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눈 - 호미고메 요조
제2장 역사라는 말의 의미
앞 장에서 다룬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이야기에 이어서, 이 장에서는 '과거를 여는 실마리'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그런데 우선 이 문제에 들어가기 위한 실마리로서-실마리란 말이 이중으로 나와서 좀 혼동이 되긴 하겠습니다만-역사라는 말을 설명하는 데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역사라는 학문이 원래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이미 앞장에서 말씀드린바 있거니와 역사라는 말의 의미 또한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역사라는 단어는 원래 중국에서 빌어온 말입니다. 그런데 역사라는 말을 구성하는 '역(歷)'과 '사(史)'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사'자라고 합니다. 이 '사'자는 원래 사람이 책을 받쳐들고 있는 형상을 나타내는 글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사'라는 글자는 사물이나 사건을 글로 써서 남기는 인간, 기록하는 인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차용해온 이 글자만으로는 이제부터 말씀드리려고 하는 실마리를 얻어낼 수 없습니다. 반면에 같은 역사를 의미하는 유럽의 언어에서는 이제부터 말씀드릴 '과거를 여는 실마리'를 잡기 위한 훌륭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역사를 의미하는 말로서 대체로 두 가지 문자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유럽 문명의 원류를 이루는 그리스-로마 계열의 문자이고, 다른 하나는 중세 이후에 유럽 문명을 담당하게 되는 게르만계 민족의 언어입니다. 그 그리스-로마 계열의 언어란 곧 현대 영어의 '히스토리(history)'라는 단어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는 '히스토리아'라고 하는데, 이때 히스토리아라는 말은 원래 '히스토리오'라는 동사에서 전화된 명사입니다. 이 히스토리오라는 동사의 의미는 '사물을 탐구하다, 조사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히스토리아는 결국 조사된 것, 탐구된 것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로마의 경우에도 이에 해당되는 말은 그리스어와 마찬가지로 히스토리아입니다. 이히스토리아라는 말은 이탈리아어로는 '이스토리아', 프랑스어로는 '이스토아르', 영어로는 '히스토리'가 됩니다. 이야기를 뜻하는 영어의 스토리(story)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게르만 계열의 언어에서는 역사를 게쉬히테(Ceschichte)라고 합니다.이 게쉬히테라는 말은 또 어떤 말에서 유래한 것일까요? 그것은 '게쉐엔', 즉 '일어나다'라는 의미를 갖는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그르므로 게쉬히테는 이미 일어난 일, 곧 과거의 사실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유럽에서 역사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을 탐구해낸 결고, 곧 탐구된 사실이라는 의미를 갖는 히스토리라는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게쉬히테, 즉 이미 일어난 사실을 가리키는 두 가지의 문자가 사용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유럽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 두 가지의 말은 역사라는 말,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역사라는 말의 용법을 그래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자못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역사라고 말할 때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역사책에 쓰여진 사건 혹은 과거에 대해 탐구한 사건을 역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학문적으로 사용되는 역사란 말의 뜻은 물론 후자의 의미에 속합니다. 어쨌든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그것을 탐구하여 글로 적은 역사라는 역사의 이중의 의미가 서양의 언어 속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라는 말의 뜻을 이렇게 더듬어 볼 때, 어쨌든 우리는 과거의 사실을 탐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탐구하는 사건이면 모두 그대로 역사가 되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과거에 일어난 그 복잡하기 짝이 없는 모든 사실이 역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그 모든 과거의 사실을 탐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역사가 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 하루, 아니 어제 하루에 있었던 일만을 잠시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금세 분명해집니다. 비록 단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이라 하더라도 이것저것 꼼꼼하게 따지고 보면 한도 끝도 없이 복잡하여 그것만을 서술해도 책이 몇 권이나 될 정도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일기를 쓰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일기를 쓰는 경우 그 날에 경험한 모든 일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일까요? 우리는 결코 그런 식으로 일기는 쓰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날 경험한 일 가운데 필요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골라서 일기장에 기록으로 남깁니다. 역사의 경우도 일기를 쓰는 것과 똑같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남김없이 모두 긁어모아 역사를 쓰는 경우란 결코 없습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는 잡다한 여러 가지 사실들 가운데서 몇 가지의 사실만을 골라내서 역사를 씁니다. 결국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쓰는 일기의 경우와 다를 바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잡다한 사실들 중에서 도대체 어떤 사실을 취하고 어떤 사실은 버리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여기서 소위 취사선택이라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인데, 이 취사선택은 반드시 일정한 기준이 있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 기준에 따라 우리는 과거의 사실에 대한 평가를 한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가려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기준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앞에서 과거의 사실을 탐구한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무턱대고 그렇게 탐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때 비로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란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그 