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3장 (비탄에 잠긴 마키아벨리)
서기장이 글 속에서 관직을 잃은 슬픔에 관해 언급한 곳은 몇 안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그만큼 쓰디쓴 맛을 느끼게 한다. 아마 가장 마음에 여운을 남기는 경우는 그가 면직 이후의 시기를 표시하기 위해 적어놓은 간결한 문체의 (모든 것을 잃은 뒤 post res perditas) (이 어구는 1512년 메디치 가의 복귀로 마키아벨 리가 공직에서 해임되어 어쩔 수 없이 시골에 은거하게 된 일련의 사건을 가리킨다. 그는 이 말을 자신의 (피렌체 곤사조직론 Discorso dell'ordinare lo stato di Firenze alle armi) (1506)의 개인 소장 사본에다 써놓았다. 또한 그의 글 (민병대 옹호론 La cagione dell'ordinanza, dove la si truove, ... Post Res Perditas) (1512)에서도 같은 글귀가 보인다-옮긴이)라는 구절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몰락과 불행을 조국인 자유 공화국의 몰락과 불행에 거의 등치시키고 있다. 그가 그토록 충직하게 열과 성을 다하여 국가에 봉사한 대가치고 타격은 너무 컸고 사정은 너무 불공평하였다. 그처럼 항상 바삐 돌아다니기만 하던 사람에게 해임 직후의 빈둥거리는 나날들이란 장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라도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정무궁 집무실에서 온종일을 보내던 그가 집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다보니, 자신이 다욱 작고 옹색하게 느껴졌으리라. 바깥이라고 나가보았자, 비열한 인간들과 안면을 바꾼 사람들로 인해 마음만 더 무거워질 뿐이었다. 한 대는 공화국의 서기장에게 친밀하게 대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그를 외면하거나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단지 그의 불행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그는 이제 겨우 내리막길의 초입에 들어섰을 뿐이었다. 관직을 배앗은 것은 그것만으로 볼대는 다만 새 정부가 자신들에게 좀더 충실하고 고분고분한 사람들을 원한다는 뜻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서기국을 통치에 이용한다는 것은 메디치 가의 오랜 방식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해임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비난이었고 처벌이었으며 복수였던 것이다. 이는 오래지 않아 명백히 드러난다. 11월 10일, 정무위원회는 그에게 일 년 간 피렌체 영토를 벗어나지 말것과 1,000피오리노 금화를 보석금 조로 납부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큰 액수의 돈은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친구 세 사람이 대납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마키아베리의 심장을 또 하나의 비수로 찌르는 격이었다.
그에게 이어서 일어난 일은 비유하자면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사건이었다고 할까. 11월 17일(앞 뒤 시간 간격이 짧은 것 자체가 일을 더 잔인하게 만들었다), 정무위원회는 그가 14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일했던 정무궁에 12개월 간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곧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를 그곳에 데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면서 말이다! 당시 그는 민병대에 봉급을 주기 위해 큰 액수의 돈을 만졌기 때문에 회계 관계를 설명코자 정무궁을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출입이 금지된 문턱을 넘게 해주십사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한때 자신의 서기보였지만 이제는 마치 이단 신문관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돈 계산을 한다는 것이 시인의 마음을 지닌 그로서는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자리에 메디치 가의 옛 서기장이자 지금은 그들을 위해 정무위원회를 염탐하고 있는 니콜로 미켈로치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의 의심에 찬 얼굴과 피하는 듯한 목소리를 대하는 것도 모두가 고통스러웠다. 이러한 일들을 12월 10일까지 계속되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아르노 강 너머의 초라한 집에 웅크리고 있는 니콜로와 그의 가족들에게는 더없이 슬픈 날이었다. 그의 식탁 위에는 산탄드레아의 맛있는 시골 빵과 가능성 없는 희망이라는 버터가 놓여 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메디치파와 유력 시민들의 원한을 가라앉힐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을 법하다. 그의 식탁에 오른 것은 소데리니를 쫓아내되 자신은 폭군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보냈던 메디치 추기경을 향한 그 불 같은 교황의 분노와, 또다시 피렌체 정부를 바꿔놓겠다는 그의 엄포와, 신정부에 대한 의심으로 분통을 터뜨리던 일부 시민들의 불만이라는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특별히 마키아벨리를 살찌울 만한 것은 없었다.
