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눈 - 호미고메 요조
제11장. 역사에 질문을 던진다는 것
역사와 역사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 장에서 학문으로서의 역사의 성격과 그 논리를 다룰 때 그 결론으로서 이 양자의 결합이 예상된다는 식으로 말씀드린 바 있고, 또 이 문제는 사실 이제까지 방법은 다르지만 여러 곳에서 이야기해온 내용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역사는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물음을 던질 때에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에 대한 우리의 물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던지는 물음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에 상관없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실천적 관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잇는 실천적 관심이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의 실천적 관심에는 고급스런 것에서부터 저급스런 것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입니다. 예컨대 올림픽이 개최되면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올림픽에 쏠립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관심은 같은 올림픽에 쏠려 있으면서도 그 내용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인 것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올림픽이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그리스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를 알아보려고 하는 식의 취미지향적인 관심을 보이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올림픽의 정신이나 의미를 염두에 두면서 그러한 정신이 가능했던 그리스의 국가나 사회, 특히 그 폴리스적인 사회의 성격이나 성립을 알아봄으로써 올림픽의 정신을 이해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관심은 아무래도 취미 차원에서 올림픽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그것보다 조금 더 심각해지게 마련일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올림픽의 역사는 제 전공 분야가 아닙니다. 그렇게 때문에 제가 이 장에서 '역사와 역사관' 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든 예들도 그리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유럽의 중세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을 미리 말씀 드려두고자 합니다. 부분적으로는 이미 앞에서 거론됐던 예들입니다만, 다시 반복해서 이야기함으로써 더 한층 문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믿기 때문에 애써 그러한 예들을 다시 거론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들고자 하는 예는 바로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유럽의 EEC [European Economic Community : 유럽경제공동체] 문제입니다. 이 EEC가 경제적으로 중요한 시사를 던져주고 있어서 그런지 최근 매스컴들도 EEC 관련 기사를 자주 싣고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특히 EEC가 지향하는 미래의 이상이 과거에 어떤 현실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느냐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가운데 유럽의 중세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역사를 되짚어보는 작업도 많이들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EEC의 이상이 실현될 가능성을 찾아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도 그 중세 세계가 샤를마뉴 대제 치하에서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단순한 복고주의에 그치고 말 뿐입니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EEC의 유래 혹은 그것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유럽의 중세에 눈을 돌리는 것이 전혀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단 이런 시각에서 중세에 눈을 돌린 결과. 특히 중세 시대에 국경이나 민족의 벽을 뛰어넘어 유럽에 일체성의의식이 자리잡았으며 그런 의식의 근저에는 무엇보다도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적 일체성이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러한 의식이 성립할 수 있었던 조건으로서 로마교회가 유럽 속에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조직을 결성하고 그 조직을 통해서 유럽의국가들과 국민들을 지도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확실히 중요한 인식상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체성이 가장 잘 나타난 사실을 찾는 과정에서 십자군을 머리에 떠올리게까지 되면 우리의 인식은 더 한층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인식으로부터 오늘날의 문제에 대한 그 어떤 해답까지도 경우에 따라서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유럽의 중세에 대한 이러한 물음은 도대체 어떤 관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또 그러한 관심은 현대의 어떠한 문제와 결부되는 것일까요? EEC가 단순히 현대의 유럽이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바람직한 이상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점을 밝히려함에 있어서 중세 유럽에 성립되었던 일체성의 의식을 이해하는 것은 확실히 커다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이러한 일체성이 가톨릭적인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이해하게 되면 그러한 이해로부터 이번에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유럽의 정신적 통일이 가장 긴급한 과제이며, 따라서 이를 해결하는 데에는 기독교의 부흥이 필수적이라는 식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는 대체로 이와 같은 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가톨릭이 아닌 프로테스탄티즘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당연히 고개를 들게 됩니다. 