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4장 (비탄에 잠긴 마키아벨리)
7월 12일, 대사 친구는 주제의 성격 자체는 여전히 늘 보던 것이지만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난 자네와 함께 이 세계를 뜯어고치고 싶네. 전부가 안 된다면 일부라도 말일세. 물론 이는 머릿속으로 하기도 힘든 일이라, 설사 그것이 실현된다고 해도 나는 믿지 못할걸세.) 서두를 이렇게 뗀 그는 열강드리 처한 상황과 그들의 의도에 관해 얘기한 뒤에, 전 서기장에게 (펜으로 평화를 만들어내 보라)고 권유하면서 글을 끝맺었다. 이렇게 해서 두 친구는 7월과 8월 내내 서로 편지를 교환하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머릿속에서 평화 조약 안을 구상하였다.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이러했다. 마음이 선해서가 아니라 의심이나 어떤 술책의 일환이겠지만 어쨌든 계속 중립을 지키고 있는 교황이 프랑스 왕과 연합하고 대신 왕은 밀라노 공국을 반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생각을 가진 베토리는 8월 20일자 편지에서, 먼저 세상 소식으로 이 추방객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준 뒤, 마키아벨리와는 반대의 입장에서 자신의 평화 안을 뒷받침하는 논증을 펼쳐나갔다. 니콜로는 다시 8월 26일자 편지에서 마치 친구를 놀리는 듯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편지를 보고 처음에 그는 논증이 질서가 있고 복잡다단한 데 놀랐으나, 다시금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신이 여우로 본 것을 그는 사자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깜짝 놀라죽을 뻔했고, 그 다음에는 걸음을 멈추고는 덤불 뒤에서 그를 지켜보다가, 결국 말을 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곧 (프랑스 왕을 바보로 여기고 반면 영국 왕은 대단한 인물쯤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범한 그를 책망하는 셈이었다. 또다시 마키아벨리의 판단은 옳았다. 물론 그는 나라가 자신의 군대를 가져야만 강해질 수 있다는 지론으로 주제를 벗어나기도 하고,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공화국에 대해 말했던 것들은 무시하기도 함으로써, 베토리가 투르크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스위스에 대한 환상 속에 바지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였다.
여우의 우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또는 응담 거리가 없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군주 제후들이 백성들의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간의 그 쓸데없는 경쟁을 계속함으로써 연일 새로운 생각 거리를 만들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토리는 이 편지에 답하지 않은 채 몇 달 간이나 소식을 뚝 끊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그를 자극하거나 도발하려는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편지를 쓰지 않았다. 이제 그는 자신의 여가와 생각을 다른 일에다 쏟아붓고 있었다. 그는 결국 자신만의 길, (지금까지 아무도 밟지 않을 길)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지체없이 그쪽으로 나아갔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아마 발렌티노 진영에 사절로 가 있던 당시쯤부터, 짧지만 가끔 생기는 (일 사이사이의 짬 otia inter nogotia)(otium=ozio(짬, 여가, 나태, 무위도식)와 nogotium=negozio(일, 바쁜 행동)는 서로 대립 개념으로, 르네상스 정치철학에서는 각각 명상적, 관조적 생활 vita contemplativa과 활동적, 행동적 생활 vita activa로 대변되는 두 개의 대립적 세계관을 뜻하기도 한다-옮긴이)을 이용하여 인간 행위에 대한 자신의 잊지 못할 경험들을 기술하고 그것을 고대인의 경우와 비교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천재성은 때로는 경험을 통해 또 때로는 직관을 통해, 스스로를 과거사에 깃들인 (역사의 풍미)를 음미하고 그로부터 신과학의 일반적 원리와 규칙들을 이끌어낸 최초의 인물로 만들어갔다. 그의 주장이 기반하는 제일 원리는 인간 본성이란 그 속에 담긴 욕망과 악덕, 약점이나 미덕과 함께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과거의 모든 혁신자들이 주장한 것들이 거의 그랬듯이 수정되어야 할 여지가 있는 이론이라는 점은 인정되지만, 그 자체로서 어떤 진실의 일면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오류를 범한 바로 그 부분조차도 진실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제일 명제가 그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은, 그가 과거사를 재독 삼독하면서 이러한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를 자신의 (오랜 경험)과 비교하여 (역사의 풍미)를 발견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대한 주석 작업에도 힘입은 바 있었다. 