정권에 불만을 가진 인물들 중에는 아고스티노 카포니와 피에트로 파올로 보스콜리가 있었다. 둘 중 하나가 18명 내지 20명의 명단이 올라 있는 문서 하나를 잃어버렸고, 8인감찰위원회가 이를 입수하게 되었다. 명단에 나온 사람들을 모두 의심스럽게 본 그들은 더 조사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즉시 체포된 카포니와 보스콜리의 입에서 그들이 추기경을, 또는 딴 사람에 의하면 줄리아노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자백이 흘러나왔다. 이는 당시로서는 흔하게 보던, 칼보다는 펜을 가지고 하는 평범한 모의 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이 경우, 모의자들은 고전에서 그러한 영감을 얻긴 했지만 그 생각 자체가 매우 솔직담백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 해를 끼칠 만한 성질의 것은 못 되었다. 점잖고 학식있는 인물로서 사보나롤라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피에트로파올로의 마음속에서는 브루투스와 그리스도가 갈등하고 있었다. 모의자들은 이 명단에다 자신들이 아는 친구나 또는 반메디치적이라 알려진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하지만 이들 중 그들이 만난 사람은 니콜로 발로리와 조반니 폴키뿐이었는데, 둘은 그들을 차갑게 대했다. 그러므로 이 모의는 그럴 듯한 기반도 없고 실제 진행되지도 못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8인감찰위원회는 주저 없이 명단에 적힌 사람 모두를 체포하였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7번재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
경찰이 그를 붙잡으로 갔지만, 그는 집에 없었다. 아직도 그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정무궁 내의 친구 누군가가 미리 알려준 덕분에 스스로 몸을 숨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딴 곳에 가 있었을 것이라는 편이 더 그럴 듯하다. 체포에 실패하자, 그들은 (메쎄르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의 아들 니콜로가 어디 있는지 알거나 그를 숨겨주고 있는 사람, 혹은 누가 그를 숨겨주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반란죄로 몰려 자신의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으려면 한 시간 안에 그를 고발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는 즉시 출두하였고, 그 자리에서 투옥되어 다른 혐의자들과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 보스콜리와 약간 아는 사이이며 발로리 및 폴키와 친구라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지 못했다. 혹여 있다면, 그들이 최근 몇 달 사이 그에게 가한 위해를 두고 그가 메디치 가를 조롱 조로 입에 담은 적이 있다는 것 정도엿다. 하지만 그가 하지도 않은 그 일조차도, 체포되어 고문 끝에 나온 다른 사람들의 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따. 푸네 fune(밧줄로 죄인의 손을 뒤로 묶어 매달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는 형벌-옮긴이)는 네 번이면 보통 심신이 기를 잃기에 충분한 횟수였다. 이것으로 모자랄 대는, 사지를 부러뜨리고 살을 찢는 고문이 되다른다. 니콜로는 6번 매달렸다. 그는 이를 (스스로도 대견해할 만한) 기백과 강인함으로 이겨내었다.
피렌체의 서기장은 감옥에 갇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면서, 비로소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부지불식간에 이 어두운 구멍 속에 빠져버린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자신이 처한 위치를 인식하려고 애썼다. 팔다리가 고문으로 찢겨진 데다 수갑과 족쇄로 꼼짝달싹 못하게 되어 있는 자신의 처지를 보며 그의 마음은 고통으로 가들 찼고, 이는 다시 육체적 고통을 가중시켯다. 그는 자신과 가족의 장래를 염려했다. 그는 스스로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있었으며, 그처럼 자신에게 가당찮은 불운에 의해 굴욕을 겪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했다. 그로서는 사태가 나쁘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예견할 수 없었다. 그는 새 정부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국정을 다스리는 데 매우 엄격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고문을 꿋꿋하게 잘 이겨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을 엉뚱하게 걸고 넘어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동생인 토토가 사건 즉시 로마에다 전령을 보내 (정부의 인색함 때문에 그가 사절 시절 도무지 누리지 못했던 사치) 교황청에 대사로 가 있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사건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도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베토리가 (자신만을 아는) 사람이고, 설사 도와줄 마음이 별로 있다고 해도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2월 23일 동틀 무렵, 그는 장송곡 소리에 잠을 깼다. 카포니와 보스콜 리가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다. 서기장의 신앙심은 별로 두터운 편이 못 되었다. 혹시 쓸데없는 경거망동으로 자신을 파멸시켜 버린 그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리스도교적 동정심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별안간,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쳤다. 지금까지 그는 사람들이 줄리아노의 인간성, 점잖음, 관대함을 한껏 칭찬하는 소리를 들어왔다. 그는 재능 있는 사람들, 그리고 시인들과 벗하는 대단히 품위 있는 사람이며, 뮤즈의 신들과도 친분이 있다고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편지를 한번 써보기로 작정했다. 그는 이에 대한 허락을 받고는 필요한 물건들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성격상 소네트를 쓰는 사람이지 비탄 조의 탄원서를 쓸만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웃음으로 지키고, 숨을 때도 언제나 웃음 뒤에 숨은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사지의 고통과 죽음의 면전에서도 그는 자신의 그 유명한 조소를 되찾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썼다.
