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성과 권력 - 권택영
제3부 에로스의 저항
호미 바바와 문화의 혼혈성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내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더 많은 여가를 즐기고... 인간은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끊임없이 발견과 창조를 거듭해왔다. 과학기술과 합리적인 이성에 근거한 개발의 논리는 미신의 어두움과 권력의 혼돈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자는 계몽의 빛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향하던 전진의 행군이 비틀거리며 문득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순간이 있었다. 그런 행진의 발굽 아래 짓밟히고 스러져가는 것들의 흔적이 어느 날 전진하는 발끝을 툭 건드린 것이다. 그 지점은 바로 어느 정도 물자가 보급되고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점, 후기 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무엇이 밟히고 억눌려 왔던가. 개발의 논리에 짓밟혀온 환경파괴, 백인이 주도한 민주화에 의해 억압되어온 흑인, 남성이 이끌어온 가부장제가 억압한 여성, 제1세계가 억압한 제3세계, 이성이 억압한 감성, 서구 합리주의가 억압한 동양의 비합리주의, 말하기가 억압한 글쓰기 등 20세기 중반부터 '포스트'라는 접두어를 붙이며 일어난 온갖 사회, 문화운동은 산업화와 민주화가 억압해온 것들의 흔적이 쌓이고 쌓여 터져나온 과거에 대한 반성의 결과였다.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 그러나 이 세 가지 논의들은 20세기 후반부 사회 전반과 문화의 패러다임들로 서로가 관련을 맺고 있기에 경계를 가늠하기란 그리 간단치가 않다. 그러나 해체 혹은 후기 구조주의는 사상이요 비평이론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예술과 문화의 양식이고 탈식민주의는 해체와 마르크시즘이 결합된 문화비평의 한 갈래라고 거칠게 말해볼 수는 있으리라. 나르시스 신화가 억압한 에코를 들추어 상상계에 저항하는 '흔적'으로서의 읽기를 선보인 스피박의 탈식민주의 여성비평은 데리다의 해체에서 타자의식을 빌어온다. 그리고 제3세계 여성이라는 입장에서 선배들을 다시 읽어 중심주의를 드러내고 그들이 억압한 식민지인과 여성의 음성을 복원한다. 입장이란 무엇인가. 나의 나르시시즘으로 너의 나르시시즘을 읽어 무의식이 억압한 타자를 드러내는 것 아닌가. 너의 나르시시즘으로 본 나는 정확한 나가 아니다. 인식에 개입되는 착오를 벗어날 수 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에 착오가 개입된다는 걸 보여줄 수는 있지 않는 가. 스피박의 읽기는 프로이트의 나르시스적 주체, 혹은 데리다의 '흔적'으로서의 주체에 입장이라는 마르크시즘이 경합된 문화비평이다. 같은 제3세계인이며 남성인 호미 바바는 어떻게 나르시시즘을 이용하는 가. 그의 문화이론은 정신분석과 마르크시즘을 스피박과 어떻게 달리 결합시키는지 보자.
호미 바바의 문화이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탈식민주의 문화비평 에서 이루어진 작업들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구적인 작업을 벌 인 프란츠 파농과 잔모하메드, 그리고 에드워드 사이드를 살펴보는 것은 이들이 정신분석과 나름대로 관련을 맺고 있으면서도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언어는 이미 타인의 입 속에 반이 있다는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이 프로이트의 전이와 흡사한 것도 함께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그의 이론은 볼셰비키의 단음조에 반대했을 뿐 제국주의나 식민지 관계로 확장되지는 않는다. 정신분석이 환자와 분석자 사이의 대화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본 프로이트의 전이는 환자와 분석자의 욕망을 중시하고 양쪽의 나르시스적 주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로의 욕망을 나누고 길들이는 과정에서 진리가 얻어진다고 본 혁명적인 암시였다. 나의 나르시시즘과 너의 나르시시즘이 부딪쳐 서로를 나누고 길들이는 게 정신분석이라면 치료란 실재 그 자체의 독단과 권위를 무너뜨리는 과정이 아닐까. 대화인 점은 비슷하지만 바흐친과 달리 프로이트의 갈림 언어는 우월의 차이를 지닌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무너뜨리는 전략이 암시된다. 너의 나르시시즘이 지닌 착오와 독단을 나의 나르시스적 주체가 드러내 보이는 정치성이다.
