장에서 국가사를 논할 수 있었던 정치인,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만은 그의 단단하고 차가운 껍질을 깨고 나왔던 인물을 좋아하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는 틀림없이 카르피 가는 길에 모데나에 들렀고 돌아오는 길에도 다시 그곳으로 갔을 것이다. 둘은 함께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당면 문제들에 대해서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기이한 사행을 두고 질탕한 농담을 주고받았으리라. 이때가 그의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산 카쉬아노의 곰팡내 나는 생활을 떠나 그토록 먼 거리를 말 잔등에 얹혀왔던게 아니었는가 말이다. 이제 여독을 느낄 때도 되었을 것이다. 그는 5월 11일이나 12일에 피렌체를 떠나 모데나에서 하룻밤과 한나절이 채 못 되는 동안을 묵었다. 그는 탁발승들이 저녁 기도를 위한 종을 울리기 전에 도착했는데, 그것은 일라리오네라는 이름의 수도사가 그렇게 하도록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모두를 상전으로 모셔야 할 판이었다. 그는 그곳에 있으면서도 친구와 계속 대화하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에게는 이어서 더 기이한 임무가 맡겨졌는데, 이 덕분에 그들간에 나눌 이야기 거리도 더 많아진 셈이었다. 양모 조합의 조합장들이 그에게 쓴 5월 14일자 편지에는, 그곳 수도사들에게 잘 얘기해서 조반니 괄베르토 다 피렌체라는 저명한 수도사(별칭이 (북풍)일 정도였다)로 하여금 다가오는 사순절에 두오모에서 설교할 수 있도록 하게 해달라는 부탁의 말이 담겨 있었다. 이 전언은 마키아벨 리가 길을 떠난 때보다 이삼 일 뒤에야 부쳐졌으나, 우편이 더 빨라서 카르피에는 그와 거의 동시에 도착하였다. 아마 한 친구의 편지를 통해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것으로 생각되는 귀차르디니는 그럴 더 놀려먹을 기회를 갖게 된 셈이었다. 그는 17일자로 마키아벨리에게 편지를 써서, 피렌체의 유명한 대식가이자 동성연애자인 파키에로토로 하여금 (친구에게 아름답고도 우아한 아내를 찾아주도록 한 것)처럼, 그에게 설교자를 구하게 한 것은 정말 기막힌 생각이라고 농을 던졌다. 그리고는 이어서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자네가 그들이 기대하는 대로 자네의 명예를 지키면서 일을 하리라 믿네. 하지만 이 나이에 새삼 신심을 새롭게 해서 명예를 흐리게 하지는 말게나. 지금까지 언제나 그 반대로만 살아온 자네 처지에 신심을 돈독히 한다는 건 미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치함으로 치부될 테니 말일세.) 그는 끝으로 수도사들이 그를 위선자라고 비난하기 전에, 그리고 유구한 영향력을 가진 카르피의 분위기가 그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기 전에, 서둘러 일을 마치라고 조언하면서 글을 맺었다. 아니 한 가지 더. 얄궂은 운명의 장난에 의해 만일 그가 어떤 카르피 사람의 집에 묵게 된다면, 그의 병에는 약이 없을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시지스몬도 산티라는, 그 도시의 군주인 알베르토 피오의 서기장 집에 유숙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는 곧 집주인과 수도사들을 놀려먹을 생각으로 반짝거렸다. 즉 귀차르디니로 하여금 그에게 특별 전령을 자꾸 보내게 해서, 사람들이 그를 귀하신 분으로 보도록 만들어 더 존경도 받고 식사 대접도 나아지도록 하려는 게획을 세운 것이다. (이 얘기를 들려주지 않을 수 없겠네. 그 궁수가 편지를 가지고 도착하여 땅에 코가 닿다록 절을 하면서 급한 일로 특별히 왔다고 말하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우왕좌왕하ㅇ며 존경스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네. 그 중 몇 사람이 나에게 새소식을 묻더군. 그래서 나는 내 위신을 높일 겸 이렇게 말해 줬지. 사람들은 황제를 트렌토에서 기다리고 있고 스위스는 새 의회를 소집했으며, 프랑스 왕은 가서 그 왕과 만나려 하지만 그의 자문관들은 그것에 반대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네. 그랬더니 사람들은 모두 입을 헤 벌린 채 모자를 벗어들고는 내가 편지를 쓰는 동안 내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지 뭔가. 내가 장문의 편지를 쓰는 양이 그들에겐 신기한지 마치 무엇에 홀린 듯이 나를 바라다보고 있었다네. 나는 그들을 더 놀래줄 양으로 가끔 펜을 멈추고는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곤 했지. 그랬더니 모두 침을 질질 흘리더군. 만약 그들이 내가 무엇을 쓰고 있었는지를 알았다면, 더 놀라 자빠졌을걸세.)
