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왜? - 여성 억압의 어제와 오늘 : 서진영
제1부 : 하늘에서 땅으로
2. 원시 시대의 가족
1) 가족, 자연의 요구 원시 시대의 여성의 지위를 결정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가족의 형태이다. 원시 시대의 가족은 최초의, 유일한 사회 조직이었다. 가족도 다른 사회 조직처럼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그러나 최초의 가족이 어떤 모습이었을까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바는 매우 적다. 가족을 구성하는 것은 어느 정도 고등한 동물에서는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동물들이 얼마간 지속적인 가족을 형성하는 가장 일차적이고 보편적인 요인은 임신한(혹은 부화중인) 암컷과 새끼의 부양이다. 동물들은 각기 고유한 종족 번식의 방법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그들이 자연에 적응해 온 오랜 기간에 걸쳐 본능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인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정적이다. 암수가 짝을 짓는 형태나 새끼를 부양하는 방법에 대해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암컷의 임신(혹은 부화) 기간이 길고 새끼를 적게 낳을수록, 그리고 새끼가 태어나서 자립할 때까지의 기간이 길고 태어난 후에 배워야 하는 것이 많을수록 가족 관계는 지속적이고 가족간의 정서적 유대 관계도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보다 고등한 동물일수록 강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원숭이는 새끼를 오랫동안 키우면서 먹이를 얻는 법, 위험을 피하는 법 등을 가르친다. 고등 포유류에서는 대개 수컷이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우리는 대부분의 포유류들에서뿐 아니라 조류나 어떤 종류의 파충류, 양서류, 심지어 곤충들에서조차도 눈물겨운 모성애와 부성애를 확인할 수 있다. 또 가족의 형태나 지속성은 먹이를 취하는 방식, 생존 방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호랑이의 경우 새끼를 낳은 직후부터 암컷이 활동을 할 수 있으며 주로 혼자서 사냥을 한다는 사실은 암컷만이 새끼를 돌보고 수컷은 혼자서 살아가는 그들의 생존 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맹수의 먹이가 되는 보다 약한 초식 동물들은 무리를 지어 살면서 새끼를 공동으로 보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물의 가족을 인간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가족 역시 인간이라는 종이 자신의 종족을 보존하는 방법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즉 가족의 가장 기본적이고 흔들릴 수 없는 기초는 남성과 여성이 합하여 자식을 낳는다는 것이고, 자식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부모의 물질적, 정신적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보다 임신 기간과 산후 회복 기간이 길고, 적은 수의 자식을 낳으며, 자식의 성장기가 길고, 또한 아무리 단순한 인간 사회라도 언어, 전통,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많은 노력가 노동(점점 많아지는)이 필요하며 이 노동은 가족간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장과 생활에는 감정적 유대와 상호 교류가 반드시 필요하다. 요컨대 자식의 성장과 성인의 생활에 필요한 상호 협력과 의존이 인간 가족의 지속성과 단일성, 강력한 감정적 유대의 궁극적인 기초이다. 물론, 남녀의 결합은 종의 번식을 위한 의식적인 의도에서라기보다는 자연적인 충동에서 비롯된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의 목적이 곧장 자녀의 출산은 아니다. 오히려 보다 많은 경우 자녀의 출산은 결혼의 결과이며, 때로는 예기치 않은 부산물이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에게 이 부산물을 어쩌면 결혼 자체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도록 함으로써 역으로 결혼을 지속하도록 만들었다.
