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6장 발렌티노에 대한 사절 시기 (1/2)
피렌체는 언제나 법률상의 결점을 시민들의 능력으로 보완해 왔으나, 이 즈음에 들어 상층 시민 cittadini migliori일수록 공직에서 더 소외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평시민들의 시기로 인해 마음이 이반되고 불만과 경계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재력을 국가를 위해 쓰려들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이익 관계와 세력간의 각축속에서 구습들이야말로 공화국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었다. 극히 짧은 임기의 정무위원을 추첨으로 선출하는 이상한 방식 때문에, 종종 아무런 능력도 경험도 없는 인물들이 권좌에 앉게 될 뿐 아니라 그들 역시 공직에 대한 경험을 쌓기도 전에 그 직에서 물러아야만 했다. 이러저러한 난맥상이 초래한 결과는 당시 공화국이 겪은 재난들 속에서 잘 나타나 있었다.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에서 결국 모두들 정부를 개혁하고자는 데는 동의했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국정의 기초이자 상징인 대평의회를 폐지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심 그것을 무척 바라는 사라들 조차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평시민 정부의 틀을 유지하되 베네치아의 소평의회 I Pregiti(원로원적 성격을 띤 베네치아의 통치기구. 베네치아에서는 pregado라고 함 - 옮긴이)와같이 거의 유력 시민 회의 il consiglio di ottimati에 해당하는 소수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직제을 도입하여 공화국의 중대 현안을 다루자는 안도 나왔다. 하지만 이는 평시민들이 받아들일 리 없었으므로, 결국은 당분간 종신제 곤팔로니에레를 임명하여 시기를 봐가면 좀 덤 충분한 고려 아래 개혁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하나의 절충안에 불과하였다. 최초의 (종신 곤팔로니에레)를 선택하는 일은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력 시민과 평시민의 요구 사이에 끼인 상태였으므로, 결국 평범한 인물이 권좌에 오르는 것이 낙착되었다. 선출은 대평의회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가장 똑똑한 인물보다는 평시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 뽑힐 가능성이 많았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 여러 계층이 두루 받아들일만한 성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피에로 소데니가 바로 그 같은 인물이었다. 명문가 출신의 상층 시민이었던 그는 평화기였다면 자신의 소임을 재무 잘 해나갈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관직에서나 사절에서나 소임을 매우 잘 해나갈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관직에서나 사절에서나 자기 차례를 거부한 적이 없었으므로 평시민 정부의 강력하나 지지자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공직에 기용되고, 또 그것이 다른 인물들의 공직 기피 때문임을 알지 못한)평시민들은 결코 유력 시민들이 만족스러워 할 만한 선택은 아니었으나, 모든 점을 감안할 때 공화국으로서는 괜찮은 결과였다.
이는 마키아벨리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성실하고 헌신적이 자세로 국정에 임했던 마키아벨리는 곧 그와 비슷한 성향인 소데리니의 눈에 띄었다. 이와 더불어 그는 마키아벨리의 날카로움, 기민함, 단호함을 마음에 들어 했는데, 이 모든 품성은 관대하기만 해서는 안되는 곤팔로니에게에게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나쁜 점은 나타내고 좋은 점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약간 건방진 듯하면서 장난기 어린 태도에다, 처음 만남 평범한 사람들과는 잘 부딪혀서 그들에게 자신을 오만하거나 혹은 묘한 인물로 보이게 하는 그런 성품 때문에, 우리의 니콜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 반면, 그를 오랫동안 잘 알고 그의 예의바름과 재능을 이해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뛰어난 인물로 비쳤다. 우리는 훗날 그가 소데리니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들과의 친분을 맺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과거에 소데리나가 여기저기 많은 공적을 옮겨 다니는 동안, 서기국 일으 통해 그와 지속적으로 접촉한 바 있었다. 또한 바로 전에 있었던 우르비노 사절단에서 그의 동생인 주교와 동행했을때에도 마키아벨리는 곧 주교의 마음을 얻었었는데, 이 역시 신임 곤팔로니에레의 마음을 열게 해준 열쇠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마키아벨리는 그의 취임 즉시 10인위원회 명의의 공한과 함께 사적인 축하의 편지를 쓴 것으로 보이나. 그가 소데리니의 동생인 주교에게 라틴어로 편지를 쓴 것으로 보인다. 그가 소데리니의 동생인 주교에게 라틴어로 격식을 갖추어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리고 주교는 곧 답장을 보내어, 그의 (품위 있는)편지에 감사하면서 자신의 가문과 국가를 위해 애써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때쯤 발렌티노는 왕에게 자신의 변호하기 위해 급히 가서는 프랑스식의 무책임한 사면뿐 아니라, 이제는 희생양이 되어버린 비텔로초로부터 치타 디 카스텔로를 돌려받고, 나아가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돈으로 왕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벤티볼리오로부터 볼로냐를 차지해도 좋다는 백지 위임장을 들고는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보르자의 이러한 복귀는 피렌체인들에게 다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정작 이를 더 두려워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의 성공 도구였던 소군주들, 즉 비텔리를 비롯하여 오르시니 가, 빌리오니 가,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 판돌표 페트루치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보르자가 자신들의 무덤을 파는 데 오히려 일조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어떻게 하면 이를 미연에 방지 할 수 있는지 숙고하기 시작하였다.