이 주석들은 원래 인쇄업자인 니콜로 델라 마냐가 마키아벨리의 아버지 메쎄르 베르나르도에게 주었던 리비우스의 같은 책, 어린 니콜로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일찍부터 보아왔던 바로 그 책의 넓은 여백에 씌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불운에 처한 그는 (시골집으로 물러나 사람의 얼굴을 멀리한 채), 나태와 불행과 필요성의 느낌이 뒤섞인 속에서 그 책을 다시금 뒤적거리게 되었을 것이고, 앞서 써놓은 위에다가 이제는 갖가지 생각으로 가득 찬 자신의 심중을 덧붙여 나갔으리라. 그리하여 그는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10권에 대한 주석의 형식을 빌려 공화국에 대한 노고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비록 첫 발상부터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초지일관 주석의 형태를 유지하였지만 말이다.
이 저술은 여러 해에 걸쳐 띄엄띄엄 진행되어 나갔지만 결코 포기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여가 초기에 느낀 집필 충동 속에서 이미 그 일부를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가 발간자의 열성으로 글에 매진하는 모습을 본다. 고대나 현대의 역사적 사실이 스스로 제시했던 이론, 그러리라 예건했던 진실을 확증하는 새로운 보기가 되었을 때, 저술에 대한 그의 열기와 희열은 더욱 커졌으리라. 그는 자신이 착수한 작업의 위대함과 새로움을 깨닫고 무한한 흥분을 느꼈다. 그리고 (미지의 바다와 땅을 탐색하는) 사람에게 으레 닥치는 위험을 스스로 예견한 그의 마음은 거의 두려움 같은 것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이론들과 사상적 논리성으로 엮여 있는 이 책의 저술에 몰입해 있는 동안, 자신이 접하고 있었던 역시 마찬가지로 모호한 재료로부터 다른 또 하나의 저작이 싹을 틔우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물병처럼 매우 구체적이고도 짜임새 있는 모양에다, 칼처럼 직설적이고도 날카롭다. 그의 마음은 자신의 시대와 나라와 혈통과 신분 때문에 언제나 평시민 국가에 쏠리고 있었고, 이러한 경향은 로마 세게에서도 그가 애호하는 유일한 존재인 로마 공화정의 행적을 좇아 오래도록 키워온 것이었다. 그러나 앞을 내다보는 그의 지성은 이탈리아가 자신의 이러한 마음과는 달리 군주국의 시대로 옮아가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가 군주국에 대해 논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던 셈이다. 바로 그 당시, 그가 리비우스에 대한 (논고)의 집필에서, 자신의 눈을 고대 로마로부터 당대의 이탈리아 도시들로 돌려 (부패한 민족은 설사 자유를 얻는다 해도 그것을 보존하기란 극히 어렵다)라고 말한 장에 다다랐을 무렵, 그는 (그 사지가 모두 부패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무력이나 군대와 같은 비상 수단에 호소하고, 나아가서 스스로를 군주국으로 변신케 하는 일)이었다. 오직 어떤 (신국주)만이 그 썩은 사지를 되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필시 그러한 군주에게서만이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만의 구원자)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10년 전, 발렌티노는 운세와 한 교황의 도움으로 그 일에 거의 성공할 뻔하였다. 보르자 가가 사라진 후, 줄리오 2세는 교회가 이탈리아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지금 교회는 교회의 힘에다가 피렌체국의 힘까지 더한 한 피렌체인의 손에 놓이게 되었다. 그에게는 아직 젊은 나이지만 권력을 쥐고 싶어하는 남동생과 조카가 있으며, 그 자신 역시 (하늘과 운세의 비호)를 비할 바 없이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산탄드레아의 은둔객은 마음속으로 공화국에 관한 앞의 책을 일단 제쳐두고 (군주국에 관한) 책, 즉 (군주론)을 쓸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오직 하나, 비르투만을 제외하고는 (신군주)로서 기대되는 다른 모든 조건들을 다 같춘 것으로 보이는 인물에게 바치려고 작정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자신의 책에서 세습 군주국에 대해서는 휙 지나쳐 버리고 비르투에 의해 얻은 군주국의 경우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좋은 운세 덕분으로 얻은 군주국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발렌티노의 경우에서 또다시 되풀이된 사실이었다. 이탈리아의 운명은 그때마다 이들의 어깨에 달려 있었을 법하며 마키아벨리 자신의 운명 또한 그러하였을 것이다. 이탈리아! 당시로서 그것은 단지 시인에게만 바쳐진 이름이었다. 이를 하나의 정치적 개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인이면서 동시에 정치가인 한 인물이 필요하였다.
