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8장 두 번째 프랑스 사절 시기. 첫 (십년기 ) 민병대 (1/2)
전쟁은 멀리 나폴리 왕국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프랑스와 행로를 같이하고 잇던 피렌체인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에 사자로 가 있는 동안 계속해서 전쟁 소식을 전해 달라는 닦달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그 당시에는 전투가 없다가 그가 떠난 직후인 12월 28일, 프랑스 군은 가릴리라노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에스파냐 군의 잘 닦인 군기와 보병대의 용맹성, 그리고 운과 재주를 겸비한 지휘관 콘살보 덕분이었다. 패전군은 설상가상으로 겨울의 매서운 날씨와 싸워야만 했다. 피에로 데 메디치 역시 바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싸우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물이 불어난 강을 건너다 익사했는데, 이는 시종 멍청하고도 불행한 삶을 살았던 그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프랑스 군의 궤멸로 인한 실망과 불안이 더 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피렌체의 평시민 정부는 피에로의 이 같은 죽음에 축하라도 보내야 할 판이었다. 나폴리 왕국 내의 기반을 모두 잃어버리고 에스파냐 군에 대패한 데다가, 스위스 막시밀리안의 의중은 오리무중인 상태에서, 루이 왕은 장차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지 에도 너무 바빠 동맹국을 돌본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우려되는 바는 콘살보가 프랑스를 롬바르디아에서도 축출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그 첫 타격이 토스ㅌ카나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이미 피사에다 지지 기반을 만들어놓았으며, 시에나 루카에서도 여러 계획들을 진행시키는 등 그곳에서 일을 꾸미고 있었다. 로마냐 문제까지 끼어 있는 상황에서, 피렌체인들로서는 마치 대장군(콘살보의 별명 - 옮긴이)의 망치와 베네치아의 모루 사이에 놓여 있는 심정이었다.
따라서, 피렌체인들이 사태가 얻허게 돌아가는지, 왕의 준비 태세와 의중이 어떠한지를 즉즉시 파악하고자 햇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하여 1504년초, 그들은 당시 피렌추올라에 가 잇떤 니콜로 발로리르 사절로 보냈다. 그는 이미지로 따나기에 앞서, 그에게 도움이 될 만환 일을 일러주기 위해 급히 그곳으로 파견되었던 마키아벨리로보터 지시 사항을 들었다. 하지만 서기장에게는 또 다른 긴여행이 기다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발로리가 아직 궁정에 도달하기도 전데, 콘살보의 의중에 대해서는 새 정보를 알아냈지만 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공화국은 애가 타사 다시금 마키아벨리를 급히 그에게 보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단히 긴급을 요하는) 자신의 임무를 두고 6일안에 도착해 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사실 그렇게 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키아벨리를 파견한 일은 좀 이사하게 보일 수도 잇다. 왜냐하면, 피렌체는 이미 왕의 궁정에 새로운 훈령을 주어 신임 대사를 보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게 편지로 지시만 내리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 굳이 마키아벨리를 보내게 된 것은 s서신 우송이 미답지가 못하다는 이유 말고도, 그가 이 모든 협상의 추이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잇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사람들, 특히 곤팔로니에레가 그의 판단력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는 1504년 1월 19일자로 그에게 내려진 훈령 속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당신의 이번 여행은 현재 진행중인 준비 상황을 관찰하고, 그것데 대한 당신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첨부하여 우리에게 '즉시' 알려주는 것이다.) 그들은 그곳 주재 대사의 판단을 믿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월 20일 길을 떠난 마키아벨리는 22일 밀라노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미 지시받은 대로 그곳의 프랑스 사령관인 샤를 당브와즈를 만나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즉 프랑스의 도움이 없다면, 피렌체로서는 그냥 앉아서 점령당하든가 아니면 점령하려는 자들과 협정을 맺을 도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앙브와즈는 이에 대해, 자신은 콘살보가 침입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설사 그런 일이 있다 해도 왕이 우방을 결코 못 본 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무제를 궁정에 상세히 보고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러한 조치는 사절로서 바라던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와 헤어지며, 그는 큰소리로 (아무 걱정 말라)고 소리쳤다.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에 보내는 편지에다 자신의 프랑스어 실력을 슬쩍 뽐내면서, 이 말을 전하고 있다.
