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눈 - 호미고메 요조
제5장. 시대구분은 역사에 대한 판단이다.
시대구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이 문제를 고찰하다 보면 결국 역사의 본질에 대해 전혀 뜻밖의 아주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의외로 시대구분의 문제를 아주 가볍게 보아 넘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시대구분이란 것이 원래 단절이 없는 시간으로서의 역사의 흐름 속에 우리가 제멋대로 어떤 시점을 설정하여 여기서부터는 근세가 시작된다느니, 이제까지는 중세였다느니 하고 자의적으로 구분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고는 애초부터 그것이 무리였다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역사를 연구하거나 역사를 생각하거나 하는 경우에 이용하기 위한 편의적인 수단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가볍게 생각해 버립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전문가들조차 흔히 빠지기 쉬운 커다란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저는 이 시대구분의 문제에 대해 먼저 현재에는 어떠한 시대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또한 이제까지는 어떠한 시대구분이 이루어져왔는지 하는 점에서부터 논의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우선 가장 먼저 생각해둘 필요가 있는 것은 시대구분이 비단 역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다소 넓은 시각에서 전체를 파악하려 할 때 도무지 한눈으로 일별해 볼 수 없는 경우 우리는 그 속에 몇 개의 단락을 설정하여 보는 사고상의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인생을 생각하는 경우에도 유년기라든가 청년기 혹은 노년기라는 식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여행을 하는 경우에도 오랜 옛날부터 이와 비슷한 구분을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곳은 이번이 몇 번째 여행이고 또 다른 곳은 몇 번째 여행이라는 식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방식이 그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모두 나중에 하나하나의 단락을 합쳐서 전체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어떤 커다란 사건의 전체적인 면모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려고 할 경우, 전체를 한꺼번에 꿰뚫어보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고 그 위에서 전체를 파악하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고방식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역사에 관해서만 이런 사고방식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말인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까지 어떠한 시대구분이 이루어져 왔는가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시대구분의 기준을 보면 그것은 실로 천차만별이라고 할 정도로 다양합니다. 옛날에는 정치의 중심이라든가 혹은 가 시기에 지배했던 왕조의 이름을 기준으로 하여 시대구분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경우에는 주周, 진秦, 한漢과 같은 왕조의 명칭이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이용되는 것이 그러합니다. 그뿐 아니라 정치의 내용에 착안점을 두고 시대를 구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왕조시대와 그에 대비하여 무신정권 시대라는 식으로 정치의 내용을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 노예제 시대, 봉건제 시대라는 식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구분의 방법이 오늘날 모두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와 같은 시대구분을 하게 된 애초의 이유는 오늘날 대부분 사라져버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대구분은 요컨대 단순히 역사의 표면에 나타난 외적인 특징으로 역사를 구획한 것일 뿐, 그 각각의 시대가 어째서 하나의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발전해 가느냐 하는 발전의 의식이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역사를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하지 못하던 때의 시대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대구분이라고 하면 곧바로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소위 3분법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서양의 고대-중세-근세라는 3분법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습니다만, 일본이나중국에도 이런 구분법이 없지 않습니다. 일본의 경우 이미 도꾸가와 시대에 상대(上代), 중세, 근대라는 구분법이 등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구분법이 서양의 그것을 모방한 것이냐 하면 단순히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시점에 있는 지금의 세상이라는 의미에서 근대, 그로부터 아주 먼 옛날의 시점을 고대 혹은 상대, 그리고 그 사이에 하나의 중간 시대를 설정한 데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구분법은 결국 우리가 가장 상식적으로 생각해내기 쉬운 보편적인 시대구분일 뿐입니다.