2) 가족의 옛 모습 요컨대 가족은 한편으로는 종족 보존의 본능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녀를 기르고 생활하기 위한 남녀의 협업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가족은 각각의 사회와 역사적 시기에 있어 이에 합당한 형태를 향해 발전해 왔다. 그 과정은 일률적이지 않다. 자연 조건, 노동 방식, 문화적 요인들이 가족의 형태에 영향을 미쳤다. 현존 원시 사회에서나,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 사회들에서나 가족의 모습은 실로 천차 만별이다. 원시 사회의 가족의 형태는 군혼과 단혼, 모계제와 부계제, 모처제와 부처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현존 원시 사회를 볼 때 수렵, 채집 사회의 가족 구성은 절반 이상이 남편, 아내, 자녀들로 구성된 소규모의 핵가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대규모의 가족은 농경이 발달된 이후에 비로소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앞에서 말했듯이 가족이 자년 양육을 위한 부부의 협력에 기초해 있으며, 그 원초적인 형태가 집단혼보다는 단혼에 보다 가깝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 노동 방식의 변화가 가족의 형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단혼을 현재의 일부일처제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선 안된다. 인간의 가족은 매우 원시적인 상태로부터 발전해 왔다. 초기의 인류에게는 성교에서 어떤 금기가 없었을 것이다. 즉 처음에는 형제 자매간의 성교는 물론, 부모와 자식간의 성교도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는 역사적으로 광범위하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성서를 보면 형제 자매간의 결혼은 다반사이고 아버지와 딸의 성교도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근친혼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불과 수백 년 전의 일이다.
신라 시대 왕실의 경우, 기록이 확실한 53건의 결혼 중 13건이 부계 혈족혼, 즉 근친혼이었는데, 신분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원시 시대의 관행이 남아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 시대에도 광종, 덕종, 문종의 왕비는 그들의 친 여동생이었으며 경종, 성종, 예종의 왕비는 그들의 종자매였다. 고려 왕실의 기록에 나타난 왕비 51 명 중에서 동성혼이 22 명이나 된다. 기록되어 전해오는 것은 이러한 왕실의 혼인 뿐이지만, 근친혼의 풍습이 왕실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을 것임은 명백하다. 근친혼을 금지한 것은 고려 11 대 문종 때부터(1080 년경)이며,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근친 상간은 조선조에까지도 답습되어, 근친혼을 곤장 80-100 대로 다스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원시 상태로부터 근친혼에 대한 금기가 발달해 왔다. 이는 한편으로는 근친혼의 유해한 우생학적 결과를 막기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와 자식, 부부와 형제 자매의 관계가 혼동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생겨났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혼동은 가족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또 단혼과 함께 여러 가지 형태의 집단혼을 발견할 수 있다. 단혼은 부부의 성적 자유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결혼은 보다 쉽게 해체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푸에블로 서쪽에 거주하는 호피(Hopi)족의 경우, 부부 관계는 쉽게 해체될 수 있고 이혼율이 약 34%였다고 한다. 이때의 남녀 관계가 자유로왔다는 것은 부족 국가가 출현한 이후에도 전해 내려온 원시 시대의 유습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가장 느리게 변화하는 제사 의식에서 보존되어 왔는데,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고구려와 부여의 백성들은 10월의 제천 행사 때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들어 큰 무리를 이루어 연일 먹고 마시며 노래와 춤으로 밤을 지새웠으며, 이 기간은 "귀천이 없는 절기"로서 이 기간 중 남녀간에 생긴 애정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신라에서도 제천 행사 때에는 남녀가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일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즐겼다. 고구려인들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곧 결혼을 하였으며, 이러한 풍속은 이미 유교 윤리를 익힌 중국인들의 눈에 음란하게 보일 정도였다. 또한 고려 시대에도 자유로운 남녀 관계가 일반 백성들 사이에는 많이 남아 있었다. 중국 송나라 서경이 고려 사회를 보고 쓴 '고려도경'에는 남녀가 구별없이 시냇가에서 옷을 벗고 목욕하며, 결혼하는 데 있어서 "가볍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고 놀라고 있다. 고려 시대의 종교 행사인 연등회, 팔관회 등에서도 뭇 남녀가 집단적으로 자리를 같이하여 즐기었다. 조선 시대에 와서 유교를 숭상한 양반들에 의해 '남녀 상열지사'라고 매도당한 고려 시대의 고려 장가는 자유로운 남녀 관계를 전해준다.