이유는 우리가 뭔가 그것에 대해 탐구할 필요가 있다든가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탐구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일기를 예로 들어 말씀드린 '기준'이 라는 것도 결국에는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뭔가를 기록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기록하려고 하는 그 사실 속에서 뭔가 기록할 만한 필요 내지는 가치를 찾아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이 점을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문제와 관련시켜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즉, 앞에서 우리가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까닭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결단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과거의 사실, 다시 말해 미래에 대한 우리의 결단에 어떤 이유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과거의 사실을 그 속에서 찾아내기 위함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때 그 어떤 이유를 부여해 주는 그 무엇인가가 취사선택의 기준이요 이유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점을 구체적으로 하나의 예를 들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기원전 5세기경에 아테네에서 활약한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입니다. 이 자리는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이므로 굳이 철학자를 예로 끌어들일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는 여기서 문제로 삼기에 매우 적절한 인물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앞 장에서 저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문제를 일본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무관한 서양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문제로 바꿔놓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렇게 한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때 그것은 결코 단순한 회고 취미나 상고(尙古) 취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 속에 들어 있는 과거, 따라서 그것은 어쩔 도리 없이 우리 자신에 대한 관심인 바, 이 점을 일단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인 서양사에 대한 관심과 관련하여 마찬가지로 증명해낼 수 있다면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문제를 더 한층 분명히 여러분에게 이해시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에 대한 관심이란 자기자신에 대한 관심 혹은 적어도 그와 관련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던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직접 맥이 통하는 셈이라 하겠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아는' 방법과 역사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아는' 방법이 반드시 똑같지는 않다고해도 궁극적인 목적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역사의 근본이념을 생각할 때마다 으레 이 대철학자의 사상을 떠올리곤 합니다. 원래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이 격언은 소크라테스가 처음으로 한 말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이 숭배해 마지 않던 중부 그리스의 델피에 있는 아폴로 신전에 내걸려 있던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야 어찌됐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교사로서 설파한 내용은 언제나 반드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귀착되었으므로, 그 격언을 소크라테스의 것이라고 간주해도 그다지 무리는 없을 줄 압니다.
그러면 이제 본래의 문제로 돌아가기로 합시다. 소크라테스는 대략 70세 정도 살다 간 사람입니다. 이 소크라테스의 칠십 평생에 대해서는 실로 온갖 잡다한 사실들이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흔히 알고 있는 것을 말하면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청년들과 어울리며 청년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로 살았다. 그런데 그의 교육자로서의 명성이 너무나 높다보니 그 명성을 시기하는 자가 있어 그가 소크라테스를 음해할 목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신봉하는 신을 믿지 않고 따로 새로운 신령을 믿었다'라고 참언을 하는 바람에 투옥당했다. 이어서 재판을 받은 결과 사형을 선고 받았다. 마음속 깊이 진정으로 아테네를 사랑했던 소크라테스는 친구가 탈옥하여 도망칠 것을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양심이 명하는 바대로 국법에 따라 순순히 독배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정도의 사실들이 대체로 우리가 교과서 등을 통해서 소크라테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리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의 칠십 평생 가운데 어째서 겨우 이런 정도의 사실만이 우리의 교과서에 실려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일본의 경우 한정시켜 생각해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교과서가 발행된 시기가 전쟁 전이라면 그것은 국가라는 절대자에 순종하는 국민도덕의 모범을 보이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만일 그것이 전쟁 후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발행된 교과서라면 삶과 죽음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으면서도 자신의 나라와 정의를 사랑하는 신념에 따라 미동도 하지 않고 의연히 죽음을 택한 소크라테스의 고귀한 정신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의 칠십 평생 중에는 이런 사실들 말고도 알려져야 할 사실들이 아주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하나의 예를 들자면 그가 아테네의 청년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게 그가 청년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는가 하면 그것은 그가 진리에 이르는 길을 누구나가 승복하지 않을 수 없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그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는 학문 내지 학문적 방법의 창시자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학문의 역사, 혹은 좀 더 범위를 넓게 잡아 문화의 역사를 생각하는 경우 반드시 소크라테스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여담입니다만, 소크라테스의 사적인 행적과 관련하여 플라톤(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유명한 철학자)이 기록으로 남긴 [대화편]에 의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일화가 있는데, 이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설파하고 다닌 것은 시민(국민)의 윤리였다고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입만 열면 항상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를 설파하고 다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시민된 자는 반드시 훌륭한 육체의 소유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였습니다. 