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1장 초년기의 교육과 경험
아르노 강이 사보나롤라의 몸을 불태운 화형의 찌꺼기를 여전히 실어 보내고 있을 때, 피렌체 공화국에서는 그 수도사의 체포 직후 시작된 하나의 혁명이 조용히 마감되고 있었다. 읍도파(읍도파, I Piagnoni :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피렌체에서 사보나롤라파를 반대파가 깔보는 투로 부르던 말 - 옯긴이) 관리들은 모두 관직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는 반대파 사람들로 채워졌다. 처음에는 10인 위원회 I Dieci, 8인감찰위원회 gli Otto di Guardia, 정무위원회i Collegi della Signoria등이 폐지되었고, 점차 하위 관직까지 사보라롤라에 반대하거나 혹은 그를 공격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와는 무관한 사람들에게로 넘어갔다. 당시 그에게 더 노골적으로 반대했던 사람일수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기국에서 해임된 읍도파들 중에서 (피렌체 시(시) 찬가 De illust ratione urbis Florentiae)라는 시를 썼던 휴머니스트 우골리노 베리노 외에, 제2서기국의 서기장이었던 알레싼드로 부라치(혹은 브라체시)가 들어 있었다. 브라치는 때때로 격노파(격노파, kli Arrabbiati: 성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사보나롤라의 개혁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가리킴 - 옮긴이) 성향의 정무위원회와 읍도판 지지의 10인위원회 사이에 끼어 일을 어렵사리 처리해 나깆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사보나롤라에 대한 교황의 분노를 달래보려고 끝까지 노심초사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브르키엘로 풍의 풍자 시인이자 유려한 라틴 시인이었던2) 그의 후임으로 80인회 il Consiglio degli Ottanta는 무명의 청년인 니콜로 디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를 임명하였다.
비록 마키아벨리 가(가)가 도시의 유력 가문은 아니었다 해도, 그 기원조차 불분명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발 디 페사에서 도시로 이주해 왔으며, 몬테스페르톨리의 옛 군주들과 혈연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들은 곧 좋은 시민이 되었다. 빌라니 연대기에는 마키아벨리가가 1260년의 대패배 이후 피렌체서 쫓겨났다가 뒤에 (전면 복귀한)교황파의 주요 가문으로서, 바르바도리 가, 카니자니 가, 소데리니 가와 함께 을트라느노 구(구)의 (이름 있는 시민 집안)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도시의 많은 관직을 역임했는데, 그 중에서 21명의 곤팔로니에레 gonfaloniere(르네상스기 피렌체의 최고 행정 수반인 정무위원회 의장을 가리키던 관직명. 베네치아의 도제Doge에 해당된다. 중세 이탈리아 도식국가에는 민병대를 보유할 수 있는 행정구역 gonfalone들이 있었는데, 곤팔로니에레란 중앙 정부에 대해 그러한 구역을 책임지는 관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원래의 말뜻 그대로 보자면, 군기(군기, gonfalone)를 든 기수라는 의미이다. 이를 정무위원장이나 정무총감 혹은 행정장관 등으로 옮기는 것은 마치 왕과 같이 더 높은 직위 아래에 있는 하위직인 듯한 인상을 주므로 적절치 않다고 생각된다. 비이탈리아권의 학자들 역시 대개 원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 옮긴이)와 54명의 정무위원 periore(조합의 요직이나 정무위원회의 위원을 가리키는 말. 원래는 교회의 주요한 직책들{나라와 시기에 따라 다양함}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옮긴이)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도시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유일한 사람은 지롤라모라는 인물로, 그는 과두 정부에 공공연이 반대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추방되었다가 결국은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3)
