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3장 첫 번째의 사절 임무들
마키아벨리가 서기장 직에 취임한 당시, 피렌체인들의 주요 관심사는 피사의 탈환 문제였다. 서기국을 거쳐 나가는 대내외의 모든 일들 중 이 전쟁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피사의 반란은 샤를 8세의 간여와 동의 아래 이루어졌으므로, 피렌체인들은 무엇보다 그것을 상실케 한 원인이었던 왕으로부터 그 도시를 돌려받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뒤,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거꾸로 기회를 엿보다가 배반하는 긴 시간을 보낸 후, 결국 그들은 군사력으로 그것을 다시 빼앗고자 하였다. 만일 피렌체가 과중할 정도였던 대외적 욕심을 버리고 프랑스와의 끈끈한 밀착 관계를 포기함으로써 당시 샤를 8세에 대항하여 뭉쳐있던 이탈리아 국가들의 적의를 사지 않도록 했더라면, 피렌체의 피사 탈환은 쉽사리 이루어졌을 것이다. 프랑스와의 우호 관계는 오랜 전통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업적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었으며 또 사보나롤라도 설교에서 그것을 옹호했기 때문에, 피렌체의 입장은 확고하였다. 특히 사보나롤라의 친프랑스적 설교는 이탈리아 동대의 깃발 아래 교속(교속)의 양군대를 동원하고 있던 교황을 격분케 하였다. 결국 로마 교황청이 피사 탈환을 양해하는 대가로 프랑스와 거리를 둘 것과 사보나롤라의 목숨을 요구함으로써, 피렌체 정부와 교황청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대결의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러한 대결 국면은 사보나롤라의 죽음으로 종결되었는데, 나는 여기서 당시 피렌체와 이탈리아 주요국들이 어쩐 관계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정책은 어떠 했는지를 간략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샤를 8세는 사보나롤라의 체포 하루 전에 죽었지만, 이로써 이탈리아의 평화와 운명에 대한 프랑스 군의 위협이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새로이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는 전임자와 같이 두 시칠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는 말한 나위도 없고 할머니로부터의 계스권을 주장하며 스스로를 밀라노 공이라고까지 칭함으로써(루이 12세의 조부인 루이 드 발로아는 1389년 밀라노의 잔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첫 부인에게서 낳은 딸 발렌티나와 혼인하였다. 뒤에 1441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잔갈레아초의 손녀 비앙카 마리아와 결혼한 것을 기화로 밀라노를 장악하자, 루이는 자신의 계승권을 주장하였다. - 옮긴이) 자신의 심중을 일찌감치 드러낸 바 있었다. 따라서 알프스 이남의 보든 나라들은 희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심정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반 샤를 동앵은 이미 해체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국가들은 이 후계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숙고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여러 나라가 프랑스에 사절을 파견하였고, 피렌체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히지만 피렌체의 경우, 비록 새정부가 사보나롤라 정부의 극단적인 친프랑스 정책을 멀리하고 알프스 이북의 공허한 약속보다는 좀더 가까이서 믿을 만한 우방을 찾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는 있었지만, 프랑스 탐색에는 가장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의 목숨을 담보로 한 승부에서 승리했고 그래서 더 이상 공의회도 샤를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교황은 이제 이탈리아에서 가문의 영예를 키우는 쪽으로 자신의 생각을 돌리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루이 12세의 호의와 도움이 필요했다. 그가 현재의 결혼생활을 청신하고 자신에게 형수 뻘 되는 죽은 샤를의 미망인과 혼인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교황은(정신적 호의를 베풂으로써 그 대가로 세속적 권력을 얻으려는) 의도 아래 이 쉽지 않은 두 사안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이제 그는 피렌체인들에게 노골적으로 우호감을 by시하기에 이르렀으며, 나아가 피렌체의 피사 탈환에 찬성할 뿐 아니라 베네치아의 동의를 얻도록 도와줄 용의까지도 있음을 피력하였다. 당시 베네치아는 흑안공(흑안공, II Moro : 스포츠차의 안색이 검다는 데서 유래한 별칭, 혹은 그의 미들 네임이 (Mauro)라는 데서 연유한다는 설도 있다. 부르크하르트가 일찍이 (완벽한 참주)라고 불렸던 인물 - 옮긴이) 로도비코 스포프차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렌체의 피사 탈환을 반대하고 있었다.