보르자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은 피렌체 공화국에게나 어제의 적들에게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그들은 판돌포 페트루치를 통해 접근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파랑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피렌체는 이러한 기미가 분명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종립을 지키면서 발렌티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발렌티노가 피렌체와의 동맹을 모색하기 위해 사절을 이몰라로 보내 주기를 청했을 때에도, 그들은 자산들이 알레싼드로 6세의 환속과 건달 아들을 싫어하는 이상으로 그와의 동맹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그와 계속 접촉하면서 가까이서 그들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보르자에 휘말리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파악해 낼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마키아벨리를 그에게로 보냈다. 그는 최대한 속력으로 말을 달리라는 훈령을 받고 1502년 10월 6일 길을 떠났다. 그는 이 훈령을 곧이곧대로 따랐는데, 이는 그의 일행이 생각처럼 움직여주지 않자 스카르페리아에서 짐과 하인들을 뒤에 남겨둔 빌린 말을 타고 이몰라까지 단신으로 달려간 데서 잘 나타난다. 다음날 도착 즉시 그는 (승마복 차림 그대로)발렌티노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몇 마디 서로 반가운 듯이 인사를 나눈 뒤, 자신의 임무를 설명하였다. 말의 요점인즉, 피렌체인들은 오르시니 가와 빌리오니 가, 빌텔리,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해 마조네에서 소집된 구수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프랑스 왕 및 발렌티노와의 친선을 확고히 지키기 위해 그것을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발렌티노는 이러한 배려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는 한때 자신과 같은 편이었다가 이제는 적이 되어버린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자신과 공화국 모두에게 손해를 입히고 약탈을 자행하고 배신을 일삼았다고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그 (패잔병 집단)을 애써 경멸하면서, 그들이 부추겼던 우르비노 공국의 반란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설사 그것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을 다시 되찾는 방법까지 잊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왕이 이탈리아에 있고 교황이 여전히 살아 잇는 한, 이 둘이 (환히 밝혀주는 불을 끌 만큼 물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다면 결코 자신을 쉽사리 없애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과 공화국 사이를이간질하는 오르시니 가와 비텔리를 제거한 뒤, 서롤 힘을 합치자고 제의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 리가 (그러한 동맹의 세부 사항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에 대해서는 (끝내 함구하였다.)
다음날, 발렌티노는 마키아벨리를 불러 왕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내용의 프랑스 발 편지를 몇 통 보여주면서 그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발렌티노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아는 마키아벨리는 편지의 서명을 이전에 프랑스로부터 받은 편지들의 경우와 비교 확인해 보라고 10인 위원회에 요청하는 시중함을 보였다. 또한 그는 발렌티노의 새로운 동맹 제안을 전했으며, 아울러 용병 대장들의 변절 이후 얼 마 안 남은 군대의 세부사항을 보명, 기병, 포병, 현재 소집중인 새로운 군대, 그리고 다른국가와의 관계, 자신의 신민들과의 관계별로 조목조목 전달하였따.
벌써 이 첫 번째의 편지에서부터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사람들의 찬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니콜로 발로리가 이에 앞장섰다. 마키아벨리는 이미 피스토이아에 사절로 가 잇는 동안 일을 잘 처리해 그의 신임을 얻은 바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정무위원의 위치에 올라 젊은 서기장을 치하하는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시하였다. 그는 거듭거듭 마키아벨리의 편지쓰기와 판단력을 칭찬해 마지 않앗다. 그는 편지에서 (모두가 당신만큼만 한다면 실수는 일어나지 않을 텐데!)라고 썼다. 또 그는 11월 1일 공직에 취임할 예정인 새 곤팔로니에레에게 얘기하여 마키아벨리에겍 30두카토의 격려금을 보내도록 하엿다. 그 직후 쓴 편지에서 그는 돈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마키아벨 리가 발렌티노를 다루는 방법이나 출중한 판단력에다 힘이 넘치는 편지 내용에 대한 자신의 공적. 사적 찬사로써 모자라는 액수를 메우게 해달라고 말하였다.