그는 다음날 밀라노를 떠나, 27일 왕이 잇는 리용에 도착하였다. 밀라노에서 뺏겼던 시간을 뺀다면, 그는 6일만에 오겠다던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대사부터 만나러 갔다. 이 두 니콜로는 서로 오랜 친구 사이였고, 우리가 앞서 말했듯이 (99쪽을 보라 - 옮긴이), 발로리는 마키아벨리에게 정감 어린 편지들을 보내곤 했던 인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는 한 통의 편지에서 더욱 정겨운 마음이 느껴진다. (나는 형제가 없기 때문에, 당신을 나의 형제처럼 생각하고 싶소. 당신도 그렇게 대해 주었으면 하오. 이는 우리끼리의 약속이오) 따라서 둘의 사이는 틀림없이 좋았을 것이므로, 발로리가 10인위원회의 명으로 그에게 온 마키아벨리와 같이 분별 있는 사람을 괜히 의심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문필가로 약간을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대사는 스스로 보고서를 쓴 뒤 혼자 서명하였다. 다른 임무에다 그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던 마키아벨리로서는 독자적인 보고서를 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지에서의 시간을 통틀어서 그가 쓴 편지는 두 통뿐이었다. 그 중 중요한 내용을 담은 첫 번째 편지의 경우, 그는 단지 발로리가 쓴 것을 확인하고 추인 했을 뿐이었다. 다만 그가 곤팔로니에레와 내밀한 편지를 주고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당시 왕은 그간의 실패로 심신이 피로한 상태라 접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니콜로는 다음날 루앙을 만났다. 앞서는 두 명의 사절 중 하위 직급이었던 마키아벨리는 이제 상위 직급의 위치에서 그에게 신임장을 수여하고 자신이 온 이유를 밝혔다. 그는 루앙에게 콘살보와 베네치아에 관해서, 그리고 주변의 적대적인 공화국들과 피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의 말인즉 일러하였다.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은 왕이 무엇을 도와 줄 수 있는지, 또 피렌체가 과연 그것에 의지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는 만약 우방이 도와주지 못한다면 적과 악수하는 수 밖에 또다른 도리가 있겠느냐고 덧붙였다. 추기경은 (불쾌하다는 듯이 화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불평 조로, 피렌체인들은 프랑스가 이렇게 어려운 때에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느냐고 되받았다. 다음은 발로리의 전언이다. (그러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매우 능숙한 솜씨로 프랑스가 토스카나를 구하려 한다면 우선 어떻게 성벽을 지킬 것이가를 숙고해야 한다는 점과 교황과 시에나와 페루자가 콘살보에 대한 방여벽ㅇ 역할을 할 서이라는 점을 주지시켰습니다.) 추기경은 교황와 시에나는 믿을 수 있을까? 페루자는 교황의 것인가? 라는 말을 되묻듯이 되풀이하고는 이야기를 중단시켜 버렸다.
다음날, 추기경은 발로리와 마키아베리에게 좀더 누그러진 태도로 대하였다. 그는 현재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두 왕들 간에 휴전 협상이 진행중임을 전했다. 그는 전쟁이냐 평화냐의 여부가 다음주쯤이면 결정 나겠지만, 어는 경우든 피렌체는 안전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상황이 휴전으로 갈지 또는 프랑스의 강력한 도움으 받는 것이 될지, 어느 족이든 확실한 사실을 피렌체에 보고할 수 있을 때까지는 떠나는 일을 연기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30일, 그들은 왕을 접견하여, 앞서 루앙에게 한 이야기를 그에게 다시 되풀이했고 역시 똑같은 대답을 받았다. 피렌체의 두 사절과 프랑스 궁정의 다른 두 인물 간에도 똑같은 내용의 설전이 오갔다. 그 중 하나는 로베르테였고, 다른 하나는 투키디데스를 번역한 클로도 드 세이쎌이었는데, 발로리는 그들을 향해 (재빨리 일급의 서기관들을 파련한) 피렌체의 기민성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일급의 서기관들)을 파견한 것도 결과적으로 별 소용이 없었다. 11일 휴전 협정이 맺어졌기 때문이다. 그 기간은 3년이었고 양측은 각각의 동맹국들을 거명할 수 있었다. 기대했던 대로 프랑스는 피렌체를 지명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물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출발을 연기하다가, 3월초가 되어서야 서두르지 않고 느긋한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길을 떠났다.
우리는 그가 언제 피렌체에 도착했는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4월 2일 피옴비노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임무는 당시 시에나의 영토 안에서 전쟁 준비로 의심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잇는 데 대해 그 곳 지방 연주와 의견을 나누면서, 피렌체는 그의 영지가 보존되기를 원하므로 서로의 공동 이익을 위해 그를 도울 의사가 있음을 알린 뒤, 그로 하여금 피렌체와의 옛 우호 관계를 재개하도록 권유하는 것이었다. 공화국으로서는 다른 나라가 자신의 소극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실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예비 임무들을 진지하게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파견된 주요한 목적은 훈령 끝머리에 나타나 잇는 대로, 그쪽 지역에서는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어가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영주의 모든 품성들, 사람들의 성향, 시에나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또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등을 면밀히 관찰하기 바라오.)