하지만 서양의 경우에 이와 같이 고대-중세-근세로 이루어지는 3분법이 만들어진 데는 그 나름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됩니다. 그것은 중세기 말 그러니까 이탈리아에 르네상스 문화가 열리기 시작한 무렵의 일입니다. 그 당시 휴머니스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과 세상 돌아가는 방식이 그때까지의 중세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그리스-로마의 고대세계에서 자주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로마의 고대시대를 그 이후의 역사와는 분명히 다른것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러한 고대와 자신들의 현대, 즉 르네상스기라는 현대를 양극에 위치시키고 그 중간에 중세라는 시대를 끼워넣어 오늘날의 3분법적 시대구분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3분법적 시대구분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사고습관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광범하게 채용되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전통적인 시대구분법과 병행하여, 혹은 그러한 전통적인 시대구분법의 바탕으로 이러한 3분법이 널리 이용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오늘날 나라시대奈良時代-헤이안시대平安時代-가마쿠라시대등鎌倉時代-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로 나누는 식의 낡은 시대구분법이 이용되는 경우에도 그 밑바탕에는 서양의 3분법적 시대구분의 발상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3분법적 시대구분은 너무나 포괄적인 구분이라 서 그것만으로는 결코 만족스런 시대구분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연히 좀 더 세밀하고 구체적인 규정이 필요하게 됩니다. 단순히 좀 더 구체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내재적인 발전의 계기를 그 속에 포괄할 수 있는 그러한 구체적인 규정이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고대-중세-근세라는 3분법적 시대구분을 이용하는 경우에도 그 각각의 시대 속에 좀 더 구체적인 역사적 규정을 포함하고 있는 구분법이 채택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3분법적 시대구분이 그대로 쓰이는 경우는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 3분법적 시대구분에는 아주 곤란한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서양을 예로 들어 살펴보면 그리스-로마의 고대, 그로부터 게르만 민족이 들어오고 난 이후의 중세, 그 후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경계로 시작되는 근세로 나누는 것이 통상적인 3분법적 시대구분이라 하겠는데, 이대 이 마지막의 근세 이후에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현대라는 시기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근세와 현대의 구분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다시 말해 근세 속에 현대가 들어가는 것인가, 아니면 근세는 어떤 일정 시점에서 끝나고 그 후에 근세와는 질적으로 다른 현대라는 시대가 이어지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이 일어난 14~16세기와 오늘날 사이에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였고, 또 그 사이에는 그것을 전부 일괄하여 근세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사정들이 많이 개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현대를 어떻게든 근세와 구분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3분법이 아니라 4분법적 시대구분이 되어 버리는데, 이 4분법이라는 것이 아주 골치 아픈 문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라는 것은 요컨대 역사가가 역사를 보고자 할 때, 혹은 우리가 역사를 고찰하려고 할 때에 언제나 자신이 서 있는 시점을 현대라고 부르고 있는 데다, 또 중세인의 경우에도 그가 역사를 쓰려고 했을 당시에는 역시 현대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라는 명칭은 고대, 중세, 근세라는 각기 명료한 성격을 가진 시대의 명칭에 비해서 무성격적인 명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는 말하자면 무명無名의 시대, 어노니머스anonymous 곧 '익명의 시대'가 되는 셈입니다. 현대라는 구분을 굳이 내세운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근세의 단순한 여낭이 아니라 특정의 의미 내용을 갖는 시대를 내세우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다시 현대라는 무성격인 명칭 말고 다른 어떤 명칭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명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것은 아주 까다로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고대-중세-근세라는 3분법은 그것으로 전체가 완결되는 구분법이므로 거기에 새로운 구체적인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거꾸로 3분법 그 자체를 파괴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이 3분법적 시대구분에는 현재 도저히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3분법 고유의 딜레마가 있습니다만,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현재 이 딜레마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현재에도 아직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는 이 3분법에 그 의미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아래에서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이 3분법적 시대구분은 오늘날에도 활용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역사의 파악방식에는 발전단계라는 역사의 사고방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몇 개의 단계로 구분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는 결코 최근에 들어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가 진정으로 발전의 학문으로서 이해되기 시작한 계몽주의 시대, 그러니까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 사이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에 앞서 위대한 이탈리아의 천재로서 비코라는 인물이 있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위와 같이 말합니다. 이들 계몽주의자들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인간문명의 진보의 근원으로서 이성(理性)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이 야만적인 상태로부터 문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이성의 진보를 기준으로 삼아 몇 개의 단계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단계론은 상당히 유치한 것이어서 역사적으로 명확한 단계를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뿐아니라 이들은 역사를 설명하는데 오히려 이성에 대한 신뢰 내지신앙을 무매개적이고 선험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역사의 발전을 내재적으로 파악해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후 19세기의 독일에서 발전단계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주로 독일의 경제학자 및 경제사가에 의해 고안된 경제생활을 중심으로 한 발전단계의 관점인데, 그것이 경제의 측면에 비중을 두게 된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발전단계의 관점은 인간의 다양한 문화현상 중에서 경제가 넓은 의미에서 계량적으로 파악하기가 가장 쉽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즉 역사를 발전단계라는 관점에서 말하면 거시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계량이 어떻든 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경제현상이야말로 그 어떤 다른 역사현상보다도 객관적 계량이 용이하다는 사실에 따른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경제의 발전단계를 상정하고, 나아가 그것을 기초로 하여 인간의 역사를 구분해 보려고 하는 사고방식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일 뿐 아니라 또 가장 중요한 발전단계를 제시한 사람은 독일에서 '국민경제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프리드리히 리스트입니다. 