그저 청년들에게만 강조하고 다닌 정도가 아닙니다. 그 스스로가 육체의 훈련, 다시 말해 체육에 남보다 몇 배나 더 열의를 쏟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흔적도 여기저기서 발견됩니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의 전인적(全人的) 이상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일화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육체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찬양했는지,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중단하면서까지 치렀다고 하는 저 올림픽 경기도 거기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태도는 경기를 그저 구경이나 하는 것으로 여겨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사이의 목숨을 건 싸움을 앉아서 즐기기만 하던 로마인들과 비교할 때 아주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자신이 직접 하기보다는 구경하는 쪽으로 기울기 쉬운 것이 현대인들의 스포츠입니다. 이런 점과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살던 그리스 고전기의 정신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 않을까요? [대화편]을 기록한 대철학자 플라톤 자신도 체육과 경기를 몹시 사랑한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덧붙여두겠습니다. 잠시 줄거리를 벗어났습니다만, 이제까지 제가 소크라테스를 끌어들여 그리스 문화의 일단을 조금은 장황하게 논한 까닭은 역사란 결국 우리의 관심 문제에 따라 수많은 사실들 가운데 이에 들어맞는 한에서 우리가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을 골라내는 것이라는 점, 따라서 과거의 사실을 무차별적으로 재현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이와 같다 해도 우리는 닥치는 대로 아무데서나 사실들을 골라낼 수는 없습니다. 사실을 끌어내기 위해 바탕으로 삼아야 할 신뢰할 수 있는 재료, 즉 사료(使料)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앞서 잠깐 말씀드린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아는 데에 가장 중요한 사료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그리스 시민의 이상과 윤리와 학문,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삶에 대해서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료들이 없이 그리스 고전기의 문화사를 쓸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플라톤의 [대화편]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냐 하면 그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불충분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 외에도 그리스 고전기의 문화사와 관련된 사료는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부를 남김없이 모아도 어떤 의미에서는 불충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숱한 사실들에 비한다면 지극히 제한적인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설사 과거의 사실이 무제한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추상적 가능성으로 그럴 뿐, 실제로는 사료가 보여주는 것 이상의 과거의 사실이란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바로 이 점이 픽션과 논픽션의 다른 점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에서는 주어진 사료 없이 단지 그럴 가능성만 가지고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하여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역사가에게도 상상력은 소설가 못지 않게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가는 소설가와 달리 상상한 내용을 그대로 사실로서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사료라고 하는 것이 역사가의 사활을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료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요?
사료 가운데 우선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문자로 쓰여진 사료입니다. 앞 장에서 말씀드린 [고사기]와 [일본서기]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밖에 비문(碑文)이나 증서 등 과거에 관한 기록도 모두 문헌사료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사료로부터 우리가 과거의 어떤 사실을 끌어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그 사실이 올바른 것인지 올바르지 않은 것인지를 판단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사료 그 자체는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전달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자격을 구비한 사료가 되려면, 우선 어떤 사건과 관련하여 그 사건이 일어난 동시대의 사료여야 하며, 또 그것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의 기록이어야만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반적으로 문헌사료라고 불리는 것들에는 과거의 사실과 사료의 관련 정도에 따라 1등사료니 2등사료니 하는 차등이 주어지게 됩니다. 어떤 사건에 대해서나 모두 1등사료만 있다면 역사가라는 직업도 참으로 행복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원하는 사료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원형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원본 자체가 아예 사라져버린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 복사본만 존재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것이 정말로 올바르게 쓰여져 있는지 어떤지가 문제되며, 또 단순히 오류가 없어야 한다는 정도만이 아니라 그것을 베껴 쓴 사람의 가필이 있는지 어떤지도 문제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사료의 원형이 어떤가를 검토하고 따지는 작업을 우리는 '사료비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료비판의 작업에는 단순히 사료 그 자체의 원형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 말고도 그 안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이 진실인지 어떤지를 따지는 작업도 포함됩니다. 