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왜? - 여성 억압의 어제와 오늘 : 서진영
제1부 : 하늘에서 땅으로
오랫동안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가 불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믿었다. 그것은 그들이 생각한 우주에서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밑에 있는 것처럼 불변하는 법칙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른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여성의 지위 변화는 여성의 예속이 특정한 시대와 사회적 조건들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낳았다. 문명 이전의 인류의 역사에 관한 새로운 지식들이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여성의 지위가 시대와 사회마다 다른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여성의 지위를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요인들은 어떤 것인가? 그런 요인들은 인류 역사의 다른 요인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남녀간의 불평등은 계급적 불평등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런 문제들은 여성 문제를 이해하는 출발점일 뿐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는 길잡이이기도 하다. 여성 억압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연구는 인간의 본성과 여성 문제의 본질에 관한 이해와 결부되어 있으며, 나아가 여성 해방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실천적 과제와 결부되어 있다. 여성 억압의 기원은 여성 문제에 관한 이론의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문제이며, 여성 문제에 관한 모든 이론의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여성 억압이 처음 생겨난 때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제1장 원시 사회의 여성
1. 풍요의 여신 원시 시대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매우 불완전하다. 더욱이 인류 최초의 조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나 적다. 최초의 인류와 진화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거의 대부분은 최근 30 년 동안에 이룩된 것이다. 1950 년대까지 사람들은 인류가 약 1백만 년 전에 지구상에 나타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59 년 거의 25 년 동안 아프리카의 들판을 헤맨 끝에 세계 최초의 인류라고 생각되는 화석을 발견한 루이스 리키와 매리 루키 부부는 이 화석이 200 만 년 전 것임을 밝혔다. 그후 다시 매리 리키는 350 만 년 전에 살았던 오스트랄로피테신의 발자국 화석을 발견했다. 분자생물학자인 빈센트 살리치 박사는 혈액 단백질의 유전자를 분석하여 인류가 약 4,5백만 년 전에 침팬지와 인간의 공동의 조상으로부터 분리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류가 출현한 것은 최소한 2백만 년에서 4,5백만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인류가 문명 시대에 들어간 것은 가장 빠른 지역에서도 약 5천 년 내지 일만 년 전 정도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의 99~99.9%가 원시 시대였다. 이 아득한 옛날의 기나긴 세월 동안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 시기는 생물학적인 진화가 인류의 발전을 선도하였다. 프래드글래인박사는 2백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신 그레사일과 150 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신 로버스트의 이빨 화석이 갈린 모양을 분석하여 그들이 과일이나 나뭇잎 등 채식을 했다고 주장했다. 억센 앞발도, 날카로운 송곳니도 없는 유인원은 최초에는 다른 동물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의 두뇌는 아직 원숭이의 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최초로 사냥을 한 인류로 알려진 것은 호모 일렉투스다. 사냥에 적합한 도구를 발명함으로써 비로소 인류는 숲 속에서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고, 나아가 다른 동물을 지배하게 되었다.