저는, 줄리아노 님이여, 양다리엔 족쇄를 하고
어깻죽지엔 여섯 번을 궁중에 매달린 상처가 있습니다.
다른 불행은 아예 말씀 올리지 않겠습니다.
시인이란 으레 이런 식으로 대접받으니까요.
부서진 벽에서는 이가 득실댑니다.
하도 크고 살져서 흡사 나방 같지요.
그런 고약한 냄새는 아직까지 없었을 겁니다. 롱세스발리에스에서도
혹은 사르데냐의 수풀 속에서도.
저의 이 멋진 방에서만큼은 말입니다.
땅에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를 하며,
제우스와 몬지벨로(시칠리아의 에트나 화산-옮긴이)가 내려치듯이.
수형자 하나가 사슬을 차면, 다른 하나는 사슬을 풀고,
열쇠와 자물통을 시끄럽게 찌그럭대면서.
그리고 공중에 높이 매달린 또 누군가의 비명소리!
저를 제일 슬프게 하는 건 말이죠.
잠이 들어 새벽이 어슴푸레 다가올 때,
들리기 시작하는 이런 소리. (너를 위해 기도하노라.)
원컨데 제발 그런 목소리를 듣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자비를 저에게 베푸시어.
그리고, 대인이시여,
이제는 그만 이 끔찍한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한 수의 시는 다른 시를 부르는 법. 그는 소네트 하나를 더 지어 앞의 것과 함께 보냈다. 혹은 며칠 뒤에 보낸 것 같기도 한다. 여기서 그는 마치 뮤즈가 감옥으로 자신을 찾아와 그렇게 신세 한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그가 이름을 대자, 뮤즈는 그를 꾸짖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콜로나니! 당신은 다초야.
다리며 발꿈치며 모두 꼼짝달싹 못하고
광인처럼 사슬로 채워져 있는 걸 보니.
안드레아 다치(위의 시에 나오는 다초가 지칭하는 실제 인물-옮긴이)는 제1서기장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의 학생으로, 당시 정체가 심한 편이던 피렌체 문필계란 바다에서 어떻게든 떠 있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이 농담은 재치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재기가 넘치는 줄리아노에게 틀림없이 즐거움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3월 7일 재판이 끝났다. 발로리와 폴키는 2년 간 볼테라의 지하 감옥에 갇히는 벌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단기간의 추방이나 벌과금의 형을 받았다. 니콜로는 다시 숨쉴 수가 있었다. 그는 자유를 되사기 위한 돈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풀려난 것이 오직 소네트 덕분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사실 그는 뒤에 가서 자신의 방면이 줄리아노와 파올로 베토리 덕이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었다. 줄리아노에게 소네트와 그의 시인됨을 잘 말해 주어 그로 하여금 더 심한 벌을 받지 않도록 해준 사람이 바로 파울로였을 것이다.
한편, 2월 21일 줄리오 2세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카포니와 보스콜리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인 22일에 메디치 추기경은 로마를 향해 떠났다. 3월 6일 교황 선출 회의에 들어갔던 그는 11월 레오네 10세라는 이름의 교황이 되어 나왔다. 그 소식은 정말 놀랍게도 바로 그날 안으로 피렌체에 전해졌고, 이제 모든 사람들이 메디치파로 변했다. 그들은 각각 동료 시민으로서 씀씀이가 후한 교황으로부터 공사 양면으로 기대할 만한 명예와 이익을 떠올리고 있었다. 피렌체는 광란의 상태에 빠졌다. 광장에서, 거리에서, 가가호호 문 앞에서, 닷새 동안 쉬지 않고 축제의 화톳불이 타올랐으며, 태울 만한 땔나무나 나뭇단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마루판이나 지붕의 나무 판자, 나무 통, 목가구까지 태웠다. 흡사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 것 같았다. 때는 사순절(참회의 상징으로 머리에 재를 뿌리는 성회례를 시작으로 부활절 전야에 이르는 40일 간을 말함. 황야의 그리스도를 기억한다는 뜻에서 단식과 참회를 함-옮긴이) 기간이었으나, 사람들은 마치 사육제라도 되는 양 가장행렬용 마차들을 만들어 매일 저녁 메디치 가 건물 앞에서 그것을 하나하나 불태웠다. 평화의 여신을 모신 마지막 남은 마차 한 대는 새 교황 아래서는 전쟁이 끝난다는 뜻에서 불태우지 않았다. 감옥 문이 열렸고, 모의죄로 형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벌과 금과 잔여 형기 모두가 면제되어 방면되었다. 곧이어, 소데리니까지도 사면되었다.
