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6장
2. 수호신으로서의 호랑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호랑이의 강력한 힘 앞에 인간은 무력한 조내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호랑이를 노하지 않도록 산신으로 모셔 정성을 다하여 받들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산악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일찍부터 발달해 온 산악숭배사상과 함께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사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 12지신 등으로 호랑이가 본격적인 수호신으로서 그 위치를 굳히게 되었고, 실제생활에서의 호랑이에 의한 피해와 두려움과는 별개로 호랑이는 사된 기운과 악귀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는 벽사의 존재, 상서로운 동물로 인식되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젊은 시절 사냥을 나갔다가 폭우를 피해 동굴 속에서 친구들과 머물게 되었다. 이 때 호랑이가 굴 입구에 나타나 으르렁거리며 잡아먹으려 하자, 친구들과 의논하여 모자를 던진 뒤 호랑이가 물어 올리는 모자의 주인이 굴 밖으로 나가 희생을 당하기로 하였다. 호랑이가 왕건의 모자를 물어 올려 왕건이 약속한 대로 굴 밖으로 나가니, 그 순간 굴이 무너져 간발의 차이로 살아나게 되었으며, 호랑이는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사람을 보호하는 수호신으로서의 호랑이에 관한 이러한 전설이나 설화는 누구든지 한두 가지쯤은 알고 있는, 우리에게 널리 일반화된 소재이다.
1) 산신으로서의 위치
우리나라에는 산악숭배사상과 산신신앙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후한서」동이전에는,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한다. 산천에는 각기 부계가 있어 서로 간섭할 수 없다.... 범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라고 우리 민족의 풍습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산을 숭배하여 산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온갖 정성과 치성을 드려 왔다. 제주도는 섬이기 때문에 매년 해신인 바다의 용왕에게 용왕제를 지내는데, 용왕제를 지낸 후에는 반드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이는 해신은 용왕의 영검한 힘만 신성시하는 것이 아니라 산신의 수호 없이는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누릴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산신은 호랑이 또는 백발노인으로 상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때로 백발노인이 호랑이로, 호랑이가 백발노인으로 변하기도 한다. 예로부터 호랑이가 별칭하여 산신, 산군, 산군자, 산령, 산신령, 산중영웅 등이라 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심메마니들은 호랑이를 산신령으로 깍듯이 대접하고 있다. 산신을 모셔 놓은 산신당(산신각, 서낭당, 당산, 수호신당 등이라고도 함)에는 호랑이가 산신의 사자로 묘사되기도 하고 호랑이 그 자체가 산신으로 모셔져 있기도 하다. 이 때 산의 형세에 따라 산신의 성별을 구분하여 여자산신은 할머니 모습으로, 남자산신은 할아버지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처럼 성이 구별되기는 하지만 여자산신을 산신도로 그린 것은 극히 드물게 전해지고 있다. 또한 산신도의 내용과 양식에 따라 도교적인 것, 유교적인 것, 불교적인 것으로 구별되는데 이러한 양상은 토착신앙과 외래종교와의 습합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특히 불교에서 폭넓게 수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산신도에서 묘사되고 있는 호랑이는 무섭고 사납기보다는 점잖고 친근한 만화풍으로 애교있게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호랑이의 자세도 공격적이거나 서 있기보다는 산신의 옆 또는 앞에 다소곳이 엎드려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복호, 즉 호랑이의 엎드린 자세는 산신도에서의 호랑이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산의 군자 호랑이는 엎드려 있어도 모든 헤아림이 그 속에 있다”라는 말에 나타난 바와 같이, 호랑이의 엎드린 자세는 산신의 신지를 받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어떻게 관장할 것인가를 헤아리고 있는 사려깊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소곳이 엎드려 길게 다물고 있는 입 양쪽으로는 상서로운 동물의 상징인 토체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으며, 호랑이의 기상과 기개를 나타내는 꼬리는 소나무 사이로 길게 뻗어 구름 속까지 닿게 하여 화면 전체에서 대각선을 이루고 있다. 눈은 왕방울만하게 그려 전체적으로 아래와 내려뜨린 모습이며, 파란색 금박으로 눈동자를 박아 어둠 속에서 신비스런 빛을 발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호랑이의 모습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애교가 있고, 신성한 영물로서의 분위기와 함께 친근한 시골 할아버지 같은 분위기를 나타냄으로써, 확실하게 선과 정의의 편에 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2) 십이지신, 사신
