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눈 - 호미고메 요조
제7장. 역사를 이해함은 역사의 법칙을 안다는 것
이번에 다룰 주제는 역사에 있어서 필연과 우연이라는 문제입니다. 이 장에서는 먼저 필연의 문제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역사 속에서 뭔가 중요한 사건의 전개, 예컨대 혁명이라든가 전쟁 같은 커다란 사건을 서술하는 경우 우리는 그러한 혁명이나 전쟁이 필연적 사태였다느니, 특히 상황이 이런저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전쟁이 발발하는 것은 필연이었다느니 하는 식의 서술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필연이라는 말은 이렇게 단기간의 현상에 대해서만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의 커다란 동향, 그러니까 어떤 한 시대 혹은 몇 단계의 시대에 걸친 장기적인 시간의 맥락 속에서 뭔가 중심적인 발전의 법칙성이 확인된다든가 하는 경우나 또는 유사한 현상이 거의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경우에 그러한 현상을 가리켜 필연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자리에서 이러한 필연성의 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전체적으로 모두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필연과 우연의 문제야말로 역사학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는 다만 우리가 역사 속에서 필연성을 인식한다고 한다든가 혹은 어떤 필연적인 움직임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바를 간략하게 이야기할까 합니다. 그런데 본론에 앞서, 우리는 '역사란 사건이나 사물을 시간적인 인과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경우를 이따금 보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이 하나의 원인에 의해 모두 다 설명되는 경우란 애초에 있을 수 없습니다. 사건이면 사건, 현상이면 현상을 그렇게 일어나게끔 한 원인 혹은 이유는 아무래도 복수로 존재한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면 또한 단순히 그런 원인들을 있는 그대로 다 늘어놓는 것만으로 문제가 끝난 것이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을 하나의 예로 들어봅시다.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에 대해서는 루이 왕조의 재정적 파탄이라든가, 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적 시도로서 귀족에게 과세하려는 국왕의 움직임을 국왕의 전횡이라며 들고 일어난 귀족 측의 반발, 혹은 경제적 실력은 충분하면서도 정치적인 발언권은 부여받지 못한 시민계급의 불만, 그리고 농민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봉건적 부담 등이 혁명의 발발과 관계가 있을 법한 이유들로 열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이유들만으로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몇 가지 원인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여러가지 원인들의 상호관계를 고찰하고, 그럼으로써 이들 여러 원인들의 시스템을 찾아낼 필요가 있게 됩니다. 그러한 시스템을 찾아내게 될 때 비로소 하나의 중요한 사건의 원인이 해명되었다거나 혹은 그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역사의 다양한 현상들과 관련지어 고찰해가는 동안에 역사적 사건이 갖는 사실적 인과관계는 더욱 추상되게 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역사가는 자주 반복되는 법칙적인 것 혹은 개연성 같은 것을 발견하려 하게 됩니다. 나아가 역사가는 단순히 반복되는 이런 법칙성만을 찾는 데서 머물지 않고 하나의 발전적인 법칙을 인식하려 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역사가는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를 추상해 가는 과정에서 어떤 한 시대의 경향으로부터는 역사발전이 다른 방향이 아니라 꼭 이런 방향으로만 전개되며, 그러한 발전이 또한 모든 나라의 역사에서 규칙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이러한 규칙성은 역사 속에서 단순히 반복될 뿐인 법칙성과는 다른 그 어떤 경향이나 개연성 혹은 법칙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금 저는 법칙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 말은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이 법칙이란 말을 개연성 혹은 가능성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 법칙이란 말을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법칙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역사학에서는 법칙이라는 말을 되도록 피하려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또한 그러한 경향은 유독 역사학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과학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자연과학에서조차 그런 경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에는 물리학에서조차 언제 어떠한 경우에나 타당한 법칙이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보고, 다만 고도의 개연성 혹은 경향성을 편의상 법칙이란 말로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를 논의하면서 법칙이란 말을 아무런 제한도 없이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여기서는 편의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자연과학보다는 훨씬 느슨한 의미에서 법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내용을 전제로 하여 이제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역사란 결국 개별적인 사실들과 그 인과관계만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그러한 사실들 모두를 관통하는 법칙을 인식하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를 관철하는 법칙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로 한정될 필요는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가지 법칙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동시에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법칙이 있는 경우 단순히 그러한 법칙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상호간의 관계, 나아가 여러가지 법칙들 중에서 다른 모든 법칙들을 설명하는 하나의 혹은 적은 수의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 또한 역사가의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이 문제는 다른 주제를 이야기할 때 다루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으므로, 이 자리에서는 이정도로 언급해 두겠습니다.