그래서 (이 도시 전체가 환희의 도가니에 빠진 가운데), 마키아벨리는 그 악취 나는 감옥에서 풀려나 이미 봄의 향내가 풍기는 피렌체의 감미로운 미풍을 맛볼 수가 있었다. 그는 마치 오랜 중병에서 회복되어 다시 생명을 얻은 기분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도망쳐 나오 삶에 대한 새로운 욕구를 느낀 것이다. 2일 간을 창고에 묶여 있던 후에 다시 맛보는 자유란 더 기쁜 것이었다. 심연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어가다가 그 충격에서 겨우 벗어난 그는 이제 그 비탈을 다시 기어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 (메디치 군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여들여 그들에게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의심을 총애로 바꾸어놓아야만 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기 작가들과 문학사가들의 견해화는 반대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축복받은 영혼들에 대한 찬양 Canto degli Spiriti beati)의 저술 시기를 바로 이 당시로 비정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앞서 언급했던 평화 여신의 개선을 노래학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시를 쓰려고 했더는 것은 하등 놀랄 일이 못 된다. 투옥중에도 풍자 조의 시구들을 읊었던 그가 아니던가. 그것은 사육제의 노래라는 이름을 붙임직한 것들 중에서 사육제적 분위기와는 가장 거리가 먼 작품이며, 사실 종교적인 냄새까지 풍긴다. 여기서 그는 전임 교황의 통치기 동안 그리스도교 신앙을 피로 물들였던 긴 전쟁을 한탄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과오를 범한 사람들에게 보여주라
우리 주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롭게 삶으로써.
그는 또한 신의 증오와 분노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주께서 당신의 왕국을 보시니
점점 사그라드는구나. 당신의 양떼까지도.
새 목자가 잘 인도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를 (새 목자)로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다른 수단도 강구하고자 했다. 그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쓴 3월 13일자 편지에서, 베토리가 (하지도 않았던) 일을 들먹이며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한 다음, 교황의 시종이 되고 싶어하는 동생 토토를 추천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가능하다면 나를 교황 성하의 기억 속에 넣어두어 당신께서든 당신의 가족들이든 나를 쓰고자 생각하도록 해주게나. 그리 된다면 나는 기필코 자네에게 명예가 되고 나에게도 이익이 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네.) 그러나 베토리는 자신이 마키아벨리의 일을 추기경에게 말씀 올리기 위해 교황 선출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중 피사 원병에 참가하게 되는 바람에, 막상 그가 풀려나왔을 때는 알지 못했다고 변명하면서, (이전에 닥쳤던 다른 불운들도 참아내었던 것처럼, 이번의 박해도 오히려 기쁜 마음르로 털어내버리라)고 위로하고 (언제나 낙담만 있는 것은 아닐 거라)며 희망을 가지라는 듣기 좋은 말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단지 말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따뜻함에 마키아벨리는 기운을 차렸고 다시 희망을 되살리게 되었다. 그는 3월 18일 친구에게 답장을 쓰는데, 여기서 그의 마음과 그의 펜은 최근 자신을 덮쳤던 사건들로 되돌아간다. (운명에 감연히 맞서는 일에 대해서라면, 난 나 자신의 불운으로부터 자네가 무언가 즐거움을 얻길 바라겠네. 나는 그러한 불운을 꽤 잘 이겨냈기 때문에, 나 스스로에 대해 기쁘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놈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일세. 그리고 만약 새로운 주인께서 내가 여기 이대로 있지 않도록 해주신다면, 나는 분부를 기꺼이 받들어 당신께 기쁜을 주는 방향으로 노력할 수 있다고 확신하네. 만약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난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만 하겠지. 원래가 빈한하게 태어나서 즐거움보다는 궁핍을 먼저 알게 되었던 나니가 말일세.) 이러한 말을 여기에 옮기는 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를 대하는 독자들 역시 바로 이 말 때문에 그를 반드시 더 좋아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렇듯 보편적인 기쁨을 느긋하게 맛보면서, 꿈꾸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생의 나머지를 즐기겠다)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삶에 대한 그의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 그를 더 좋아하게 될 것이다.