파쎄리니의 허풍과는 달리, 이번 임무의 중요성을 그곳 영주와 그가 다스리는 영지의 가치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서기장은 며칠안에 일을 끝내고는 서기국의 편지 쓰는 일로 돌아왔다. 이탈리아에서 사로 싸우던 두 나라 왕이 휴전 협정을 체결하자, 그곳은 갑작스런 고요함에 빠져들었다. 로마냐 쪽의 베네치아인들은 이제 그들이 획득했던 영토로 만족하고 있었다. 호전적이었던 교황의 역시 호전적인 조카인 줄리오 2세는 여전히 (확고한 권력을 얻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이제는 긴 공성전이 되어버린 지루한 피사 전쟁만 없었더라면, 당시는 아마 옥타비아누스의 평화 시대를 다시 구시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이 시기에 우리의 관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공한들보다는 그가 오랫동안 머릿속에만 담아오다가 당시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 군사에 대한 몇몇 생각들이다. 청년기 이후, 전쟁은 그에게 용병대의 저열함과 모반의 경향 그리고 배신 행위들과 함께, 피렌체와 이탈리아가 그들로 인해 파괴되는 모습을 숱하게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시기국에서 궁정에서, 전장의 소요 속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왔던 그에게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고, 이후 그는 그러한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그 고대의 용맹성이여
이탈리아인의 가슴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고 있구나
라고 읊은 페트라프카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서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는 로마냐에 사절로 가 있는 동안, (한 집당 한 명씩 정발된) 그곳의 농민들이 돈 미켈레의 고된 훈련 끝에 어엿한 병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mfl고 피사인들이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용병대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스스로를 방어하는 모습도 목격하였다.
물론 영예로운 코무네의 민병대((milizie) 혹은 (la Ordinanza). 이를 민병대로 옮긴 것은 당시의 용병대에 반하는 개념에서이며, 현재와 같이 졍규군이 아닌 사병(사병)이란 뜻에서가 아니다. 물론 시민군 miliaia cittadina 또는 자국군 armi proprie 등의 옮긴말도 가능하며, 이 역시 마키아벨리나 리돌피가 실제로 쓰고 있는 말들이다. 앞의 경우는 중세 봉건 영주에 대항한다는 의미가 강하지만, 실제로 모병 대상자는 대개 콘타도의 농민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좀 도시 반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한 역어라고 생각된다. 뒤의 경우는 조금 거리가 있는 말이다. - 옮긴이)에 대한 기억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로부터 거의 이백년이 지난 당시의 상황에서 시민과 농민을 모병한다는 생각은 피렌체인들에게는 아무래도 무모하고 허황되게 보일 만큼 낯선 것이었다. 읍도파 문인 도메니코 체키가 (피렌체를 지키기 위한 성스럽고 고귀한 개혁 방안 Riforma santa e preziosa)에서 주워섬기고 있는 그렇게 많은 기발한 방법들 중에서도 체격이 좋은 시민들을 군으로 훈련시킨다는 괴상한 생각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 당시 피사 전쟁과 그 외의 이러저러한 용도로 콘타도 지역에서 징집된 (코만다티 comandati)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공병대로 보는 것이 나으며, 단지 어떤 특수한 경우에만 활용되었다. 피렌체의 서기장은 국민병에 대한 정치 이론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이론을 실제에 적용하여 정규적인 소집과 확고한 법령에 의하여 정부 관리의 통제 하에서 운용되는 민병대를 창설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그처럼 기상천외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굳은 신념에다가 곤팔로니에레와 그의 동생인 추기경이 그에게 보여준 큰 호의 덕분에 그는 용기를 얻었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그가 추기경에게 이 계획에 관해 처음으로 이야기 한 것은 로마에 사절로 가 있을 때인 듯하다. 분명한 것은, 당시 그들 사이에 이 문제에 관한 의견 교환이 있었고, 추기경이 아주 즉각적이고도 열성적으로, 그리고 아주 강력하게 그 계획을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피렌체로 돌아와 곤팔로니에레를 비롯하 몇몇 유력 시민들과 그 문제를 의논한 결과 그는 조심성 많은 피렌체인들의 회의적인 분위기를 극복하기란 아무래도 매우 힘들겠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7년 전 정무위원회가 무장 호위대를 갖추게 하자는 말이 나왔을 때 기를 쓰고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이 그렇지 않아도 종신 임기인 지금의 곤팔로니에레를 아예 종신제 참조로 만들려는 음모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케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같이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마키아벨리는 반 쯤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1504년 5월 24일 추기경에게 편지를 썼고 5일 뒤 다음과 같은 답장을 받았다. (민병대에 대한 반대는 그 방안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건전한 것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네. 