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눈 - 호미고메 요조
제4장. 역사는 항상 다시 쓰여진다
역사의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문제는 앞서 사료의 해석이라는 작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마지막 부분에서 사료를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의 주관을 제멋대로 사료 속에서 끌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점. 바꾸어 말해 원래 그 사료를 쓴 사람의 심리를 감안하고 거기에 따라서 사료를 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간략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바로 이 문제로부터 우리가 역사를 연구할 때 항상 따라다니는 문제, 즉 역사에 있어서의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역사를 연구하거나 서술함에 있어서 우리가 항상 부딧치게 되는 아주 골치아픈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또 우리가 역사를 연구하거나 서술해 나가는 여러 단계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이며, 당시에 이제까지 살펴본 여러 장에서 다루어온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이 장만으로 완전히 끝 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장에서 우선 그 실마리가 될 중요한 쟁점 두 가지 정도를 끌어내어 이 문제가 어떤 성질의 문제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선 첫째로 역사의 재료인 사료를 연구하여 그로부터 우리가 아무런 오류가 없는 사실, 즉 역사상의 진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가정하기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작업이 끝났느냐 하면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연구로부터 우리가 끌어낸 것은 단순한 역사상의 사실일 따름입니다. 또 설사 그것을 연대순으로 배열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역사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잡다한 사실들이 그저 연대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학자에 따라서는 이렇게 해서 모아진 사실들 상호간의 관련을 더듬어가면 그로부터 저절로 역사가 생겨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19세기만 해도 오히려 이러한 사고방식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실증적인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 실증적인 역사가들의 사고방식에는 바로 앞 장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료 속에 주관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는 기본적인 생각이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 자체로서는 결코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단순한 사료 해석상의 이러한 규칙을 그 적용 한도를 넘어서서 역사학 전체의 원칙으로까지 확대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류의 실증적 역사가들은 각자의 개인적인 관점을 되도록 제거하고 사료로부터 획득된 사실로 하여금 스스로 말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역사의 최대의 요건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견해는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그것은 이중의 의미에서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우선 다음과 같은 점을 문제로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의 사료라고 하더라도 그 종류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문자로 쓰여진 서술사료가 있는가 하면 그 자체로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유물적 사료도 있습니다. 고고학이나 고천학(古泉學)을 비롯한 역사보조학이 제공해주는 자료들이 바로 그런 류의 것들입니다. 또한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해도 각종의 증서류 같은 것은 너무나 구체적인 사실과 밀착되어 있어서 그 하나하나는 대부분 역사의 단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증서류나 여타의 유물적인 사료를 설명해주고 그 각각을 역사 속에 자리메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연대기나 전기 혹은 각서 따위의 서술사료들도 그러한 서술사료를 제작한 사람의 주관에 따른 고찰, 그 사람의 주관에 따른 각 시대에 있어서의 역사일 뿐입니다. 그뿐아니라 또한 거기에는 이미 그 서술사료를 작성한 사람들에 의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취사와 선택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사료를 작성한 사람의 주관이 우리의 주관이나 우리의 사고방식, 혹은 우리의 문제의식과 동일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원칙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다른 유물적 사료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재료는 될지언정 그러한 설명이 곧바로 우리를 만족시켜주는 설명으로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설명도 제시해주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과거의 사실이란 우리가 그것을 어떤 하나의 문맥속에 집어넣어 말을 하게 하지 않는 이상 결코 그 스스로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스스로 말을 한다'고 하는 실증적 역사가들의 견해는 하나의 수사학은 될지언정 그대로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따금 역사가가 자신이 서술한 역사 속에는 단 한 행도 사료에 기초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장황하게 떠벌이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 또한 단순한 수사학에 지나지 않든가 기껏해야 자기만족 이상의 것이 되지는 못합니다.