우선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역사연구에 있어서는 현상이나 사건의 설명을 위해 가능한 한 적은 수의, 그러나 중요한 원인을 발견해내고, 그 원인들을 더욱 추상하여 법칙적인 인식으로까지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고 또 이러한 경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역사연구의 경향에 대해서는 역사를 자연과학적으로 보려는 것이 아니냐, 역사를 하나의 자연사로서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의문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는 까닭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법칙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은 역사학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근본적인 욕구가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노력의 결과로 어떤 근본적인 인식을 획득할 때 비로소 역사에 대한 우리의 물음도 일단 끝이 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바로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심적인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약간 까다로운 문제를 먼저 이야기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방금 위에서 저는 법칙적인 인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렸거니와 이것은 사물을 일반화시켜보는 인식방법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또는 그러한 방법의 일부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일반화적 인식방법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또는 그러한 방법의 일부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일반화적 인식방법이라는 것은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외계의 사물을 이해하고자 할 때 흔히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보통 어떤 사물에 대해 일정한 개념이나 명칭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이때 그와 같은 개념이나 명칭 자체를 하나의 일반화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반화가 법칙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 점은 인간의 원시적인 상태, 그러니까 갓난아기의 상태라든가 혹은 문명적으로 아주 뒤떨어진 민족을 고찰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일본의 원시부족인 아이누족의 언어에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가령 어떤 나무 한 그루가 있을 때 아이누족들은 그 나무의 각 부분에 대해서는 제각각 별도의 이름을 붙여놓고 있지만 그 나무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언어학자가 웃으면서 제게 해준 이야기인데, 이런 특징은 어린이에게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신상태가 지극히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눈에 띄는 모든 사물을 각각 별개의 것으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령 벛꽃을 보든 국화꽃을 보든 튜울립꽃을 보든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꽃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와 같이 꽃이라는 명칭으로 그 속에 있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현상들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눈에 보이는 외계의 사물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추상적인 내용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시민족에게는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다신교와 유일신교 가운데 어느 것이 문명적으로 우수하고 어떤 것이 열등하냐를 논하기는 어렵지만,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유일신교로 평가되는 유태인의 여호와 신앙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보면 다신교의 흔적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결국 유일신인 여호와 신앙은 이러한 다신교로부터 탄생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는 사물에 대한 다원적인 인식으로부터 일원적인 인식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류의 지적인 진보를 더듬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처럼 개념적인 추상화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성의 본질적인 속성일 것입니다. 이 점을 역사와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이 경우에도 완전히 똑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잡다한 사실들을 있는 대로 마구잡이로 늘어놓고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역사를 이해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늘상 부딪치는 일인데, 어떤 아주 복잡한 사건이나 이리저리 뒤얽힌 발전을 고찰하는 경우 그 하나하나의 사건과 그것들의 상호관계는 잘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사실들의 계열을 따라 최후까지 추적해 들어가도 전체적으로는 결국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벽에 부닥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비단 역사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이야기겠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 그러한 난관을 이겨내고 뭔가를 '알았다'고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다종다양한 사건의 인과계열 전체를 하나로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이 떠올랐을 때입니다. 가령 우리가 어떤 역사적인 문제에 대해 논문을 쓰려고 한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 논문을 쓰기 위한 사료도 갖출 만큼 갖췄고 연구문헌 또한 모을 만큼 모아서 나름대로 대충 다 훑었다고 칩시다. 이런 정도면 일사천리로 붓을 움직이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찌된 일인지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우선 당장 뭐라고 써야 좋을지 아무리 머리는 짜내봐도 그 첫마디가 쉽사리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아마 직접 경험해보신 분들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줄 압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아직 문제의 사안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한데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를 감싸고 악전고투한 끝에 어쩌다가 문득 어떤 말이 우리의 머리 속에 번쩍 떠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전혀 감조차 잡히지 않던 사실 전체가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으며 눈에 잡히듯이 선명하게 떠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첫마디가 어떤 순간에 번쩍 떠올랐다는 것은 우리의 문제의식이 그 사안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연관을 비로소 파악했다는 말이 됩니다. 