그는 5월 17일자 같은 편지의 서두에서 설교자를 택하는 일에 대해 우스갯소리를 장화하게 늘어놓았다. 수도원들을 격리시키는 문제는 모든 것이 수도사들의 선거가 끝날 때를 기다려야만 했는데, 이 또한 그에게 새로운 농짓거리의 소재가 되었다. (난 이곳에서 할 일없이 빈둥대고 있네. 수도회 총장과 감독관들이 선출될 때까지는 아무것도 일을 볼 수가 없는 형편이라네. 그래서 일을 한번 꾸며보기로 했지. 스캔들이 일어나도록 해서 그들이 나막신을 끌고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도록 말일세. 내가 잘만 한다면 성공하리라 믿네. 자네의 조언과 도움이 있다면 훨씬 낫겠지.) 카르피의 분위기가 영향을 미칠 거라는 귀차리디니의 농에 대해서 그는 뻔뻔스러운 어조로 지금까지 거짓말 박사로 지내온 마당에 자신이 배울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언젠가부터 나는 내가 믿는 것을 말하지 않고, 내가 말하는 것을 믿지 않으며, 혹시라도 진실을 말할 때가 있다 해도 그것을 알지 못하도록 이러저러한 거짓말 속에 숨겨버리기 때문이네.) 또다시 그는 스스로가 가지고있지도 않은 악습들을 마치 가지고 있는 양 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귀차르디니는 친구의 장난에 같이 마음이 동해서 이 게임을 계속하기로 하고는, 마치 그가 중요하고도 극히 비밀을 요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것처럼 꾸며 시지스몬도를 놀려먹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일 하룻동안 두 통의 편지를 마키아벨리에게 보냈다. (친애하는 마키아벨리 보게나. 난 자네에게 조언할 시간도 재간도 없을 뿐 아니라 보통은 아무 보수도 없이 그런 일을 하지도 않네만, 자네의 그 험난한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미력하나마 도움을 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네. 그래서 여기 궁수 하나를 전령으로 보내네. 그에게는 이 일이 매우 중요하므로 최대한 빨리 전하라는 지시를 미리 내려두었으니까, 아마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뛰어들어갈 테지. 그가 들어오는 양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주접거리는 모습을 보면, 모드들 자네가 귀하신 몸이며 자네의 일이 탁발승과의 일과는 다른 중요한 것이라고 믿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네. 그리고 우편물이 두꺼워야 주인이 믿을 것이므로, 내가 취리히로부터 받은 통신문들을 동봉할 테니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든지 자네 손에 들고 있든지 알아서 편리할대로 사용하게나.) 마키아벨리는 이 편지를 받고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자신하건대,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고 말할 수 있네. 숨이 턱에까지 찬 전령의 모습과 두꺼운 편지 뭉치 사이에서 이 집과 이웃의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어버렸지 뭔가. 나는 메쎄르 시지스몬도를 특별히 생각해 주는 척하며 그에게 스위스와 왕 사이의 조약 내용을 언급한 부분을 보여주었다네. 그는 이를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네. 그래서 황제의 병환과 그가 프랑스로부터 사고 싶어하는 나라들에 대해 말해 줬지. 그랬더니 그도 놀라 침을 질질 흘리더군.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뭔가 미심쩍어하는 눈치일세. 왜 그 많은 편지들이 갑자기 탁발승만이 가득한 이 아라비아의 사막에 나타났는지 도대체 의심스럽고 이해할 수 없다는 거겠지. 그리고 나 역시 그에게는 자네가 편지에서 썼던 바와는 달리 그렇게 대단한 사람으로 비치는 것 같지는 않네. 노상 집안에 죽치고 있으면서,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아니면 그냥 찍 소리 않고 처박혀만 있으니 왜 안 그렇겠나. 그래서 자네가 나와 그를 두고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쩌나 싶네. 그가 뭔가 캐물어도 난 엉뚱한 쪽으로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다가올 홍수나 언젠가는 우리를 침공해 올 투르크에 대한 이야기, 또는 이 시대에 심자군을 일으키는 것이 합당한지 어쩐지 등등 술집에서 흔히 하는 잡담들을 늘어놓는다네. 그는 아마 자네를 대면해서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묻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 걸세. 그도 그럴 것이 자네야 말로 그를 이 혼란에 빠뜨린 장본인이 아닌가 말이야. 나야 뭐 집에서 괜히 그를 바쁘게 만드는 성가신 존재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래도 그는 이 장난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 눈치네. 그래서 그런지 계속 환대하는 얼굴에다 식사도 연일 진수성찬이라 나도 얼싸 좋다 하고 먹어치우지. 그리고는 점심 때면 '야! 오늘 아침엔 2줄리오 giulio (교황 줄리오 2세가 처음 만든 은화-옮긴이) 벌었네,' 저녁 식사 때는 '오늘밤엔 4줄리오'하고 중얼거린다네.) 두 피렌체인은 이런 식으로 게속 농을 주고받았고, 마키아벨리는 이에 더해서 대접까지 잘 받고 있었다.
