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1장 초년기의 교육과 경험
(비록 늦기는 했지만) 마키아벨리의 시대는 그 스스로 보는 바에 의해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던 기억 덕분으로, 피렌체의 옛 생활 방식을 여전히 접할 수 있던 바로 그러한 시기였다. 소길드 세력의 약호로 1382년에 성립되어 1387년 개혁되고 1393년에는 마소 델리 알비치에 의해 조직이 개선, 강화된 유력 시민 정부 il governo di Ottimati는 공화국에 유례 없는 행복과 위대함을 가져다주었다. 비록 단테가 카차귀다 시대의 코무네(코무네 정부를 그린 것만큼은 절제 있고 품격이 높지는 못하지만, 메디치 가의 집권으로 부패가 만연하기 전, 니콜로 다 우차노와 마소 델리 알비치 시대의 피렌체는 여전히 도덕이 살아 있던 도시였다. 부가 넘치고 상업이 활발하며 세련된 기술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영민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찼던 당시의 건축물들은 최상의 모습을 뽐냈다. 뒤에 사보나롤라가 경멸 조로 말했듯이, 비록 종교적 성소롤 지어졌던 건물이 사실은 각 가문의 무기고로 이용되기는 했지만, 코지모 데 메디치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이 도시의 기질을 안다. 우리는 50년도 못 가 쓰러지겠지만 이 건물들은 여전히 건재할 것이다.) 이러한 절제된 화려함을 예술적 품위와 문학적 우아함으로 세련미를 더했다. 공적 의례는 장엄성을 과시한 반면, 사적 생활은 이탈리아 어느 곳보다도 높은 수준의 문화와 예법을 보여주고 있었다.
통치력은 훌륭한 법률보다는 지도의 덕성에서 나왔다. 비록 정치 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직에 선임되었고 그 중 소수는 직접 정치를 담당하게 되었지만, 설사 불의와 권력 남용의 경우가 있었다 해도 그것조차 정의의 외양을 가지고 적절한 정도를 넘지 않도록 배려되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침해받고 있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정치적 인물을 훈련시키는 이러한 어려운 과정은 관직에 들어가기 전, 이미 도시의 명망 잇는 사람들의 상점이나 사무실에서 이 평민적 도시에 어울리는 소박한 방식으로 행하여졌다. 그들의 명망은 재산보다는 분별력에 연유한 것으로, 그들은 결코 최고위의 관직에서 중대한 국가사를 맡은 뒤에도 자신들의 사무실과 상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이렇게 단순 소박하다는 면에서 그들은 훌륭한 전기 작가인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가 비교한 바 있는 (그러한 고대 로마인들과) 매우 닮아 있었다. 사실 우아함을 갖춘 로마적 자유가 있다고 찬양해 마지않았던 당시 한 시임의 말과 같이 15세기 피렌체에서 마키아벨리 역시 종종 그랬던 것처럼 인물과 사건들을 로마의 경우와 비교하고자 하는 유혹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정당화 될 수 있었을 듯하다.