자신의 인접 국가인 베네치아 공화국을 의심과 질시의 눈으로 보고있던 흑안공은 피사 문제에 대한 베네치아 공화국을 의심과 질시의 눈으로 보고 있던 흑안공 피사 문제에 대한 베네치아의 간섭이 차후 더 큰 주장으로 가는 빌미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정책의 방향을 바꾸어 피렌체인들의 뜻에 찬성할 뿐 아니라 그 일이 성사되도록 도와주려고 작정하였다. 이는 특히 사보나롤라와 그 파당이 제거된 후, 정권이 좀더 믿을 만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데도 그 이유의 일단이 있었다. 물론 피렌체 공화국이 그에 대한 프랑스 왕의 적개심을 완화시켜 주거나 또는 왕과 베네치아의 세력에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희망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피렌체의 피사 탈환을 베네치아가 완강하게 반대했다는 사실은 이미 말한 대로이므로, 이제는 이탈리아의 다른 국가들이 피렌체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부연하는 것만이 남은 듯하다. 제노바와 시에나 같은 인접 공화국들은 피렌체와 오랜 적대 관계에 있었다. 부근의 루카 역시, 흑안공의 개입으로 겉으로 중립을 지키고는 있었지만, 이웃의 적대국이었다. 로마냐 지방의 경우, 볼로냐의 참주 벤티블리오와 이몰라 및 포를리의 여 참주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피렌체에 우호적이었다. 반면 라엔차는 베네치아 편에 서있었다.
다른 요인들이 끼어들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당시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들이 피사 주변에서 진행되던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이 전쟁은 서기국에 자리를 잡은 마키아벨리의 일상적 관심사였으므로, 우리는 이에 관해 상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피렌체인들은 그 해 5월 산 레골로에서 작은 패배를 맛본 이후, 즉시 유명한 용병 대장이었던 파올로 비텔리를 군 사령관으로 부름과 동시에 로도비코 스포르창게데도 구원을 요청하였다. 스포르차는 중원군과 돈과 언약으로 공개적인 지지 의사를 표명하였고, 교황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는 다만 약속에 그치고 말았다.
1498년 6월 1일 엄숙히 지휘봉을 잡은 새로운 지휘관은 곧 활기차게 전쟁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때까지 피사가 굳게 지켜왔던 부티, 비코피사노, 리브라파타를 때로는 힘으로 때로는 협상을 통해 차지하였다. 베네치아는 직접 원군을 보내거나 또는 견제 공격으로 피사를 도우려 했지만, 가르파냐나로 진군하려던 시도가 좌절되고 로마냐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 시에나와 페루자를 통해 군대를 보내려는 계획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자 베네치아는 파엔차를 경유하여 카젠티노에서 전투를 벌여 드디어 10월께는 비삐에나와 몇 개의 성채를 손에 넣었다. 이는 피렌체로서는 영토의 심장부를 위협받는 결과였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피사로부터 비텔리가 소환되었다. 베네치아인들은 물론이고 망명 상태에서 그들과 함께 있었던 피에로와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는 그 해 겨울이 우울하고 쓸쓸한 시기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강력한 적군과 대치하고 있었을뿐 아니라 동시에 그보다 더 강하고 적대적인 날씨라는 자연 현상에 대처해야만 하는 가혹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영토 획득을 열망한 피렌체인들 만큼의 강력한 동기를 갖지 못한 베네치아인들은 먼 곳에서의 전쟁에서 힘을 소모한 데 지친 나머지, 결국 페라라 공이 마련한 타협안에 동의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피렌체는 피사에 대해 단지 제한된 지배권밖에 누리지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사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베네치아는 그들대로 이를 치욕으로 생각하였다. 