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눈 - 호미고메 요조
제12장. 나 자신을 알아야 객관적 진실도 알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앞 장의 결론을 이어받아 역사에 있어서 주관성이 라는 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볼 것입니다. 요컨대 역사는 본래 주관적인 물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 결과로 얻어지는 인식 역시 아무래도 주관적인 성질을 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도 학문인 이상 이러한 주관성을 가능한 한 객관적인 것으로 바꿔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을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도 인용한 바 있는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보면, 영국의 대표적 중세사 연구가인 옥스퍼드 대학의 퍼워크 교수가 한 말을 인용하고 있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 역사를 해석하려는 욕구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어지간히 건설적인 사고방식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자칫 신비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라는 대목입니다. 카아는 이 말 속에 있는 건설적인 사고 방식 이라는 이색적인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설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입장에서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그 역사를 해석하려는 욕구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라는 구절입니다. 왜 역사를 해석하려는 욕구가 그다지도 강한 것일까요? 제가 이제까지 언급해온 내용과 관련지어 말씀드리면, 결국 우리의 역사에 대한 물음은 좀 더 깊이 캐들어가다 보면 우리의 역사관 내지 역사적 세계관과 맞닿게 되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해석의 욕구가 그렇게도 강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카아는 따로 설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나름대로의 설명을 덧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문제를 설명함에 있어 또 한가지 예를 들고자 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 혹은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 문제를 설명하는 데 아주 적절한 예이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가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을 제공해주기 때문은 아닙니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기는 하나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가 이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을 제공해주진 않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 있어서의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문제 내지는 역사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우리의 역사적 세계관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매우 심각한 형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예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선정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됩니다. 방금 저는 매우 심각한 형태로 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마르크스가 학문이나 문화의 계급성을 지적한 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면 마르크스가 설파한 역사관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그의 저술로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경제학 비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경제학 비판이라는 책에는 서문이 붙어 있습니다.
오해가 없도록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책에는 서론과 서문 두 가지가 딸려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서론이 아니라 보통 서문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그 서문 속에 일반적으로 유물사관의 공식으로 일컬어지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 이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사회의 전개 내지는 사회의 발전을 전면적으로 혹은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묻고,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사회의 물질적인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대항하여 생산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이 생산관계의 총체가 곧 사회의 경제적인 구조이기도 하다고 마르크스는 규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으로 하부구조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 하부구조를 토대로 항 그 위에 법률, 정치 및 기타 다양한 사회적 의식형태를 포함하는 상부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의식형태로는 종교, 예술, 학문 따의의 문화가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 점을 마르크스는 매우 특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말에 이 첫째 부분의 핵심이 담겨 있는데, 이것은 동시에 앞서 언급한 학문 내지 문화의 계급성이라는 사고방식과 연결되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둘째는 이와 같은 사회의 발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되느냐하는 점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것을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즉 '사회의 물질적인 생산력은 그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그 생산력이 종래 그 안에서 작용해온 현재의 생산관계 혹은 그 생산관계의 법률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소유관계와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 이들 재관계는 생산력의 발전형태로부터 전화하여 그 질곡이 되고, 그렇게 되면 사회혁명의시대가 시작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서서히 또는 급격히 변혁된다' 라고 언급합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형성된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이러한 과정은 계급투쟁이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이와 같은 전개를 보여주는 사회를 발전단계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입니다. 즉, 마르크스는 역사상 사회의 발전단계를 아시아적 사회, 고대적 사회, 봉건적 사회 및 근대시민적 사회 내지 생산약식이라는 계기적인 발전단계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근대시민적 사회의 모습이 더욱 심화되어 그것이 극복되게 되면 사회주의 사회가 나타나고, 이 사회주의 사화가 더욱 발전하여 공산주의 사회에 도달하게 되며, 이로써 인류의 전사가 끝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합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설파한 사회의 발전에 관한 여러 단계입니다. 대체로 이상과 같은 골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은 역사이론사상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체계적인 이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마르크스의 이러한 역사이론은 그에 앞서는 헤겔이라는 사상가에게서 힘입은 바 큰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은 역사에 좀 더 밀착해 있다는 점에서 헤겔의 그것보다 더 한층 역사적인 이론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그가 사회발전의 과정을 동적으로 묘사한 점, 그리고 사회의 물질적인 생산이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주장한 점 등은 그때가지 역사를 보는 관점을 완전히 뒤엎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역사이론에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킨 셈입니다. 