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1장 (2/2)
가는 길에 귀환중인 대사 (그는 절친한 관계였던 알레싼드로 나시였다)를 만났던 마키아벨리는 7월7일 리룡에 도착했고, 이틀 뒤에 다시 길을 떠나 17일 궁정이 있던 블로아에 닿았다. 로베르테는 그렇지 않아도 피렌체에 전령을 보낼까 하고 생각중이었는데, 마침 때 맞춰 잘 왔다고 일러주었다. 왕은 자신이 로마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와중에 대사까지 소환된 데다, 공화국이 교황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휘하를 떠나 교황의 명으로 제노바를 급습하려는 마르칸토니오 콜론나에게 길을 열어주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피렌체의 의도로 의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피렌체로서도 이 일들에 관해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왕은 도착 직후 그를 접견한 자리에서 거두절미하고 대뜸 앞의 사실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만일 교황이 자신을 괴롭힌다면 공화국이 (지체없이)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밝히라고 요구하였다. 사절은 이에 피렌체인들과 왕 사이에는 우호 조약이 맺어져 있으며, 이를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였으나, 이 정도로는 왕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왕이 대답하기를, 물론 자신은 이를 확신하고 있으나, 그 이상의 보장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정부에다 이 문제에 관해 즉시 편지를 쓰라고 명하였다. 이를 로베르테에게 주어서 왕의 전령 편으로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시키는 대로하였다. 그는 피렌체인들이 어떤 답을 줄 것인지를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어쨌든 회답을 기다리며 궁내의 귀족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어보았다. 모두가 교황에 대한 비난 일색이었다. (복종의 관계를 거두어들이고 즉시 공의회를 개최하라. 그리고 그로부터 교속 양권을 빼앗아버려라. 그래도 이 정도면 후하게 대접하는 셈이다.) 그러나 궁내에는 교황 사절 역시 주재하고 있었는데, (그는 매우 분별이 있고 정치에도 정통한, 정말로 괜찮은 인물이었다.) 그는 마키아벨리와 만난 자리에서 (어떻게 사태가 갑자기 이토록 험하게 돌아가게 되었는지 경악하면서) 침울해하였다. 궁에는 또 조반니 지롤라미라는 소데리니 추기경의 첩자도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매일같이 자기 상전의 말을 전해 주었다. 마키아벨리는 곧 그와 힘을 합쳐 협상에 착수하였다. 이탈리아와 피렌체는 물론이고 추기경 자신의 사익에도 하등 좋은 징조가 못되는 이 일련 움직임에 피렌체가 조정자이자 중재자로서 개입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8월 8일, 왕이 사냥을 나간 곳 가까이까지 말을 타고 나간 피렌체의 서기장과 로베르테는 약 3레가(1lega는 약 3migli에 해당함-옮긴이)의 거리를 가는 동안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모든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에다 그 내용의 핵심을 추려 보고하였다. (당신네 정부는 만일 교황과 왕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양단간에 한쪽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 것이오.) 이는 물론 위험이 뒤따르는 일이기 때문에, (무언가 보상이 없다면 그러한 위험에 뛰어들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하면서, 로베르테는 우르비노 공국 정도라면 피렌체인들이 좋아하겠느냐고 물었다. 마키아벨리는 슬쩍 답을 피했으나, 정무위원회에다는 이제 루카에 관해 한번 생각해 볼 시점이 아니냐고 제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내 교황과의 전쟁에 (내재된 모든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프랑스에 초래할 위험들을 주시시키려고 애썼다. (만약 혼자서 전쟁을 치른다면, 그것이 쉽게 끝나지 않고 질질 끌 것이라는 점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와 힘을 합친다면, 이탈리아의 일부는 그 동맹국에 떼 주어야 할 것이고, 결국은 그 나라와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될 터인데, 이는 교황과의 싸움보다 훨씬 위험할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로베르테를 설득하였고, 이 때문에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줄 만 알았던 프랑스인들의 마음도 바꿀 수가 있구나 하고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을 뻔하였다. (지체 있는 이탈리아 사람 몇 명만이라도 여기서 프랑스인들의 머릿속에 이러한 생각들을 심어주고자 노력한다면 그들을 설득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이탈리아인은 프랑스에 없었고, 이탈리아에서도 아마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동안 사태는 나름의 필연적인 행로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왕은 자신에 대한 지지를 명확히 밝히라고 압박을 가했지만, 피렌체인들은 조약의 명문 규정은 언제나 지키겠지만 그를 돕겠다는 어떤 명확한 언질도 줄 수 없다고 버티었다. 마키아벨리가 이 대답을 왕에게 전하자, (그는 매우 만족스러워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마키아벨리를 국무회의의 장소로 부르더니, 만일 교황이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악령의 사주를 받아) 제노바에 어떤 식으로든 해를 가한다면 피렌체 공화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쇼몽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그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피렌체는 곧 줄리오의 분노를 사 그의 군대를 바로 끌어들이는 상황에 처하고 말 것이라고 대답하자, 국무회의의 제후들은 (거의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치기를, 왕이 이탈리아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해 준비중이므로 그것은 단지 며칠 정도만 공격을 막아내는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역시 마키아벨리는 정부가 무슨 대답을 내놓을 것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어쨌든 왕의 요구를 10인위원회에 알리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했고, 다시 이렇게 끝을 맺었다. (이들이 어떻게든 우리를 이 전쟁에 끌어들이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숙고할 점은(...) 