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5장
새
4. 기러기
기러기는 인간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은 적으면서도 그 성질이나 특성으로 인해 우리의 삶과 정서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새이다. 황량한 가을 하늘에 무리지어 멀리 날아가는 기러기떼는 보는 이에게 저마다의 감흥과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어떤 이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지나간 이별을 생각하기도 하며, 때로 세월의 흐름과 인생의 무상에 젖기도 한다. 이처럼 기러기는 순수한 슬픔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새로서 시, 시조, 가곡 등에서 그리움과 이별과 고독을 노래할 때 많이 등장하고 있는 소재 중의 하나이다. 기러기는 또한 가을에 오고 봄에 돌아가는 철새로서 가을을 알리는 새인 동시에 소식을 전해 주는 새로도 인식되어 왔으며, 암수의 의가 좋고 사랑이 지극한 새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혼례식 때 신랑이 신부집에 나무로 만든 기러기(목안)을 전하는 습속이 유래되었으며, 혼인예식을 일명 ‘전안례’라고도 한다.「규합총서」에서도 기러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추우면 북으로부터 남형양에 그치고 더우면 남으로부터 북안문에 돌아가니 신이요, 날면 차례가 있어 앞에서 울면 뒤에서 화답하니 예요, 짝을 잃으면 다시 짝을 얻지 않으니 절이요, 밤이 되면 무리를 지어 자되 하나가 순경하고, 낮이 되면 갈대를 머금어 주살(살을 매어서 쏘는 화살)을 피하니 지혜가 있기 때문에 예폐하는 데 쓴다. 이와 같이 기러기는 사랑이 지극한 새, 가을과 같은 애잔한 슬픔을 주는 새,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다.
1) 사랑의 새
기러기는 암수의 의가 좋을 뿐만 아니라 짝이 죽으면 다른 짝을 구하지 않는 정절의 새이다. 이처럼 사랑이 지극하며, 또한 때를 알고 순서가 정연한 새로서 사람의 도리를 안다 하여 기러기 안자에 ‘사람 인’변을 쓰게 된 것이다. 때를 안다는 것은 봄에 갔다가 가을에 돌아오는 철새를 이르는 것이고, 순서가 정연하다는 것은 기러기의 행렬이 항상 선두를 중심으로 하여 ‘A’의 모양으로 가지런히 질서를 지켜 날아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남의 형제를 경칭할 때 기러기의 행렬과 같이 순서가 있고 의가 좋다 하여 안행이라 하고, 순서를 다른 말로 안서라고도 한다. 기러기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와 사랑이 깊고 정절을 지키는 새라 하여 혼례 때 사용된다. 신랑은 신부집에 이르러 혼례의 첫 의식으로 기러기를 바치는데, 원래는 산 기러기를 썼으나 구하기가 힘이 들고 번거로워서 나무로 만든 목기러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 절차와 방법은 다음과 같다. 혼례식날 기러기를 든 기럭아비가 신랑의 앞에 서서 가게 되는데, 이 때 기럭아비는 첫 아들을 낳고 후덕하게 사는 사람을 택한다. 일행이 신부의 집에 이르면 신부의 아버지가 문 밖으로 나와서 신랑을 맞이하게 된다. 신랑은 기러기를 받아 머리를 왼쪽으로 가도록 안고 대청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꿇어앉은 뒤 기러기를 상 위에 내려놓으면 시자가 이를 받는다. 그 다음에 신랑이 재배를 하게 되는데, 절이 다 끝나기 전에 신부의 어머니나 여자하님이 기러기를 치마폭에 싸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가 예를 행한 뒤 후행이 돌아올 때 함께 시댁으로 가지고 오게 된다. 이 때의 기러기는 신랑과 신부 두 사람에게는 사랑의 언약을,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해로의 서약을 의미하는 상징물로 사용된 것이다. 이옥이라는 문인이 지은 연대 미상의 다음 시에서 혼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소박하고 진실한 마음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신랑은 목을 쥐고 신부는 건치를 쥐었으니 그 기러기 날 때까지 두 정 그치지 않으리. 복 있는 손으로 홍사배 들어 낭군에 권하나니 합환주를 첫 번 잔에 아들 낳고 세 번 잔에 오래 사네.
이러한 기러기의 상징성으로 인하여, 홀로 된 외로운 신세를 “짝 잃은 기러기 같다”고 하며, 짝사랑하는 사람을 일컬어 ‘외기러기 짝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즉 기러기는 사랑이 지극한 새이므로, ‘외기러기’라는 말은 하나의 상징어로서 사랑을 잃거나 홀로된 사람을 일컬을 때 사용하게 된 것이다.