십이지신은 땅을 지키는 열두 신장으로, 십이신장 또는 십이신왕이라고도 한다. 열두 방위에 맞추어서 쥐,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의 동물을 수호신으로 배치하였다. 이 십이지 신앙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밀교의 영향으로 호국적인 성격을 지녔으나, 삼국통일 이후는 단순한 방위신으로써 그 신격이 변모하여 갔다. 이때 호랑이는 음양오행사상에 따라 음양으로는 발톱이 다섯 개이므로 양, 오행으로는 목, 방위로는 동쪽에 해당한다. 사신은 우주를 진호하고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상징적인 네 마리의 동물을 의미한다. 즉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대 동양사상의 하나로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붉은 봉황), 북쪽에는 현무(검은 거북)라는 이름을 가진 방위신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들 네 신은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으로서 군사적으로는 부대의 깃발과 포진에도 응용되었으며 좌청룡,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라 하여 풍수지리에서도 널리 적용되었다. 이 때 백호(흰 호랑이)는 서쪽의 수호신으로, 오행으로는 금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에서 사신의 개념이나 형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에 중국문화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백호는 청룡과 대칭되는 것으로, 특히 풍수에서는 용호가 혈의 호위로 인식되어, 좌청룡 우백호가 서로 어울려 여러 겹으로 주변을 감싸는 것이 최고의 명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용호상박이란 말이 있듯이, 용과 호랑이는 강한 상대가 서로 대치하는 것을 나타낼 때 같이 쓰이고 있다. 이처럼 사신과 십이지신을 통하여 호랑이는 우주의 섭리에 따라 사방을 수호하고 땅을 지키는 존재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무덤을 쓸 때 좌청룡 우백호를 보아 자리를 정하고, 무덤을 보호하는 능호석에는 십이지의 하나로서 호랑이상을 새겼으며, 또 무덤 앞의 식물에도 호랑이상이 조각되어 있다. 특히 십이지신은 육십갑자에 따라 사람의 띠를 나타내게 되어, 호랑이는 인간과 더욱 친밀한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다.
3) 벽사의 주재자
산신으로서 받들어지고 십이지신과 사신 등의 수호신으로 자리를 잡은 호랑이는 우리의 생활 전반에서 길상의 동물, 강력한 벽사의 주재자로서 그 상징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매년 정초가 되면 대궐과 민가 할 것 없이 벽사용 세화로서 호랑이 그림을 대문에 붙이고, 기둥이나 출입문 위에 ‘호축삼재’, ‘용호오복’이라는 방문을 써붙여 귀신을 쫓고, 액땜을 하고, 복일 빌기도 하였다. 특히 호랑이가 등장하는 부적은 삼재를 쫓는 부적이라 하여 ‘삼재부적’이라 부른다. 삼재는 풍, 수, 화에 의한 재난으로서 인간의 병으로는 심화, 풍병, 수종을 들 수 있고, 인패, 재패, 우환 등의 재난을 뜻한다. 이와 관련해 세계 최고의 의학서 「본초강목」에서는 호랑이가 치료제로 쓰이는 이치와 호랑이 삼재부적의 쓰임이 서로 직결됨을 기록하고 있다. 즉 호랑이의 뼈는 사악한 기운과 병독, 발작 등을 멈추게 하여 풍병 치료제로 쓰이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푸른 인광을 발하는 호랑이의 눈을 마음이 산란한 환자에게 쓰면 사귀가 놀라 달아나므로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호랑이 코는 미친병 치료와 어린이 경풍에, 이빨은 남자의 매독, 종기, 부스럼 치료에, 발톱은 어린이 팔뚝에 붙은 병도깨비를 쫓는 데, 털가죽은 사악한 귀신들을 놀라게 하므로 학질을 떼는 데, 수염은 치통에 쓰이며 오줌은 쇠붙이를 삼켰을 때 물에 타서 마시면 녹아버린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의 풍속 중에서 ‘쑥범’이라 하여 단오절 궁중에서 쑥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무관의 표시로 관복의 흉배에 용맹을 상징하는 호랑이를 수놓았는데, 정3품 이상은 두 마리의 호랑이, 종3품 이하 종9품까지는 호랑이 한 마리를 수놓았다. 호랑이 그림을 걸어두면 관직이 높은 귀한 자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태교의 한 방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관직에 나가도록 하거나 벼슬을 높여주는 최관부로도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해 관상서 「마의상법」에는 호랑이 모습의 얼굴 모양은 영화를 누릴 상이라 하였으며, 귀인들이 쓰는 모자에는 호수라 하여 호랑이의 수염을 꽂았다고 한다. 이처럼 호랑이는 양물이며 뭇짐승의 우두머리여서 능히 악귀와 사된 기운을 물리치므로 호랑이의 주술적인 힘을 빌어 기복과 벽사를 소망하였던 것이다.