1. 하얀 마스크를 쓴 검은 피부 :프란츠 파농
해방된 식민지인들은 그날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법적으로 신분이 보장되고 의식으로도 그렇게 알고 있지만 진실로 자긍심을 가지고 홀로 설 수 있는가. 겉으로는 해방된 흑인이지만 마음 속으로는 열등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사에 백인이 되려 애쓴다. 자신의 검은 피부를 증오하고 두려워하여 꿈속에서는 늘 흑색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백인이 되고픈 소망을 무의식 속에 가두고 있다. 왜 해방은 진정한 해방이 될 수 없는가. 해방이 된 지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것은 몸의 해방일 뿐 마음은 여전히 갇혀 사는 식민지인은 아닌가. 식민지란 형패를 달리하여 마음속으로 스며들었고 이런 열등의식은 인간을 이중적으로 만든다. 하얀 마스크를 쓰는 검은 피부의 인간으로. 알제리와 프랑스의 국경지방에서 정신과 의사로서 흑인들의 꿈을 분석하고 그들의 분열증을 치료해온 파농은 흑인으로서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가 가늠해보게 된다. 해방된 지 백년이 가까워오는데도 왜 흑인들은 자신의 피부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가. 50년대와 60년대 초 파농은 이 분열증에 가까운 흑인들의 열등의식을 탐색하고 그것이 식민통치가 끝났어도 여전히 사회의 가치기준이 백인에게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사회의 가치기준이 백인에게 있기에 자아는 붕괴되어 타자가 되고픈 꿈을 꾼다. 어릴 적부터 그를 둘러싼 문화와 교육은 백인이 우월하고 흑인은 열등하다는 무의식을 심어준다. 백인이 사용하는 언어와 흑인의 언어는 그저 다른 게 아니라 한쪽이 더 우월하게 다르다. 그래서 흑인은 불어를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백인이 된다. 불어를 잘못하는 러시아인이나 독일인들은 자존심이 있기에 그들 식으로 발음하고도 전혀 꺼리지 않는다. 그러나 흑인은 자신만의 문화와 역사가 없기에 백인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보이려 애쓴다.
흑인 여성은 푸른 눈을 가진 남성과 결혼하여 사회적 신분을 높이려 한다. 그녀는 영혼을 팔아 그의 시종이 된다 흑인 남성은 어떤가. 흑백혼혈의 여성에게 아첨하고 그녀를 얻으려 한다. 자신보다 한 단계 위의 신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피부색에 따라 한 단계 씩 상승한다. 흑에서 혼혈로 혼혈에서 백으로, 소망은 오직 앞으로만 나아갈 뿐 퇴행을 모른다. 흑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려 안간힘을 쓰다보니 분열적인 행동을 보인다. 흔히 프랑스의 흑인은 미국의 흑인보다 더 자유롭다고 여겨지지만 프란츠 파농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미국의 흑인은 인종차별에 항의하고 스스로 전리를 쟁취하려 행동하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런 항의가 필요 없게 차별이 없다. 그러나 무의식 속에 심어진 차별의식은 더 끈질기고 심각하다. 이 문제는 헤겔 식의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노예의 피부 위에 주인의 마스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으로는 주인이지만 무의식으로는 여전히 노예인 것이 식민시대가 끝난 탈식민주의 시대의 식민지인이다. 그래서 포스트 컬로니얼리즘의 '포스트'(post-)에는 후기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파농의 글은 이것을 밝힌 것에서 의미가 있었다. 미국의 1993년도 노벨상 수상작가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 (1970)은 이런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어릴 적부터 흑인 아이가 보아온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셜리 템플이었다. 아이는 푸른 눈만 가지면 자신도 사랑 받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 백인이 미의 기준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 그렇게 교육받아온 아이가 그런 환상을 갖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소설은 자긍심과 사랑이 없는 한 가족의 불행을 그린다. 모리슨은 사회의 잘못된 백인 우월주의와 그것을 무분별하게 뒤쫓는 흑인의 허영, 그리고 그것에 의해 분열증을 일으키는 한 소녀의 모습을 그려 미국 사회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먼 유럽 땅에서 파농이 겪은 항의와 반성이 10년 후 미국의 한 여성작가의 작품으로 나타난다.
이로부터 20년이 흐른 1994년, 이런 정체성의 비극은 존 업다이크의소설, '브라질'에서 한층 더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흑백의 인종차별이 심한 브라질에서 백인 상류층 여자가 흑인 하류층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갖가지 모험을 거치면서도 두터운 인종차별의 벽을 넘지 못한 여성이 연인을 위해 피부색깔을 바꾼다. 마술의 힘을 빌어 자신의 하얀 피부를 남자에게 주고 자신은 흑인이 된다. 흑인 여성이 흑인 남성보다 인종차별의 벽을 넘기 쉬웠고 또 그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연 뜻한 대로 행복해 질까. 백인이 된 남자의 속은 여전히 흑인이었다. 그는 검은 피부 위에 하얀 마스크를 썼을 뿐이다. 그는 옛날 자신이 백인을 상대로 금품을 뜯던 바로 그 해변가에서 살해당한다. 백인이 된 자신을 잊고 동료를 대하듯 하자 흑인 부랑아는 겁에 질려 면도칼로 그를 찔러 죽인다. 속과 겉이 다른데서 온 이 비극적 종말은 인종 차별의 벽과 정체성의 문제가 얼마나 복합적인 것인가 보여준다. 그것은 외적인 법적 자유의 문제라기보다 내적인 자긍심과 사회의 가치기준과 무의식의 문제여서 긴 시간을 두고 이처럼 이론으로 작품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마스크들'(Black Skin, White Masks, 1952)에서 속은 흑인인데 흰 마스크를 쓰려는 흑인들의 성격파탄을 이렇게 예로 든다. 흑인 여성은 같은 동족인 흑인 남성을 거부한다. 흑인 남성 의사는 군의관이 되어 자신이 당한 만큼 백인들을 지배하고 싶어한다. 그는 자아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기에 자아를 사랑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타자를 사랑하지도 못한다. 굴욕감이 주는 자기학대는 타인학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문화는 이처럼 제도만큼 중요하다. 아무리 제도적으로 식민지 대가 끝났다 해도 문화 속에 심어진 차별, 무의식에 내재된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식민주의는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될 것이다. 50년대에 쓰인 파농의 이런 통찰은 이후 탈식민주의 문화비평에 큰 영 향을 미친다. 우선 제도나 이성의 힘보다 문화와 무의식의 힘이 중시된 다. 무의식에 심어진 지배와 종속의 관계를 살피게 되어 텍스트 분석에 도 정신분석과 마르크시즘이 다 필요하게 된다. 이제 프로이트의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단순히 에로스와 문명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의 에로스와 제3세계인의 에로스가 부딪쳐서 우월의 관계를 의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문화 읽기가 된다.
