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6장
호랑이
한국을 소개하는「한국문화의 뿌리」를 저술한 코벨박사는 담배 피우는 호랑이 사진을 책의 표지로 선정하고, 가장 한국적인 그림으로 소개하였다. 코벨은 우리 민족과 호랑이와의 관계, 그리고 한국인의 여유와 해학을 잘 이해하여 그 그림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로 시작되는 옛날 이야기의 서두에서부터 서울올림픽대회의 마스코트 호돌이에 이르기까지 호랑이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 가까운 존재로 느껴지는 동물이다. 창경원을 찾지 않으면 실제 모습을 보기 어려운 동물일뿐만 아니라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맹수임에도 불구하고, 의롭고 우호적이며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호랑이에게 부여해온 의미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설화와 이야기, 그림과 조각 등의 미술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는 동물은 호랑이와 용이다. 용이 상상의 동물인 점을 고려하면, 실제의 동물 중에서는 호랑이가 우리 민족에게 가장 특별한 의미를 지닌 존재임을 알 수 있다.「주역」에서 호랑이의 방위를 지칭하는 인방도 만주와 우리나라를 지목하는 동북방이며, 우리나라의 지도가 호랑이의 도양하려는 모습으로 형성된 것 등도 우리 민족과 호랑이와의 특별한 인연을 말해 주는 듯하다. 그리고 호랑이가 우리 민족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속담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호랑이 보고 창구멍 막기 .호랑이에게 개를 꾸어 준다 .호랑이 코에 붙은 것도 떼어 먹는다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노릇 한다 .호랑이에게 물려갈 줄 알면 누가 산에 갈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호랑이도 새끼가 열이면 스라소니를 낳는다.
우리 민족이 본 호랑이에 대한 관념의 변천과정은 매우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그 속에는 민족의 지혜와 여유와 해학이 깃들어 있다. 즉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나라에는 호랑이가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야성의 포악함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호랑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에 직접, 간접적으로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는 존재,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호랑이를 산신으로 모셔 제를 지내는 등 호랑이가 노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편을 취하였다. 호랑이를 이처럼 강력하고 신령한 존재로 상정한 뒤에는 이러한 힘에 의지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호랑이의 역할을 의로운 존재로 설정하고, 호랑이의 용맹성과 강력한 힘이 인간을 괴롭히는 각종 잡귀와 사된 것을 물리쳐 주기를 소망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편에 선 정의의 사자, 벽사의 주재자로서의 위치를 굳힌 호랑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친숙한 관계로까지 발전되었다. 가장 용맹한 맹수의 왕 호랑이에게 담뱃대를 물리고, 곶감 이야기에 놀라 황급히 도망가는 어수룩한 호랑이를 탄생시킴으로써 호랑이는 우리와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사납고 가장 두려운 존재이기에 가장 가깝고 친근한 관계로 만들어 버린 우리 민족의 예지와 해학이 놀랍지 않은가? 세계 어느 나라를 살펴보아도 현대의 전위적인 미술품을 제외하고는 호랑이와 같은 사나운 맹수에게 담배를 물린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호랑이에 대한 이와 같은 관념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의 민속과 유형, 무형의 산물이 표출되었다. 실로 호랑이와 관련된 우리의 문화는 다채롭기 그지없다. 용, 학, 사슴, 거북 등과 같은 동물이 우리 민족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도 비교적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음에 반하여, 호랑이는 매우 다중적 성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호랑이의 존재가 그만큼 강력하고 두려운 것이었으며, 그에 대해 표출된 우리 민족의 갈등의 반영이라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호랑이에 대하여 우리 민족이 부여한 의미를 관념상의 변천과정에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1. 호랑이에 대한 관념의 출발 : 맹수로서의 호랑이