둘째로, 역사가는 자신의 주관을 제거하고 사실로 하여금 스스로 말을 하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문제를 설정하는 방식 그 자체가 처음부터 우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역사를 쓰고자 하여 사료에 접근할 때에는 무슨 '황소 뒷걸음질에 쥐잡는' 격으로 무턱대고 사료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사료를 탐구할 때에는 이미 우리 스스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 의도에 따라서 사료에 접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런 의도를 가리켜 우리는 보통 가설(假說)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을 상식적인 말로 표현하면, '예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요즈음 휴행하는 추리소설적 어법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아무런 가설도 없이 범죄 수사에 뛰어드는 탐정이나 형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역사가도 나름대로 이 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사건이 전개되었을 것이라든가 혹은 그런 식으로 사건이 전개될 가능성이 있었다든가 하는 식의 가설을 세우고 사료에 접근한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사료라는 것도 연구자를 위해 빠짐없이 전부 갖춰져 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차피 새롭게 사료를 발굴하고 발견하려는 노력을 해야만 하게 되는데, 이렇게 부족한 사료를 발굴하고 발견하려는 노력을 해야만 하게 되는데, 이렇게 부족한 사료를 발굴하려고 하는 경우에도 어떤 하나의 예상이 없고서는 사료 그 자체를 발견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게 됩니다. 오히려 예로부터 위대한 역사가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사료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예상이나 가설을 아주 절묘하게 내세운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예상이나 가설을 아주 절묘하게 설정한 덕택에 유력한 사료를 발굴해낼 수 있었고 또 발견할 수도 있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도 없이는 우리의 역사연구작업은 애당초 성립되지 않을 뿐더러, 또한 그것 없이는 역사를 쓸 수도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세워야 하는 예상이나 가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것이어야만 하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지 않다기보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연구의 각 단계에서 항상 좀더 잘 다듬어져서 보다 객관적인 진실에 접근해가는 식으로 끊임없이 개선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우리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맨 처음에 세운 예상이나 가설이 자기도 모르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우리가 연구를 할 때에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경쟁하는 가운데 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지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서 우리는 가설을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처음에 세운 가설을 고집하는 경향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 결과 무리하고 자의적이라는 의미에서의 주관적인 해석에 빠지는 잘못을 범하기 십상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증적인 역사가들 중에는 애초에 역사를 연구하면서 '해석'을 끌어들인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그와 같은 해석, 즉 주관을 제거하고 사료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스스로 말하도록 놔두는 것이 역사를 연구하는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뭔가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가의 가설이 처음부터 잘못 설정되어 있든가 아니면 그 가설을 고집하는 태도에 있는 것이지 가설을 세우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가설 없이는 우리는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습니다. 이는 가설도 없는 탐정이 아무리 현장을 둘러보고 거리를 헤매봐야 무엇 하나 찾아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라 좀 더 까다로운 문제가 또 한편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다룬 장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읽기도 하고 혹은 연구하기도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결국 우리가 장래를 앞에 두고 어떤 행위를 결단하고자 할 때에 그런 결단을 내리기 위한 근거를 구하고자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라 했습니다. 말하자면 장래의 결단을 위해 우리는 과거에 물음을 던진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두고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각각의 시대, 각각의 영역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하여 그 문제를 해석하기 위해 과거에 물음을 던진다고 한다면 그 문제는 원칙적으로 항상 다른 것일 것이고, 따라서 과거에 물음을 던지는 방식도 항상 달라질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흔히들 하는 말입니다만, 역사는 시대와 함께 다시 쓰여지는 것입니다. 역사가 시대와 더불어 다시 쓰여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좀 더 분명한 예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아주 가까운 과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일본의 역사와 관련하여 전쟁 전에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역사 서술과 전쟁 후의 그것을 비교해보면 이 점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의무 교육을 시작해서 각 단계의 학교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를 살펴보더라도 전쟁 전의 교과서와 전쟁 후의 교과서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당면한 문제 내지는 그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시대에 따라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게다가 또한 우리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것, 즉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야만 하는가 하는 우리의 태도까지도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역사도 달리 쓰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태평양 전쟁은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역사의 본질에 대해 아주 훌륭한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이렇게 단지 시대와 더불어서만, 그러니까 시간적인 관련에서만 달리 쓰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물음은 세계 도처의 인간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므로 일본 사람이 역사에 던지는 물음과 미국인이나 영국인 혹은 독일인이 역사에 던지는 물음은 다를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서양사를 전공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 역사가의 연구서를 누구보다 자주 읽어야만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의 역사학은 서양에서 발달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배움으로써 오늘날의 학문적인 역사학을 이룩해 놓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만일 서양의 역사를 서술하는 경우에 영국이나 프랑스, 혹은 독일 출신의 위대한 역사가의 저서를 그대로 취해 저의 것으로서 가르치거나 쓰거나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나하면 