원시 시대를 연구하는 데에는 화석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인류학자들은 현존하는 원시 사회를 연구함으로써 옛날의 원시 사회를 밝히고자 한다. 그러나 이 사회들을 통해 원시 시대에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많다. 이 사회들의 대부분은 수렵과 채집을 하고 있으며 원시 농경 사회도 있다. 현존하는 원시 사회는 전체 원시 시대에서 보면 완전히 후기의 사회이다. 뿐만 아니라 문명 사회와의 접촉을 통해 변모된 것도 많고, 단지 몇몇 부족의 생활이 과연 전체 원시 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각각의 특수성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신화나 전설을 분석하여 원시 시대의 삶을 추적했다. 신화와 전설 역시 오랜 세월에 걸쳐 각색되어 왔기 때문에 이를 통해 순수한 원시 시대의 상을 추출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작업들을 통해서 우리는 원시 시대에 대해 말해 주는 몇 가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 지식은 무엇보다도 우선, 문명 사회에 비해 현저히 평등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에는 생산력의 발전 수준이 매우 낮아서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의 생산물, 즉 잉여 생산물을 생산하지 못했다. 모든 사회 성원들이 그때그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동을 해야 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착취할 가능성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생산 도구들도 보잘 것 없었고 생산물도 적었기 때문에 각자의 소유물 역시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생산력이 낮은 사회의 생산 관계는 공산적 관계였다. 즉 모든 사회 성원들이 공동으로 일하여 그 성과를 공동으로 분배했다. 기록 영화 『부시맨』은 남자들은 공동으로 사냥을 하고 여자들은 채집을 하여 어른부터 아이까지 골고루 제 몫을 분배받아 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노동이 발달하지 않은 사회의 조직은 기본적으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혈연적 조직이었다. 생산을 둘러싼 인간 관계가 혈연 관계로부터 독립될 정도로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혈연적인 관계 내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여성의 지위는 어떠했으며, 그것을 규정한 요인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현존 원시 부족들에서 여성의 지위는 다양하다. 그것은 자연 조건, 노동 방식, 가족의 형태, 전쟁의 빈도 등에 달려 있다. 먼저 중요한 요인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전쟁이다. 인간의 두뇌가 발달함에 따라 인간은 동물과 환경을 지배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고, 자기의 동료 이외에는 무서운 적이 사라지게 되었다. 먹을 것, 혹은 보다 나은 생활 조건을 위한 각 집단간의 투쟁이 벌어졌다. 직접적인 인류 내부의 살생 투쟁이 생존의 조건의 하나가 되었다. 공동체 내부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평등하고 협조적이었던 이 단계에서 전쟁은 주로 부족과 부족 사이처럼 서로 다른 공동체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전쟁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수록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개인이나 집단의 위치가 강화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엘빈 토플러가 말했듯이 폭력은 경제적 요인, 지식 등과 함께 지금까지 역사에서 권력의 주요한 기반의 하나였다. 전쟁은 통상적으로 남자의 일이었고 전쟁이 생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수록 남자들의 지위가 높았다. 자연 환경도 수렵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자연 조건이 나쁜 곳일수록 여성의 지위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는 자연 조건이 성별 분업과 생산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식물이 거의 살 수 없는 혹독한 자연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서는 남자들의 사냥에 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에스키모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가장 낮았던 반면, 먹을 것을 구하기가 보다 쉽고 여자들이 거기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숲지대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훨씬 나았다. 또한 종교와 같은 문화적인 요인도 영향을 미쳤다. 많은 원시 사회에서 여성들이 주술사나 제사장, 주술로 병을 고치는 의사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성은 영적인 세계, 천계, 초월적인 힘의 중재자였다. 이런 역할을 하는 여성들은 높은 존경을 받았고 부락의 일에 대해 많은 권한을 가졌다.
또 하나의, 그리고 보다 중심적이고 주도적이며 다른 요소를 규정하는 요인은 노동의 발달과 그 안에서 여성의 역할이었다. 노동이 발전함에 따라서 최초로 나타난 분업은 성별 분업이었다. 예를 들면 사냥이 먹을 것을 구하는 주요한 방법의 하나가 되자 이는 주로 남자의 일이 되었다. 거프는 175개 현존 수렵 채집 사회의 97%에서 사냥은 남자의 일로 한정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는 사냥을 위해서는 며칠씩 들판을 뛰어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부시맨에 관한 관찰은 이를 잘 보여주는데, 남자들은 독화살로 기린을 쏜 후, 기린이 기진해서 쓰러질 때까지 사나흘 동안을 기린을 쫓아 들판을 헤맨다. 여자들은 아이를 돌봐야 했으므로 사냥은 당연히 주로 남자의 일이 되었다. 여자들은 집 주위에서 채집 활동을 했다. 그녀들은 수백 가지 식물의 다양한 이용법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지식이 여성들로 하여금 원시 농경을 시작하게 했다. 이런 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노동 분업은 남녀의 지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즉 그 사회의 주요한 산업을 맡은 쪽이 주도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현존 원시 사회를 보면 그 사회의 생계 유지를 채집에 의존할수록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높았고, 사냥에 의존할수록 남자들의 권리가 강했다. 수렵이 도구와 생산력의 발달을 주도한 중요한 산업이었던 많은 초기 수렵 사회에서 여성들은 부차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종속 정도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고, 대개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렵 사회라 하더라도 대개 채집 노동이 식량 조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원시 부족들을 연구한 결과, 고기는 수렵 사회의 경우에도 총 음식물의 20~40%정도만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콩, 이파리, 뿌리, 호두, 버섯 등의 식물로 충당하였다. 특히 사냥을 할 수 없는 건기에는 식량의 대부분을 여자들이 조달했다. 어느 곳에서나 가족의 생계는 떠돌아다니며 사냥을 하는 남편이나 아들보다는 집에 머물러 있는 여자들의 노고에 더욱 의존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짐승들을 고되게 쫓아다니다가 빈손으로 스스로 배를 곯으며 집으로 찾아드는 것은 실제로 원시인들에게는 흔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푸성귀는 남자들뿐 아니라 나머지 가족 모두에게 중요한 식품이었다.