그리고 그것은 사적인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그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될 것이네. 거기서 주저앉지 말기 바라네. 언젠가는 그 일을 자랑스러워 할 때가 올 테니까. 다른 보답은 없더라도 말이네.) 사실 그는 다른 어떤 보답도 받지 못했지만, 그 때문에 훗날 영예는 얻게 되었다. 그의 앞길을 예언하는 듯한 이러한 격려가 피렌체 서기장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추기경의 애정 어린 배려는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그는 같은 편지에서 마키아벨리를 가리켜 (가장 친애하는 동료)라고 불렸으며, 대부가 되어 준 것 외에도 그에 대한 자신의 우정을 또 다른 방식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사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마침 군사 문제를 주 업무로 하던 서기국 일과 병행해 나갔다. 그때 피렌체는 피사를 둘러싸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들은 작전은 상례대로 주변 농작물을 갈아엎고, 리르바파타를 재탈환하고, 도시를 먹여살리는 외부의 도움을 차단하는 조치들을 취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피사에 대한 원조는 오직 아르노 강 위쪽의 바다로부터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은 머저 강 어귀에다 좁다란 랠리선을 가진 일단의 수비대를 배치한 뒤, 강의 물줄기를 돌려 피사인들을 말려버릴 계획을 추진하였다. 곤팔로니에fp는 물을 잘 아는 피렌체와 외국 전문가들을 부추김으로 이 계획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공화국 돈 7,000두카토를 웅덩이 속에 밀어넣고,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우리 서기장의 펜만 수없이 닳아없어지게 하는 데서 그치고 말았다. 마키아벨 리가 이 안을 지지했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톰마시니는 아니라고 말한다. 무릇 위대한 인물이라면 실수가 있을 리 없고 특히 그의 전기 작가를 위해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증거를 더 확인하지 않고도 이에 대해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는데 개의치 않겠다. 우리는 서기장과 그 계획의 주도자인 곤팔로니에레간의 관계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으며, 실제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주 기발하고 대담했던 그 계획의 성격 자체가 나에게는 바로 마키아벨리적인 천재성과 딱 맞아떨어지는 듯이 보인다.
이 수공 작전에 건 마지막 희망도 가을에 닥친 첫 홍수 속에 떠내려가 버렸다. 바로 같은 때, 마치 강물처럼 마키아벨리의 시심이 가느다랗게 분출되었다. 10월도 마지막으로 치닫던 그때, 그는 샤를 8세의 침입으로 서두를 잡아 ( 10년 동안 이탈리아가 기울인 노력과 2주동안 '자신이' 기울인 노력)을 보여주는 550행짜리 시 한수를 완성했던 것이다. (첫 (십년기 Decenale) 를 가리킨다. 이 작품은 시의 형식을 빌려 1494 -1504년의 10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피렌체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위의 (2주동안)이라는 표현은 이 시가 14-5일 만에 씌어 졌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나온 날이다. 미완성으로 남은 두 번째 (십년기)가 있으면, 이는 1504-1509년의 일을 다루고 있다 - 옮긴이). 이 시에서 모든 일의 출발점인 서두의 경우, 우연은 별다르게 기능하지 않지만, 끝맺음 부분에 가서 발렌티노(연전히 그의 운명적이 군주인)의 마지막 행적을 다룰 때에는 상당한 작용을 하고 있다. 줄리오 2세의 마지막 발톱을 피해 가까스로 몸을 피한 그는 처음으로 콘살보의 환대를 받으나 뒤에 그로부터 배신당한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읊고 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네
그리스도에 거역했던 자가 받을 만한 만큼.
산문에서든 시에서든, 살아서든, 죽어서든, 이후 (바쁜) 마키아벨리는 더 이상 자신의 영웅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발렌티노는 에스파냐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전투중에 그곳에서 죽었다. 한때 이탈리아의 역사 무대 위에 발을 내디뎠던 그는 이제 마키아벨리에게는 정말 (무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십년의 이야기는 한 악한의 쓸쓸한 최후로 마감됨으로써 민요 풍의 노래 un cattare di dandamento popolaresco((십년기)를 (민요풍)이란 부른데 대한 디오니소티의 반론과 리돌피의 재반론에 관해서는 이장의 주 33을 볼 것 - 옮긴이)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끝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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