질 것 같은 속에서 어떻게 승리를 이끌어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며칠이 지나가고 사절의 부지런한 보고는 계속되었지만, 사태는 변하지 않았다. 왕은 교황과의 전쟁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쪽으로 갔다. 그의 말이다. (당신은 짐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짐은 교황에 피배하고 싶지 않다.) 그는 다가오는 겨울 내내 사태를 관망하면서, 그 동안 줄리오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공의회를 소집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반면 교황은 군대를 끌어모으면서, 페라라를 공격하고 조약을 통해 모데나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교황이 고용한 스위스 용병대는 롬바르디아로 가는 길목마다에서 저지당해 패주하게 되고, 프랑스 궁정에서는 춘계 대공세를 두고 (사실 그건 아예 전쟁이 아니라 로마로 소풍 나가는 격이 될 것)이라며 유쾌해했다. 마키아벨리에 의하면, (이 사제들은 이 세상에서 쓴맛을 좀 봐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 발전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사제들의 희망은 저 세상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 즈음 프랑스에서는 사람들이 (코클리쉬 Coquluche)(백일해의 일종-옮긴이)라고 부르던 유행성 독감이 온통 유행가고 있었고, 마키아벨리도 이로 인해 괴로움을 겪었다. 24일, 그는 변명 조로 다음과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기침 때문에 5일 동안 아무하고도 만나지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기침이 멈추고 난 뒤에도 (그놈이 제 뱃속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바람에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는 처집니다.) 더욱이 그는 언제나처럼 돈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불만스러워하였다. 그는(제가 말을 팔아버리고 걸어서 집에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이라고 썼던 며칠 전의 펼지를 상기시키며, 10인위원회에 재차 송금을 요청하였다. 몸이 아프자 그는 귀국하여 아내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에 젖어들었다. 지금은 잔느라는 여인이 빈 곳을 어느 정도 메워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도 얼마 후에는 심드렁하게 대하게 될 터였다. 그가 귀국할 날은 그리 멀리 않은 듯했고, 로베르토 아차이우올 리가 신임 대사로 선임되어 발걸음은 느리지만 이미 이쪽으로 길을 잡은 상태였다. 파란체스코 베토리는 그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로베르토에게 자네를 곧 돌려보내라고 부탁했네, 그래야 그는 떠나더라도 대신 자세를 보게 될 테니까 말일세(...) 필리포(카사베키아)와 나는 매일같이 자네를 학수고대하고 있네) 프란체스코는 독일 사절 이후 마키아벨리에게 보내는 편지에 세레명만으로 서명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기꺼이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가 어는 아이의 대부였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아마 1510년초에 태여났다가 1511년 2월에 죽었던 아이였던 것 같다. 마키아벨리의 아이들이 누구누구인지, 그들의 대부는 또 누구인지를 어떻게 일일이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동안 아이들과 아내는 비교적 잘 지내고 있었던 편이었다. 그가 서기국에다가 왜 가족의 근황을 그렇게 전해주지 않느냐고 불평 조로 말하자, 아드리아니가 나서서 짤막하면서도 익살맞게 말을 받았다. (자네 아내는 여기서 살고 있고, 아이들은 제 발로 서 있으며, 집에 연기가 나는 일도 없지만, 페르쿠씨노의 포도 작황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 정무위원회에다 10인위원회와 9인관제위원회의 서기장이자 가장 가톨릭에 충실한 왕에게 파견된 사절이었던 그이지만, 이제는 정치.군사 문제에 대한 생각 외에 산탄드레아의 얼마된지 않는 농토까지도 신경을 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니! 수확과 나쁜 날씨와 자신 소유 농토 내의 농부들이나 나무꾼들이 겪는 끝날 줄 모르는 불운들이 때로는 그를 성가시게 만들었고, 때로는 기쁘게도 했으며, 또 때로는 사무실 동료들에 대한 그의 불평 속에서 은연중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나무꾼과 농부들이라니! 지금 그는 프랑스 궁정에 있으며, 마치 커다란 청동제 화병 두 개 사이게 끼인 도자기 병 같은 형국에 있던 자신의 공화국을 어려움에서 건져내야 하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 사절 임무를 토해서였다. 왕과 같이 백일해에 걸려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로베르테를 방문한 그는 분별과 논지를 갖춘 말로 그와 아야기를 나누었다. 마키아벨리의 말인즉, 만일 전쟁이 계속 제 가리 길로 간다면, 왕은 피렌체를 (크게 존중해 주어야(하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의 도움없이 자력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커다란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렌체에다 떠맡기는 요구들과 계획들을 충분히 숙고하고 논의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주장에 공감하는 듯했으며, 그래서 그들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문제는 쇼몽이었다. 그에게는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이 곁에 없었던 데다가 이탈리아 전쟁의 짐을 온통 혼자서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반드시 원군이 있어야만 한다고 고집하였다. 그러자 마키아벨리는 다시 국무회의로 돌아와 그 (제안들)을 장시간 논하였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앗다. 피렌체인들은 조약을 지킬 태세가 되어 있다. 하지만 군대를 보내라고 요구함으로써 주위의 적에 스스로를 무방비 상태로 내맡기도록 만드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교황을 막는데는 피렌체가 군대를 도시 내에 유지하고 있는 편이 (다른 곳으로 내보내는 편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다. 국무회의는 서기장의 말을 신중히 경청한 뒤, 그의 논지가 옳다고 찬사를 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는 결국 그들 모두를 설복시킨 것이다.