마키아벨리 가가 (부유 시민 poploani grasssi)으로서 품위 있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상업보다는 발 디 페사에 소유한 토지 덕분이었다. 당시 다른 가계들에 비해 사정이 좋지 않았던 곳은 베르나르도 디 니폴로 디 부오닌세냐 집안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형편이 빈한한 것을 들어 그가 아마도 사생아 가계 출신이 아닌가 의심했으며, 나로서는 믿기 힘들지만, 이것이 빌미가 되어 뒤에 그가 사생아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토토 마키아벨리의 유산을 상속받아 형편이 약간 나아지기는 했지만 이러한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열심히 일하고 극히 절약하지 않으면 가계를 유지하기가 매우 힘든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법학 박사였던 그는 마르카에서 회계사 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5)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피렌체에서 그는 법률가로서 일한 적이 거의 없었고 간혹 그런 기회가 있었다해도 보수는 극히 적었다. 대신 그는 사려 깊고 엄격하게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재산을 관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최근까지도 아려져 있진 않았던 베르나르도의 (비망록 Libro di Ricordi)이라는 귀중한 자료가 발굴됨으로써, 우리는 그가 비록 본성보다는 궁핍 때문이겠지만 약간 인색한 편이며, 주의 깊은 성격에다 다소 괴팍한 데가 있으나 그렇다고 저급하지는 않은 인물이었음을 알게되었다. 그는 돈 문제에 신경을 쓰면서도 공부가 주는 위안도 아는 사람이었다. 베르나르도는 결코 사치할 만한 여유를 갖고 있지 못했으며 안락은커녕 최소한의 생활도 유지하기 힘들 때가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때로는 책 살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야말로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결점이자 동시에 유일한 열정이었다. 그는 언제나 아직 철하지 않은 책을 사서 스스로 제본하는 애정을 보였으며, 때로는 채식(채식)을 가하기도 하였다. 만일 책을 사지 못하면 즉시 그것을 빌려 보았으며, 법률서뿐 아니라 인문학에 관한 책들도 읽었다. 피렌체에 인쇄술이 소개된 것은 그가 비망록을 쓰기 시작한 지 불과 사 년전의 일이었으나, 인쇄본을 멀리한 당시의 부유한 애서가들과는 달리 그는 탐욕스럽다고 하 만큼 그 이점을 이용하였다. 그는 초기의 피펜체 인쇄업자들 중 하나인 니콜로 델라 마냐로부터 인쇄 예정인 리비우스의 책 한 부를 받아 그 속에 나오는 지명을 색인하는 일을 맡았다. 12첩의 종이를 쓰면서 무려 아홉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애쓴 대가로 드디어 그는 자신이 열망하던 책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 베르나르도에게서 1469년 5월 3일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태어났다. 위로는 이미 프리마베라와 마르게리타라는 우아한 이름을 가진 누나가 둘 있었으며, 남동생을 재산을 남겨준 아저씨의 이름을 따서 토토라고 불리웠다. 어머니는 바르톨로메야 데 넬리오, 그 집안의 한 가문록 작가는 그녀가 몇 편의 종교시를 썼다고 말한 바 있으나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모계 유전에 관한 현대의 유전학 이론들에 비추어볼 때, 니콜로의 일생을 불태웠던 시적 재능이 어디에서 연유했는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유전적이든 본받아서든 간에 공부에 대한 애정을 물려받았다. 아버지 베르나르도의 기록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유년기 공부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1476년 5월 6일 니콜로는 마테오라는 선생으로부터 라틴어 공부의 첫걸음에 해당하는 (도나텔로 Donatello)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 일곱 살이었는데, 이 나이는 당시의 교육적 통례에 합치되는 것이었다. 다음 해에 들어 그는 산 베네데토 교회의 바티스타 다 포피를 새로운 문법 선생으로 맞게 되었다. (소년은 많은 노력을 했고, 또 그것을 참을성 있게 견뎌냈다......,) 지루하게 마련인 유년기의 공부 짬짬이, 그는 아마도 아버지의 초라한 시골집이 있던 산탄드레아의 숲이나 혹은 외가의 시골집을 둘러싼 무젤로의 몬테부이아노 성벽 폐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뛰어다녔을 것이다. 1480년에 그는 산수도 함께 배우기 시작하였다. 베르나르도는 한 해 전에 그의 친척 두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피렌체인들을 희생시킨 전염병에 걸려 몸져 누웠으나 기적적으로 회복 된 후 빈약한 수입과 함께 식구가 줄어들었음을 신고하면서 아이들에 대해 (니콜로는 11살, 토토는 5살로 둘 다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다음해에 두 아니가 파올로 다 론칠리오네라는 선생에게 공부를 배우고 있음을 보게 된다. 토토가 (도나텔로)를 붙잡고 씨름하는 동안, (니콜로는 어느 정도 라틴어를 하게 되었다). 즉 로마의 말로 이미 짤막한 글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가 결혼할 무렵에야 겨우 라틴어를 배웠다는 조비오의 악의적인 말이 거짓임을 말해 준다.(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그의 말에 현혹되고 있다.!)
