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2장 서기장 마키아벨리
1998년 5월 28일, 80인회는 까다로운 심사 절차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게 젊은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제2서기장으로 선출하였다. 사보나롤라가 처형된 지 겨우 닷새 뒤의 일이었다. 전기 작가들은 지금까지 마키아벨리에게 이러한 길을 열어준 것이 바로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의 몰락이었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식으로 그는 당시의 경험으로부터 하나하나 교훈을 얻어가고 있었다. 사실 이미 그 해 2월부터 서기국의 한 하위 관직을 얻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든 그는 사보나몰라와 그를 따르던 읍도파의 몰라긍로 갑자기 더 좋은 기회를 맞게 되었다. 읍도파들 가운데는 다름아닌 제2서기장 알레싼드로 부라치가 들어 있었으며, 아울러 그의 자리를 놓고 니콜로와 경쟁했을 만한 몇몇 인물들로 끼어 있었던 서이다. 니콜로의 임명 건이 6월 15일 80인회의 심의를 통과하고 법에 따라 대평의회 Consiglio Maggiore(베네치아의 경우를 본따 14새게말에 도입된 일종의 민회. 그 규모가 최대일 때는 구성원의 수가 약 3,000명에까지 이르렀다 - 옮긴이)의 최종 결정에 부쳤을 때, 그의 경쟁자로 나선 사람들이 공립대학 pubblico studio(스투디오란 르레상스기의 대학을 일컫는 말 - 옯긴이)의 수사학 교수였던 프란체스코 가티와 공증인 안드레아 디 로몰로, 그리고 순교자에 대한 재판 과정을 조작함으로써 악명을 얻었던 바로 그 프란체스코 디 세르 바로네였다는 사실은 결코 의미 없는 일이라고 흘려보낼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재능이 뛰어나지는 않아도 서기적에 오래 종사한 두 인물과 불량배로 악명 높지만 그 무혈 혁명에서 공을 세원 한 인물을 제치고, 비록 재능은 뛰어나지만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고 경험도 일천한 젊은이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마키아벨리는 6월 19일 제2서기국의 장으로 선임되었다.
그곳은 물론 권위나 위엄에서 공화국의 제1서기장과 비교될 수 없었지만 중요한 자리였다. 이 두 관직에 대해 잘 아리지 못하고 혼동하는 경우도 있었고, 둘을 동등한 위치에 놓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이제 더 연륜이 많고 그 일에 더 능숙한 사람들이 젊은 새 서기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때까지 도시 내에서 명성은커녕 연대기에서든 공사(공사)의 문서에서든 그에 대한 언급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던 마키아벨리는 29세의 나이에 마치 신화의 주인공처럼 성숙한 용사의 모습으로 사람들 깊숙한 곳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서기국의 관직들은 설사 그것이 보좌직이라 해도 박사나 공증인이나 어느 정도의 명성을 가진 문필가로 채워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관례는 시민 모두로 선출자 자격을 확대한 1498년 2월 13일의 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선임자나 동료들, 또는 후임자나 부하들을 막론하고 누구나 그러한 자격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문학사에서 기억되거나 적어도 다른 학자의 글 속에 언급될 만한 글들을 남겼다. 반면에 그는 공문서상의 명치에서 (메쎄레 messere)난 (세레 sere)라는 칭호가 붙지 않는 사실에서 보듯이 박사도, 공증인도 아니었다. 또한 산물이든 시든 간에 그의 생에 전반기에 씌어졌다고 확신할 만한 작품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이 주요 저술은 물론이고 약간이라도 주목할 만한 소품들조차도 모두가 명백하게 생애의 후반기, 아니 후반기의 또 후반부인 서기장 재직 이후에 씌어진 것이다. 얼마 되지 않는 사육제 시편들 약간과 연애시 몇 편의 제작 연대를 그의 젊은 시절로 비정해 볼 수도 있으나, 이는 단지 그러한 추측을 반증하지 못해서일 뿐이지 결코 더 강력한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가족과 친족이라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확실히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 우리는 그가 쓴 1497년 12월 2일자 편지를 들 수 있다. 