이 중재안은 또 피렌체가 베네치아에 상당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정해 놓았는데, 후자로서는 이 액수가 불명예의 대가로는 충분치 못한 것이었던 반면, 전자로서는 배상금 지급이 옳지도 않을뿐더러 참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흑안공에 대항하여 프랑스 왕과 연합 관계에 있던 산 마르코 공화국(베네치아를 일컬음 - 옮긴이)이 그들에게 좀더 직접적이고 이익이 되는 일에 관심을 쏟게 되면서, 비록 조약 자체는 거부했지만 공교롭게도 조약에서 약정된 시간에 맞추어 자국군을 철수시켜 버렸다. 이로써 피렌체는 이제 모든 세력에게서 버림받은 상태였던 피사에 자신의 모든 전투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비망록 속의 마키아벨리 자필 편지나, 또는 보좌직에게 구술시키든지 그들에게 직접 쓰도록 한, 제2서기국과 10인위원회의 문서보관소를 가득 채우고 잇는 편지들을 통해 이 전쟁의 추이를 따라가는 일은 쉽지만, 동일한 비망록과 문서철 속에서 서기장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알기란 매우 어렵다. 설사 편지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매일 매일의 편지들만을 검토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더욱이, 장관들의 이름으로 씌어졌던 이러한 편지들에서 과연 얼마만큼이 그의 것인지를 알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암도 때로는 편지의 형식에만 간여했을 것이지만, 또 때로는 그 내용에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서기국을 둘러싼 비밀의 벽을 뚫고 마키아벨리의 재능이 한껏 빛을 발하는 경우는 특정한 군사. 정치 문제에 관해 장관에게 사실을 알거나 혹은 자문에 응하기 위해 쓴 보고서에서이다. 한 예로서 (피사 전쟁 논고 Discorso della guerra di Pisa)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피렌체가 베네치아로부터 스스로의 옆구리를 노리던 칼을 빼앗은 뒤 새로운 다짐으로 피사 탈환의 시도를 재개한 때인 바로 이 당시, 더 정확히 말하면 1499년 5월에 씌어진 것이었다. 명석학도 치밀하며 힘찬 느낌을 주는 이 글은, 현존하는 것으로는 마키아벨리 최초의 정치 저술로서 이미 사자의 발톱 같은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장군들과 그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데서 나타나는 명쾌성, 날카로운 판단력, 다부진 문체의 이 저술을 읽노라면, 정무위원회가 왜 날이 갈수록 그 서기장을 신임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서기장들은 이와는 다른 방식의 일까지도 하곤 했다. 때때로 그들에게는 위임업무나 나아가서는 사절의 임무까지도 부여되었는데, 이는 경비 절감이나 일의 성격상, 또는 어떤 긴급한 이유 때문에 정식으로 대사를 보내기가 마땅치 않을 때 그러하였다. 이때 서기장에게 붙은 호칭은 공식 대사를 뜻하는 암바쉬아토레 ambasiciatore나 오라토레oratore가 아니라 그냥 대리인의 의미를 지닌 만다타리오 mandatario였다. 그들의 임무는 평화 조약이나 동맹 관계에 관해 협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관측하고 보고하거나, 중성이 덜하면서도 긴급을 요하는 일을 처리하거나, 절차에 따라 선출될 대사에 앞선 예비 작업을 하는 것또는 이 대사들을 수행하고 보좌하며 조연하는 동시에 그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가 이런 종류로 처음 맡은 임무는 당시까지도 끝없이 계속되고 있던 피사 전재에 관련된 긋오 그 기간이 얼마 소요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피옴비노의 참주이자 피렌체의 용병 대장들 중 하나였던 야코포 다피아노에게로 보내졌는데, 당시 그는 급료 인상과 지휘권 확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 자신이 문서 속에서 밝힌 유명한 판단에 따르자면, (말을 잘하지만 결단력이 없으며 행동은 더 형편없는) 이 소참두와 그사이에 일었던 일의 결과는 우리에게 알려져 잇는 그대로다. 그는 첫 번째 요구에 대해서는 종전의 액수로 유지하도록 하고 두 번째 요구에 대해서는 그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언질을 줌으로써 사태를 해결하였던 것이다.