그런 만큼 마르크스의 이론이 발표된 이후 그것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쪽이든 그것을 부정하는 쪽이든 마르크스의 이론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이론은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또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단순한 역사이론만이 아니라 역사에 입각한 하나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사회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이라는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사회변혁의 이론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마르크스의 역사이론, 즉 유물사관이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고 또 영속적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제가 특히 중요한 문제로서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점입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하는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의식하느냐 어떠냐에 상관 없이 역사에 대한 우리의 물음이나 역사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세계관으로까지 연결된다는 것을 그야말로 명확하고도 드라마틱하게 밝혀 주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이론이 출현한 이래 우리는 자의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공부한다거나 역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일이 한낱 취미생활이거나 사적인 관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마르크스의 지적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가 품고 있는 역사에 대한 견해나 또는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입장은 역사관 내지는 세계관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므로, 모든 역사 연구자는 자신이 서 있는 역사관과 세계관을 구명해야 할 학문적인 책임을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거듭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역사관 내지 세계관은 주관적인 계기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관적인 계기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관으로부터 출발한 우리의 역사적 인식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객관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여기서도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마르크스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얻었을까요? 이것이 우선 우리가 마르크스를 예로 든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 곧 유물사관에 대해서는 그 사실적 측면의 오류 내지 이론상의 결함과 관련하여 19세기 이래 많은 지적이 있어 왔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결함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이 역사를 공식적으로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세운 정식을 기계적으로 혹은 그것이 반드시 타당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으로 역사 사실에 억지로 두들겨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르크스의 정식이 역사연구의 수단으로 전략시킨다는 비판도 없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은 공식주의 내지 교조주의 라는 것이 그에 대한 비판의 골자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대해서라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역사연구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 자체 속에 그와 같은 공식주의 내지 교조주의를 조장하는 요소가 숨어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어는 정도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와 그의 친구인 엥겔스가 역사를 하나의 자연사로 보는 사고방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데서 기인합니다. 이렇게 역사를 하나의 자연사로 간주한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자연의 역사 내지는 자연계의 현상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적 법칙성을 가진다고 간주하는 것이고, 나아가 적어도 역사 속에서 자연과학적 법칙을 이끌어내는 것을 역사연구의 목적으로 삼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마르크스나 엥겔스도 역사를 자연과학과 완전히 똑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9세기의 시점에서 법칙이라고 할 때는 우선 자연과학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자연과학과의 유추 속에서 역사법칙이란 것을 생각하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법칙은 아무래도 보편타당성을 요구받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로써 보건대 마르크스주의에는 어쨌든 역사의 어떤 국면에서나 결국 동일한 법칙이 관철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려 하는 공식주의에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모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이겠지만, 그러나 그들이 얼마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에는 또한 그 나름대로 그러한 공식주의의 위험을 극복할 어떤 시사점도 내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시사점은 더 나아가 바로 역사에 있어서의 주관성을 극복할 하나의 단서를 마련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진실에 도달하는 길이 계급적인 입장에 철저를 기하는데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학문이나 문화는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이냐를 불문하고 기본적으로 계급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회피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계급적인 입장에 철저를 기하는 편이 진실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주관에 철저를 기하는 것이 결국 객관에 이르는 길이 된다는 이야기 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주관적이라는 것이 바로 그 주관성 때문에 올바른 것이 된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실은 부르조아의 진실과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항상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부르조아적 유산의 올바른 계승이라는 점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 양자의 진리에 진리로서의 공통성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식으로 강조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은 주관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객관적이기 때문에 진실인 것입니다. 물론 역사는 개별적인 진실의 잡다한 모음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체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본 역사는 부르조아적 진실을 그 요소로서는 포함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부르조아적 역사와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간주되는 까닭은 그것이 계급적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외의 방법으로는 밝혀낼 수 없었던 역사의 일면을 밝혀낼 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 이미 알려진 역사 사실을 보다 넓은 범위에 걸쳐 그리고 보다 무리 없이 설명해낼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관적이고 계급적이기 때문에, 바꾸어 말해 그 진실성이 계급적 입장 아래에서 미래에 증명될 것이기 때문에 현재에 있어서도 올바르다고 하는 데에 있는 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은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주요 논점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자신의 편견 내지는 계급적 입장에 어디까지나 철저를 기한다는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첫째로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나 관점이 우리의 어떤 근본적인 입장과 결부되어 있는 것인가를 올바로 자각하지 않은 채 역사에 눈길을 돌리면 그것은 종종 수미일관하지 않게 되든가, 혹은 객관적이라고 하지만 실은 점점 더 주관적으로 경도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로는 우리가 각자의 궁극적인 입장을 명료하게 인식하면 그 입장의 주관성과 그 한계를 알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뛰어넘어 진실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반성은 기본적으로 학문의 계급성을 폭로하고 그 계급성을 강조한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학문의 주관성을 오히려 그 주관에 철저를 기함으로써 극복하는 일은 비단 마르크스주의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음으로는 두 번째 측면인데, 마르크스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유물사관의 정식을 세운 당사자이지만 그러나 그의 실제 역사연구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러한 정식을 그대로 적용했다고만은 볼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오히려 마르크스 이후에 등장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하나부터 열까지 신봉하고 있는 자들이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마르크스적으로 되어 버린 기묘한 현상이 나타나고 잇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컨대 앞서 인용한 경제학 비판의 서론을 보면 마르크스가 문화의 특수한 성격을 논하는 가운데 그리스의 비극 건축 조각 서사시 같은 것들이 그 훌륭함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가능했던가, 