마키아벨리가 줄리아노 앞에 펼쳐 보이려 하는 군주의 전범은, 그가 (역사의 풍미)를 맛보고 있다고 볼 때, (칭송될 만하다고 누구나가 생각하는) 신적, 인간적 교의들을 같춘 인물이 아니라 시대 상황에 따라 바람직한 결과를 이룩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이 구원자를 어떤 구원의 난제로 이끌어, 사악함과 싸우고 사악한 자들과 겨루며 찬탈자를 다시 찬탈하는 과업에 착수하였다. 장군은 단지 군사적 측면에서만, 과학자는 단지 과학적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의 이론이 전개되어 나가는 데 이절적인 도덕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를 인도하는 것은 오직 강철 같은 논리뿐이었다. 그가 국가의 승리에 대해 고찰할 때, 그에게 문제되는 것은 오직 국가뿐이며, 종교조차도 국가에 의해 조직되고 또 그 아래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의 과제가 사보나롤라의 경우처럼 사람들의 복음속에 신앙의 승리를 심는 것이라면, 똑같이 냉혹한 논리가 그를 와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이었다. 전쟁이 꼭 필요하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이며, 어떤 군주가 자신의 잔혹함으로 백성들에게 닥칠 더 큰 잔혹함을 막을 수 있다면, 그의 행위는 자비로운 것이다. 무릇 행위란 그 성격이 어떠하든간에 신성한 결과로 이끌어진다면 신성한 법이다. 그 유명한 마지막 권고가 마키아벨리의 책을 불경하고도 잔혹한 교의들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처럼, 결과는 그것을 있게 한 행위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탈리아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온 구원자와 이제 막 만나게 된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됩니다. 이들 외적의 침입으로 고통받던 모든 지방 사람들이 어떤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맞을지, 또 얼마나 복수심에 목말라하면서 굳건한 믿음과 경건함과 눈물로써 그를 대할지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어떤 문이 그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그를 경재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질시의 감정이 그를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탈리아인이라면 그를 경모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야만족의 지배가 방방곡곡에 뿌려대는 그 고약한 냄새란! 그러므로, 부디 대인의 고명한 가문이 정당한 일을 한다는 기백과 희망을 가지고 이 과업을 압장서 맡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대인의 깃발 아래 이 나라가 고격함을 되찾고, 대인의 영도 아래 일찍이 페트라르카가 읊조린 다음과 같은 희망이 실현되도록 이끌어주옵소서.
광포함에 맞선 덕성이
이제 무기를 잡으매, 싸움은 곧 끝나리니.
옛날의 용맹함이
이탈리아 사람들의 가슴속에 아직 살아 있으므로.