다시 말해 프로테스탄티즘의 성립과 발전이 전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가톨릭 모교회로 복귀하는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현대적인 과제가 되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적어도 유럽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세 유럽의 일체성이란 것이 과연 사람들이 말하듯이 그렇게 완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접하게 되면 결론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이런 시각에서 EEC의 실현을 위한 조건을 중세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결실도 없는 헛수고로 끝나고 말 것으로 저에게는 생각됩니다. 정신적인 통일이 성립되기 위한 조건을 망각한 채 단순히 정신적인 통일이란 사실만을 염두에 두고 중세의 유럽을 바라보는 것은 완전히 헛수고로 끝나고 말 우려가 많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중세 유럽에 가톨릭적인 정신의 통일이 존재했다고 가정하고 그러한 정신적 통일에 의해 유럽의 각 국가들 및 민족의 벽을 뛰어넘는 일체성이 실현된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정신적 통일에 앞서 그것을 가능케 한 조건이 있어야만 하고, 따라서 바로 그러한 조건이 좀 더 근본적인 것이 아니었던가를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생각해 볼 때 그러한 조건, 다시 말해 가톨릭적인 통제가 존재할수 있었던 조건은 반드시 가톨릭 교회 쪽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정치가 지극히 미발달된 상태여서 국가들도 오늘날과 같은 배타성을 가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각 국가들 서로간에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국경이 없었다는 사실 속에 그러한 조건이 존재한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정치의 미성숙이라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톨릭적인 교회조직이 유럽에 보편적으로 성립될 수 있었고, 동시에 유럽 전역에 걸쳐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좀더 추상적으로 말씀드리면, 중세에는 정치가 미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대국가에서와 같은 국가의 독점적인 주권이 성립되지 않았었고, 또한 그로 인해 각국 내에는 봉건적인 정치권력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초월적인 권위로서 로마교회의 힘을 끌어들이게 되었는데, 바로 이런 조건하에서 유럽전역에 걸친 가톨릭 교회의 조직이 성립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십자군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군만틈 통일 유럽의 이념을 잘 보여주는 것도 달리 없다고들 합니다. 그렇지만 십자군이 그렇게 기독교적 유럽의 공동작으로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유럽의 국가들은 봉건제도에 의해 이제 겨우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을 뿐인데다 정치의 밀도도 아직 현저히 낮았으며 국가의 조직도 미처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이런 조건이 있었기에 비로소 그와 같은 전 유럽적 공동작업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십자군이 제2차, 제3차로 회를 거듭함에 따라 전 유럽의 공동사업으로서의 성격이 점차 희박해졌다는 사실에서 자명하게 드러납니다. 각국의 군주들은 2차, 3차로 자꾸만 십자군의 원정 및 횟수가 늘어나자 불안정한 국내 정치의 압박에 내몰려 장기원정으로 인한 국내의 공백만을 걱정하느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면 로마교회의 최전성기를 구가하였고 중세 로마교황 가운데 최대의 정치가였던 이노센트 3세가 주창한 제4차 십자군 에 단 한 명의 국왕도 참여하지 않았고, 게다가 그렇게 성립된 십자군이 교회의 통제를 벗어나 교회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탈해 버렸던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유럽자체의 발전에 따른것, 즉 다시 말해 유럽에 있어서 정치가 발달하여 국가의 조직화가 진전된 데 따른것이라고 답변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십자군이 이러한 유럽의 발달에 근본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은 교과서에 나오는 그대로라 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십자군의 기여 등으로 해서 촉진된 유럽의 발달 자체가 십자군이라는 전 유럽적 공동사업을 점차로 곤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항상 이러한 역설을 증명하는 것이 또한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십자군의 쇠퇴는 혹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신앙심의 퇴조에 따른 것도, 로마 교황권의 통제력이 약화된 데 따른 것도 아닙니다. 