한마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나 문제의식이 그들의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설혹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독일의 랑케의 저서라 하더라도 제가 그것을 빌려 학생들을 위해 강의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랑케의 역사는 그 자체로 대단히 훌륭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그것을 내 자신의 강의로서 혹은 역사서술로서 이용하려고 들면 그 순간 아무래도 그것이 내 자신의 것이 아니고, 따라서 학생에게나 일반 독자에게나 그것을 그대로 제공할 수는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특별히 서양의 위대한 역사가들의 저술이 틀리거나 나빠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문제와 문제의식이 우리와는 다르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방금 위에서 예로 든 랑케 자신도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역사를 서술한 그리스의 대표적인 역사가 투키디데스를 두고 투키디데스를 능가할 만한 역사가는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랑케가 이렇게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적어도 펠레폰네소스 전쟁에 관한 한 투키디데스의 역사로 충분하고,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연구를 하거나 서술을 하거나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랑케가 믿고 있기 때문일까요? 만일 그렇다고 답한다면 그것은 랑케의 진의와는 전혀 동떨어진 대답이 될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쩌면 역사란 스스로 문제를 느끼고 과거에 물음을 던지는 곳에서만 생겨나는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도 관심도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진 역사는 설사 투키디데스나 랑케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우리 자신의 역사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시대와 더불어 원하든 원치 않든 다시 쓰여지게 마련이지만, 그것은 시간적인 관련 속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공간적인 관련 속에서도 다시 쓰여지게 됩니다. 나라가 달라지면 같은 과거에 관해서도 다른 역사가 쓰여지는 것이고, 또 달리 쓰여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제 막 제가 한 말이 옳다면, 여러분의 뇌리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고개를 내밀 것입니다. 즉, 그렇다면 역사는 항상 그것을 쓰는 인간의 주관의 산물일 뿐 객관적인 역사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냐 하는 의문, 혹은 역사는 항상 단지 변화하고 유동하는 것일 뿐이며 따라서 역사상의 진리는 기껏해야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진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냐 하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는 일단 역사에는 절대로 객관적인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변을 해두어야만 하겠습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출판물 가운데 [캠브리지 역사총서](고대, 중세, 근세의 3부로 이루어진 세계사)란 것이 있는데, 이 총서를 편집하면서 편집자인 액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역사는 최종적으로 객관적인 역사를 서술한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이 총서의 계획에 참여한 집필자들은 만일 그 자신들의 이름을 삭제하고 나면 시대나 영역이 변화하고 그에 따라 필자가 교체되더라도 그 사실을 독자들이 눈치챌 수 없도록 할 것을 목적으로 해야만 하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객관적 진실의 합성이어야 하며, 바야흐로 이제 연구의 진보와 더불어 객관적 진실의 합성으로서의 역사가 가능해졌다는 확신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방금 위에서 말씀드린 바, 객관적인 역사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액튼 교수의 이러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잘못이었습니다.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캠브리지 역사총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액튼 교수의 확신이나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장 직접적인 책임을 지고 집필했던 근세사야말로 그 총서 가운데서 가장 불완전한 부분인 것으로 지적되었고, 따라서 결국 그부분을 전면적으로 수정한 개정판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액튼 교수나 근세사를 집필한 역사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대나 중세사의 경우에도 거의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역사에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역사가 언제나 문자 그대로 다시 쓰여지는 것이냐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갑작스런 단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있어서도 돌연한 급변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물론 혁명이라든가 우리가 경험한 바 전면적인 패전과 같은 사건에 의해 역사가 대폭적으로 다시 쓰여지는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이전 역사의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올바른 것으로 간주되던 것이 그 후의 연구에 의해 부정되는 일은 물론 흔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또한 이전에 중요시 되던 것이 그 후의 연구에 의해 그 의의가 감소되거나 혹은 완전히 서술에서 빠져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사료처리의 절차를 거쳐 확립된 사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올바른 것으로 남게 됩니다. 예를 들어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변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며, 또한 그와 관련된 다양한 사실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역사도 일단은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전히 새로 쓰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사료로부터 획득된 사실이 스스로 역사를 만들지는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사실이나 사실 상호간의 관련에 해석을 가함으로써만 역사는 하나의 통합된 전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씌어짐으로써 변하는 것은 사실이나 사실 상호간의 관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갖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면하는 새로운 문제나 시대와 더불어 변해가는 우리의 문제의식의 변화와 함께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단 확립된 객관적인 사실이 그 즉시 잘못으로 밝혀지는 경우란 없으므로, 역사가 다시 쓰여지는 것이라고는 해도 이는 결코 문자 그대로 전면적으로 다시 쓰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이전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그 위에 새로운 연구를 쌓아가는 것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주관성과 객관성의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우리는 항상 역사의 소재로서의 사실이나 데이터와, 그것들에 해석을 가함으로써 성립되는 역사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도 해석은 항상 달라질 가능성이 있으며, 또 사실 그자체도 항상 새롭게 추가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역사는 이렇게 이중의 의미에서 항상 다시 쓰여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에 완전히 객관적인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점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이 자리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역사의 과정, 다시 말해 우리가 연구에 의해서 쓰게 되는 역사가 아니라 과거의 모든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역사의 과정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의 점진적이고도 무한한 전개의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이 과정에 있어서는 지난 시대의 문제라든가 그 문제에 대응하여 생겨난 역사가 단순히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말해 새로운 문제나 그 문제에 대응하는 새로움 역사 속에 포섭되어가는 형태로 부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시야는 끊임없이 넓어지고 또 끊임없이 깊어집니다. 