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8장
용
4. 권위와 길상의 상징
용은 우리 민족, 나아가서는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오랜 옛날부터 초능력적인 상상의 동물로 그 위치를 굳혀 왔다. 민가와 조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민간신앙과 불교 또는 유교의 구분 없이 널리 수용된 용은 시대 및 수용분야에 따라 그 역할과 조화능력 등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인 이미지는 ‘권위’와 ‘길상’을 대표하고 있다. 단순히 사된 것을 방지하고 복을 기대하는 길상적인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힘과 능력을 갖춘 가장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형태의 길상자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최대의 권위와 적극적인 길상의 존재로 자리잡은 용에 대한 관념은, 다양한 분야에서 유형, 무형의 다채로운 문화를 꽃피웠다. 권위와 길상의 상징인 용은 옛 선비들에게 있어서 성취와 최상의 것을 의미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따라서 입신출세의 관문을 등용문이라 하고, ‘미꾸라지가 용이 되었다’ 또는 ‘개천에서 용났다’하는 말은, 갑자기 크게 성공하거나 단계를 뛰어오른 사람을 말할 때 쓴다. ‘등용문’의 고사는, 중국 황하의 잉어들이 산서성에 이르면 높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서 상류의 협곡이 있는 용문으로 다투어 뛰어오르는데, 그 곳을 넘어서면 잉어가 용이 된다고 하여 입신출세의 관문을 등용문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또한 중국의 유명한 화가 장승요가 용을 그린 후 눈동자를 그려 넣자 용이 갑자기 생기를 띠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가장 중요한 일을 성취하는 것을 화룡점겅이라 하기도 한다. 우리가 꾸는 꿈 중에서는 용꿈을 최고로 치는데, 특히 태몽으로 용꿈을 꾸면 크게 될 인물을 잉태했다고 하여 집안의 경사로 삼는다. 이러한 대길의 용꿈을 몰래 간직하기 위하여 용꿈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오죽헌에 있는 몽룡실은 선비들이 용꿈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알게 하는 한 예이다.
용꿈에 얽힌 실화를 몇 편 살펴보자. 세조 때 홍재상이 낮잠을 자다가 문득 하늘에서 뇌상병력이 진동하고 청룡이 그에게 달려드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홍재상은 급히 시비 춘성과 관계를 맺었고, 그날부터 춘성에게는 태기가 있어 출산을 한 아이가 바로 홍길동이라 한다. 전북 정읍군 칠보면에 사는 함풍 이씨 문중의 이승지 아버지는, 어느 여름 돌확(돌로 된 조그만 절구)에서 청룡 세 마리가 나와 두 마리는 하늘에 오르고 한 마리는 올라가다 떨어지고 올라가다 떨어지고 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나 돌확에 가보니 큰 지렁이 세마리가 있어 그것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나서 아들 3형제를 낳았는데 모두 인물과 재주가 뛰어났으며, 한 명은 승지가 되고 한 명은 대동군수가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 문과에 장원한 사람들의 모임을 용두회라 하였고, 군자의 덕을 칭친하여 용광이라 하였으며, 뛰어난 인물을 용과 봉황에 비유하여 용봉이라 하기도 하였다. 또한 호걸이 민간에 숨어 있는 것을 용이 서린 것에 비유하여 용반이라 하였고, 천자나 영웅의 위엄을 비유하여 용의 비늘, 즉 용린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용은 심이지신의 하나로 진시의 시작신장의 임무를 차지하였고, 사신의 첫번째 존재로 동방의 수호신 역할을 담당하였다. 십이지신장으로서의 조형은 신라시대 왕릉병 풍호석으로서 표현되었고, 조선시대에는 불교식 장례에 쓰여진 현화로서 인신용면의 특이한 형상을 나타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청룡도는 사신도의 최고작품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풍수지리에서 좌청룡, 우백호의 신앙에 따라 우리 일상생활을 지켜주는 존재가 되고 있다. 이러한 좌청룡 우백호의 방위수호신은 점차 가장 강력한 두 동물, 용과 호랑이를 함께 설정함으로써 더 큰 힘을 얻고자 하는 소망에 따라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다. 새해가 되면 ‘호축삼재 용수오복’의 뜻으로 대문에 걸거나 붙이는「용호도」에서 이러한 민심을 잘 읽을 수 있다. 이밖에도 용과 호랑이의 기세를 함께 설정한 것으로, ‘용미에 범 앉은 것 같다’라는 말은 위엄이 넘쳐 타인을 억압하는 듯한 인상을 가리키며, ‘용호상박’이라 하여 막강한 두 사람이 서로 싸운다는 뜻을 담았다. 또한 ‘용양호시’라 하여 영웅이 일세를 응시하는 태도가 용처럼 활달하고 범 같은 눈초리로 본다고 표현하였고, 웅장한 산세가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듯하다 하여 ‘용반호거’라 하기도 하였다.