이슬람 세력의 저항력이 증대되었고 또 그만큼 조직화도 진전되었다는 또다른 중요한 조건을 제외한다면, 그 이유는 오히려 유럽 내부에서 정치가 발달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사실이 일반적으로 승인될 수 있다면 맨처음에 말씀드린 가톨릭적인 관점에서 던지는 중세사에 대한 물음은 완전히 잘못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상당히 불충분한 물음임엔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결국 그러한 물음은 EEC와 관련한 현대의 관심에 해답을 제시해주는 바도 많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바꿔서 EEC가 전개되고 있는 현대의 시점에서 중세사에 물음을 던지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일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EEC와 관련한 현대의 관심에 답변을 주는 중세사의 사실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는데, 이에 대해 저는 이제까지 말씀드려온 바를 근거로 하여 바로 국가의 역사성-이것이 그에 대한 답변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국가의 역사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국가라는 것도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그것이 역사적 산물이라고 한다면 국가에도 발생이 있음과 동시에 그 종말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어도 우리가 현재 그 속에서 살고 있고 또 알고 있는 근대국가에 관한 한 저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 국가라고 불리는 단체는 중세 초기에도 존재하였고, 또 그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의 국가는 십자군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스스로 그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한 근대국가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주권을 그 불가결한 조건으로 하는 바의 근대국가는 십자군 시대의 초기에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고, 그 시대의 흐름속에서 싹이 트기 시작하여 근대 초엽에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와 같은 국가를 대신하여 국가에만 고유한 것으로 생각되는 주권을 행사하고 있던 것은 국가속에 포함되어 있던 각종의 작은 집단들이었습니다. 근대국가가 성립되는 초기에는 국왕이나 귀족만이 아니라 가문이나 가장들도 오늘날에는 국가만이 행사하고 있는 주권이란 것을 어느 정도씩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이 경찰이나 군대, 사법제도 등에 의한 일반적인 보호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누구든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자신의 실력으로써 지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실력이 훗날 국가에 집중되어 국가의 폭력행사권, 요컨대 주권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가문이나 가장, 나아가 그것을 뛰어넘는 집단으로서의 지방 제후의 영역 혹은 도시와 같은 것이 순차적을 그 주권성을 획득해가고 마침내 그것이 근대국가 속으로 흡수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과정을 연구하는 중세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가르쳐줄 것입니다.
즉, 주권은 지극히 작은 소규모의 것에서부터 대규모의 것으로 이행해가는데, 그것은 기술이나 생산력의 발전, 다시 말해 우리의 자연지배력이 발달함에 따라 마치 일련의 발전을 보이다가 끝내는 근대국가라는 민족적 단위의 국가로까지 확대되어 간다.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발전이 미래에까지 계속 확장되어 가다보면 근대국가도 또한 주권독점이라는 그 역할에 종지부를 찍을 날이 꼭 올 것이다. 국가에는 태어났을 때가 있음과 동시에 죽을 날도 또한 올것이 틀림없다.
지금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국가 특히 근대국가,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의 주권국가 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권국가가 그 역할에 종지부를 찍게 될 때에는 그것을 몇 개나 합한 보다 더 큰 단위가 국제사회에서 각자 주권을 행사하는 단위 단체로서 등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재로서는 아직 순전히 꿈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 일지 모르지만 세계 그 자체가 일체가 되는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는 점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근대국가가 그 혁할을 끝내는 시기는 도대체 언제일까요? 어쩌면 이 시기와 관련해서도 우리는 또 중세 내지 중세 이후의 역사로부터 하나의 시사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은 시사를 던져주는 것으로는 19세기 전반기에 독일에서 성립된 관세동맹이 있습니다. 이 관세동맹은 그 당시 분열을 거듭하면서 난립하던 독일의 소국가들의 국경이 독일에서의 근대 자본주의의 발달을 방해한다고 해서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어 정치적인 국경은 그대로 두되 경제적인 활동에 관한 한 국경을 철폐하고자 한 일종의 경제적 협정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EEC의 관세 철폐와 완전히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전반에 성립된 이러한 관세동맹이 마침내 19세기 후반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할때 그 전제 내지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오늘날의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도 염두에 두면 많은 시사를 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 등장한 EEC라는 것도 결국은 서구의여러나라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발전을 지속적으로 도모하기에는 너무나도 협소해진 국내 시장을 여러 국가의 통합에 의해서 확대하려는 취지에서(광역시장의 실현) 하나의 경제적 동맹을 결성함으로써 출현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그런데 이것은 EEC의 경제적인 측면일 뿐, EEC는 동시에 정치적인 