바로 이 점에 역사라는 학문이 점진적으로 축적되면서 우리의 역사인식에 깊이와 넓이를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점은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비단 역사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모든 학문에 있어서도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모든 학문에 있어서도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기술적 진보는 언제나 외계의 자연을 지배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이루어지는 것인데, 외계의 자연을 지배하는 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우리의 시야도 또한 그 만큼 당연히 넓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그 예를 찾자면, 사료 연구의 측면에서 옛날 사람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방법이 새로이 개발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앞 장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비행기를 이용함으로써 우리는 옛날의 경지제도나 농업상의 토지제도 따위에 대해 19세기의 역사가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고고학적인 유물 등의 연대를 확정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탄소연대측정법, 즉 해당 유물 속에 포함되어 있는 탄화물의 방사능을 검사함으로써 그것의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이 제2차 대전 후에 널리 행해지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아주 오랜 옛날의 연대까지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현재 이 방법은 아직 완전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오차가 상당히 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달리 비교할 아무런 자료 없이도 대략적인 연대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놀랄만한 기술의 진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술적인 진보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는 과거에 인간적인 혹은 사회적인 온갖 다양한 경험을 수도 없이 쌓음으로써 오늘은 우리의 물음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아주 다양한 답변을 제공해 줍니다. 이와 같이 풍부한 인간경험의 보고를 연구함으로써 또한 우리의 역사에 대한 해석도 그 깊이와 넓이를 더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의 역사가 언제나 얼마간은 주관적인 계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주관이란 것이 우리의 단순한 착상이나 개인적인 편견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를 되돌아보면 그때까지는 완전히 자명한 것으로 생각되던 자신이 전혀 알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기자신만의 문제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 가운데 역사나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자아가 모두 역사나 환경에 의해서만 형성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주체인 까닭에 자신에 대해 항상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바라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변이 누구에게나 결코 자명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소크라테스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도 무엇보다 이와 같은 의문을 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역사에 있어서의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애초의 문제로 되돌아가면, 이 문제는 결국 다분히 역사에 대한 우리의 전체적인 시각, 즉 역사관의 문제로까지 귀착되는 것입니다. 이 역사관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함께 논의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 다른 맥락에서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이제까지 말씀드린 점과 관련하여 한마디만 결론적인 말을 덧붙여두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역사를 볼 때에 이용하게 되는 예상이라든가 가설 같은 것은 결국 우리의 역사관과 관련되는 문제라는 점이 그 하나입니다. 이 장의 맨 앞 부분에서 역사적 사실로부터 역사를 구성할 때에는 주관이 필요하다는 점과 아울러 이런 주관을 거치지 않고는 역사적 사실을 구성할 수 없다고 하는 점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역사를 연구할 때에는 논리상 언제나 어떤 주관이 선행하게 마련이라는 말씀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주관이라는 것이 역사관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만, 일단 여기서는 우리가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항상 역사관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확인해 두는 데 그치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여자면, 이 역사관이나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역사연구상의 가설이나 모두 역사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런 관계를 잘못 이해하면-이것을 오해할 위험이 항상 따라다닙니다만-우리가 지극히 경계해야 할 역사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 그것도 나쁜 의미에서의 주관적인 해석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일단 이러한 바람직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역사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하루 아침에 무너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점에 항상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역사는 사람의 인간적인 체취가 너무나 강하다든가 혹은 또 지나치게 계급적인 입장에 기울어 있다든가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이러한 일은 모두 이 역사관 내지 역사상의 가설을 역사 그 자체인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 기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연구할 때나 역사를 서술할 때나 가장 주의를 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의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그렇지만 이 주관적인 해석의 유혹은 역사관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성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서 지극히 극복하기 어려운 유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관이 가지고 있는 이렇게 강력한 유혹에 대해서는 역사와 역사관에 대해 다루는 곳에서 다시 말씀드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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