그 내용은 전 (마키아벨리 가) 전체를 대신하여 부유한 파냐 교구 교회의 소유권을 요구하는 파치 가의 주장을 일축하고 그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음을 페루자의 추기경 조반니 로페즈에게 탄원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쓴 것으로서 날짜가 명기된 최초의 글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 가가 아직은 젊은 나이의 니콜로에게 이러한 일을 시킨 것은 사실 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당시 아버지인 베르나르도가 가장으로서 여전히 생존해 있었을 뿐 아니라 법학 박사에다 결코 문재(문재)가 없었던 것도 아니가 때문이다. 어쨌든 이 편지가 그의 재능을 내보이고 있으며 법률가 풍의 장중함 아래 장래 대작가로서의 간결하고 단호한 문체의 일단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역시 이 문제에 관해 추기경에게 서간을 보낸 정무위원회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이 편지의 결과 마키아벨리 가가 교회의 소유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니콜라가 마키아벨리 가라는 자신의 문중 안에서 문제를 인정받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시민들 누구에게가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지금 우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문필가들 중 제일 말석을 차지했던 인물들까지도 그 이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그의 이름은 들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당시의 나이까지 그가 쓴 글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은, 그가 문필가고 활동한 적이 없다는 거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 그의 생애 전반기에 대한 이러한 모호함은 후반기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어느 정도 해명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는 말보다는 일을 더 사랑했으며, 문필보다는 삶을 더 좋아하였다. 그는 생각이 메마른 자신의 동시대인들이나 동료들 대부분과는 달리 결코 문필가는 아니었다. 그가 저작 활동은 시작한 것은 스스로의 (오랜 경험)이 이미 자신의 젊은 시절을 살찌운 바로 그 (끊임없는 독서)를 기름지게 만들고 비교의 재료를 제공하고 난 이후였다. 사실 그 전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리라. 왜냐하면 경험이 결여된 도서란 무익할 뿐이었을 것이며, 거꾸로 그러한 독서가 없었다면 그것을 통해 본 일들을 경험 속에서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사 이러한 사실이 그의 문을 열고 가려진 젊은 시절의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줌으로써 성숙한 시절의 저작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열쇠가 된다 하더라도, 그의 서기장 선출을 둘러싼 작은 비밀을 해명하는 데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일 지난 세기의 몇몇 학자들이 한 말대로 그가 1494년이나 1495년 이후 보좌직 또는 그 보다 하위 직급으로 서기국에서 근무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점이 명료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그 같은 주장을 한 누구도 이를 입증하려 하지 않거나 혹은 많은 오류에 빠짐으로써, 그러한 주장에 담겨 있을지도 모를 일말의 신빙성조차도 빼앗아가 버렸다. 엉뚱한 문서를 바탕으로 피렌체 서기국에 대한 그러한 주장을 지지하려 했던 한 역사가는 진실로 (어이없는 웃음과 측은함의 대상이 될 법한) 실수를 범한 셈이었다. 그러므로 니콜로의 선출을 둘러싼 비밀을 밝혀줄 수도 있는 견습시절에 대한 희망 섞인 추측은 더욱 신빙성 있는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제쳐놓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그것은 마키아벨리 스스로가 (국정술의 연구에) 전념했던 날들을 세고 있는 한 유명한 편지의 냉용과도 모순된다. 왜냐하면 그가 센 햇수 속에는 분명히 서기직으로 보냈던 날들 모두가 포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피렌체 서기국을 연구한 앞의 역사가는 니콜로의 선임이 1498년 4월 30일에 있었던 한 결의 사항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가설을 내놓고 있다. 