2, 탈식민주의 문화비평
비록 파농의 글이 60년대에 영어로 번역되었지만 탈식민주의 담론이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잔모하메드(Abdul R. JanMohamed)는 식민주의 문학을 상상계적 텍스트와 상징계적 텍스트로 나눈다. 유럽은 선이요 원주민은 악이라는 이분법을 고정시키고 타자를 자아와 일치시키려는 상상계적인 것과 타자를 다르다고 보면서 혼성적인 합일을 꿈꾸지만 결국은 타자를 인정치 못하고 은연중에 지배자의 시각을 드러내는 상징계적 텍스트이다. 인종적 차이를 느끼는데 경제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한다고 보는 잔모하메드는 정복과 지배의 야망을 숨기고 한 쪽이 다른 쪽을 교화시켜야 한다고 믿는 상상계적 텍스트보다 타자를 인정하는 상징계적 텍스트를 위에 놓지만 진정한 탈적민주의 소설은 타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소설이라고 믿는다. 유럽인은 원주민을 사용가치로 보지 않고 교환가치로 보아 잉여가치를 원하기에 선과 악의 이분법적 이념을 식민지인에게 심어 재투자를 시도하려 한다. 유럽인의 나르시시즘은 의식으로는 식민지인을 교화시켜 자신들과 똑같이 문화인으로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무의식은 지배와 소유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잔모하메드는 라캉의 상상계를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연결시킨다.
잔모하메드는 제국과 식민지인을 모두 죄인으로 보는 꾸찌에 (J. MCoetzec)와 호미 바바를 상상계적 환상에 빠져 있다고 보고 나딘 고디머 (Nadine Gordimer)의 소설이나 '인도로 가는 길', '어둠의 속',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상징계적 텍스트로 분류한다. 그의 이런 분류법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 책의 뒤에서 보이겠지만 꾸찌에는 비록 백인이지 만 남아프리카의 백인이 상상계적 오류에 빠진 것을 드러내 자기 반성적 소설을 쓰고 있다. 그리고 곧 논의되는 바바는 백인의 것을 흉내내어 백 인의 것을 전복하는 저항을 담고 있기에 그가 단순히 상상계적 오류에 빠져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한 편의 글이 그 정도의 압축된 통찰을 담고 있기도 쉽지는 않다. 잔모하메드만큼 압축된 통찰은 아니지만 같은 마르크시즘 계열의 아메드(Aijaz Ahmad)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대가들을 비판하면서 탈식민주의가 이 둘 밖의 어느 곳이어야 함을 암시한다. 그는 제1세계와 제3세계를 자본주의 대 반자본주의로 나누는 제임슨의 견해가 피상적이라고 반박한다. 한국은 제3세계지만 가장 빠르게 성장한 자본국가이다. 제3세계인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매직리얼리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기법이다. 제3세계의 자본주의 민족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과 힘든 관계라는 증거는 없다.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는 포스트모던 기법과 제3세계를 합쳐 캐논에 반대되는 작품을 썼다. 그러므로 제임슨 식의 이분법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푸코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미시적 접근도 문제다. 사이드의 책에서는 그가 해체시키려는 바로 그 권력의 음성이 들린다. 또 아무리 그의 '오리엔탈리즘'이 통찰을 보여도 과거의 모든 기록이나 연구가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고 제국주의의 발흥자나 원주민이 똑같을수는 없지 않느냐.
아메드는 제3세계 민족주의는 제임슨을 통해 비판하고 '해체'는 사이드를 통해 비판한다. 그의 이런 반박은 상당히 정확하고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비판보다 대안이다. 그는 자신의 대안이나 논리를 밝히지 못한다. 이제 바바의 대안으로 넘어가기 전에 사이드의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그가 부딪친 한계는 무엇이며 바바는 어떻게 프로이트를 끌어들여 이 한계를 극복하는가. 순수학문이란 이상에 불과하고 동양에 관한 서구의 텍스트는 객관사실이 아닌 담론이라는 전제는 지금까지 무심코 받아들여온 서구문화에 대해 재검토하게 만든다. 지식이 권력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면 동양에 대한 지식이란 서사이다. 그것은 서구인들의 욕망과 동양인들의 욕망에 의해 형성되는 과정의 산물이지 객관사실이 아니다. 동양에 관한 서구인들의 여행기, 안내서, 학술단체, 세미나, 그리고 주요 시인, 예술가, 학자들에게서 공통되는 일련의 수사적 기교가 밝혀진다. 즉 한 권의 책이 권위를 얻으면 그것이 인용, 재인용되면서 점점 실체에서 멀어지고 하나의 동일하고 획일적인 동양관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의 식민정책과 긴밀히 연결된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관계를 나르시스적 주체와 연결시킨 책이다. 무의식에 잠재한 지배의 욕망을 지식과 연결시킨 그의 작업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와 지식에의 의지를 미국에 사는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제3세계인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글이며,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연결시킨 글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반문이었다. 어떻게 타인을 억압하거나 조정하지 않고 다른 문화와 민족을 연구할 수 있는가. 어떤 대안도 지식이 권력이라는 그물망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가 거짓이고 제국과 식민지인의 나르시시즘에는 차이도 없다는 말인가. 이런 반문에 푸코가 그렇듯이 사이드는 소극적인 방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지식은 억압이면서 동시에 각자가 즐거이 참여하는 생산이다. 이 지속적이고 단단한 힘을 단순히 상부구조의 강대함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문화적 지배의 가공할 구조를 깨닫고 그 구조를 타인에게 적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등등.