장난기를 거두고 이야기를 먼저 진지하게 되돌린 쪽은 귀차르디니였다. 그는 1일자로 된 것들 중 두 번째 편지에서, 마키아벨리 정도의 인물이 설교자 구하는 일 때문에 탁발승들에게 사절로 보내졌다는 이 희극적 장면 속에 담긴 거의 비극적인 비애감을 표시하였다. (나는 공화국 및 수도사 사절 이라는 자네의 직함을 보면서, 엣날 자네가 상대했던 그 많은 왕과 제후들을 생각했다네. 그리고는 리산드로스 Lysandros(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를 격파한 스파르타의 장군-옮긴이)를 기억해 냈지. 그토록 많은 승전과 전리품을 뒤로 하고 스스로 영예롭게 이끌었던 바로 그 병사들에게 급식하는 일을 맡게 되었던 그 인물 말일세. 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지. 바뀌느니 사람의 얼굴과 사물의 외양뿐이요, 사건은 언제나 되풀이될 뿐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 이미 일어나지 않았던 일은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건의 이름과 얼굴이 바뀜으로써 오직 현명한 자만이 그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법. 역사가 우리에게 좋고 유인한 것은, 우리에 앞서 존재하면서 우리가 결코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일들을 다시금 알고 보도록 해주기 때문이 아니겠나. 사제식 추론법에 따르자면, 이로부터 다음의 결론들이 나오지. 자네에게 역사를 쓰도록 배려한 사람들은 칭송받아야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자네는 자네에게 맡겨진 그 일을 지체 말고 부지런히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것일세. 이를 생각하면 지금의 이 사절 임무도 깡그리 쓸데없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네. 이 삼 일 간의 여가 동안 자네는 나막신 공화국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 이 실례를 자네의 다른 에들과 비교 대조해 봄으로써 자네의 목적에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네.) 이러한 말 속에는 그가 마치 (리비우스 논고)나 (군주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대목들이 있다. 그러나 그는 곳 평소의 쾌활함으로 돌아온다. (난 자네가 시간을 죽이거나 운세가 좋을 때 그것을 잡지 못하는 것은 자네에게 유익함이 없는 것으로 보았네. 그래서 늘 하던 대로 다시 전령을 보냈다네. 그게 다른 일에는 별 소용이 닿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내일 아침 파이 하나는 더 얻게 해주지 않겠나.) 하지만 이제 농담 거리도 떨어졌고, 그가 맡은 일도 끝나 가고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19일자 편지에서 보듯이, 그는 자신의 총독 친구에게 주인집 사람의 의심스러운 눈치에 대해 말하면서 장난에 종지부를 찍었다.
제기랄! 이 작자에게 신경 좀 써야겠네. 눈치 빠르기가 흡사 악마 삼만을 합친 것 같다니까. 내 생각으로는 그가 자네의 장난을 알아차린 듯하이. 왜냐하면 전령이 오자 그자 이렇게 말했거든. (이것 봐. 틀립없이 뭔가 내막이 있어. 전령이 너무 잦거든.) 그리고는 자네의 편지를 읽고 나서 또 이렇게 말했다네. (내 생각으로는 총독이 나와 당신을 놀리고 있는 것 같은데.) (...) 그래서 난 지금 변도 제대로 못 볼 지경이라네. 그가 빗자루를 들고는 나를 여인숙으로 쓸어내 버리면 어쩌나 하고 말일세. 그러니 내일 하루는 쉬어주게나. 이 장난이 지나쳐서 여태까지 좋았던 사정이 완전히 뒤집히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어쨌든 요 삼 일 동안은 좋은 음식에 편안한 잠자리에 여러 모로 참 잘 지냈다네.
오늘 아침에 수도원 분리 문제에 착수했네. 이 때문에 아마 온종일 바쁠걸세. 내일이면 끈날 것 같네만. (...)