비아조 부오나코르시 역시 그를 찬양하였는데, 언제나 니콜로의 예찬자였던 그는 때로는 연인의 질투심이 묻어나는 듯한 편지를 쓰기까지 할 정도였다. 한번은 그조차도 감연히 마키아벨리를 비판하고 나선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편지를 씀에 있어서 자신의 그 간명하고 명쾌한 판단은 좀 유보해 두고 단지 사실들을 전달하는데 거쳤어야 했다는 내용이었다. 비아조가 지적한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당시 발로리가 칭찬해 마지 않았던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사람 좋은 비아조가 그를 비판한 것은 그가 마키아벨리를 경외했기 때문이고 그러한 경외심은 또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러한 애정은 이성적 판단보다 더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이는 다음의 솔직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부디 신의 가호로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를.)
적어도 후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니콜로는 그 건달 같은 군주의 모든 행적을 자신의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되씹어봄으로써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고 있었다. 뤼지 델라 스투파가 자신이 사절로 가 있던 플랑스로부터 니콜로에게 쓴 편지 속에서 (기류의 변화와 함계 이러한 품성을 지닌 다양한 인물들을 보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예리하게 만든다) 고 말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군주를 좋아하였다.그의 이름은 체사레엿고 그의 일생은 그 이름에 값하는 것이었다. 그의 군기에는 (체사레냐 무(무) 냐)라는 명문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탈리아어 (체사레 Cesare)란 라틴어 (카이사르 Caesar), 즉 황제란 뜻임 - 옮긴이). 그는 정복과 계략을 거듭하면서 (하늘과 행운의 도움으로) 피렌체 성문 앞에 모습을 나타냈던 그때 이후 줄곧 마키아벨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그가 마키아벨래의 호감을 얻게 된 것은 여전히 승리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던 몬테펠트로의 웅장한 성채에서 그를 접견했을 때였다. 용병 대장들과 휘하 소국들과 그리고 운명까지 그에게 반기를 들었을 당시에조차도 그를 좋아하는 마키아벨리의 마음은 변치 않았다. 10월 17일 적들은 그나마 그의 수중에 남아 있던 소수의 군세마저 궤멸시켜 버렷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빼앗았던 모든 것을 잃은 채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처지가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참고 숨기고 가다리면서, 또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신민을 다독거리고 요새를 강화하면서,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체사레는 그 사이사이에 이미 평화를 위태롭게 할 조짐을 보이고 잇던 반군 수장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속삭임으로써 (그, 일부를 이탈케) 하력고 시도하였다. 그는 많은 비용을 감수하면서, 프랑스, 로마, 밀라노, 레라라 등지에 끊임없이 전령을 보내 협상을 하거나 무기와 친선과 군대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가 사용한 수단과 그 결과를 만사에서 절약을 지향하는 피렌체 공화국의 경우와 비교하고 있다. 그는 이몰라체류 2주쯤 되는 어느 날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제가 여기 온 이후, 그는 우리 정부가 두 해 동안에도 다 쓰지 못할 정도의 큰 금액을 전령과 사절의 비용으로 다 써버렸습니다.) 그가 생각지 못한 것이 있다면, 자신의 동료 시민들이 스스로의 지지갑에서 돈을 지불해야 한는 반면, 체사레의 돈은 교황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며, 교황은 추기경들을 마치 닭장 속의 닭처럼( 이 비유는 베체치아 대사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좋은 값에 만들어서는 잔치에 쓸 요량으로 살찌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발렌티노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보다 악한 정도에서 열 배는 아래인 어떤 피렌체인은 단지 그가 교수대에 서는 것을 보고 싶어했겠지만 말이다. 카미아벨리가 발렌티노를 좋아한 것은 그가 강력한 국가를 이룩한 상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발렌티노 공이 외교와 전쟁에서 보여준 불국의 끈기, 그 저동성과 분별력, 숨김과 가장의 능력 그 능숙한 정책과 기민한 실천력에 찬사를 보냇다. 그의 인생 행로는 마키아벨리를 현혹시켰고, 특히 그가 그 과정에서 보여준 신념은 더욱 그러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그를 요모조모 뜯어가며 연구하엿고, 그가 자신의 마음에 새겨준 모든 말드과 사실들을 남김없이 피렌체에 알렸다. 한번은 그가 친구 비아조에게 프르타프코스의 (영웅전 Vite)을 보내달라고 청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 그가 이미 마음속으로 현재의 경험과 과거의 사실들을 서로 새롭게 비교하려 했었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으리라. 발렌티노 역시 그의 드높은 위신과 에스파냐, 로마적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이보잘 것없는 지위의 서기장을 결코 불쾌하게 생각지 않았다. 흑자가 그렇게 믿고 또 쓰고 있는 바와 같이 마키아벨리가 사절로 가 있는 동안 발렌티노의 마키아벨리즘을 흡수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어리석은 생각이 되겠지만, 그가 마키아벨리에게 이례적일 만큼 접견을 쉽사리 그것도 장시간 허용했던 사실이나 양자간 대화의 성격 등으로 미루어볼 때, 이 사심 없는 피렌체 사람의 재능과 격식 없고 날카로운 판단력이 발렌티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명확해 보인다.