물론 사이드는 자신의 방어에 만족하지 못한다. 해체 이후의 마르크시즘은 고유가치를 인정하지 않기에 그리 쉬운 대안을 제시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오리엔탈리즘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이때 철저한 텍스트 분석으로 제국의 나르시시즘을 드러내고 자신의 욕망을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스피박의 실천비평이 그에게 하나의 탈출구로 떠오른다. 영국제국주의 시대의 텍스트를 읽어 그 속에 묻힌 지배이념을 밝히자. 1994년에 나온 '문화와 제국주의'는 바로 이런 맥락의 책이었다. '로빈슨 크루소' 이래 19세기 위대한 영국 소설들은 지금까지 사랑이야기, 인간적인 성장, 미학적 구성, 그리고 더 나아가야 당시 영국사회의문제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오곤 했다. 그것은 인문학적이고 심미적인 작품으로 영국 사회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영국문화는 그 이념을 바탕에 깔고 있지 않겠는가. 사이드는 문화 읽기에 어찌 그런 이념이 배제될 수 있는가 반문한다. 제국으로서의 영국이었으니 제국주의 문화로서 영국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러티브(서사)란 소설의 수사성일뿐 아니라 국가의 전략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꾸미고 그 속에서 듣는 이를 설득하려는 욕망은 한 국가의 전략이며 이것은 문화를 통해 나타난다. 아니 문화가 오히려 제국을 이끌어간다. 로빈슨 크루소는 거구 식민지 개척의 대표적 선구자이다. 그는 무인도에 표류하여 어떻게 야만인과 어울리며 재물을 축적해 나가는지 보여준 다. '제인 에어'의 로체스터는 전 부인 버어사를 다락방에 가둔다. 미친 그녀는 서인도제도인이다. '폭풍의 언덕'에서 캐더린에게 거부당한 히 스클리프는 먼 곳에 가서 돈을 벌어와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에게 복 수한다. '위대한 유산'의 매그위치는 죄수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유배되지만 그곳에서 돈을 벌어 핍을 신사로 만든다. 매그위치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속죄의 장소를 이탈한 죄수로서 돌아와서는 안 될 곳에와 있다는 이념을 심어준다. '테스'의 엔젤은 첫날 밤 테스의 고백을 듣고 충격으로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 방랑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돌아오지만 너무 늦어 그녀를 구원하지 못한다.
19세기 영국소설들에서 식민지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는 인물들의 탈출구다. 그곳은 참회의 지역이요, 재산을 모아오는 곳이요, 가능성을 지닌 미지의 영역이다... 이 정도면 제국이 독자에게 식민지에 대한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영국 사회를 다루면서 은밀히 끼워 넣는 식민주의. 문화와 제국은 독자를 은밀히 움직이는 수사요, 내러티브다. 이제 제국주의 문제를 좀 더 드러나게 다룬 20세기 소설들을 보자. 폴란드에서 망명하여 영국 작가가 된 조셉 콘래드의 소설은 영국의 제국주의에 자의식적인 시선을 던진다. '어둠의 속'(Heart of Darkness,1899)에서 그는 영국의 아프리카 콩고 식민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준다. 식민지 통치자 커츠는 상아 채집과 야만적 행위로 탐욕을 채우기에 급급하다가 비극적 최후를 마친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공포, 공포"(horror, horror)였다. 사이드는 이 소설이 제국주의의 문제점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커츠의 체험을 말로우가 전달하면서 자의성이 개입되고 다시 그것을 제3의 화자가 전달하는 기법이 주제를 흐려놓았다는 것이다. 말로우는 두 세계 사이에서 감정적으로 어중간한 거리를 유지할 뿐 식민지인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능동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콘래드는 제국주의를 비판했으나 그 제국주의를 벗어날 탈출구를 암시하지 못했다. 결국 폴란드 망명인의 자의식에 머문 그 소설은 자기시대의 산물이었다고 사이드는 아쉬움을 표한다. '어둠의 속'은 인간의 어두운 심연과 죄의식을 다룬 모더니즘 소설로 알려져왔다. 또한 언어가 전달자의 욕망에 따라 굴절되는 것을 양파껍질과도 같은 독특한 기법으로 보여준 소설로 해석되기도 한다. 리얼리즘의 명징함을 선호하는 사이드는 콘래드의 모던 기법이 엉거주춤하게 느껴진다. 그가 인도의 문제를 다룬 소설 중에서 포스터의 것보다 키플링의 것을 선호하는 것도 전자의 모호성 때문이다. 키플링은 인도를 사랑한다. 그러나 올바로 사랑하지 못한다.