이러한 두 측면을 모두 포함하여 사료비판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사료비판은 아주 번거로운 작업이지만 그러나 역사가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작업입니다. 그것이 번거로운 작업이라고 하는 주된 이유는 어떤 사료를 기록으로 남겨준 사람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좋고 나쁨과 사랑과 미움과 이상과 이해(利害)를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이고, 또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기록을 남긴 사람이 아무리 양심적이고 객관적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있게 마련이고, 또 설사 기록상의 잘못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양심적이고 객관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경우는 오히려 예외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사료비판의 작업에 있어서는 언제나 성악설(性惡說)의 입장을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료 제작자의 주관이 개입되기 어렵거나 혹은 완전히 개입되지 않은 종류의 사료가 중시되고, 또 증서류인지 아니면 내용의 단순한 기록인지가 중요해질 뿐만 아니라 문자에 의한 사료와는 다른 고고학 및 고전학적(古錢學的)인 사료, 바꾸어 말하면 유물사료(遺物史料)의 이용이 고려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물사료는 오늘날 실제로 많이 이용되고 그에 따른 성과도 많은 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유물사료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그러한 유물사료들로 하여금 입을 열게 하기 위해 다시 문헌사료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사료비판으로서 역사의 번거로운 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단 이렇게 번거로운 사료비판 작업이 모두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가정합시다. 그렇게 되면 이것으로 만족스러운 재료가 전부 갖추어진 것이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료 제작자는 오늘날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기록으로 남긴 데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기로한 데 반해,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밖에,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기록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 우리의 관심과 사료 제작자와의 관심이 결코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싶어하는 것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 경우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보충을 해야 할까요? 물론 우리의 상상력도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입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사료연구는 이런 경우에도 과거의 사실을 재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유력한 방법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방법은 사료 제작자의 숨은 의도를 파헤쳐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말하자면 사료 제작자 역시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살아 있는 인간이라서 우리가 마찬가지로 다종다양한 이상이나 이해, 좋고 나쁨이나 사랑과 증오 따위의 감정에 따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허위의 사료나 혹은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사료를 쓰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때 그러한 불완전성 내지 부정확성 혹은 허위성이 명확하게 확인되는 경우에는 불완전하거나 허위라는 사실 그 자체가 오히려 과거에 대한 확고부동한 증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명치 시대의 어떤 사학자는, [태평기(太平記)]는 문학이지 역사서가 아니며, 따라서 '[태평기]는 사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태평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신뢰를 보낼 수 없다 하더라도 [태평기]의 저자로 하여금 그와 같은 서술을 하게끔 만든 이상이나 동기에는 그 시대의 배경을 엿보기에 충분한 중요한 증언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아까 말씀드린 1등사료니 2등사료니 하는 사료의 등급도 의미가 없어지고, 때로는 그러한 등급의 순위가 뒤바뀌는 경우조차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료 제작자의 숨은 의도를 따라가는 방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른바 위조문서(僞造文書)에 대한 연구와 비판의 방법입니다. 허위의 진술은 보통 연대기나 전기와 같은 역사서 속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그러나 보다 많이 발견되는 것은 아무래도 서한류나 증서류에서라고 하겠습니다. 족보나 도면 따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사료에 허위로 기록된 내용은 확실히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건대 위조를 하는 경우에는 그렇게 위조를 하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만일 그 이유가 그 어떤 방법으로든 확인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다른 어떤 기록에 못지 않게 과거에 대한 확고부동한 증언을 제공해 주게 됩니다. 물론 그것이 직접 증언해 주는 범위는 그다지 넓은 것이 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조된 사료를 광범하게 연구하고 그 결과를 종합할 때에는 사료 속에 충분히 기술되어 있지 않은 내용에 대해 어떤 중요한 결론을 끌어낼 수도 있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상 중세사 연구의 진전은 이와 같은 위조문서의 연구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거를 여는 실마리라는 의미에서의 사료와 그 비판에 대해서는 이외에도 말씀드려야 할 내용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만, 그 하나하나를 모두 다루면 지나치게 교과서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는 그 핵심만을 간추려서 말씀드렸습니다. 마지막에 언급한 위조문서에 대해서는 내용 그 자체에 재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결론도 역사라는 학문의 성격, 나아가서는 '역사를 보는 눈'에도 중요하기 때문에 다음 장에서 다시 좀 더 상세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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