어쨌든 당분간 보르자는 계속해서 피렌체와의 협정을 고집하였다. 히지만 피렌체는 통상 그렇듯이 말로는 좋은 듯이 하면서도 그것을 행동을 옮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의 변명이란 이 일을 왕에게 알리고 그의 동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히지만 한 주일 한 주일 시간은 흘러가도 답은 오지 않았다. 발렌티노는 비록 여전히 우호적이긴 했지만 그 특유의 놀랍고도 초연한 태도로 자신의 새로운 방식에 따를 것을 재차 촉구하였다. 그에게 정말로 중요했던 것은 이미 물의를 빚어왔던 자신의 용병료, 즉 세례 요한의 상이 새겨진 양질의 피오리노 금화였다. 그리하여 마키아벨리에게는 자신의 나라 피렌체를 위해 이 펜싱 선수와 겨루어야 하는 임무가 맡겨졌으며,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그리고 피렌체 정부가 그에게 준 무디고 녹쓴 무기를 가지고 이 일을 해냈다. 어느 날 둘은 피렌체 공화국이 새로이 고용한 만토바 후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발렌티노가 물었다. (그래, 당시네 정부가 나에게 맡긴 일은 뭐요?) 마키아벨리는 이에 대해 전하는 일을 맡기보다는 일을 끌어가실 분이라고 농담 조로 응답하였다.
왕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변명이 더 이상 먹혀들어가지 않자, 피렌체인들은 이제 교황과 의논하고 싶다고 말을 바꾸었고, 이어서 다시 소데리니 주교를 프랑스로 보냈으니 모든 결정은 그 결과에 달렸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발렌티노는 압력을 넣을 요량으로, 그가 오르시니 가 및 비텔로초와 거의 조약을 체결하기 지적이며, 그렇게 되면 피렌체인들은 매우 난처한 지경에 처할 것이라고 들러대었다. 마키아벨리로서는 만약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다면 돈으로 발렌티노와의 친선을 사는 데에 기꺼이 일만 두카토 정도는 걸 마음이 있었으나 정무위원회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그는 결국 어느 날 피렌체가 그에게 무언가 괜찮은 일감을 주기는 힘든 처지에 있으며, 그렇다고 사소한 일을 맡기 수도 없지 않느냐고 말할 도리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발렌티노의 한 관리가 용병료라는 말이 적절치 않다면 수고비로 명복을 바꿀 수도 있다고 제의하자, 마키아벨리는 이름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피렌체가 발랜티노와의 친선에 단돌 한 두카토도 내지 않으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관측했듯이 그들간의 친선 관계는 하루가 다르게 쓸모없는 것으로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피렌체 정무위원회는 그 즈음 마키아벨리와 발렌티노 사이의 모든 협상과 논의를 중단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한 상태였다. 그래서 친구 비아조는 피렌체 발 편지에서 마키아벨리르 다음과 같이 놀려대었다. (이보게 니콜로, 자넨 허탕을 쳤어, 아마 자네는 발렌티노의 마음에 들 만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네만.) 이 일로 인해 그는 앞서 어떤 때보다도 더 본국으로의 귀환을 정부에 요청하게 되었다. 그가 귀환하고 싶어하는 데는 자신이 10인위원회에 보낸 편지에 적힌 것 말고도 상당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 그에게는 가사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었고, 게다가 당시 집 사정도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외국 출장중에 자신과 공화국의 품위를 위해 버는 액수보다 돈을 더 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그는 편지에서 아마 인색한 정무위원회로서는 그리 달갑게 들리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저는 제 몫으로 돈을 쓸 수 도 있었고 또 지금은 그러한 돈을 공작으로부터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돈은 바라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그럴 만한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일은 우리 정부에게나 제 자신에게나 결코 명예롭지 못한 것이라 생각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도 제가 한푼 두 푼 비용을 구걸하다시피 하면서도 정말 기꺼운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생각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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