호랑이는 아시아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동물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국토의 7할 이상이 산으로 이루어진 산악국으로, 일찍부터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여 ‘호랑이의 나라’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한반도와 만주, 중국의 동부에서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산중 혹은 인근마을에서 부딪힌 가장 무서운 맹수가 바로 호랑이였다. 단군신화에 보면 곰과 호랑이는 모두 인간으로 화하길 원한다. 그러나 동국 속에서 마늘과 쑥을 먹으며 인내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뛰쳐나와 맹수로 머무는 호랑이의 모습에서도 얼마나 다루기 힘든 야성의 맹수인가가 잘 나타나고 있다. 호랑이가 인간에게 끼친 민폐는 매우 심하여, 호랑이가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는 환난을 일컬어 ‘호환’이라는 말까지 생겼다.「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헌강왕 11년(885년) 2월에 호랑이가 궁궐마당에까지 뛰어들었다고 하였으니, 호랑이의 피해가 나라 전체에 걸쳐 매우 심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규경이 저술한「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도 우리나라에 호환이 많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날이 어두워지면 함부로 나다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호랑이를 산군이라 하여 무당이 진산에서도 도당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 때 음식이 불결하거나 부정한 음식을 바치는 등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성내어 울부짖고 마을에 내려와 사람이나 가축을 물어 갔다는 기록이 남아 전한다. 이처럼 살아있는 호랑이가 신으로 받들어지고 제사까지 받아먹는 풍속은「후한서」동이전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오랜 옛날부터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민간에서는 호랑이에게 부모, 자식, 남편 등을 잃은 가족이 그 원수를 갚고 시신을 찾아오는 등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오륜행실도」에는 고려 때 수원에 살았던 최누백의 이야기가 나온다. 누백은 15세의 어린 나이로 범에게 물려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호랑이를 죽이고 그 뼈와 살을 꺼내 장사를 지낸 효자로 유명하였다.「삼강행실도」에는 호랑이와 싸워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오는 금지박호도, 아버지의 시신을 뺏는 연수겁호도, 호랑이로부터 아이를 지키는 권씨부토도, 호랑이에게 물려간 남편을 따라 자결하는 소사자서도 등 수많은 이야기가 전하다. 또한 정초의 풍속에서 정월의 첫 호랑이날, 특히 산골 부녀자들은 바깥 출입을 꺼렸다. 그 이유는 이 날에 여자가 외출하여 남의 집에서 용변을 보면, 그 집의 가족이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는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산에서 호랑이라는 말을 입밖으로 내면 호랑이가 나타난다 하여 ‘산신령님’, ‘산군님’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이처럼 호랑이는 두려운 존재였고, 호환은 언제나 온 나라의 근심거리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나라에서는 적극적으로 호랑이를 퇴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숙종 때 편찬된「수료집록」에 의하면, 인명을 살상하는 악호를 잡는 사람에게 금포 20필을 상으로 내리고, 두 마리 이상 잡는 자에게는 20필을 추가로 지급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영조 때 편찬된「속신보수교집록」에는 호랑이를 잡은 변장이나 수령에게도 상을 내려야 한다고 거론된 기사가 보인다. 이 외에도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로부터 국도상정의 어명을 받고 한양의 지형을 살펴보니, 외백호격인 관악산 서봉 호암산의 산세가 호랑이가 북쪽을 향하여 곧 뛰어들 듯 위급하고 위태한 형상이었다. 이에 호랑이 머리맡에 호암사라는 절을 짓고 마주 보이는 상도동에 사자암을 지어 기세를 누르고 견제하였다고 한다. 또한 호형의 거센 산세를 염려하여 삼정산의 복부에 도성을 향해 예배하는 얼빠진 모습의 호랑이를 배치, 호환을 물리치고자 하였다고 한다. 특히 호환이 심하였던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호랑이에 의한 피해를 방지하고자 범굿을 행하였다. 이 굿에서는 한지에다 호랑이의 얼굴과 몸뚱이를 그린 호탈을 쓴 사람이 호랑이의 역할을 하면서 굿의식을 행한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여러 과정을 거친 후 마지막에는 호랑이가 사람의 손에 죽고 가죽까지 벗겨지게 된다. 이처럼 호랑이가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악호로 설정된 데에는 산간지방에서의 현실적인 피해상황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