이들 피렌체의 유력 시민들은 경쟁적인 베네치아 공화국의 귀족들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다. 글은 평민 귀족으로서, 분명코 인민 주권의 형식을 초대한 존중하려던 사람들이었다. 인민들은 그들을 (동등자 중 일인자)와 같은 존재로 간주하면서 그들의 통치 아래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들은 지도자들의 지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시장이나 상점 혹은 선술집에 앉아 정무궁Palazzo에서 진행되는 극히 세련되고 섬세한 정치 게임을 받아들였다. 우리 시대의 입헌 군주와 같이, 인민들은 다만 명목상의 주권에 만족하면서 정치를 소수의 지도자들에게 맡게 놓았던 것이다. 메디치 가 역시 그들이 지배한 처음 50년간은 이러한 게임의 힘든 규칙을 지켰고, 그것을 잘 준수할수록 더 나은 통치를 해나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앞서의 과두정권 아래서 향유되었던 풍습과 삶과 만족감이 코지모든 피에로든 또는 로렌초든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일인 통치 아래서도 얼마간 지속되었다. 합법적이지는 않았지만 사실성의 군주였던 그들은 끊임없이 신변을 경계하면서도 무력으로 통치하기보다는 결코 신민이 아닌 동등 시민들의 동의에 의거하여 다스렸던 것이다. 이러한 평민 군주들은 스스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미묘한 방식으로 그들이 선호하는 인물을 장관직에 앉히고 통혼과 관직 분배로 부와 호의에 균형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질시와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며, 거의 모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배려였을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태어나 째는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죽은 바로 그 해였다. 코지모의 뒤를 이어 피렌체의 시민 군주가 된 피에로는 그 자리를 다시 아들인 로렌초와 주리아노엑 물려주었다. 마키아벨리는 볼테라의 반란(1472)에서 야기된 무자비한 복수와 신의의 파기를 알기에는 당시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1478년 파치가 사건이 발생했을 때쯤에는 이미 라틴 자가들을 읽고 있었다. 그때 그는 도시의 명망가라는 인물들이 자신들의 질시와 원한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은폐하고, 최악의 교황이었던 시스토 4세의 묵인 아래 그의 조카들이 허망한 탐욕으로 음모를 꾀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음모자들 중에는 피사 대주교와 교황의 혈족인 젊은 추기경 리아리오도 들어 있었다. 음모를 실행하기 위해 택한 시간과 장소는 성체 봉현 미사가 있던 성당이었다. 줄리아노는 사해되었으나 로펜초는 죽음을 면하였다. 대주교와 많은 공범자들은 그들이 헛되이 차지하려 했던 정무궁 창 밖으로 목이 매달렸으며, 길거리에서 군중들에 의해 찢긴 그들의 시체는 여러 날 동안 참혹스러운 광경을 연출하였다.
교황은 줄리아노의 죽음에 대해 어색한 위로의 말을 전한 뒤,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그는 교수형에 처해진 대주교보다는 자신의 혈족으로 당시 억류 중이던 추기경에 각별한 관심을 표하였다. 추기경은 결국 풀려났으나, 뒤에 마키아벨리가 말했듯이 (교황은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고 자신과 {나폴리}왕의 모든 세력을 규합하여 피렌체를 공격)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사실에 의거하여 마키아벨리주의적 교의를 이끌어내었던 것이다. 26) 교황은 세속적인 무기를 쓰기 전에, 먼저 정신적 무기로 로렌초와 장관들을 파문에 처함과 아울러 도시 전체를 금력으로 묶어버렸다. 니콜로의 말처럼, 이러한 조치는 피렌체 시민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무기는 이미 그것의 옹용과 사용자의 악명으로 무뎌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정신적 공격이 피렌체인들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해도, 군대의 공격으로 그들은 지쳤고 마침내는 포초 임페리알레에서의 패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는 용병대의 전례 없는 비겁성에서 기인했는데, 이는 시민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었고 특히 니콜로에게는 대단히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피렌체사 Istorie fiorentine)에서 이에 관해 언급하기 오래 전, 이미 마음속에 그 일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아니 메디치 가는 로렌초의 대담한 결정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남자답게 이 전쟁의 책임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나폴리 왕의 손에 맡김으로써 결국 명예를 손상치 않고 평화를 얻어내었다. 물론 이에 대해 교황은 즉시 반대하였으나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피렌체에서 로렌초의 명성을 최고조에 달했다. (니콜로가 어른이 되어 썼듯이)(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릇 어떤 일에 대한 평가는 원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그 결과에 달려 있는 법인 것이다.