이 리스트라는 사람은 재화財貨의 생산과 교환이라는 두 가지의 계기를 기준으로 경제상태가 인간의 역사단계를 구획하면서 변해간다는 데 착안하여 '미개상태''목축상태''농업 및 공업상태' 그리고 나아가 '농공상(農工商)의 상태'라는 식으로 경제의 상태에 관한 몇 개의 단계를 설정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브루노 힐데브란트가 교환형식-재화를 교환하는 형식을 말합니다-의 발전을 기준으로 하여 '자연경제' 혹은 '현물경제''화폐경제''신용경제'라는 세 개의 발전단계를 고안해냈습니다. 그리고 또한 [국민경제의 성립]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칼 뷔셔는 경제재經濟財의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 이르기가지의 거리를 표준으로 하여 몇 개의 발전단계를 설정하였습니다. 우선 최초의 것이 '자기경제'인데, 이것은 생산자가 동시에 소비자가 되는 단계입니다. 이러한 '자기경제'에 이어서 '도시경제', 다음으로는 '국민경제'라는 세 개의 단계를 뷔셔는 설정해놓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정책학의 분야에서 널리 알려져 잇는 구스타프 슈몰라는 '촌락경제' '도시경제' '국민경제' '세계경제'라는 발전단계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이상은 주로 역사파 경제학이라고 일컬어지는 학파에 속하는 경제학자들의 발상입니다. 이에 비해 원래의 역사학 분야에서는 중세 독일 경제사의 영역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긴 칼 람프레히트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칼 람프레히트는 사회심리에 착안하여 경제학자들이 내놓은 것과는 다른 발전단계를 상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람프레히트도 처음에는 역시 경제사의 발전단계와 아주 흡사한 발전단계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원시적 경제' '씨족적 경제' '촌락적 경제' '장원(莊園)경제' '도시경제'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라는 도식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훗날 그는 이러한 발상을 사회심리 및 민족심리에 기초를 두고 이론화함으로써 다시 '상징주의 시대' '유형주의 시대' '전통주의 시대' '사회주의 시대'라는 발전단계를 상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상이 19세기의 독일학자들이 발전단계를 설정하고자 시도한 노력들입니다. 이러한 발전단계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 번쯤 고려해볼 만한 학문적 내용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이러한 단계를 실제로 역사 속에 설정해보고 구체적으로 어디서부터 어디 까지를 어떤 단계에 맞춰볼 것인지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그것은 너무나도 추상적이어서 아무래도 역사의 구체적인 사실에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곧바로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에는 다들 발전단계론을 실제로 응용하려고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자들의 노력과 거의 병행하여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새로운 발전단계 및 시대구분을 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먼저 칼 마르크스가 '아시아적 사회' '고대적 사회' '봉건적 사회' '시민적 사회'의 4단계를 자신의 [경제학비판]1858에서 내세웠는데, 그 뒤에 엥겔스가 미국의 민속학자 모건의 저서인 [고대사회]1877를 높이 평가하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원시공산제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사회' 앞에 '원시공산제 사회'를 추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시민사회' 다음에 '사회주의 사회'를 놓고 있는데, 이것까지 합하면 모두 여섯 단계의 발전단계를 규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발전단계론은 이전의 그것들과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발전단계론은 이전의 그것들처럼 단순히 몇 개의 발전단계를 설정한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의 단계로부터 다음 단계로 계기적으로 이행해가는 필연적인 과정에 대한 설명, 말하자면 역사의 내재적인 운동법칙을 아울러 설명해냄으로써 그 어떤 이론보다도 강력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순을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방금 위에서 말한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의 발전단계를 경과하는 역사발전이 일어난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역사발전이 필연적인 것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발전단계론은 기묘하리만큼 우리가 흔히 이용하고 있는 고대-중세-근세의 3분법적 시대구분에 딱 들어맞는다는 점입니다. 즉 마르크스는 고대 사회를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는데, 이 노예제 사회는 흔히 말하는 고대 사회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마르크스에게 있어 봉건제 사회는 농노제 사회인데, 이 또한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중세 사회와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로서, 이것은 근대의 소위 시민 사회가 됩니다. 이렇게 보면 고대-중세-근세라는 3분법적 시대구분이 마르크스의 고대적-노예제적, 봉건적-농노제적, 그리고 시민적-자본제적이라는 세 개의 발전단계와 거의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의 3분법적 시대구분은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매우 강력하게 보완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는 단순한 학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의 실천적 이론으로서 세계 도처에서 각 민족, 각 사회에게 그 나름의 실천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하여 각 나라나 민족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이제까지의 역사발전을 설명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역사발전의 목표를 제시해주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종래의 3분법적 시대구분으로는 자신들이 역사를 설명하지 못했던 나라나 민족들도 이제는 고대, 중세, 근세의 세 시대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이러한 예를 들자면 중국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중학교에서 동양사를 배우면서 중국사에 대해 들어 잘 알고 있겠습니다만, 중국사는 단지 왕조의 교체만이 있을 뿐 역사의 발전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심히 의심스러운 역사였던 것으로 저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특히 중국사에는 중세가 없습니다. 