얼음위에 댓잎자리보아 임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얼음위에 댓잎자리보아 임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정둔 오늘 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하략)(주12) (전략) 삼장사에 불공드리러 갔더니 그 절 주지스님 내 손목을 잡더이다 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나거들랑 조그만 상좌중아 네말이라 하리라 더러듕성 다리러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위 다로로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같이 울창한 곳 없거니 (하략)(주13)
원시 사회의 초기부터 부부와 자식으로 구성된 단혼 가족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으리라는 가정은 기존의 모계제나 부계제 가족에 대한 상과는 맞지 않는다. 모계제와 부계제의 문제에 대해 로위는 순수하게 모계적이거나 순수하게 부계적인 사회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버지를 전혀 계산에 넣지 않는 모계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계제와 부계제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것이었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로위는 가족은 모계와 부계 양계적 원칙으로, 동족 조직은 단계적 친척 관계로 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가족 단위는 언제나 어머니와 아버지, 그들의 자식들로 구성된 반면, 친족 조직은 모계나 부계 어느 한 편으로 되었다는 것이다.(주14) 여기서 모계냐 부계냐는 가족의 형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 상속이 모계를 따르는가 부계를 따르는가를 규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친족 제도가 모계냐 부계냐를 결정한 주요한 요인은 그 사회의 주요한 산업과 그 담당자가 어느 쪽이냐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물려주어야 할 기술과 전통, 사회적 유산 혹은 귀중품이나 도구 등 재산의 소유자가 어느 쪽이냐에 따라 모계냐 부계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머덕의 '민족지'에 따르면 약 862개의 원시 사회 중 모계제 사회는 약 100개 정도인데, 이는 원예 농경의 형태를 갖는 호미 경작 사회이고, 부계제는 대개 잉여물이 생기는 농경이나 가축 사육 사회라고 한다. 원시 농경의 담당자가 주로 여성이었고, 농경, 목축의 담당자가 주로 남성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는 식량 조달에서 남녀의 위치와 상속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즉 원시 시대에 부계가 발달하는 주요한 요소는 식량을 획득하는 데서 남자가 차지하는 위치였을 것이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역시 그 자식과 강력한 유대로 묶였다.
그러나 또한 앞의 예로부터 모계제가 좀더 원시 시대 초기의 가족 형태이고, 부계제는 보다 후기의 형태일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잉여 생산물이 생기는 단계는 원시 시대가 문명으로 넘어가는 시점으로 원시 농경보다 후기이다. 또한 부계는 부부 관계가 보다 안정적이고 단혼이 보다 확립된 경우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부계는 모계 가족보다는 좀더 후기에 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원시 시대의 대부분의 경우에 여성들이 식량 획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므로 모계 가족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모계 씨족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러한 모계 씨족의 존재는 현존하는 원시 부족의 경우 외에도 여러 나라의 신화와 전설, 단어의 어원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대개의 건국 신화나 영웅 설화를 보면 그 어머니는 지상에 존재하는 것이 명백하지만 아버지는 여자가 길을 가다 알을 주워 먹고 자식을 낳았다든지 하는 식으로 명백하지 않으며, 부권이 확립된 후세에 와서야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식으로 덧붙여진 경우가 많다. 또 단군 신화의 '웅녀'이야기, 성명의 성자가 여자가 낳았다는 뜻을 가졌다는 사실, 중국의 고대 성씨에 여자 변을 가진 성씨가 많다는 것 등등이 모계 씨족의 존재를 말해준다. 유태인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관습상 신랑과 신부의 어머니가 성이 같아선 안된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신라 상대의 석씨와 김씨 제왕이 박씨인 혁거세의 제사를 지낸 것은 혁거세가 그들의 외조나 외조의 외조가 되기 때문이었으며, 신라 하대의 박씨왕이 김씨왕의 제사를 행한 것도 같은 이유였는데, 이는 모계의 유습이다. 이러한 모계의 유습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까지 남아 있었으며 거의 완전히 부계로 바뀐 것은 조선 시대 후기에 와서였다.