좀 더 단순화 시켜 말씀드리면, 써야 할 첫마디가 떠올랐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의 머리 속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통찰'이 잘못된 것일 가능성은 언제든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통찰이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거친 결과로 얻어진 것이라면 그것에 기초한 최초의 말은 그 이후의 모든 서술을 함축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논문을 읽는 독자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논점이나 사실이 전혀 뜻밖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 논문의 서술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스스로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이같은 예상을 독자들에게 무리없이 제공해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러한 서술을 가장 성공적인 서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서술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일까요? 위에서 저는 어떤 사건 전체를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이라는 말을 쓴 바 있습니다. 문제는 그와 같은 통찰력이 어떻게 해서 얻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제 경험을 반추해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개별적인 사실의 인과관계나 그것들의 중복만으로부터는 절대로 생겨나지 않는 그 어떤 것입니다. 오히려 개별적인 것들을 뛰어넘는 전체적인 인식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을 개별적 사실의 인과관계를 관통하며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인과적 인식,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한가지인 경우는 유감스럽게도 역사의 세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과적 인식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는 그것들의 결합에 의해 좀 더 쉽게 전체를 꿰뚫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역사연구는 결국 항상 수많은 사실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소수의 인과관계를 규명해내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인식목표로 삼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추상에 추상을 거듭한 인과인식은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역사에 있어서의 고도의 가능성이나 개연성 혹은 법칙성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개별적인 사실들을 서술해가다 보면 우리는 그 과정에서 어떤 사건이 왜 하필 꼭 이렇게만 전개되고 저렇게는 전개도지 않았는가 하는 그 까닭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모든 인과관계에 대한 인식은 결국 하나의 단일한 인과인식으로 수렴되어가는 것이라거나 또 역사연구는 이와 같은 인과=법칙=필연에 대한 인식만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다만 역사 연구 역시 다른 모든 학문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사건을 복잡한 채로 고대로 인식하려 하지 않고 가능한 한 단순한 법칙에 대한 인식으로 그 범위를 좁히려고 하는 필연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이 점이 제가 이 자리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었던 점입니다.
제가 필연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이 장의 맨 앞부분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역사학에서는 그것이 아주 느슨한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필연이라는 말의 용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필연이라는 말이 역사가로서는 써서는 안 될 말로 간주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이 점에 대해 짧게나마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그에 앞서 근대 역사학의 성립과 발전에 얽힌 복잡한 사정을 잠시 되돌아보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역사가 하나의 과학으로서 독립적으로 성립하게 된 것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부터입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계몽주의가 아니라 그 계몽주의 이후에 나타난 낭만주의가 역사학을 발전시킨 주역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계몽주의가 역사나 인간현상을 단순화시켜서, 이를테면 기계론적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낭만주의는 역사를 기계론적으로 취급하는 계몽주의에 반발하여 역사의 복잡하고 법칙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합리적인 측면을 강조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점을 들어 낭만주의야말로 역사를 진정으로 발전시킨 주역이라고 간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 그대로 전적으로 타당한 견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찌됐든 이와 같은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이 동시에 역사에 대한 필연적 해석 혹은 법칙성의 인식에 대해 반발을 느끼게 한 이유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필연적 해석이라는 면에서는 계몽주의에 뒤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인 마르크스주의가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이론으로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 어디서나 가장 강력한 이론이었다고 할 수 있고, 또 앞으로도 이런 마르크스주의가 하루 아침에 그 지위를 잃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 마르크스주의야말로 그 어떤 역사이론보다도 역사 속에서 필연적인 발전법칙을 인식하는데 가장 적극적인 사상입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이론이 복잡한 인간 현상 속에서 발전법칙을 발견해내는 데만 급급하다 보니 자주 기계적인 설명에 치우쳐 인간의 풍부한 역사적 가능성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해석에 대한 반발이 동시에 필연이라든가 법칙과 같은 표현들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이론에 대해서는 이 강의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좀 더 상세히 다룰 생각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더 이상 말씀 드리진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비판은 비판 그 자체로서야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속에서 필연적인 것을 인식하려는 우리의 근본적인 지향까지를 내던져 버린다면 아마도 우리는 역사의 인식 혹은 역사의 이해를 송두리째 포기해 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이 이 장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첫 번째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그렇다면 우리의 과거에는 역사의 필연성을 인식하려는 시도로서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역사의 필연성을 인식하려는 시도만을 보자면 거기에는 방금 말씀드린 마르크스주의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은 역사 속에서 필연성을 인식하고자 역사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져왔습니다. 