프로그램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EEC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럽 연방의 실현입니다. EEC산하의 여러 나라들로 구성되는 이 유럽연방에 대해서는 EEC국가들 사이에서도 아직 일치된 결론을 보는 데가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EEC의 핵심적인 추진자였던 드골은 유럽연맹이라는 비교적 느슨한 결합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따라서 EEC의 장래를 놓고 현재 어떤 확실한 예상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런 예상을 하기 위한 실마리로서 역사로부터 일정한 시사를 받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시가 중세시대에 하나의 독립된 정치단위로서 형성되어가던 때의 사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도시의 성립과정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그때가지는 어느 정도 왕권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도시 전체를 위해 서로 주권성(정당한 폭력행사권)을 포기하고 하나의 서약단체를 만들어 그 서약단체가 이제까지 각자가 가지고 있던 주권적인 권력의 행사권을 대신해서 행사하게끔 한 것입니다. 이것이 법리적으로 본 도시의 성립인데, 도시는 이에 의해 행위능력을 갖춘 법인격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도시는 하나의 독립된 정치단위로서 성립되었던 것인데, 근대국가의 원형을 이와같은 도시의 성립 과정에서 엿볼 수 있다고 해도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근대국가의 탄생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일단 군주 내지 제후가 그때까지 주권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봉건적 지방권력, 도시)로 하여금 실력이나 혹은 평화적인 입법을 통해서 주권적인 권력을 포기하게끔 하고, 이권력을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국가 자신이 행사하도록 함으로써 근대국가가 생겨나고, 이로써 근대적인 의미의 주권국가가 성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통 일반치안입법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세 말기의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이른바 중앙집권화의 과정이란 법리적으로 보면 이처럼 치안입법에 의한 폭력행사권의 수탈과 집중의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문제는 결국 주권국가가 난립하고 있는 오늘날의 국제사회에 있어서 평화를 위한 서약단체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 그러니까 이른바 일반치안입법을 어떻게 입안할 것이냐, 주권국가의 주권성을 구속하는 상위단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이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은 단순화하자면 중세 이래의서약단체 형성이나 일반치안입법의 절차를 국가를 단위로 하여 시행하려고 한시도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서 다른 장(제6장)에서 이미 다룬 바 있거니와 일거에 전세계를 단위로 하는 단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만큼 우선 당장에는 일부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입니다.
여기서 마치 그 시범을 보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역사에 등장한 것이 바로 EEC인 셈인데, 유럽은 그 세계적인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위기적 정황 속에서 또 다시 세계 그 어느 곳보다 앞서서 인류 최초의 정치실험을 시도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주권의 무제한적인 발동을 억제할 국제단체를 형성하기 위한 조건은 오늘날 상당한 정도까지 성숙해 있다고 보아도 좋을것 입니다. 그러한 조건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과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가공할 만한 기술의 진보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일반적인 정세 하에서 EEC의 정치적인 프로그램을 촉진시키는 특수 사정을 살펴보면, 우선 앞서 논의한 유럽의 광역시장을 실현하자는 요청을 그 하나로 들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이 미 소 양대 권력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음으로 인한 정치적 외압의 문제들을 하나로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국제정치적인 정황은 중 소 논쟁이나 아시아, 아프리카, 혹은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민족주의의 대두로 인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역시 EEC문제의 세계사적인 의의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EEC에 속한 여러 국민과 그 지도자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입니다. 만일 이같은 전망에 오류가 없다고 한다면 주권국가가 그 역할을 다하고 자신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게 될 시기는 결코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20세기 후반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이미 그 시기에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논의해온 역사의 동향에 대한 전망은 저 자신이 중세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파악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만일 제가 근대 이후의 역사에만 몰두하고 있었더라면 결코 파악하지 못했을 문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적어도 제자 아는 한 근대사만을 연구해서는 이와 같은 문제제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EEC가 문제되고 있는 현대라는 시점에서 중세를 향해 하나의 문제를 던져보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며, 도리어 하나의 귀중한 시사를 얻을 수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역사와 현대의 관련에 대해서는 일단 설명을 마친 셈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현대에 있어서 우리의 역사에 대한 물음, 나아가 역사에 대한 태도 결정은 과연 역사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견해와 도대체 어떻게 결부되는 것일까요? 