반면 니콜로는 그리스어를 배운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아마 초보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결코 그를 학자로 만들 생각이 없었으며 니콜로 자신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생각이 어떻든 간에 그러기에는 아마 돈이 모자랐을 것이다. 그가 읽었던 것들은 분명히 그 시대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럴 듯한 구절들을 외우면서 숙독했을 그런 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성년이 되어 말했던 역사에 대한(끊임없는 독서)가 마치 위대한 소명처럼 바로 이러한 유년시절에 시작되었을 것임을 상상하고 또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읽게 되는 역사가인 유스티누스 Marcus Junianus Justinus17)(기원전 3세기경에 살았던 로마 역사기. 필리푸스 시대의 역사 Historiarum Philippicarum)를 썼는데, 이는 기원전 1세기경 폼페이우스 트로구스기 쓴 같은 제목의 책을 요약한 것임 - 옮긴이)는 그의 아버지의 서가에 없었지만 사려 깊은 베르나르도는 재빨리 그것을 빌려서 니콜로가 12살이 되어 이미 (라틴어를 하고 있을) 무렵에야 되돌려주었다. 반면 그는 비온도의 (로마제국사Deche)(폴라비오 비온도 {1392-1463}의 역사서 Historiaurm ab inclinatione Romanourm decades(1437-1442)는 그 제목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바와는 달리, 고대 로마제국사가 아니라, 5세기경의 서로마제국의 쇠망에서부터 바로 자신의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의 행적을 중심으로 다룬, 현재의 관점으로는 최초의 유럽 중세사이다. 서양에서는 이 책명을 줄여서 흔히 Decades(=Deche)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 역사서가 10권씩으로 묶여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옮긴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더욱이 리비우스의 저술들도 소장하고 있었다. 베르나르도는 아마도 어렵게 색인 작업을 한 대가로 얻었음직한 그 저술들을 1486년에 제본한 것 같다. 당시 17세였던 니콜로는 그 귀중한 책을 찾으러 제본업자에게 갔으며, 아버지가 시골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제본비 조로(붉은 포도주 세병과 식초 한 병)을 주었다. 아버지의 이와 같은 기록들을 읽노라면, 니콜로가 언젠가 이야기했던, (나는 빈한하게 태어나서, 즐거움보다는 궁핍을 먼저 알게 되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마키아벨리가 고전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고 중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당시 피렌체의 가장 명망 있는 휴머니스트들의 학식과 비교한 것으로, 최근의 연구는 그 의미에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는 라틴 자가들 중 오직 역사가들에게만 관심을 가졌을 뿐) 이라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번역된 희극 작품들을 베끼거나 모방했을 뿐 아니라 그 유명도와 인기에 연연함이 없이 시들을 읽었다. 그는 단테에 매혹되어 라틴 시인들 중에서도 가장 단테적이라고 일컬어져 왔던 루크레티우슬 옮기어 베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각별히 즐거운 일이다. 그는 필사본 혹은 활자본 상태의 라틴어 번역으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크세노폰, 헤로디아노스, 투키디데스, 폴리비오스를 일고 인용하였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열의를 가지고 진지하게 마키아벨리의 교양과 고전적 바탕이라는 문제에 관해 다룬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명시적으로 기록하고 있거나 암묵적으로 인용했거나 또는 적어도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는 작가들의 일람표 하나라도, 고전 고대에 대한 그의 인식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져 온 지식의 범위를 크게 넓혀줄 것이다. 단정하기는 힘들겠지만, 그가 분명히 연구하거나 읽은 저술가들을 전체적으로 파악한다면 우리가 마찬가지로 불분명하게 알고 잇는 여러 사실들이 다른 각도에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마키아벨리의 인생을 중반에 이르기까지 살찌웠던(고대사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였음이 틀림없다. 그 이후의 생애는 보다 더 (현대사에 대한 오랜 경험) 속에서 보내게 되며, 우리는 다음의 장들을 통하여 이러한 편력을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먼저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바로 그 시기에 스스로 목격했던 사건들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뒤에 말했듯이, 인생 초년에 보고 들었던 것들이 (젋은 마음에(......) 어쩔 수 없이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바, 이는 (모든 인생행로에서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것이었다. 그가 인간 행위에 대해 내세운 보편 진리들은 다름 아닌 스스로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씌어졌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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