역사에 있어서 필연성을 인식하려는 태도는 우리의 역사탐구만큼이나 오랜 것이고 또 언제 어디서나 있어 왔습니다. 이러한 경향을 이미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그리스의 헤로도투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헤로도투스는 예컨대 이집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운데 풍토 혹은 지리적이 조건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상세히 논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비단 헤로도투스에게서 만이 아니라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언제 어떤 세계에서나 항상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위대한 사상가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 속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가령 남방 사람들은 정열적이고 북방 사람들은 냉정하다든가, 풍수가 좋은 땅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온다든가 하는 사고방식들이 그런 것들인데,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굳이 그 근원을 따져보자면, 지리적인 요인이 항상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인간성의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박하기 짝이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터무니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는 사고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역사가나 지리학자들 중에는 이런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서 지리라든가 풍토와 같은 것이 인간의 성격에, 따라서 또한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고찰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우리는 지리결정론(地理決定論)이라고 부르거니와 잘 알려진 [법의 정신]을 저술한 프랑스 계몽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 몽테스키외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잇고, 동시에 계몽주의자이자 낭만주의자이기도 했던 독일의 헤르더 같은 사람에게서도 이런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지리학자인 럿셀에 이르러 체계적으로 확립됩니다. 나아가 그것은 스웨덴의 첼렌에 의해 지정학(地政學)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는데, 나찌 독일의 하우스호퍼는 그것을 나찌식으로 해석하여 [태평양지정학]이라는 책을 쓰기까지 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이런 사고방식이 전쟁의 종료와 더불어 혹은 전체주의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정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예가 적지 않으니 말입니다.
환경론의 한 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이같은 지리결정론은 일반적으로 인간에 대한 환경의 영향을 일면적으로 그리고 기계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렇지만 헤르더 이후에 이르게 되면 기계적인 성격이 점차 약화되면서 환경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도 한편에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여전히 외적인 자연이 인간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여기서 보다 중요한 점은 외적인 요인, 곧 자연적인 요인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사회생활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밝혀내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도록 환경론은 이 점을 밝혀낼 방법을 개발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린 지적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아직도 소박한 패럴랠리즘(Parallelism, 병행론)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패럴랠리즘이란 나란히 일어난 두 가지 현상 가운데 한 현상을 나머지 한 현상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을 말하는데, 이것은 어떤 사건을 설명하는 데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긴 하지만 언제나 논리가 비약해 버리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란히 일어난 두 현상 간에 있을 수 있는 인과관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방법이지만 그러한 인과관계를 직접적으로 설명해내는 데는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기후에 대한 연구로부터 문명의 발전을 설명해내려고 했던 미국의 문명사가(文明史家) 헌팅턴에 대해서도 같은 지적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기후와 문화]라는 저술에서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발전을 기후의 건조와 습윤이라는 현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세계의 몰락과 같은 거대한 현상을 나무의 나이테에 대한 연구 결과로부터 설명해내려고 하였지만, 그 이후의 연구에 따르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문명을 크게 변화시킬 만큼 급격한 기후의 변화는 아직까지 일어난 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지리결정론 내지 환경론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컨대 그것들 대부분은 나름대로 진리의 일면을 내표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필연성을 인식하고자 하는 이론치고는 너무 유치한 것이었습니다. 외계의 자연이 인간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개개인의 인간을 통해서 미치는 것만이 아니라 반드시 그 사회의 구조를 통해서 미치게끔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생활의 구조 혹은 사회적인 생산을 통해서 비로소 외계의 영향은 역사적인 것으로 전화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앞서 잠시 언급한 바 있는 경제발전 단계론이 오히려 역사의 법칙적 인식이란 면에서는 환경론보다 훨씬 수준 높은 인식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이론을 배경으로 하여 성립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발전단계론이야말로 이제까지 나타난 발전단계론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만큼 역사의 필연성 인식에 있어서도 앞서 살펴본 환경론보다 훨씬 우수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최근의 예로는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이론'을 들 수 있겠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이론이라기보다 하나의 역사철학일 뿐 역사가에 의해 오늘날 승인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까지 여러 가지 역사발전의 필연성을 인식하려는 시도들을 논의해왔지만 현재 그 어느 것도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실패로 끝난 시도를 장황하게 설명한 까닭은 그것들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욕구에 다름 아니고, 또한 어떻든 그러한 욕구를 갖지 않고는 역사 그 자체도 성립할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