이러한 물음은 원칙적으로 역사에 대한 모든 종류의 물음에 대해 항상 타당한 문제이며, 또 맨 앞에서 언급한 가톨릭적 입장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역사에 대한 물음이나 역사에 대한 견해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편의적으로 만들어지는 우연적인 성질의 것의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역사관과 결부된다는 점을 이자리에서 다시 한번 강조해두고자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가톨릭적 입장 내지는 로마교회적 입장을 고려함으로써 분명해 지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유럽의 중세에 대한 물음을 던질 때에 가톨릭적 입장이 갖는 관점이란 결국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로마교회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고 또 시대와 더불어 그 내용을 풍부히 해온 가톨릭적인 역사관, 가톨릭적인 세계관의 일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중세에 대해 던지는 저의 물음도 결국에는 저의 역사관에서 나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나아가 가톨릭적인 역사관이 전세계의 기독교화를 통해서 세계의 진보와 신의 영광을 실현하는 데로, 요컨대 소위 보이는 지상의 교회를 보이지 않는 천상의 교회와 합일 시켜가는 과정 및 그에 대한 원대한 이상과 신앙으로 귀착된다고 한다면 저의 역사관도 단순히 역사에 대한 일시적인 견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전체적인 판단 내지는 그 실천적인 이상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인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현재 끊임없이 문제가 일어나는 상황에 직면하여 어떤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그에 따른 해답을 즉석에서 찾아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결과는 항상 자기자신이 분열에 빠지는 위험을 초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저 자신의 역사관 내지 세계관을 밝히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장을 마치면서 꼭 말씀드릴 필요가 있는 것은 이제까지 이야기해온 내용의 결론입니다. 그 결론이란 우리가 역사에 대해 하나의 진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을 결국 자기자신에 대한 물음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 다시말해 자기 자신이 역사에 대해 전체적으로 어떤 판단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반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역사에 대한 물음이 어차피 우리의 실천적인 이상이라는 문제에까지 관련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역사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엄숙한 행위를 하는 섬에 된다는 것, 이것이 결국 역사와 역사관에 대한 저의 결론 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든 아니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든 관계없이 회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에 대해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린다 함은 단순히 과거를 과거로 해석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대문입니다. 역사란 본시 단절을 모르는 일관된 흐름입니다. 또한 역사를 판단하기 위해 우리가 서 있는 현재라는 시점 역시 시시각각으로 미래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과거는 항상 그 속에 미래를 잉태하고 있습니다. 이 미래는 우리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우리의 이상을 내걸 수 있는 시대, 실천적인 이상을 내걸 수 있는 장이라도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같은 미래를 잉태하고 있는 과거를 판단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에 대한 판단입니다. 바로 이로부터 우리의 역사에 대한 물음이 갖는 심각하고도 엄숙한 의미가 나온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다른 한편에서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튀어나오게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앞에서 역사에 대한 물음은 결국 역사에 대한 하나의 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게다가 이 판단은 아직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미래를 잉태하고 있는 과거에 대한 판단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판단에는 아무래도 우리의 주관이 개재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주관적인 판단이 끼어들 수밖에 없는 역사에 대한 물음이나 판단으로부터 어떻게 객관적인 역사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당연히 대두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은 다음 장으로 넘기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제 이 문제를 해명함으로써 저의 이야기도 결말을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