역사와 나막신 공화국에 대해서라면, 내가 여기 와서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지는 않네. 왜냐하면, 난 여기서 나름의 장점을 지닌 수많은 규율과 제도적 장치들을 접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이를 유용하게 쓸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일세.
탁발승들의 제도와 규율을 관찰한 것에 대한 이 마지막 구절은 그야말로 마키아벨리 그 자체, 즉 만사에 자신의 끝없는 호기심을 발휘하는 마키아벨리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점, 좋은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를 논외로 할 때, 그가 이 사절 시기 동안 얻은 것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설교자 문제에 관해서는 실제로 그는 비아냥거리는 어조이긴 하지만 dpt 역사 사실들을 방편으로 삼아 그 축복받은 북풍 신부의 고지식함은 완화하고 피렌체 사람들에게는 그 고귀한 성인의 설교를 통해 위안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려 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잠깐 동안이지만 무례한 농짓거리는 거둔 채 이렇게 썼다. (보건대 신앙이라는 외투 속에 스스로를 감춘 악한들이 얼마나 신뢰를 받고 있는지, 가장이 아니라 진실로 프란체스코 성인이 걸었던 궂은 길을 따르는 선인들의 믿음이 어떠한지를 난 쉽게 간파할 수 있다네.) 하지만 북풍 신부가 난색을 표했고, 이 기묘한 사절께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그의 말로는 자신이 더 이상 피렌체에서 합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세. 그리고 그가 이전에 그곳에서 설교할 당시, 창녀가 대중 앞에 나설 때엔 반드시 황색 베일을 써야 한다는 법이 만들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누이가 보내온 편지로는 청녀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옷을 입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전보다 더 꼬리를 치고 다닌다며 이러한 점들을 매우 못마땅해했다네. 하지만 난 그를 달래려고 이렇게 말했네. 큰 도시에서는 어떤 일도 오래 지속됨이 없이 오늘 다르고 내링 다른 것이 보통이므로, 그 일에 너무 놀라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일세. 그리고는 로마와 아테네의 경우를 보라고 했더니, 그는 비로소 마음이 한층 가라앉아 나에게 거의 언질을 주었다네.) 그러나 다음날 그는 또다시 마음이 흔들렸고, 그의 상급자가 찾아와서는 그가 다른 곳에 가기로 정해졌다는 말을 전했다. 나로서는 이 일이 결국 어떻게 끝났는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 결과를 꼭 알아야 할 만큼 그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수도원 분리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미 얘기했듯이, 그 일은 19일날 시작되어 20일에 끝나 버릴 정도였다. 어쨌든 이 일에서도 마키아벨리 특유의 솜씨는 수도사들의 어지러운 강변들 속에서 어느틈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총회 평의원들을 한 사람씩 따로 만나서는, (그들 모두에게 말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하고 날카로운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전했다). 그는 이 일을 교황이 원한다는 정치적 무기를 내 보였고, 그런데도 이 사안이 수도회 200년 이래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반응이 나오자 마침내는 (인간의 지혜란 자신이 지킬 수도 그렇다고 누구에게 팔 수도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포기할 줄 아는데 있다)는 말까지 내뱉기에 이르렀다.
(소인배들 같으니.)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하며 그 형편없는 탁발승들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추기경과 8인집행위원회로부터 오는 새로운 공한들이 그들 숙고 과정에 보탬이 될 것이었으리라. 일라리오네 신부가 미키아벨리에게 빨리 말에 올라 피렌체로 가서 그 편지들을 받아로라고 권하자, 지금까지 카르피에 있을 만큼 있었던 그로서는 이것이 여기서 벗어나 그를 파견한 사람들을 놀려먹을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던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모데나에 도착하자 22일까지는 피렌체로 들어가라는 신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추기경에게 거침없는 논조로 장문의 보고서를 올렸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신은 (약간 몸이 불편한 관계로) 말을 빨리 달릴 수 없다는 말을 집어넣었다. 그리하여 그는 총독의 말 잘 타는 전령 하나를 대신 보내고는, 8인집행위원회와 추기경과 프란체스코 수도외의 조바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데나에 눌러앉아 귀차르디니를 벗삼아서 며칠을 즐기며 보낸 뒤, 여유작작하게 피렌체로 돌아왔다.
바로 이러한 것이 카르피에서의 임무였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흡사 마키아벨리의 전 생애를 상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가 얻은 것은 단지 좋은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만은 아니었다. 그는 비록 자신에게 그 일을 맡긴 어리석은 사람들의 마음에 쏙 들게 하지는 못했지만, 언제나처럼 쾌활한 얼굴을 잃지 않음으로써 후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아울러 역경의 시기에도 그 유쾌한 편지들을 남김으로써 명예를 얻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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