원시 농경의 발달과 함께 여성의 지위는 보다 높아졌다. 원시 농경을 발명하고 주도한 것이 채집을 맡았던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현존 원시 사회에 대한 실증적 분석에서도 나타나는데, "여성이 평등하거나 남성보다 약간 우세한 여성 중심적 사회는 초기 수렵 사회보다 초기 정착 사회에서 상당수 발견"된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원시 농업을 창안하고 주도했으며 따라서 생산 노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연구 보고들에서도 나타난다.
여성들은 식물을 채집하는 과정에서 곡괭이와 같은 도구를 발명하였다. 호주의 센트럴 빅토리아의 원주민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쓰여진 보고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즉 그 지역에서는 여자와 어린이들이 고구마와 같은 식물의 뿌리를 캐내기 위해서 막대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 막대기는 불로 달구어 단단하게 만들고, 그 끝을 뾰족하게 간 것이었다. 이렇게 뿌리를 캐기 위해 땅을 파헤친 것은 농경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은 사냥한 짐승을 가축으로 사육하는 법과 씨를 뿌려서 작물을 거두는 원시 농경 기술까지도 발명해 내었다.
원시 농경을 여성들이 주도했다는 것은 신화나 제사 의식에도 반영되어 있다. 많은 사회에서 여성은 농경과 관련된 여러 제사 의식에서 제사장으로 주역을 맡았으며, 신격화되기도 했다. 그리스 풍요의 여신 데메테르와 세메즈라든지 독일 풍요의 여신 프리카 등이 그 예이며,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농업 신으로서 신모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주몽이 부여에서 위태롭게 되어 남으로 망명할 적에 신모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가라고 싸주었으나 이별하는 슬픔에 그 보리 종자를 잊어버렸던 것을 신모는 사자인 비둘기로 하여금 주몽에게 보냈다.
원시 농경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생산에서의 역할과 여성의 지위와의 상관 관계를 잘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노동을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시대의 주요한 산업의 담당자인가, 생산력의 발전을 선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생산 노동에서의 중심적인 역할은 단순히 여성들이 양적으로 많은 노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그 사회의 노동 중에서 중심이 되는 산업과 분야를 담당한다는 의미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생산이 갖는 의미만으로 여성의 지위를 설명할 수 없다면서 그 이유로 만약 그것만으로 설명해낼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19세기의 노동자나 농민의 생활과 사회적 지위가 훨씬 나아져야만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첫째로 무계급 사회인 원시사회와 계급 사회를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 계급 사회는 소유를 통해 자신은 노동하지 않고 타인을 착취할 수 있으므로, 소유라는 요소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로 19세기 노동자나 농민 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낮았던 것은 여성들이 양적, 시간적으로 더 많은 노동을 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그 사회의 부차적인 산업과 노동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또한 생산에서의 역할이 여성의 지위에 규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생산에서의 역할만이 여성의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자연 조건, 가족의 형태, 전쟁의 빈도와 폭력의 필요성,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총화로서 인류 발생 초기부터 발달해 온 문화 등 여성의 지위에 영향을 미친 요소들이 많으며, 그 때문에 각 사회의 여성들의 삶이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요소들 중에서 생산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다른 요소들에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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