적어도 유럽이나 일본의 중세에 비견할 만한 중세가 없다는 것이 중국사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지식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중국에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중국사에 고대노예제, 중제농노제라는 시대구분을 설정하려는 시도가 강력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 사회를 역사가 바야흐로 도달하게 될 목표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입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국가면 국가 혹은 민족이면 민족이 현재 마르크스주의의 발전단계 가운데 과연 어떤 단계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을 현대사 분석의 주요 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진 국가들의 경우에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시민사회의 단계에 도달한 곳이 한 곳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편에서는 그러한 단계로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정치목표가 됨과 아울러,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적인 제국주의의 환경에서는 발전단계의 도약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 시민사회를 생략한 역사발전의 이론을 고안해내기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3분법적 시대구분을 보완한 이래 이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적 발전은 보편적인 역사발전의 법칙으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어디에서나 그러한 법칙의 실현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것이 대체로 최근에 이르기까지 역사연구를 지배해온 두드러진 경향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원래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이와 같은 시대구분을 우리는 이제까지 이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대구분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다양한 측면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의문 가운데 가장 흔한 의문은, 이 장의 맨 앞부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래 단절이란 것이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제멋대로 단절을 만드는 것은 역사를 무리하게 하나의 틀 속에 집어넣으려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입니다. 발전단계를 규정하는 그 어떤 이론이든 일정한 시점을 택해 역사를 칼로 무 베듯 명료하게 앞뒤로 자르는 일은 지극히 예외적으로밖에 행해지지 않는 일입니다. 시대구분을 아무리 정밀하게 하더라도 그러한 시대구분과 모순되는 사실은 언제나 남게 되는데, 이것은 문제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시대구분에 대한 일종의 불신, 나아가서는 편의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3분법적 시대구분의 근거가 된 르네상스 시대와 관련하여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도저히 르네상스라고는 인정할 수 없는 시대, 곧 중세시대 자체 속에 르네상스적인 현상이 도처에 스며들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 결과 중세 속에 르네상스가 확대 적용되기에 이르렀고, 그럼에 따라 르네상스의 의미도 그 만큼 퇴색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 르네상스 속에서도 중세적인 요소가 얼마든지 발견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측면에서도 르네상스라는 시대구분의 의미가 마찬가지로 희석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시대구분이란 완전히 편의적인 것, 다시 말해 역사를 서술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일 뿐, 하등의 본질적인 중용성을 갖지 않은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생겨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실제로 전문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에게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커다란 오류가 숨어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도대체 왜 시대구분을 하느냐, 즉 실재하는 과거의 총체로서의 역사의 흐름속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의 단락을 지으려고 하느냐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어느 정도 언급을 한 바가 있습니다만, 우리가 말하는 역사란 존재하는 역사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객관으로서의 역사에 대해 우리의 역사는 주관적인 계기에 의해 정리된 객관적 역사에 대해 우리의 역사는 주관적인 계기에 의해 정리된 객관적 역사의 한 단편인 것입니다. 따라서 바로 이런 주관적 역사 속에만 시대구분이 있는 것이지, 존재로서의 역사 속에 단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지적해 두어야 할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구분이 사실상 이와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객관적 역사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가공의 설정, 가공의 시대구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 속의 구분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이 객관적일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아주 어려운 문제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특히 강조해두어야 할 것은 시대구분이란 본래 역사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근세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그것은 근세라는 하나의 개념 속에 포함되는 의미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역사를 근세라는 하나의 척도로 재서 거기에 하나의 단락을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근세라는 하나의 역사적 의미연관을 역사의 사실 속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 시대구분의 본래 목적이고, 역사에 대한 통일적 이해의 작업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역사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판단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라면 시대구분이란 역사연구 자체의 본질적인 작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이것을 편의적인 것이라고 치부한다면 아주 커다란 잘못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의 시대구분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엄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그것은 확실히 어려운 문제이고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한 문제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역사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판단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 이상, 어디까지나 회피할 수 없는 작업임과 동시에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가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항상 사실에 비추어 검증을 거듭함으로써 좀 더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통일적인 역사상(歷史像)도 좀 더 정확하게 형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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