3) 장가 오는 남자 노동에서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과 함께 가족이 여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모계제로 인해 여자는 동일한 씨족에 속하고 남자는 다양한 다른 씨족으로 흩어진다는 사실은 원시 시대의 여성 우위의 현시적 기초였다. 즉 모계 씨족의 족외혼 규칙에 의해 남자들은 결혼을 하게 되면 자신이 태어난 씨족을 떠나 다른 씨족으로 옮겨 갔다. 성경을 보면 창세기 2장 24절에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또 리빙스턴은 '남아프리카에서의 전도 여행과 탐험'에서 여성들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토인 부족의 생활을 전해주고 있다. 특히 잠베이의 바론다인들은 여성들이 평의회를 열며 결혼한 남자는 자신의 부락을 떠나 아내의 부락으로 옮겨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는 장모에게 평생 동안 나무를 공급할 의무를 진다. 만일 이혼하면 자식은 어머니의 소유로 남는다. 그 대신에 여자는 남자를 부양한다. 몇몇 부부의 경우이긴 하지만 남자는 결코 반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리빙스턴은 전해 주고 있다. 그리고 여자를 노엽게 한 남자에게는 굶기는 벌을 내렸다. 또한 당시 대우혼이 행해지던 이러쿼이 세네아카족 내에서 수년간 선교 활동을 한 A.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여성들은 다른 씨족의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들였다. 모든 물건은 공유였으나 너무 게을러서 자기 몫의 일을 하지 못하는 남편이나 애인은 가련하게도 여기서 제외되었다. 그가 아무리 많은 자식과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어느 때고 명령 한마디면 봇짐을 싸고 나가야만 했다. 그가 이 명령에 거역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거역하고서는 배겨날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씨족으로 돌아가든가(대개의 경우 그랬지만)다른 씨족에서 새로운 혼인 상대를 찾아야 했다. 여성은 씨족 내에서, 그리고 모든 곳에서 최대의 권력자였다. 여성들은 필요할 때는 족장을 파면하여 일반 졸병으로 만드는 일까지도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이런 모계 사회의 유풍은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해모수와 유화 아씨가 야합하는 대목을 보면 "서민은 서민과 결혼하나 남자가 반드시 여자의 부모에게 가서 폐백을 드리고 사위됨을 재걸 삼걸 한 위에 그 부모의 허락을 얻어 결혼하며, 그 결혼한 뒤에는 남자가 여자의 부모를 위하여 그 집에 머슴이 되어 3 년의 고역을 다하고 딴 살림을 차리어 자유의 가정이 되는 것인고로"라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여전히 모계 씨족 사회의 결혼 풍속이 잔존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풍속은 조선 전기까지도 약간의 모습을 달리하면서 꾸준히 유지되었다. 즉 고려 시대까지는 결혼한 딸과 사위와 외손자를 포함하는 가족, 사위의 입장에서 보면 장인, 장모를 포함하는 가족이 이상적인 가족이었다. 장가간다는 말도 '장인,장모의 집으로 간다'는 뜻이다. 이러한 제도는 조선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유명 무실하게 되었는데, 그 명맥만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즉 혼례시 신랑이 신부집으로 초행을 하여 3일을 지내고 함께 시집으로 가는 풍습이 그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문이나 지역에 따라서는 석달이나 때로는 해를 넘겨 '달묵이', '해묵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현존하는 원시 사회를 총체적으로 분석한 결과, 원시 농경 사회는 모계제이며, 대부분의 모계제나 원예 농경 사회에서는 모처제의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원시 사회의 모계제는 여성의 생산 노동에서의 위치와 함께 원시 시대 여성의 높은 지위를 결정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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