7월 12일, 그는 좀더 중요한 두 번째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이 역시 피사 전쟁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가 만난 인물은 이몰라와 포를리의 백작이자 흑안공의 서출 질녀인 카테리나 스포르차였는데, 임무는 전년도의 15,000피오리노의 급료를 받고 피렌체를 위해 싸웠던 그녀의 막내아들 오타비아노 리아리오와의 용병 계약 건이었다. 작년 말, 그는 선택 사항이었던 다음 해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었다. 그러나, 백작은 그녀의 아저씨는 물론 자신의 머리 위로까지 몰려드는 구름떼를 보면서도 짐짓 속을 숨긴 채, 그 계약 건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문의하였다. 피렌체는 어머니를 자기 편으로 삼기 위해 그 아들을 한 해 더 고용하려고 했지만, 급료로는 10,000피오리노만을 계상하고 있었다. 피렌체가 마키아벨리를 보내 협상코자 한 것은, 유는한 지휘관을 갖춘 500면의 정예 보병대를 확보하고, 가능하다면 피사 전쟁에 쓰일 포탄을 구입하는 일이었다. 히지만 피렌체인드로서는 무엇보다도 인접 지역에 위치하여 그들 나라를 방어하거나 또는 거꾸로 그들을 공격하는 요새로 이용될 수 도 있는 백작광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13일 피레체를 떠난 마키아벨리는 카스트로카로에서 멈추어, 그곳의 군수품 사정과 초병 활동에 관해 정무위원회에 보고하기 시작하였다. 15일 포를리에 도착한 그는 백작을 알현하였다. 아직은 무명인 이 위대한 정치가 앞에 로마냐의 작고 소란스런 국가를 통치하면서 달련된, 아름다운 몸과 드높은 기상으로 유명한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성벽 위에서는 어떤 남성보다도 더 식씩하고 침실에서는 또 어떤 여자보다도 더 뜨거웠던 그녀는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첫 남편인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잃고도, 당당하게 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와 아이들을 위하여 나라를 지켜냈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 남편 역시 살해되자, 그녀는 다시 한번 가차없이 복수하였다. 36세의 나이로 재차 미망인 된 그녀는 조반니 데 메디치를 세 번째 남편으로 맞았는데, 그와의 사이에,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고 스포르차 가계의 호전적 기질과 더불어 어머니의 거침없이 사나운 성격을 이어받은 아들 하나를 두었다.(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 - 옮긴이). 지금은 옆방에서 그리 중요치 않은 협상을 진행중인 그 피렌체의 서기장은 앞으로 언젠가 이 젊은이에게 이탈리아의 마지막 희망을 실은 깃발을 치켜들도록 요청하게 될 것이었다.
우리의 서기장이 이 여장부 앞에 나아갔을 때, 조언이 목적인지 아니면 감독이나 지시가 목적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자신의 거대한 친척이 보낸 사절과 함께 있었다. 그녀의 친척인 밀라나 공은 다시 교황의 버림을 받은 데다, 최근 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진 못하던 피렌치인들과도 사실상 멀어진 상태에서 알프스 산맥으로부터 프랑스군이 눈사태처럼 밀려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병사와 그 외 전쟁 물자 조달이 화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에 대한 협상에서 마키아벨리의 강력한 경쟁 상대인 셈이었다. 마키아벨리가 백작에게 자신의 이두를 얘기하자, (피렌체인들은 언제나 말을 그럴 듯하게 하지만, 정작 그것을 실행하는 데에는 시원치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는데, 이러한 반응은 당시의 피렌체인들이 흔히 접하던 것이었다. 그는 또한 그녀가 밀라노로부터 더 좋은 조건을 제시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자산의 제의에 대한 답을 곧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바로 그 다음 며칠 동안 몇 가지 대답을 받았으므로 앞의 약속 자체는 잘 지켜진 셈이었지만, 그 대답들이라는 것이 각각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던 데 대해서는 (일이란 더 많이 논의될수록 더 잘 알게 되는 법) 이라는 말로 정당화하였다.