이 결의에 따르면, 사절을 타국에 파견할 때면 젊은이들이 국정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청년 하나를 대동케 하였다. 하지만 (연대기 작가 파렌티에 의하면)(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희망으로 부풀게 했던) 이러한 특별 조치가 우리의 문제와 어떤 관련을 맺었을 가능성은 없다. 다만 마키아벨리가 그러한 조치 이전에라도, 그를 이어 뒤에 서기장이 된 도나토 잔노티(23장을 보면 1527년 6월초 메디치 가를 축출한 공화 정부가 마키아벨리가 봉직했던 서기장 자리에 프란체스코 타루지를 임명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는 얼핏 역시 1527년 잔노티가 마키아벨리를 이어 서기장직에 올랐다는 이 장에서의 언급과 상충되는 듯이 보일 수도 있다. 이에 관하 s사실을 정확히 말하자면, 타루지는 1527년 6월 10일 경 10인위원회 서기장직에 임명되었고, 잔노티는 같은 해 9월 23일 타루지의 후임으로 이 직에 선임되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죽은 지 약 석 달 후의 일이었다 - 옮긴이)가 그랬듯이 어던 사절들을 따라 외국에 나갔다 왔을 개연성이 없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가설도 버리고 나면 이제 아주 그럴 듯한 추정 한 가지가 남는다. 즉 그의 재능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그의 당시 조건에 비하면 그래도 높은 이 관직이 그에게 돌아간 데는, 누군가 명망 잇는 시민 또는 서기국과 관련이 있으면서 동시에 정무위원회에 힘을 가진 인물의 영향력이 작용했으리라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마르첼로 비르질리오 아드리아니라는 이름을 마음에 떠올리게 된다. 그는 마키아벨리가 제2서기장에 오른 해와 같은 1498년 2월 13일 스칼라의 후임으로 공화국의 제1서기장, 즉 제1서기국의 장으로 취임한 인물로 조비오가 마키아벨리의 선생이었다고 말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우연의 일치일까?)
조비오가 진실을 쓰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일부러 진실이 아닌 것을 더 자주 쓰려고 했으며, 마키아벨리 역시 그의 악의와 중상의 피해를 입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는 이 사실의 단편은 비록 정확성은 부족하겠지만 완전히 엉터리는 아님이 분명하다. 조비오는 적어도 그가 쓴 (우리 시대의 역사 Historiae sui temporis)로 인해 많은 피렌체인들과 사이가 벌어지기전까지는 피렌체 및 그 시민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위의 사실을 성급하게 폐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마키아벨리의 주요 전기 작가들도 그가 제멋대로 지어낸 세부 사실들은 제외하고라도 마키아벨리가 마르첼로 비르질리오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는 점만은 진정하고 있다. 무론 여기에는 마키아벨리가 그에게서 라틴어를 배웠으리라는 추측은 당연히 배제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은 부친인 베르나르도의 (비망록)에 의해 부정되기 전에 이미 몇 가지 이유에서 잘못되고 자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전기 작가들은 마라첼로 비르질리오와 마키아벨리 사이가 어떤 식으로든 선생과 자제의 관계는 될 수 없었을 것이라든가, 또는 학식에서 차이가 지는 친구간에 배움을 나누는 통상적인 관계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단호하게 아드리아니가 마키아벨리의 선생이었다고 확언하기는 않겠다. 하지만 그들이 나이라는 잘못된 근거를 내세워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려고 했다는 점만은 밝히고 싶다. 그들의 주장인즉, 마키아벨리는 아드리아니보다 불과 5살 아래였기 때문에 (하지만 사실은 9살 연하였다) 제자가 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누구라도 이러한 주장이 우스꽝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아드리아니는 피렌체 공립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9살이나 어린 마키아벨리가(5살 아래라도 마찬가지지만) 왜 그의 강의를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드리아니가 마키아벨리를 천거했다는 것은 단지 조비오의 글에 근거한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는 어쨌든 합리적인 데가 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지금까지 찾고 있었던 그의 서기장 선출을 해명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사실상 성채 안의 성주와도 같은 존재였던 아드리아니야말로 그의 학생이라고 생각되던 사람을 그 성채로 들어오게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또한 그 누구도 정무위원회에 사람을 천거하는 데 있어 그보다 큰 권위를 지닌 인물은 없었으며, 정무위원회라고 해서 그의 보좌역이자 가장 가까운 협력자를 뽑는 일에 굳이 이래라 저래라 반대 의사를 표명할 리는 없었다. 