그 뒤에 발생한 사건들은 로렌초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는 이미 정치적 지략을 발휘하여 이탈리아에서의 세력 균형을 시도하고 있었다. 당시의 어떤 전쟁에서도 피렌체 공화국의 영토는 침범받지 않았다. 단지 평화라는 한마디를 하고 숨을 거둔 시스토 4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린 롬바르디아 전쟁이나, 피렌체가 새로운 교황 인노첸초 8세에 대항하여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와 동맹한 제후들의 전쟁(1486)에서도 피렌체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제 17살이 된 니콜로는 후자의 전쟁을 통해 용병의 경악스러운 행태에 대한 관찰의 새로운 자료를 모을 기회를 얻었으며, 왕의 행동으로부터 (현명한) 군주라면 (신민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잔혹하다는 악명도 개의치 않을 수 )있는 지 또는 한번 한 약속을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어떻게 파기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신의 파기의 기술을 그에게 더 장 보여 준 인물은 인노첸초의 뒤를 이은 새 교황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2 princip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알레싼드로 6세는 남을 속이는 일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또한 언제나 속일 사람들을 찾아내었다. 그보다 더 효과적으로 어떤 것을 설득하고 또 굳게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만은 항상 성공하였다.) 그는 이와 유사한 책략을 이탈리아의 여러 궁정에서의 일상사와, 인근 로마냐에서 빈번했던 가족 학살(1488)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피렌체의 자유는 장갑(장갑)으로 은폐된 로렌초의 철권 아래서 소리 없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1470년 1471년 사이, 1480년 1490년에 각각 10년 간격으로 행해진 개혁으로 정보 요직은 점점 더 로렌초의 측근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이로써 그의 권력은 더욱 확고해졌다. 자유의 쇠퇴와 함께, 앞서 말한 바 있던 도시의 옛 생활 방식도 사라져갔으며, 이제는 다만 적어도 그 마지막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한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시대의 변화와 다른 궁정들의 영향 아래 운명적으로 유입된 부패는 정치에서 시작하여 종국에는 풍숩마저 물들였으나, 로렌초는 이를 오히려 통치상의 일환으로 이용하였다. 미키아벨리의 세대가 파행적 사회상을 민감하게 느끼게 된 것도 정확히 바로 이 시기였다. 뒤에 피렌체인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그 같은 부패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그는 당시의 부패상을 더욱 직설적이고 신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잇다. (다름 사람들을 더욱 교묘하게 파멸시킬수록 더 지혜롭고 존경받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 역시 이러한 배경으로부터 이론과 실제의 양면에서 어떤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당시는 사치와 오락, 호색과 남색(남색)(이른바(피렌체의 악습)이라 불리던 것)이 만연하고 그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사라져가던 때였다. 언제나 그러하듯이(그리고 마키아벨리도 언급하고 잇는 바와 같이), 도덕의 이완은 종교의 쇠퇴를 가져오게 마련이었다. 세속적 악습은 사제와 수도사들의 부패에 일부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그들이 빚어낸 결과적 현상이었다. 가장 극단적인 예는 안레싼드로 6세가 교황에 즉위한 이후 로마에서 나타났다. 세간의 이러한 악습과 로렌초의 부패한 통치에 반기를 들고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질타의 목소리를 드높인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 위대한 수도사는 1482년부터 1487년 사이 피렌체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별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1490년 중반에 돌아온 그는 이민 끊임없는 설교와 명상과 기도로 강해져 있었으며 충고와 계시를 통해 스스로의 소명을 확신하고 있었다. 복귀 후 자신이 행한 새로운 설교 방식이 호응을 얻은 데 고무된 그는, 악습과 그것으로 악명 놓은 이물들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로렌초는 협박과 회유로 그를 침묵시켜 보려고 했으나, 그는 로렌초의 최근 개혁을 격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결국, 로렌초가 1492년에 죽고 이어 1494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입으로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의 정권이 정복되자, 사보나롤라는 투쟁의 승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예언자이자 성인의 삶을 사는 임룰로 존경하게 되었으며, 프랑스 약탕과 내란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고 새로운 평시민 정부 governo popolare(여기서 (평시민 popole)이라 함은, 귀족적 신분인 상층의 부유 시민 popolani grassi 및 유력 시민 ottimati, gran야, maggiori과 하층인 소시민popolo minuto사이에 위치하는 계층으로, 그 구성 요소는 시간과 장소에 딸라 다양하게 변하지만 주로 조합의 마스터나 중간 이상의 상인들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때에 따라 사회 계층을 평시민과 소시민의 둘로 나누기도 하는데, 이 경우 평시민에는 상층의 시민 계층까지 포함된다. 이들은 시민 계급 박R의 대중들 moltitudine과는 rqnsaudgl 구별된다. 시민들로 이루어진 대평의회 Consiglio maggiore의 구성원 수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귀족 공화정과 평시민 공화정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이 책 곳곳에서 나오는 (평시민 정부)란 곧 후자의 경우이다 - 옮긴이)를 통해 자유를 고무하고 촉진시민 데 대해 감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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