2) 애수의 새
기러기는 까치, 제비 등과 같이 사람과 가까이 사는 새가 아니며, 우리의 실제 생활과는 먼 거리에 있는 새이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기러기만큼 우리에게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새는 드물 것이다. 봄과 여름에는 산과 들, 그리고 집 가까이에 온갖 새가 날아다니며 저마다 지저귀지만, 가을과 겨울철에는 새들의 활동이 둔한데 오직 기러기만이 서릿발치는 창공을 유유히 날아, 보는 이에게 감흥을 주게 된다. 또한 삭막한 겨울의 창공과 자연을 만끽하는 기리기야말로 만인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이처럼 가을과 겨울이라는 계절의 정서와 함께 어우러져 황량한 하늘을 나는 기러기떼의 풍경은, 즐거움이나 기쁨보다는 사색적이고 애수에 젖게 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 또한 그 울음소리가 매우 구성지고 처량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무심한 마음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특히 고향을 떠난 나그네, 이별의 슬픔을 가진 이들과 같이 고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 감회가 더욱 진할 것이다. 기러기에 대한 우리 민족의 이러한 정서는 예로부터 시, 시조, 그림 등에서 풍부하게 표현되어 왔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공감대를 이어 시, 가곡, 그림은 물론 동요나 삽화 등에서도 사색적이며 고적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상징적인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고려, 조선시대에 귀양을 떠난 선비들이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고향을 그리는 그들의 적막한 심정을 읊은 시조 중에 기러기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 조선시대의 문인인 조명리가 지은 시조를 들어 본다.
기러기 다 날아가고 서리는 몇 번 온고 추야 김도길사 객수도 하도하다. 밤중만 만중월색이 고향 본 듯하여라.
또한 기러기는 이별의 슬픔에 노래되었다. 혼자 나는 외기러기를 보고 선인들은 자신의 외로운 처지로 여겼고, 구성지게 우는 기러기 소리를 들으며 더욱 감상에 젖었을 것이다. 이정보의 시조에는 이런 이별의 감상이 잘 나타나 있다.
꿈에 임을 보러 베개에 지혀시니 반벽 잔등에 앙금 참도찰사 밤중만 외기러기 소리에 잠 못 이뤄하노라
다음으로는 늙음과 세월의 흐름을 한탄하는 탄로의 의미로 기러기가 많이 쓰이고 있다. 기러기떼가 날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벌써 가을이 오고 또 한 해가 멀지 않아 지나갈 것을 애석히 여기며 선인들은 자신의 늙어감을 탄식하였다. 서릿발 치고 달 밝은 가을밤에 애처롭게 우는 기러기 소리는 세월의 무상함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역시 이정보가 지은 시조 한 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은한은 높아지고 기러기 우닐 적에 하룻밤 서릿김에 두 귀밑이 다 세거다. 경리(거울 속)에 백발쇠용을 혼자 슬퍼하노라.
이 외에도 동양화가 화조화에는 기러기와 갈대를 복합한 여안이 그 소재로 많이 쓰이고 있다. 갈대가 바람에 좌우로 쓰러지는 위에 기러기가 날아가고 있는 모습은, 시정이 넘치고 계절감각을 강렬히 풍기는 사색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이러한 여안문양이 고려시대의 동경에 나타나고 있어, 동경의 문양으로는 희귀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조선조에 오면서는 산수화의 화제와 백자, 목공예품, 자수 등에 이 갈대와 기러기의 운치있는 문양이 널리 쓰이고 있다.
3) 소식의 새
기러기는 예로부터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도 널리 인식되었다. 이는 기러기가 가을에 오고 봄에 돌아가는 철새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멀리 한나라의 고사에서부터이다. 한무제 때 소무라는 사람이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북해상 무인처에서 억류되어 10년 간이나 고생을 하였는데, 기러기 다리에 백서를 매어 자기의 소식을 전해 마침내 살아 돌아오게 되었다는 줄거리이다. 이러한 고사와 관련하여 조황이 지은 시조가 있다.
북해상 찬바람에 울고 오는 저 기럭아. 이상코 견빙할 줄 네가 능히 알았고나. 사람이 만물영되어 저 지각이 없을쏘냐.
고전소설「적성의전」에서 성의는 기러기편에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다시 소식을 전했다는 내용이 있으며,「춘향전」의 이별요 중에는 “새벽서리 찬바람에 울다 가는 저 기러기, 한양성내 가거들랑 도련님께 이내 소식 전해주오”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달거리」라는 단가에서도 기러기를 소식의 새로 노래하고 있다.
“청천에 울고 가는 저 홍안 행여 소식 바랐더니 창망한 구름 밖에 처량한 빈 댓소리뿐이로다."
한편, 민화의 문자도중 ‘신’자를 그린 그림에서도 기러기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신’이란 사람 사이의 언약과 규칙을 믿고 지키는 덕목으로, 서신이라 하면 믿음을 전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신자도에는 편지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기러기와 청조가 입에 편지를 물고 있는 모습이 문자의 획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기러기는 사람이 왕래하기 어려운 곳에 소식을 전해 주는 동물로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기러기를 ‘신조’라 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