이 꿈 저 꿈 속에서 대사 친구가 교황에게서 얻어다줄 도움을 기다리는 한편, 그는 자신이 직접 줄리아노에게 스스로를 알리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산탄드레아에서 잡은(사냥 시즌의 마지막 무렵에!) 개똥지빠귀를 새로 지은 소네트 한 수와 함께 그에게 보낸 것도 아마 바로 이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통상적인 경우와는 달리, 선물 때문에 소네트를 지은 것이 아니라 소네트 때문에 선물을 한 것이었다.
줄리아노 님, 여기 몇 마리 개똥지바귀를 보냅니다.
이 선물이 귀하고 좋아서가 아니라
가엾은 마키아벨리를 잠시라도
대인께 생각나도록 하기 위해.
그는 계속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신이 이 새들을 보내는 것은, 만일 그의 주변에 남을 (깨물고) 중상모략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깨물게) 하여 더 이상 남을 (깨물지) 못하다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새들이 보잘것없는 크기라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저 역시 보잘것없지요. 그들도 알다시피.
하지만 저를 멋있게 한 입 가득 베어먹었죠.
줄리아노가 그에게 호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맙다는 말이나마 전해주었는지 어떤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호의의 샘, 아니 아리오스토의 풍자에 나오는 호의의 우물은 로마에 있었으나, 그곳에는 아이의 대부에다가, 스스로 친구라고 말하고 그러한 샘을 두드릴 만한 최상의 위치에 있던 한 인물, 프란체스코 베토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엾은 마키아벨리)에게 돌아갈 물은 없었던 것이다. 피렌체인 교황의 귀를 열게 하고 그의 호의를 받아내는 데 피렌체인들의 대사 이상 더 적당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베토리는 3월 30일자 답장에서, 자신은 별로 교황의 총애를 받고 있지 못하며, 단지 명목적이고도 의례적인 일에 불과한 토토에 대한 부탁조차도 확답하기 힘든 지경이라고 썼다. 물론 그가 실제로 마키아벨리를 위하여 이러저러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도저히 친구에게는 그대로 전하기 힘든 대답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성품으로 볼 때, 교황의 나쁜 성질을 보았거나 그러리라고 짐작하면서 아예 그토록 골치 아픈 일에는 뛰어들려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편지는 그렇지 않아도 의기소침한 니콜로를 더욱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고, 마지막 남은 한 줄기 희망마저도 빼앗아가 버렸다. 그는 베토리에 대한 답장에서, 그가 전해 준 쓰디쓴 소식에서 느껴지는 대로 무언가 경계하고 무언가 속 시원히 털어놓지 않는 답답함이 그를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괴롭고 당황스럽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나 토토의 교황 시종 건에 대해서도 더 이상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 그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하고 있지 않네. 그리고 만약 토토가 시종 명단에 오를 수 없다면, 되는 대로 그냥 놔두게나.)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분명히 말하건대, 내가 부탁한 이 모든 일 때문에 자네가 조금이라도 불편해하지 말기 바라네. 만약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자네에게 화내는 일은 없을 것이네.) 물론 그는 그만한 일로 화낼 사람은 아니었다! 이 편지를 베토리의 답장과 비교해 볼 때, 마키아벨리의 사람됨이 그보다 얼마나 더 크게 보이는가!
그러나, 비록 그가 그토록 희망에 부풀어 시작한 친구와의 서신 교환에서 아무런 실질적 이익도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와 더불어 세상사를 논하는 재미였다. 하지만 이 재미도 스스로가 기대했던 것과는 항상 반대로 움직이는 듯한 사건들 때문에 점점 시들해져 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지금가지 자네의 머리를 망상으로 가득 채우는 일만 한 셈일세. 어쩔 수 없었던 것이, 나의 운명은 비단이나 양모 짜는 기술에 대해서는 아무 할 말이 없고 잇속을 남기거나 밑지는 일에도 문외한이니, 정치에 대해서밖에 더 얘기할 수 있었겠나. 아예 입을 닫고 있든가 이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든가를 내 자신부터 결정해야겠네.) 그는 편지 말미에다 다음과 같이 씁쓸한 서명을 남겼다. (전 서기장 니콜로 마키아벨리.)
그가 베토리에게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면, 피렌체식의 걸쭉한 농담이나 서로 아는 친구들에 대한 재미있는 주변사를 전하곤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이 농담 조의 말 중간에 페트라르카의 시구를 불쑥 들이밀고 있다.
때로 내가 웃고 노래한다 해도
그건 단지 이렇게 하는 것이
내 괴로운 눈물을 감출 수 있기 때문이지.
이렇게 그의 웃는 얼굴 뒤에는 슬프고 불행한 얼굴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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