일단 그가 정무위원회를 설득하기만 하면, 그것의 권위를 빌려 (복잡한 후보 지명과 심사)에도 불구하고 80인회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사람을 뽑는 것이 별로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며, 더욱이 대평의회에서는 더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특히 그곳에서의 마지막 심사에서 마키아벨리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가티였고 체코네가 그 뒤를 잇고 있었는데, 이 중 가티는 메디치파 열성분자가 아닌가 의심받고 있었으며 체코네는 야비하게 그를 이용했던 사람들조차도 경멸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드리아니와 마키아벨리가 조비오의 말처럼 사제지간이 아니라 단지 친구 사이였을 뿐이라고 해도, 그가 마키아벨리의 선임에 찬성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정무위원회에서 함께 일하던 시절, 두 사람 사이가 정말로 친구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찾기 힘들다. 심지어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제2서기장의 장남이 제1서기장을 대부로 맞게 되었을 때, 아드리아니가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편지에도 둘이 가깝거나 친밀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같은 부서의 동료들이 쓴 편지들 속에서는 그러한 느낌이 흘러넘치고 있는데 말이다. 사실 한쪽은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쪽은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엄숙하고 오만하기까지 한 아드리아니로서는 길들여지지 않고 쾌활한 성격의 젊은 동료에게 편안함을 느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궁정식의 장중한 품위를 유지하려는 아드리아니와는 달리 꾸밈없이 글쓰고 꾸밈없이 살아가고자 했던(매우 활기찬 성격의 소유자였던)것이다. 운이 따라서건 재능 덕분이건, 아니면 둘 다가 작용했건 간에, 어쨌든 마키아벨리가 서기장이 되었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서기장이란 직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보는 일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피렌체 공화국에는 제1서기장과 제2서기장이 있었는데, 비록 전자의 권위 또는 적어도 그의 영향력이 후자를 덮고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가가가 제1서기국과 제2서기국을 책임지고 있었다. 원래 제1서기국은 대외 관계와 외교서신을, 제2서기국은 국내 관계와 전쟁을 관장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각의 역할이 바뀌고 중첩되었다. 10인위원회가 기능하는 동안은 일의 일부가 그곳 서기국으로 이관되었는데, 제2서기국은 결국 10인위원회와 합쳐지거나 일의 구분이 없어지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10인위원회와 합쳐지거나 일의 구분이 없어지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10인위원회 역시 정무위원회가 제1서기국을 통해 그렇게 한 것처럼 외국에 파견된 사절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다시 관청들간의 일이 얼마나 뒤섞여 있는 상태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정무위원회가 시작한 외교 서신을 10인위원회가 이어받아 답하고 있는 경우까지도 보인다(두 관청의 서기장들은 각각 대외. 대내 관계 서신을 구분하는 비망록과 자료철을 가지고 있었다.) 두 기관 사이의 차이란 단지 각각이 실제로 맡은 일과 그것을 기록한 장부상의 차이였을 뿐이었기 때문에, 정무위원회와 10인 위원회는 사실상 종종 같은 기능을 가졌던 셈이다.