키플링의 소설 '킴'(Kim, 1901)에서 버려진 아이로 자란 킴은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 스파이 조직을 와해시키는 데 큰 몫을 하게 되고 결국 영국의 신사로 인정받으며 긴 모험의 종지부를 찍는다. 키플링은 인도를 이해하고 사랑했지만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는 것에 조금도 회의를 표하지 않는다. 그에게 인도인의 혈통을 받은 킴이 영국의 신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인간 승리였다. 키플링이 제국과 식민지의 합의에 건강한 축복을 보내는 데 비해 포스터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그리고 포스터의 회의적 태도는 키플링의 축복보다야 낫겠지만 존래드의 망설임만큼이나 모호하여 사이드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가 보기에는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A Passage to India, 1924) 역시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포스터의 소설에서 인도는 불가해하고 광대한 지역이다. 무어 부인은인도인과 거부감 없이 소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여인이지만 두 나라 사이의 관계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하고 죽는다. 인도인 의사 아지즈도 좋게 부각시키지 못했고 가장 공정한 입장에 선 듯한 필딩도 아지즈와 공감하지 못하며 그의 경험은 개인의 차원으로 끝난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무력감은 회피적인 작가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영국 식민주의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요 옹호하는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이다. 사이드는 콘래드의 회의적인 태도를 비난하듯 포스터 역시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모호성과 아이러니는 리얼리즘의 닫힘을 열어 놓으려던 모더니즘의 열림이었으니 직설적인 저항을 기다리는 사이드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사이드는 푸코의 미시적 접근이 갖는 소극성에서 벗어나려고 리얼리즘 쪽으로 지나치게 가버렸다. 그는 절대가치로부터 소외되었음을 표현하려는 텍스트에서 절대가치를 찾으려 했다. 그리고 문화비평이란 고유가치를 인정할 수 없는 해체 이후의 정치적 전략임을 깜빡 잊는다. 열정은 좋으나 단순해진 탓에 그가 서문에서 밝힌 순수한 단일 문화는 없고 모든문화는 혼혈이며 다양하고 다층적 이라는 언급을 보여주는 실제 예는 책에서 찾기 어렵다. 제국은 타문화를 지배해서는 안 되고 제3세계도 타문화를 무조건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던 유보적인 태도는 실제비평에서 작품이 당대의 산물이라는 전통적인 해석으로 뒷걸음친 인상이다. 모던 텍스트의 저항을 억울하지 않게 읽어주고 제3세계인으로 선배들이 만든 '차이'에서 '문화적 차이'를 만들어낸 사람은 인도인 호미 바바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스피박이 그랬듯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연결한다. 그러면서도 스피박과는 조금 다르게 에로스와 권력을 연결시킨다.
3, 호미 바바의 문화적 차이
스피박은 제국의 에로스를 식민지인의 에로스로 전복시켰다. 그녀의표현대로 하위계층(subaltan)은 상위계층의 상상계에서 우수리를 발견하여 그들의 믿음이 착각임을 짚어주고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제시했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대안으로 에코의 '흔적'을, 남근선망에 대한 대안으로 자궁전망을 암시한다. 바바 역시 제국의 에로스를 식민지인의 에로스로 전복한다. 그러나 그는 강력한 실천비평이 아니라 전복적인 이론을 만든다. 프로이트의 전이(transference)와 데리다의 산종(dissemination)에서 문화의 혼혈성 (hybridity)을 만들어내고 차이(difference)에서 문화적 차이(cultural difference)라는 제3세계인의 저항이론을 만들어낸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든'에서 엘라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하나의 해결책일지라도 바로 네 자신이 또 하나의 문제이니 그런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뜻있는 결의가 있다 해도 그것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굴절되니 언어는 중립적인 가치체계가 아니고 상황에 의해 굴절되는 수행적인 것이요 인간의 욕망은 시간에 따라 의미를 굴절시키니 주체 자체가 문제인 세상에서 진리란 어떤 것이어야 하나.