마키아벨리도 프랑스인들을 설복시키는 데에는 줄리오의 호언장담도 한몫을 하였다. 당시 그는 지나치게 친프랑스적인 피렌체 정부를 무너뜨려 버리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성미 고약한 교황은, 볼로냐로 가는 길에 몬테피아스코네에서 그를 만나 공화국이 교회와 왕 사이의 협상을 중재할 의사가 있음을 알리고 전쟁으로 기우는 쪽에 평화를 권고하려던 피렌체의 사절들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파문에 처하겠다고 위협했으며, 피렌체 영토를 유린하고 나아가 더 이상의 일도 불사하겠다고 으르렁거렸다. 운수 사납게도 교화의 눈밖에 난 사절들은 도매금으로 넘겨졌다. 피렌체와 똑같은 이유로 파견되었던 사보야 공국의 사절 하나나 투옥과 고문의 괴로움을 겪었다. 이보다 조금 앞서 오스티아에서는 페라라의 사절이 바다에 던져버리겠다는 위협을 받았는데, 그는 다름이 아니라 신이 내린 오를란도 시인(아리오스토를 말함 - 옮긴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성미 괄괄한 교황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가운데, (이탈리아를 프랑스인들의 굴레로부터, 그들의 손아귀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언명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이 말을 아무런 비평없이 기록하였다. 사실 그는 뒤에 (야만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유명한 글을 쓰게 될 것이었다.((군주론) 26장 참조 - 옮긴이). 빌라리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일찍이 발렌티노는 그렇게 칭찬했으면서도 왜 위엄 있는 줄리오에게는 끌리지 않았는지 궁금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황은 피렌체의 자유를 파괴했을 뿐 아니라 마키아벨리에게 오래도록 불행을 겪게 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앞서 말한 촉구의 글을 포함하여 자신의 가장 빛나는 저술들을 쓴 것도 바로 그러한 불행의 시기 동안이었다. 그 이전에도 마키아벨리는 줄리오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많다. 첫째, 분노와 충동이 자신의 군주상에 적합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물론, 자신이 믿는 또 하나의 신앙인 국가마저도 타락시켜 온 사제들의 지배를 못마땅했기 때문이며, 끝으로 그는 한 사람의 피렌체인이자 이탈리아인로서 교회의 세속 권력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야만족을 쫓아내려는 그 유명한 함성도 줄리오의 입을 거치면 무언가 이상하게 들릴 법했다. 사실 그 스스로가 이탈리아에 그들이 얼마나 많이 불러들였던가, 마키아벨리에게 그는 정말 (이탈리아의 우환을 매개하는 숙명적 존재) 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가 쇼몽에게로 간 왕의 편지에 그 자신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제시했던 (제안들)과 부합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을 알고 로베르테에게 (사태를 더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적극적 행동으로 교황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촉구한 것은, 결코 스스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프랑스인들 좋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뒤에 10인위원회에다 이렇게 썼다. (그는 자신들도 교황에게 한번 호된 맛을 보여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웃음과 함께 이 말을 하면서 제 어깨를 두드렸는데, 마치 곧 그렇게 할 거라는 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임무는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신임대사에게 보내는 본국의 편지가 9월초 궁정과 옮겨간 투르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10인위원회는 평소 서기장이 보여준 민첩성과 열성에 물들어서 신임대사 역시 그곳에 도착했거나 곧 도착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8월 31일이 되어서도 여전히 리용에서 어기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사절은 하는 수 없이 계속 그 앞으로 오는 편지들을 개봉하여 회답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9월 중순에야 겨우 그곳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에게 일을 인계하기 위해 며칠 더 지체하였다. 우리는 그가 정확히 언제 투르를 떠났는지, 또 이탈리아로 오는길에 언제 리용을 떠났는지 잘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가 피렌체에 닿은 것이 10월 19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 임무야말로 단순히 끝없는 마상 여행 정도가 아니라 마키아벨리 자신이 무언가 자신있게 말할 거리가 잇는 그러한 성격의 일이었다. 마치 아리오스토가 당시 스스로 겪은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던 것처럼
그리고는 그것을 나를 시인 마부로 만들어버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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