마키아벨리는 백작이 (잰 체하고 )있다고 피렌체에 전갈을 보냈다. 그녀의 옆에는 언제나 밀라노의 사절이 지키고 있었으며, 군인들은 계속해서 밀라노로 떠났다. 탄약도 여분이 없다는 말이 전해졌다. 이런 상황 아래 시국에서는 아드리아니가 전투 인력의 수급을 재촉하고 있었다. 서기보인 보오나코르시는 (계약서를 그 귀부인의 코앞에 들이밀어라)라고 말했다. 그러니 물러설 수밖에! 마키아벨리에게는 마치 악마가 살아 있는 여자의 모습으로 자신 앞에 서 잇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마침내 12,000피오리노의 급료를 주기로 하고 합의문에 막 서명하려는 찰나, 그녀는 피렌체가 자국 방어를 서면으로 약속해야 한다는 새로운 요구를 내놓았다. 하지만 피렌체로서는 원래 그것을 다만 말로써 약속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변덕에 접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노한 감정을 더 이상 (말과 제스처로만) 나타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일을 끝맺지 않은 상태로 둔 채 즉시 피렌체로 떠나버렸다.
피렌체에서는 그와 그의 편지에 매우 만족해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마키아벨리가 보낸 편지들로부터 내가 보기에 핵심적 사항이라 생각되는 사실들을 추론해 낸 것이리라. 만일 백작이 사태를 관망하고자 하는 입장이라면, 이는 피렌체인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일이될것인데, 왜냐하면 그 귀부인의 호의와 군대를 얻으려는 다툼에서 시간과 프랑스 왕이야말로 그들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키아벨리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정작 그는 그녀의 아저씨인 밀라노 공이 베네치안 군과 이제 움직이기 시작한 프랑스의 막강한 군대 상이게 일단 갇히게 되면 그녀도 더 이상 (잰 체하지)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비록 그 잘난 여인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 아래로는 야릇한 미소가 결코 그의 입가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8월 1일 피렌체로 돌아온 마키아벨리는 평상시와 같이 다시 서기국 업무에 매달렸다. 부오나코르시가 포를리에서 그에게 보낸 편지들을 믿는다면, 서기국에서는 그의 공백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피사 근교에서의 전투가 다시 가열됨에 따라 업무량도 폭주하고 잇는 상태였다. 마키아벨리가 돌아오던 바로 그날 피사 바로 아래의 진을 치고 있던 피렌체 군은 8월 6일 대포로 성벽을 40브라차(토스카나의 면적 단위로 1braccia는 약 0.3364 제곱 미터 - 옮긴이) 가량 부수었고, 10일에는 로카 디스탐파체 요새를 빼앗았다. 이곳을 빼앗김으로서 도시를 피렌체군에 열어줄 지경에 이르자, 모두가 도망할 궁리를 할 정도로 겁에 질린 피사인들은 항복 조건을 협상하기 위한 대표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적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몰랐던 비텔리는 아직 전투를 시작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승리가 눈앞에 다가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바로 그 시점에 군대를 퇴각시켜 버렸다. 그날과 다음날이 지나갈 때까지도 공격의 징조가 보이지 않자 피사인들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물론 성벽 사이의 부서진 틈으로 비텔리가 잃어버린 기회를 다시 되찾을 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하지만 공격을 재촉하는 정무위원회의 편지(이 중에는(엣소르타토리아 풀케리아 exhortatoria pulcherrima) 가장 아름다운 격문이라는 뜻 - 옮긴이)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이는 제2서기국 문서 속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비록 마키아벨리의 자필은 아니지만 그가 쓴 것으로 보아야 한다)에도 불구하고, 비텔리는 사태를 좀더 지켜보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말라리아로 병력이 크게 손실을 입자, 9월 14일 포위망을 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피렌체에서는 이에 대해 큰 불만을 표시하였다. 한동안 도시는 전쟁 비용 때문에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난 5월이래, 1499년 후반기 동안 봉직할 10인위원회의 새로운 위원들이 선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위원회가 도저히 수행 불가능한 전쟁에 공금을 낭비했다는 오명 때문이었다. 결국 정무위원회가 공석중인 위원회의 역할을 떠맡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마카아벨리의 일이 바뀌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10인위원회의 위원들이 임명되지는 않았지만 위원회 자체는 존재하고 있었고, 또 그 서기국은 오히려 더 바빠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실제에 있어 10인위원회의 서기국은 제2서기국과 거의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참을성 잇게 기다리는 파울로 비텔리의 시중한 성격은 조바심을 자 치는 피렌체인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과거의 비난은 그렇다 치더라도, 스탐파체 사건 이후로는 설사 남을 덜 의심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를 그토록 유명한 용병 대장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허 능력 없고 비겁하다고 욕했을 법하다. 