프로이트는 '전이의 역동성'에서 치료는 분석자와 환자의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주관적인 것이라 했고 라캉은 이것을 한층 더 밀고나가 치료란 둘 사이의 욕망 길들이기라고 했다. 분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모되는 둘 사이의 욕망 주고받기이므로 해답이란 어딘가에 온전히 숨어 있는 게 아니라 표층 위에 이미 올라와 있다. 진리란 과정 속에서 존재하는 잠정적인 것이고 의미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굴절되는 대화적인 것이다. 프로이트의 전이와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은 주체도 진리도 닫힘이나 단음조가 아니요 열림이고 갈림적이라는 데서 서로 만난다. 피터브룩스는 이 원리를 소설 분석에 끌어들여 '플롯을 따라 읽기'라는 책을 만들었다. 이제 바바는 서사를 국가의 전략으로 확장시켜 문화와 문화 사이의 충돌과 접목과 혼혈성을 논한다 그의 글 '국가와 서사'(Nation and Narration)는 서사전략이 곧 국가전략이라는 것으로 문화와 제국을 연결시키는 글이다. 국가는 선험적 이념이 아니라 전진과 퇴행의 양가성으로 구성되는 문화적 충돌과 접목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문화의 경계는 유동적이고 대화적 이어서 늘 자리바꿈을 겪는다. 왜 제국의 문화가 식민지인의 것을, 선진국의 문화가 후진국의 것을 꿀떡 삼키지 못하는가. 목에 탁 걸리는 아담의 뼈 때문이다. 그게 무엇일까. 바로 식민지인의 무의식이다. 이 아담의 뼈는 프로이트의 에로스요, 라캉의 억압되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상상계요, 데리다의 디페랑스이다. 그것은 반복을 가능케 하는 언캐니, 실재계, 욕망의 미끼인 '프티 오브제 아' (a), 그리고 말하기에서는 들리지 않지만 글쓰기 에서는 분명히나타나는 디페랑스(differance)의 a이다. 바바는 여기서 자신들의 "사악한 눈"인 알파벳 첫글자, '아'(a)를 만든다. 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전이에 바탕을 둔 데리다의 '디페랑스'와 '산종', 라캉의 상상계와 욕망이론을 자기 식으로 읽어 나라와 나라 사이의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리고 원주민의 무의식이 갖는 저항 때문에 식민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혹은 이기적이고 사악한 꿈인 원초적 나르시시즘을 제국의 꿈을 뒤엎는 수단으로 만들어버린 바바. 그래서 그의 문화적 혼혈성 속에는 응어리진 '사악한 눈'(Evil Eye)이 도사리고있다. 그가 어떻게 에로스와 권력을,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연결시키는지 그의 책 '문화의 위치'(The Location of Culture, 1994)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자. 배 위에 노르웨이 국기가 펄럭인다. 그 배는 필리핀인에 의해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자본이 값싼 노동력을 따라 이동하는 다국적 기업시대, 냉전체재가 끝나면서 새롭게 부상되는 민족주의, 기술과 정보의 발달로 세계가 하나의 커다란 촌락이 되어갈 때 민족주의와 세계화는 어떻게 조화를 이를 수 있는가. 문화와 문화는 어떻게 충돌하여 변형되고 그 속에서 녹지 않는 "문회적 무의식"은 어떻게 살아남는가. 최근의 글, '부호화하기, 해독하기'(Encoding, decoding)에서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다양성(pluralism)과 다의성(polysemy)을 이렇게 구별했다. 기표는 상황에 의해 여러 개의 암시적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들 은 서로 동등하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즉 어느 집단 안에서 더 좋은 해 석이 제도화된다. 우열의 차이를 드러내며 종속되는 것이지 공존이 아니 라는 것이다. 그저 개인의 사적인 반응에 의해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게 아니라 주체 속의 응어리에 의해 선택적으로 감지되고 이 응어리가 의사 소통을 가능케 한다. 홀의 이런 견해는 바바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주체 속의 응어리에 의해 여러 개의 의미들 가운데 하나의 의미가 만들어지기 마련인데 이때 응어리가 무엇을 가리키느냐에서 차이가 난다. 바바의 응어리는 인간이 지닌 무의식이다. 억압되어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에로스 요나르시시즘으로 '사악한 눈'이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우월한 것을 선택한다는 보장은 없다. 의식의 기준으로는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무의식으로는 이기적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응어리때문에 타문화는 그대로 흡수되지 않고 그래서 제국의 꿈은 무산된다는 것이다.
제3의 공간과 문화적 차이
파농이 프랑스에서 사는 흑인으로서 느끼던 집 없는 느낌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닌 그 어떤 제3의 인간으로서 느끼던 고향 없는 느낌은 그 자신만의 느낌이 아니었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에 나오는 124번지는 어떤가. 1873년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자유를 얻은 직후의 흑인의 삶이 백년이 넘은 지금에 와서 쓰여지고 읽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의 딸을 죽이고 그 딸이 유령으로 나타나서 같이 살며 한 가정을 파괴하는 스토리는 오늘날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모리슨의 여주인공 시드가사는 블루스톤가 124번지는 원한과 저주로 가득 차 있다. 그곳은 가정이 아니고 죽은 유령이 되돌아와 함께 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투쟁의장이다. 제3의 공간이다. 노예시절 너무도 참혹한 학대로 고통받은 시드는 어린 딸을 죽인다. 그 애가 자신과 같은 동물적인 삶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바바는 시드의 이런 행위를 노예로서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고 말한다. 주인의 재산을 파괴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은 딸이 어느 날 소녀가 되어 시드 앞에 나타나 그녀와 함께 산다. 사랑과 증오와 소유와 탐닉으로 124번지는 소외되고 피폐된다. 유령은 과거 노예시절의 악몽이다. 시드가 유령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과거의 악몽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파농이 느끼듯 인종차별은 이제 무의식 속에 자리잡아 악몽처럼 시드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다. 그리고 시드는 그 속에서 헤메고 탐닉하여 자아를 붕괴시킨다. 빌러비드는 누구인가. 모든 흑인의 얼굴에 달라 불은 노예시절의 악몽이다. 그들은 해방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 열등의식의 마스크를 벗어 던지지 못한다. 124번지는 더 이상 옛날 같은 집이 아니다. 그곳은 현대인 이 겪는 타자와의 만남, 문화적 충돌을 상징하는 은유이다. 시드와 빌러 비드처럼 검은 피부 위에 흰 마스크를 쓰고 탐닉과 고립 속에 황폐하여 마멸될 것인가. 덴버처럼 다시 이웃과 손잡고 건강한 타협을 찾을 것인가. 모리슨의 질문은 바바의 것이기도 하다.