꿈의 피륙 위에 다시 짜인 마키아벨리의 새로운 정치 교의들은 이렇게 마지막의 감정적인 호소 속에서 시의 세계로 들어온다. 몽테스키외는 마키아벨 리가 발렌티노라는 우상에 홀딱 빠져 있었다고 말했지만(법의 정신 29권 19장-옮긴이), 사실 (군주론)에서나 그 이전부터나 그가 빠져 있었던 것은 발렌티노가 아니라 자신의 (신군주) 개념이었다. 그가 메디치 가와 보르자 가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그를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이탈리아의 구원이라는 자신의 원대한 꿈을 가로막지는 못했으리라. 물론 그도 인간이기에 스스로도 구원받기를 바랐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꿈속에서 그의 저작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완결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마키아벨 리가 등불 아래서 자신이 간직해 온 에 생각들과 이제 새로이 가지게 된 교의들의 아직은 형제 없는 덩어리로부터 끌을 힘차게 움직여 (군주론)에 담긴 개념들을 조각해 냈던 저녁의 나날들이 있었다. 아마 불운의 깊은 나락에 바진 어느 누구도 그 저녁의 마키아벨리만큼 행복감에 젖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일에 푹 빠져 다른 아무것도 생각지 않았다. 그가 피렌체로 나갈 때는 무슨 보릴이 있거나 책을 구하려는 경우뿐이었다. 베토리에게는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11월 23일,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편지를 보내옴으로써 둘 사이에 다시 편지를 오가게 한 것은 그의 친구 쪽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주저들 모두가 사람들의 악의와 냉담함과 이기심 덕분이라는 것은 그의 운명이었다. 메디치 가는 그를 관직에서 내쫓고 감금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무관심과 궁핍 속에 내팽개쳤으나, 그는 (군주론), 리비우스 논고), 그리고 그 밖에 영원히 기억될 다른 많은 글들이 나온 것은 바로 이 메디치 가 때문이었다. (흔히 말하듯이) (단테가 망명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면 (신곡)은 있을 수 없었을 것처럼, 마키아벨리도 역시 정치로부터 추방되지 않았다면... (그의 저작들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베토리의 덕도 많이 본 셈이었다. 그는 자신이라면 분명히 줄 수 있었을 법한 도움을 주지 않음으로써,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불행 속에서도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였고, 더욱이 그에게 그렇게 할 일없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로 하여금 답장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조소와 탄식 사이에 놓인 최고의 명품들이었다. 그러나 베토리는 무엇보다도 앞서 이미 언급된 자신의 11월 23일자 편지를 통해,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이탈리아 문학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편지를 쓸 기회를 주었고, 나아가서는 그 내용의 윤곽까지도 제시해주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 대사 친구는 언제나처럼 나태하고 할 일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로마 생활이 편안하기는 하지만 아무 쓸모도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마키아벨리는 이에 답한 12월 10일자 편지에서 이번에는 스스로의 생활 모습을 적고 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는 자신이 직접 덫을 놓아 개똥지빠귀를 잡았다. 해돋기 전에 일어나 올가미를 만든 다음, 등에다 한 무더기의 새장들을 걸치고는 마치 (암피트리온의 책을 가지고 항구에서 돌아오는 제타) (이 비유는 15, 6세기에 유행했던 8행시 형식의 노벨라 (제타와 비리아 Gete e Birria)에서 따온 듯하다. 이 이야기는 플라우투스의 (암피트루오 Amphitruo)에 근거하고 있는데, 여기서 암피트리온 Amphitryon은 그의 하인인 제타에게 책을 지워 보내면서 아내인 알쿠메나 Alcumena에게 자신이 곧 돌아간다는 소식을 알리도록 했다. 하지만 몰래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려는 주피터의 계획은 알지 못한채였다. 