더욱이 이곳은 피렌체가 이니던가. 급기야 사람들은 그의 배반을 입에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앞서의 촉구성 편지에 뒤이어 또다시 비난조의 편지들이 비텔리에게 전달되었는데, 이 역시 마키아벨리에 의해 구술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역정과 불신이 극에 달해, 이에 놀란 비텔 리가 피사를 재차 공략하겠다고 나섰을 때에도 냉담한 반응밖에 얻지 못할 정도였다. 한편, 조바키노 과스코니를 수반으로 새롭게 바뀐 정무위원회는 무언가 일이 진행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토록 녹초가 딘 시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지휘관이 이끄는 전쟁을 계속하기 위한 비용을 더 부담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들 중도에 해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일들이 정무위원회에서 극비로 처리되기는 했지만, 이에 대한 그의 편지들을 통해 우리의 서기장이 계속해서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물론우리는 당시 정무위원들(원문에서는 (Signori)라는 용어를 상용하고 있으나 이는 (priori)와 동일한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 옮긴이) 중 하나가 그의 혈족으로서 알레싼드로의 아들인 또하나의 니콜로 마키아벨리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올로 비텔리를 벌하기 위해 취해진 마키아벨리주의적 방법이 우리의 마키아벨리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경솔하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쨌든 카쉬나로 소환된 비텔리는 관리들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그의 동생 비텔로초는 용케 빠져나갔지만 결국은 뒤에 더 전문적인 추적자에 의해 똑같은 운명을 맞게 되었다. 파올로는 피렌체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그가 정말 결백해서인지 아니면 용감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고 버티다가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렇듯 정의를 내세워 무자비함에 대해 그것은 명백한 불의에 불과하다고 말할 사람도 잇겠지만, 어쨌거나 피렌체인들은 그러한 조치에 크게 만족하였다. 곤팔로니에레와 그 휘하의 관리들은 큰 칭송을 들었다. 그토록 세련되고 예의에 밝은 이 사람들의 정신 깊숙한 곳에서 잔혹한 어떤 기원(앞서 말한 바처럼)이 한 줄기 섬광처럼 솟아올랐던 것이다. 이 평시민 공화국은 그야말로 기꺼이,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명성이 높았던 한 whdawkda군을 시범적으로 처단할 만큼 본보기를 중요시하였다. 귀족 공화국이었던 베네치아가 카르마뇰라에게 가한 조치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이와 같은 일의 진행 방식이 일종의 예술 작품과 같은 것이었고, 당시의 표현을 따르자면 한 국가의 (명성을 드높이는) 것으로 보였다. 아마 마키아벨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건 간에, 비텔리 건을 가혹하다고 비난한 한 루카 서기장의 편지를 가로채 보고는, 스스로를 공화국 (대변인)으로 간주하는 서기장의 전통에 따라 그것에 격렬히 반발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피렌체인들은, 비록 사람과 상황은 다를지라도, 사보나롤라의 경우에서 보는 것 같은 사악한 조치들을 가차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들이 파올로 비텔리의 목을 도끼로 자른 행위는 반드시 정의를 세우려는 것보다는 당시 도시를 옭아매고 잇던 매듭을 잘라버리려고 한 데에 그 본위가 있었다. 일단 그러한 조치가 취해지자, 전쟁과 관련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군은 이미 이탈리아로 들어와 거침없이 진군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도비코 스포르차는 빨리 몸을 피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런 방어책도 생각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롬바르디아의 큰 도시들도 차례차례 침입자의 손으로 떨어져갔다. 그리하여 흑안공은 결국 5년 전의 자산의 손으로 프랑스 군을 이탈리아에 불러들임으로써 스스로 자초했던 눈사태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흑안공이 도주한 지 20일이 채 되지 않아 밀라노와 공국 전체가 프랑스 왕의 손에 들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흑안공과 왕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피렌체는 급히 환영을 표하였고 비록 시기를 놓쳐 조건이 더 나빠지긴 했지만 승리한 쪽과 동맹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이것이 뜻하는 바는 왕의 군대를 빌려 피사를 재탈환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지친 상태였던 피렌체인들은 이로써 다시 거액의 돈을 지출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왕은 자비로 피사를 공략하려 하는 피렌체인들을 돕기 전에, 카테리나 스포르차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추기경이었다가 뒤에 발랑타노아의 전사이자 공작이 된 체사레 보르자를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다. 