회화에서도 호랑이는 동물 중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동물화 중 독특한 장르를 이루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벽사용 호랑이 그림은 오늘날에도 일반 가정의 대청이나 거실에 큼직하게 걸려 있을 만큼 널리 일반화되었으며, 여러 가지 산신도에서 나타나고 있는 호랑이 그림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호랑이 그림 중 여느 그림과 달리 특별히 까치호랑이 그림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이것은 항상 호랑이와 함께 까치가 등장하고 있는 독특한 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관점이 있다. 먼저 김호연 선생 등은 이때의 까치는 서낭신의 신탁을 호랑이에게 전하고 있는 것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호랑이를 신의 사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규정한 해석이 있다. 이에 대해 허균 선생은, 이러한 까치호랑이 그림이 신당에 모셔진 적이 없고 그림에 따라 까치와 전혀 무관하게 배치되어 있는 호랑이의 모습 등을 예로 들면서, 길상의 동물인 호랑이와 길상의 새인 까치를 함께 배치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길상적 의미의 표현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재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한편, 호랑이와의 친숙도가 더해짐에 따라 일상생활의 주변에서 다양하게 호랑이 문양과 장식이 성행되었다. 필통, 벼루, 먹, 도장, 서안, 붓자루, 지통, 책장 등 문인용품과 화살통, 칼, 관복함, 혁대, 완장, 군기 등의 무관용품에서부터 도자기, 병풍, 목침, 떡살 등에 이르는 크고 작은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문양으로 호랑이가 장식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녀자들의 노리개에도 칠보로 단장한 호랑이 발톱이 장식되었으며, 혼례날에 받아놓고 신행하는 신부의 가마 위에 드리웠던 호담, 상여나 무덤가에 장식된 호상 등도 모두 벽사기복의 소망을 담은 옛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3. 친근한 동물로서의 호랑이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로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느 산골마을에 밤이 이슥하자 배가 출출한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 어느 집 앞에 다다랐다. 방문 안에서는 심하게 보채며 우는 어린아이 울음소리와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쉿, 계속 울면 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와 잡아간단다” 하면서 아이에게 겁을 주었지만 아이는 막무가내로 계속 울어댔다. 잠시후 어머니가 “자, 여기 곶감이 있다”고 하자 갑자기 울음소리가 뚝 그치며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문 밖에서 지켜 서서 듣고 있던 호랑이는 “어이쿠, 나보다도 더 무서운 곶감이라는 것이 있었구나”하면서 부리나케 달아나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맹수 중의 왕인 호랑이를 어수룩한 존재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갑자기 친근하고 정다운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왕방울만한 눈, 고양이처럼 짧은 다리와 커다란 머리, 어리숙하고 느긋한 표정.... 산신도나 까치호랑이 그림등에 표현된 호랑이는 익살스럽기 그지없다. 또한 담뱃대를 문 호랑이에게 토끼가 불을 붙여 주는 그림, 긴장죽을 물고 연기를 내면서 담배를 피우는 그림 등은 한국인의 해학과 익살을 나타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러한 해학은 우리나라 민간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반적인 특성과 같은 맥락의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민화 혹은 민요 등은 일반 서민들의 심성과 숨결이 담겨진 것이다. 그것은 그림이든, 노래든, 소설이든, 격식이나 정형을 찾아볼 수 없으며 소박한 익살과 건강한 풍자, 친밀한 솔직함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호랑이가 아무리 두려운 존재라 하더라도 겉모습을 과감히 벗겨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본성에 직접 접근함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공감의 미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두려움을 두려움으로만, 고난을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기발한 환상과 해학의 웃음을 안겨주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호랑이를 통해 다시 한번 느껴볼 수 있는 것이다.
신단수 아래서 곰과 함께 사람이 되고자 굴로 들어갔던 호랑이에서부터 맹수로서의 포악함, 산신으로서의 신령함과 위엄, 십이지신과 사신의 수호신 및 벽사의 주재자로서의 믿음직한 모습, 각종 민화와 전설, 생활용품에서 만나는, 때로 의롭고 때로 친근하며 어리숙한 모습에 이르기까지, 호랑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민족과 함께하면서 많은 문화를 꽃피우게 한 상서로운 동물임에 틀림없다. 선인들의 의미지향적 안목에 공감을 느끼고, 그 정신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