백인의 문화와 흑인의 문화가 부딪히고 동양문화와 서양문화가 부딪힌다. 세계가 좁아지며 우리집은 더 이상 옛날의 고유한 우리집이 아니다. 경계 위의 인간들은 집 없는 느낌 속에서 이질적인 것과 부딪히고 섞인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의 의미와 상징은 투명성을 잃는다. 같은 기호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게 읽힘으로써 더 이상 통합적이고 단음조적인 문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가 산종되듯 문화도 산종된다. 프로이트의 요술 책받침처럼 우리의 의식 위에 쓰인 글씨는 자꾸만 덧쓰일 뿐 투명한 쓰임이란 없다. 언제나 앞선 것은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문화도 이런 것이 아닐까 파농의 검은 피부 위에 쓰인 하얀 마스크처럼, 모리슨의 되살아나는 유령처럼 한번 쓰인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에 저장되어 틈틈이 의식 위로 솟구친다. 이것이 우리에게 집 없는 느낌, 괴기함(프로이트의 언캐니), 산종(데리다의 'dissemination'은 의미가 시간에 따라 덧칠해지는 것이었는데 바바의 'dissemiNation'은 문화가 시간에 따라 덧칠해지는 것을 말한다), 혼혈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헤겔의 정반합과 같은 투명한 의식의 자리에 파농의 덧칠해진 의식이 들어선다.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데리다의 산종을 거친 현대 주체는 더이상 그런 초월주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기호가 그렇듯이 문화는 늘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고 발화자와 수화자의 간극으로 제3의 공간(in-between place), 결코 나타나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유령, 아담의 뼈, 실재계, 응어리, 타자를 지니기에 양가성을 띠고 문화적 차이를 낳는다. 양가성은 프로이트의 양가성과 같은 것으로 다양성이나 이중성과는 다르다. 양가성은 단음조를 가로막는 타자. 제국의 상상계에 어깃장을 놓는 원주민의 응어리 때문에 생겨나는 문화의 덧칠해짐이다. 파농의 덧칠해진 주체는 분열증의 원인이지만 바바의 문화적 덧칠해짐은 원주민의 저항이 된다. 파농의 무의식은 백인이 불어넣은 열등의식이 잠재한 곳이요, 바바의 무의식은 억압된 원주민 문화의 저장고이기 때문이다.
더프(Duff)가 쓴 '인도와 인도 선교사들'(1839)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선교사가 "인간은 부활해야만 신을 볼 수 있다"고 가르치면 인도인들은 우리도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것은 불교의 윤회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것과는 다른 의미라고 다시 가르치면 인도인들은 신을 보려면 완벽한 브라만이 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인다. 주인의 언어는 그대로 하인에게 전달되는 게 아니라 하인의 의식에 잠재해 있는 것에 덧칠해져서 전달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제국주의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척할 뿐이다. 이 '하는척'하게 만드는 나타나지 않는 제3의 공간이 바로 문화적 저항의 영역이다. 이론은 실천보다 선행될 수 없다. 한 시대의 이론과 정치적 실천은 나란히 갈 뿐 마주 볼 수도 없다. 다만 앞선 이론에서 자기 것을 만들어 바로 그것에 저항하는 것, 닮았으나 결코 똑같지 않은 것이 지닌 저항력을 만들어내는 게 이론가의 사치적 책임이라고 바바는 말한다. 스피박이 제국의 이론에서 얻은 바로 그 방식으로 제국을 인어내 자신의 것을 만들 듯이 바바는 그들의 것에서 자신들의 이론을 만든다. 프로이트, 데리다, 라캉은 서구의 담론이고 제국의 것이다. 그는 '하는 척하기'(Mimicry)가 지닌 저항을 그들의 담론에서 끌어낸다. '하는 척하기'란 무엇인가. 무의식이 의식의 옷으로 위장하고 의식의 세계에 침투하는 것이 아닌가. 현실의 옷을 입은 쾌감원칙이요 문명의 옷을 입은 에로스다.