이는 교황이 왕의 이혼을 특별히 허락해 준 데 대한 보상이었다. 발렌티노(우리는 앞으로 보르자를 이렇게 부르기로 하겠다)는 교회의 군세에다 프랑스 군 원병을 보태고, 여기다가 왕의 이름과 깃발까지 빌린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쉽사리 이몰라와 프를리를 차례로 손에 넣었다. 비록 백작의 용기가 (여자의 가슴처럼 조바심치던 많은 수비군들 틈에서 남성적 기백으로 뭉쳐져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를 자신들의 보호아래 두고 있던 피렌체인들로서는 이는 결코 적지 않은 굴욕이엇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처럼 위험천만한 세력을 이웃에 두게 되었다는 불안감이었다.
프랑스의 욕심은 피렌체인들에게 잠시 숨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왕은 폐위된 흑안공이 공화국에 빌려준 돈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정무위원회는 마키아벨리를 밀라노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월 27일자 편지들을 통해 이미 그가 도착하리라는 사실이 트리불치오의 총독과, 막강한 루앙 추기경의 비서인 뤼숑 주교에서 전달되었으며, 2월 5일에는 사절의 신임장이 작성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날 흑안공의 동생인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이 밀라노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했으며 더욱이 흑안공 자신이 스위스와 독일의 정병을 이끌고 그곳으로 오는 도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죠T다. 그러자 피렌체는 마키아벨리의 출발을 취소하고 사태의 추이를 좀더 지켜보기로 하였다.
흑안공은 놀라운 속도로 자신이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았지만 왕이 되돌아오고 스위스 용병들이 배신하는 통에 빼앗았던 것을 더 빨리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스스로의 자유까지도 상실하고 말았다. (이탈리아 전체를 통틀어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 인물의 생각과 야망이 이제 좁은 감옥의 틀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던 거이다.) 이로써 피렌체인드의 피사 공략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은 이제 모두 사라진 셈이었다. 그란 동시에 피렌체는 프랑스인들이 원하는 조건과 돈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때는 용명을 날린 적도 있지만 지금은 다만 악명만을 가진 스위스 군대, 즉 왕의 가스코뉴 보병이 6월 초하루 보몽의 지휘 아래 피아첸차를 떠나 피렌체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먼저 피렌체 공화국의 부담 아래 볼로냐의 참주를 한번 쥐어짜 보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마키아벨리는 벤티볼리오(볼로냐의 참주 - 옮긴이)의 적벽 성채를 조롱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군대를 이끌고 지나는 길에,
보몽은 벽돌을 몇 개씩이나 빼버렸네.
그 동안 피렌체는 피사 공략에 소요될 비용을 마련하고 있었다. 돈은 기대했던 것보다 잘 걷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롬바르디아 지방 전체를 단 며칠만에 쉽사리 장악했던, 그토록 두려움의 대명사였던 군대가 그 동안의 저항으로 지칠 대로 지친 도시의 성벽 앞에 나타나는 것만으로 싸움은 끝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6월 10일, 피렌체는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루니자나까지 들어온 보몽에게 두 명의 전권 대사를 보냈다. 그들은 푸카 델리 알비치와 조밤바티스타 리돌피였는데, 특히 후자는 당시 공화국에서 최고위직에 잇던 사려 깊은 인물로 여론과는 달리 피사 공략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그들을 보좌하였는데, 그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하루는 전장에서 공사가 10인위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다가, 다른 날은 사무실에서 거꾸로 10인위원회가 대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6월 22일 피렌체에서 편지를 구술하고 있었으나, 24일에는 (그 무시무시한 프랑스 군영에서) 알비치의 서명이 달린 편지를 직접 쓰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군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존재라는 사실이 곧 드러났는데,그것은 그들의 적이었던 피사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고용한 피렌체에 대해 그러하였다.