생산력이 그렇게 낮은 단계에서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문화가 대량으로 꼽을 피우고 그것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하나의 규범으로서 남을 수 있었던가, 또한 셰익스피어의 저 위대한 희곡은 도대체 어떻게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등등에 대해 자문하고 있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러나 문제의 이 서론은 마르크스의 초고 자체가 여기서 끝나 버림으로 해서 마르크스가 궁극적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전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추측컨대 마르크스는 그와 같이 우수한 문화가 발생하는 외적 조건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외적인 조건들을 기초로 하여 문화의 질을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다른 한편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한 비판에 답하면서 자신이나 마르크스나 경제적인 이유를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한 적도 없거니와 그렇게 말한적도 없으며, 그것에 의해 근본적으로 규정된다고는 했으되 그것에 의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는 말한 적이 없다고 분명하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한 마르크스 자신이 직접 쓴 역사적 저술을 보아도 그것은 분명합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결코 유물사관의 정식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건대, 유물사관의 창시자인 마르크스 자신은 그러한 정식의 활용과 관련하여 실로 자유로웠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강력한 실천적 이데올로기의 경우에는 그 추종자들이 오히려 가르침에 조금이라도 어긋날까 저어하여 공식의 창시자 이상으로 공식적으로 되기 쉬운 법입니다. 이 점은 마르크스가 복잡한 사실의 우여곡절 속에서 법칙이 관철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에 역사법칙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유연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르크스는 우리가 흔히 취하고 있는 대도, 그리니까 역사가 역사법칙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재료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법칙이 역사를 분석하고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자 작업가설이라고 보는 우리의 태도까지도 미리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던가 여겨집니다. 만일 사정이 그러하다면 그것은 하나의 가설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가설인 이상 연구 결과에 의해 언젠가는 정정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몰론 마르크스가 그러한 작업을 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는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로 그러한 역사법칙에 도달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등장하여 마르크스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가설로서 이용해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거기에 정정을 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정식이라고 하는 것도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지 1세기도 더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정정을 필요로 하는 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학자의 위대성은 그 사람이 처해 있던 역사적 조건을 넘어서서 얼마만큼 영속성 있는 인식을 획득했느냐에 따라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의 중반과 20세기의 후반인 오늘날 사이에는 역사사회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고 마르크스의 역사법칙, 곧 유물사관의 정식을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대로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방법적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하튼 우리가 마르크스에서 배워야 할 것은 엄청나게 포괄적인 그의 역사 발전의 도심과 함께 이어 그보다 오히려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자유로운 역사분석의 방법이요 그 태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르크스를 통해 우리의 역사에 대한 물음이 결국에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궁극적인 태도, 곧 세계관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관은 다시 우리에게 하나의 세계상을 제시해줌으로써 동시에 하나의 연구방법을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그것이 세계관과 결부되는 이상, 유물사관의 공식만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분석의 방법 일반은 이런저런 임기응변식의 발상일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역사분석의 방법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고, 그러한 경향은 자연스런 일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또한 우리의 역사연구가 주관적인 계기를 강하게 띠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경향은 자연스런 일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또한 우리의 역사연구가 주관적인 계기를 강하게 띠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기는 할망정 결코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방법이 비록 세계관적 입장에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학문적으로는 단지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생각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의 가능성 내지 가능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분석하는 데 이용하는 방법은 일종의 작업가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이렇게 그것이 하나의 작업가설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일단 들어맞지 않는 경우에는 다른 작업가설도 동시에 비교 검토를 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때 우리는 주관적으로 심각한 좌절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업을 중지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또한 방법 혹은 작업가설의 세계관 세계상 세계해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쩌다 그것이 아무런 기능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모든 것이 파산이고 그것을 수정하는 것은 타협이요 절충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방법을 자연과학의 법칙이나 일반명제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잘못입니다. 우리의 방법이 적합적 연관과 이해의 논리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타협과 절충 말고도 새로운 방법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 경우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 있습니다
즉 새로운 방법 작업가설이 대단한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경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와 우리의 역사에 대한 한 판단 내지는 세계관 자체에까지 정정을 요구하게 된다는 덤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학문적 책임일 것입니다. 여기가지 생각하고 보면 우리의 세계관이란 것도 항상 연구에 의해 부단히 수정되어 보다 올바르고, 보다 학문적인 세계관으로 형성되어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동시에 역사에 있어서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답변이 되지않을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반복이 되긴 하겠지만 또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인식의 타당성은 현재 시점에서의 판단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까닭은 역사란 항상 과거와 함께 미래를 포함하고 있는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역사에 대한 판단의 궁극적인 타당성 문제는 훗날의 판단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측면을 어쩔 수 없이 남겨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치가와 마찬가지로 후세의 판단을 기다려야 하는 측면이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판단 속에는 또한 미래에 있어서의 실천의 과제도 드러나게 될 것이고, 역사에 있어서의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문제도 새로운 차원에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영원한 거울 앞' 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학문 자체에 속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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