미술분야에서의 용은 궁궐의 지붕이나 임금이 임하는 곳, 사찰의 법당을 비롯한 탑, 종, 부도 등과 그림, 가구, 의류, 잡기, 문구, 장신구 등에 이르기가지 생활 전분야에 걸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고구려시대의 변화에서부터 근세의 민화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나 유형적으로 방대하게 전하고 있는 이들 자료를 통하여, 고대 용신앙이 불교와 습합되고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와 사상이 융합되어 새롭고 독창적인 우리 용으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벽사용 그림으로 그려진 용은 호랑이, 도깨비, 해태 등과 같은 다른 벽사용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고 친밀감이 넘치는 한국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작품 중에는 할아버지 얼굴 같은 인자한 용을 비롯하여 어리숙한 표정, 토끼처럼 귀여운 표정 등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용의 얼굴은 전통 귀면과 일치되며 눈, 코, 입, 이, 뿔, 눈썹, 촉각, 수염의 표현으로 용의 관상을 결정짓는데, 때로는 용두를 남근형으로 그려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해학적인 면도 있다. 신흥사 대웅전의 계호석 석룡조각은 부드러운 우리나라 용조각의 대표적인 걸작이라 할 수 있으며, 신라시대의 이수조각은 귀염성을 여지없이 드러냈고, 조선조의 용 그림은 매우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용그림은 그 종류도 다양하여, 구름을 배경으로 삼는 운룡도, 물속에서 뛰어나오는 수룡도, 아무 배경도 없이 그려지는 반룡도, 한쌍으로 꾸며지는 쌍룡도, 호랑이와 짝을 짓는 용호도, 호랑이와 힘 다툼을 하는 용호상박도, 용궁의 용왕으로 나오는 용신도, 하늘로 올라가는 승룡도, 잉어가 용으로 변하는 어변성룡도, 용꿈을 그린 몽룡도 등이 있다. 글씨에 있어서도 용자를 크게 쓴 글씨는 예로부터 선비들이 다투어 쓰던 글씨였다. 이는 용그림을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용이 움직이는 것같이 아주 활기있는 필력을 ‘용사비등’이라 하기도 하였다. 용조각은 용이 등장하는 미술품 중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분야이다. 특히 용조각은 일반적인 길상의 의미를 넘어서서 조각된 용도에 따라 뚜렷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많아 흥미롭다. 전각의 지붕 위에 장식된 용은 이문이라 하여 목조건축물에서 가장 우려되는 불을 누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범종의 종뉴(용을 매달기 위해 종 위쪽에 있는 부분)에 조각된 용은 바다의 고래를 무서워하여 고래 모양의 당목으로 종을 치면 우렁차고 힘차게 우는 포뢰로 되어 있다. 돌비석에 조각된 비히는 무거운 것을 지기를 좋아하고, 산예는 연기와 불을 좋아하여 향로에 새기며, 살생을 좋아하는 애차는 칼의 콧등이나 손잡이에 새긴다. 이 외에도 물을 좋아하여 다리의 기둥에 세우는 공하,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여 솥두껑이다 식기 또는 반기에 시문하는 도철 등이 있다. 이들 용은 모두 자신이 처해 있는 장소나 용도에 맞추어, 사된 것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특성을 발휘하면서 더욱더 강력한 수호자, 길상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반 민가에서 세시풍속에 따라 행하는 여러 가지 민속에서도 용과 관련된 다채로운 내용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경남 밀양군 무안면에서 전승되는 용호놀이는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로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오고 있다. 마을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용마을과 범마을이 새끼를 꼬아 거대한 줄로 용과 호랑이를 만들고, 각각 대장이 진두를 지휘하는 가운데 장정들이 대진하여 대결을 벌인다. 이러한 놀이를 통하여 용과 호랑이를 한바탕 혼쾌하게 대결시킴으로서, 한해 동안 용호의 천변만화하는 능력으로 사됨을 물리치고 능동적인 기복을 소망하였다. 전북 남원지방에서는 섣달 그믐이나 정월 대보름에 사는 곳을 남과 북, 두 편으로 나누어 각각 큰 용마를 만든 뒤 오체에 용의 무늬를 그려 외바퀴수레에 싣고 거리로 나오면서 백 가지 놀음으로 대진하여 승부를 겨루는 용마놀이가 있다. 이 놀이는 악귀를 제어하고 재앙을 쫓으며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기 위한 것으로, 남쪽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북쪽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이 외에도 정월 들어 첫 진일(용의 날)에 부인들이 닭이 울때를 기다렸다가 서로 앞을 다투어 물을 길어오던 풍습으로 ‘용알뜨기’가 있다. 이것은 전날 밤에 용이 내려와 우물 속에 알을 낳는데, 그 알을 낳아 놓은 물을 길어다 밥을 지으면 그 해 자기 집 농사가 잘된다고 하는 속신때문이었다. 용알을 먼저 떠 간 사람은 그것을 알리기 위해 지푸라기를 우물물 위에 띄워 놓으며, 뒤에 온 아녀자는 알이 남아 있을 다른 우물을 찾게 된다고 한다. 또한 용을 이용하여 그 해의 풍흉을 알아보던 ‘용의 밭갈기’라는 것이 있다. 「동국세시기」에 전하는 전설로서, 동지무렵 함창의 공검지, 밀양의 남지, 당진의 합덕지, 연안의 남대지 등 못에 얼음이 얼면 그것이 흡사 극젱이(쟁기와 비슷한 농구)로 밭을 갈아 놓은 득산 모습을 하고 있어, 그 지방의 옛 농민들이 이를 용의 소행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모양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갈아 나갔으면 풍년이고, 서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갈아 나갔으면 흉년이며, 동서남북으로 엇갈려 있으면 평년작이 된다고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
이처럼 용은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뿌리를 내리고 광범위하게 성장되어 왔다. 왕권과 권위를 타나내는 상징으로서, 천변만화하는 조화로 물을 주관하는 수신으로서, 나라를 지키고 불법을 지키는 호국호법의 존재로서, 사됨을 물리치고 길상을 불러오는 벽사기복의 강력한 주재자로서, 그리고 우리나라가 위치한 동방을 지켜주는 방위신으로서 용은 우리 민족과 역사의 흐름을 함께하여 왔던 것이다. 용은 우리의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이다. 용을 통하여 다채롭게 꽃피워 온 이 땅의 얼과 문화를 올바로 인식할 때, 우리 민족이 지녀 온 꿈과 이상을 함께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