흑안공이 최근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스위스 용병이 오히려 그들을 고용한 쪽에 칼을 들이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병사들은 훈련되지 않고 광폭한 데다 장군이란 자는 능력과 권위가 모자라는 상황이었다. 여기에다 군인들이 양식을 낭비하거나 숨기는 등의 탐욕과 악의를 자행함으로써 식량이 부족해지자, 곧 난동 사건들이 거의 매일같이 발생하였다. 이런 일이 빈번해지자, 원래 아픈 상태에다, 보몽에게도 스스로 말했듯이 몸과 마음이 다 괴로워진 리돌피는 그만 피렌체로 돌아와버리고 말았다. 그는 이러한 사태가 곧 그들이 프랑스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자신의 말이 얼마나 옳은 것이었던가를 입증한다고 주장하였다. 군영에 홀로 남은 알비치와 마키아벨리는 난동을 부리는 병사들을 제어하려고 노력하였다.
프랑스 군이 이렇듯 시간과 돈을 낭비하면서 느긋하게 전투 준비랍시고 하고 있을 때, 피사의 사절이 군영에 도착하여 도시를 피린체에 넘겨주는 것을 연기하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프랑스 군이 가까이 오고 있을 때 이미 이와 유사한 제의가 있긴 하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피사인들이 유예 기간으로 넉 달을 요구했던 반면, 이제 군대가 성벽 바로 밑에까지 이르자 그 기간이 단 한 달로 줄어들었다. 보몽은 이러한 조건부 항복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마키아벨리의 의견과는 달리 피렌체측 사절이 결렬한 어조로 이에 단호히 반대했기 때문에, 그들은 6월 30일 성벽을 포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졌으나 전황은 바뀐 것 없이 그대로였는데, 왜냐하면 이 (무시무시한) 군대는 결코 자신들이 식량 보급대를 공격할 때와 같은 기백으로 성 안을 향해 진격할 용기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닌 무적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섰다.
진실은 알려졌네.
어찌하면 프랑스인들도 패배할 수 있는가가.
성벽 아래에서의 이러한 한심한 행동 이후에도 병사들의 불손함은 꺽이기는커녕 오히려 켜져 갔으며, 따라서 난동 사태는 나날이 더 악화되어 갔다. 결국 가스코뉴 보병들이 먼저 엉뚱하게 급료가 적다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고, 이어 7월 9일 일단의 스위스 병사들이 전체의 묵인 하에 반란을 일으켜 피렌체 사작을 감금해 벼렸다. 마키아벨리는 그 지옥 같은 난동 속에서도 굽힘없이 그와 함께 있으려 했으나, 알비치는 (피렌체로 돌아가 이 일을 알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곧 이를 짤막하지만 격동적인 어조의 편지에 담았다. 몇 시간 후 사절은 스스로 1,300두카토를 몸값으로 지불하고 풀려났다. 그러나 이 난폭한 행위를 끝으로 수위스 병사들은 떠나가 버렸고, 이로 인해 그토록 손쉽고도 빨리 해렬되리라 생각했던 일이 졸지에 왕에게는 불명에를, 피렌체인들에게는 손해와 조롱 거리를 남기고 끝나 버렸다. 군대가 철수하는 데서 새로이 힘을 얻은 피사인들이 점점 저항에 성공하기 시작하자, 피렌체로서는 프랑스에 사절을 파견하여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동시에 불평을 토로하고 이 사태를 어떻게 손볼 수 있을지를 알아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게 되었다. 이 임무를 맡기기 위해 그들은 알비치에 이어 피사 공략전에 파견되었던 프란체스코 델라 카사와 함께, 이 일의 진행 과장을 가장 소상히 아는 인물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선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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