플라우투스의 작품에 나오는 하인의 이름은 소시아이지만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테렌티우스의 작품 (포르미오 Phormio)에서는 제타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마키아벨 리가 자신을 제타에 비유한 데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볼 것. John M. Najemy, "Machiavelli and Geta:Men of Letters" in Machiavelli and the Discourse of Literature, eds. Albert Ascoli & Victoria Kahn (Ithaca:Cornell Univ. Pr., 1993); Najemy, Between Friends: Discourses of Power and Desire in the Machiavelli-Vettori Letters of 1513-1515 (Princeton: Princeton Univ. Pr., 1993), pp. 221-230-옮긴이)처럼 떠나곤 했던 것이다. 11월은 내내 그렇게 흘러갔다(원문에 대한 나의 새로운 해석에 따르면 이렇게 생각된ㄷ). 하지만 개똥지빠귀의 이동이 끝나자 유감스럽게도 (좀 궂고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소일 거리였던 이 일마저도 함께 끝나고 말았다. 그 뒤의 생활은 이 위대한 작가 그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말로는 내가 도저히 그릴 수 없는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는 아침에 해가 뜨자마자 일어나 요즘 베어내고 있는 내 소유의 숲으로 가네. 그곳에서 두어 시간 머물면서 전날은 얼마나 일을 했는지도 살펴보고 벌목꾼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네. 그 축들이란 자기들끼리든 주변 사람들고든 언제나 무슨 말썽 거리라도 만들어내는 사람들 아닌가. 숲을 나와서는 약수터에 들었다가 내가 새를 잡는 것으로 가지. 나는 책을 한 권씩 끼고 다니는데, 단테나 페트라르카, 아니면 그보다는 조금 아래의 시인들일세. 왜 티불루스나 오비디우스 등속과 같은 사람들 있잖은가. 난 그들의 감미로운 정념과 그들의 사랑을 읽고 느끼지. 그리고 나의 정념과 사랑도 되새겨보지. 한동안은 이러한 달콤한 상념들 속에 잠긴다네. 그 다음엔 길로 나와 술집에 들르지. 그곳에서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말을 나누면서, 그쪽 소식을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온갖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의 잡다한 풍취와 다양한 생각들을 접하게 된다네. 그러다보면 식사할 시간이 오고, 나는 가족들과 함께 이 초라한 시골집과 보잘것없는 땅뙈기에서 나오는 소출로 배를 채운다네. 식사를 한 뒤엔 다시 그 술집으로 가지. 그곳엔 나를 반길 사람들이 있지. 보통은 푸줏간집 한 사람, 방앗간집 한 사람, 그리고 가마 rnq는 일을 하는 사람 둘이 바로 그들이라네. 나는 이들과 아무렇게나 어울려 딱딱 소리를 내며 카드놀이를 하지. 이 와중에 수없이 오가는 말다툼과 욕석들. 그뿐인가. 돈 한 푼을 두고 종종 드잡이 판을 벌이는 바람에 그 고함소리가 멀리 산 카쉬아노에서도 들릴 정도라네. 이 기생충 같은 인간들 틈에 끼어 나는 곰팡내 나는 머리를 씻고 내가 처한 이 불운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려 하지. 운명의 여신은 나를 이처럼 짓밟고 있지만, 그래도 그녀 스스로는 이를 부끄러워하리라 생각하는 것으로 자위하면서 말일세.
저녁이 오면 난 집으로 돌아와 서재로 들어가네. 문 앞에서 온통 흙먼지로 뒤덮인 일상의 옷을 벗고 왕궁과 궁중의 의상으로 갈아입지. 우아하게 성장을 하고는 날 따뜻이 반겨주는 고대인의 옛 궁전으로 들어가, 나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하는 이유이자 오직 나만을 위해 차려진 음식을 맛보면서, 그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던가를 물어본다네. 물론 그들도 친절히 답해 주지. 이 네 시간 동안만은 나에게 아무런 고민도 없다네. 모든 근심 건정을 잊어버린다는 말일세. 쪼들리는 생활도 나아가 주금까지도 나를 두렵게 하지는 못하네. 나 자신이 온통 그 시간 속에 빠져 들어가는 셈이지. 하지만 단테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어떤 것을 듣고 이해하더라도 기억 속에 넣어놓지 않으면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말일세. 그래서 나는 그들과의 이야기에서 배운 바를 일일이 써놓았다가 그것으로 (군주국에 대하여 de Principatibus)란 조그만 책자를 쓰게 되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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