이 두 기관 사이에서 두 서기국은 내정, 외교, 전쟁 등 모든 일에 관여했으며, 더욱이 공화국 고위 장관들이 짧은 임기로 계속 교체되었기 때문에 일이 어떻게 풀려나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것은 그들뿐이었다. 서기국은 여러 번에 걸쳐 개편되었는데, 당시 가장 최근의 개편은 서기장 바르톨로메오 스칼라가 사망한 직후인 1498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따른 주요 관직의 선임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제1서기국의 경우, 330피오니노 봉인금화를 연봉으로 받는 제1서기장에는 마르첼로 비르질리오 아드리아니, 80피오리노 연봉의 서기보에는 안토니오 델라 발레가 임명되었다. 제2서기국에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서기국 장의 임무를 동시에 관장하는 (정무위원회 서기장 il segretario della Signoria)으로서 연봉은 역시 봉인금활로 192피오리노였는데, 이는 대금화(대금화)로 따져서 128피오리노를 약간 상회하는 가치가 있었다.(피오리노 화폐는 원래 중세초에 은화로 제작되었으나, 1252년 금화 fiorino d'oro로 주조되었다. 이 금화의 앞면에는 피렌체의 수호 성인인 세례 요한상이, 뒷면에는 도시의 문장인 백합이 새겨져 있었다. largo(=fiorino d'oro in oro)이며, 다른 하나가 역시 본문 중에 언급되고 있는 봉인금화 fiorino di suggello(=소금화 fiorino piccolo)이다. 대금화란 말은 금화 둘레가 커져서 무게도 늘어났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고, 봉인금화란 말은 그것의 무게를 달고 질을 검사한 후 지갑이나 상자에다 넣어 봉인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이 당시의 화폐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R. Ridolfi, Opuscoli, p. 169 ; N. Machiavelli, Machiavelli and His Friends : Their Personal Correspondence, tr. & ed. by James B. Atkinson and David Sices (DeBalb., 1996), p. 440, n. 2 ; L. Martines, The social World of the Florentine Humanists 1390 - 1460 (Princeton, 1963, p. 128,m n. 154 ; E. R. Chamberlin, the world of the Italian Renaissance (London, 1982), Appendix I - 옮긴이). 그리고 서기보는 아코스티노 베스푸치와 안드레아 디 로몰로로서 가각 봉인금화 96 피오리노아 60피오리노의 연봉을 받았다. 이들은 비아조 부오나코르시를 비롯한 또 다른 서기보들과 함께 때로는 10인위원회 서기장을 보좌하곤 하였다. 이 10인위원회 서기국은 얼마 후인 7월 14일의 결의에 따라 마키아벨리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직무나 봉급 또는 부하 직원의 면면에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는 다만 명목상 자신이 섬겨야 할 상급자를 10명 더 가지게 되었을 따름이다.
마키아벨리가 맡게 된 직책의 성격에 관해 당시의 전기 작가들이나 문필가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인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직책 자체가 무어라 규정하기 어렵고 논란이 많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마키아벨리의 시대에조차도 일의 내용이 분명하지 않았을뿐더러 그것도 필요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직책을 공화국의 제1서기장 직과 혼동하여 그를 살루타니, 브루니, 포초, 스칼라 등의 인물들과 같은 등급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잘못을 고친다면서 거꾸로 마키아벨리에게 부연된 직책의 중요성과 권위를 깡그리 무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2서기국의 (책임자는 니콜라우스 마클라벨류스)라는 기록이 1500년의 서기국 공식 명부에 버젓이 올라 있으며, 1502년의 명부에는 좀더 명시적으로 그를 가리켜 직접 (제2서기장)이라 부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는 법적인 측면을 넘어 실제적 측면에서 제2서기국의 장이었다.)고 말한 일급의 한 문학사가 비판하면서, 그가 (계속해서) 서기장 직에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했던 앞서의 피렌체 서기국 연구가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어떤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평판이야말로 거의 직관적으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수많은 학자들의 어리석은 주장들을 교정케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피렌체의 서기장 Segretario fiorentino)이란 호칭은 그가 쓴 서명들 중 하나를 글자 그대로 옮긴 것으로, 역사적으로도 정확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오랫동안 바로 이러한 이름으로 불리고 인용되었으며, 마키아벨리라는 그 위대한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을 때에도 이러한 호칭 아래 그의 저작들이 출판되었다. 살루타티도 브루니도, 비록 그들이 최고의 명성을 지닌 서기장으로서 살아 생전에는 이탈리아의 도시와 궁정으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처럼 별칭으로 불리는 영예를 누리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영예는 지금 우리가 서기국의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음을 알게 된 바로 그 인물, 젊고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도 않으며 자신감과 재능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그 인물에게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동시와 이탈리아에 대해 (나 여기에 있노라!)라는 그 유명한 말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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