오랫동안 식민지인으로서 자신의 무의식 속에 쌓인 제국주의 언어가 해방이 된 후로도 의식의 세계를 지배하고 온갖 가치의 기준이 여전히 백 인에게 있는 사회에서 흑인은 열등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검은 피부 위에 흰 마스크를 쓰고 자아를 부정하고 타인이 되려는 게 흑인의 입장이라고 파농은 말했다. 파농은 물론 부정적인 입장에서 분열된 주체를 논의했다. 그러나 주체는 단일한 통합체가 아니라 그 밑에 억압 된 무의식이 있다는 프로이트식 분열을 암시한것에서 그는 데리다, 라 캉, 푸코에 이르는 후기 구조주의적 주체에 접근한 셈이 된다. 바바는 바로 그 분열성 때문에, 무의식 속에 쌓인 원주민의 문화적 유산 때문에, 녹지 않는 아담의 뼈 때문에 제국의 상상계가 무너진다고 본다.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이 갖는 저항이요, 에로스와 권력의 결합이다. 식민지 담론은 제국이 야만인들을 길들일 수 있다고 믿은 이성적 논리이다. 그것은 모던시대의 이성이 믿은 합리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그렇게 단음조적 통합체가 아니다. 예를 들어 영국 선교사들이 인도인에게 기독교를 가르치면 인도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믿고 그것을 따른다. 특히 만인이 평등하다는 논리는 카스트 제도가 엄한 인도의 하층민들을 매혹시킨다. 그러나 소를 먹는 서양인들의 성찬식에는 끝까지 참여하지 않으려 하고 그런 성경이 천사가 준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선교사는 영국에 급히 연락한다. 인도인들이 성경책을 원하니 많이 보내달라고. 그러나 1817년 벵갈의 선교사는 자꾸보내야 소용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을 호기심으로, 휴지로 쓰려고, 담배 싸는 종이로 쓰려고 받았기 때문이다. 식민지인들의 무의식 속에 저장된 그들 고유의 특성은 의식을 뚫고 들어오는 문명의 교리를 틈틈이 저해한다. 주체 속의 타자는 위장된 모습으로 지배음성에 어깃장을 놓는다.
사이드와 다르게 해석하기
영국인들은 애초 인도인들을 가르칠 때 서구의 모든 것을 다 가르치지 않고 그들이 노동력으로 이용하기 쉽게 선택적으로 가르쳤다. 예를 들어 자유와 평등을 가르쳐 자신들과 똑같이 되면 언젠가 자신들에게 도전해올 것이기 때문에 그저 예절, 삶의 방식, 기술, 지식 등만 가르칠 뿐 카스트제도 등은 그대로 유지시켰다. 이런 시도는 얼룩덜룩한 "부분적 재현"이 되어 더욱 주체의 분열을 낳는다. 인도인들은 겉으로는 공손히 지배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척하지만 사실 변화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속은 여전히 인도인이었다. 이 시늉하기, 하는 척하기는 자꾸만 거짓을 낳는다. 그리고 그 거짓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제국이 바라던 교화되고 이 성적인 문명사회가 아니라 모든 게 덧칠해진 깊은 혼돈을 초래한다. 바바는 콘래드나 포스터가 이런 측면을 보여주어 제국주의 담론이 쓸모없음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어둠의 속'에서 영국 제국주의의 투철하고 명료한 사명감을 띠고 아프리카를 문명화시키기 위해 콩고에 간 커츠는 그곳에서 전혀 의도와 다른 결과를 안고 파멸된다. 문명과 이성은 원주민 사치의 야성 앞에 무력했고 권력은 무한한 탐욕을 가능케 하여 커츠를 탐욕과 야성의 노예로 만든다. "공포, 공포"라는 커츠의 마지막 말은 이성의 빛에 억압된 인간의 야성적 본능에 대한 표현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상태에 대한 표현이다. 식민지 아프리카는 커츠라는 제국의 이성을 마비시킨 깊은 혼동이었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깊은 혼동은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에서도 비슷하다. 마라바 동굴의 알아들을 수 없는 깊은 울림소리 "ouboum"은 식민지의 깊은혼동이요, 제국의 이성으로는 해석 해낼 수 없는 소리이다. 인도인 아지즈는 못 듣지만 영국인 아델라는 그 소리를 들으며 깊은 환각에 빠진다. 인도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도를 알려고 했던 아델라는 아지즈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고 회교인들의 첩제도만 들었기에 그가 자신을 능욕하려 했다는 환각에 빠졌을 것이다. 인간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나라를 지배할 수 있다는 제국의 단순한 논리를 비웃는 듯한 그 울림은 서구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몰아넣는다. 포스터는 식민지 담론의 무용성을 이렇게 암시한다. 그런 나라를 어떻게 마음이 포착할 수 있을까? 침입자들을 수세대에 걸쳐 노력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쫓겨난 채로 있다. 그들이 세운 중요한 마을들은 오직 피난처일 뿐이고 그들의 싸움은 고향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병일 뿐이다. 인도는 그들의 고민을 알고 있다. 그녀는 수백 개의 입을 통해 우스꽝스럽고 엄숙한 사물을 통해 "오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엇으로 오라는 것인가? 그녀는 결코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녀는 오직 손짓을 할 뿐 약속을 하지 않는다. 서구의 이성중심 논리가 결코 파악해낼 수 없는 신비한 울림소리,"ouboum"은 식민지 담론의 투명성을 비웃는다. 그 소리는 혼돈이요, 넌센스요, 문화적 차이로서 헤겔의 투명한 논리를 비웃는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고 노예가 된 주인과 다스려지지 않는 노예가 있을 뿐이다.
사이드는 포스터가 영국 편도 아니고 인도 편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이 되어 당시 식민정책을 수용하는 입장에 섰고 결국 그의 작품은 모던시대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바바는 마라바 동굴의 울림이 식민지 담론의 단음조를 비웃는 깊은 혼돈으로 저항의 음성이라고 말한다. 영국은 합리성을 거부하는 그 울림을 다스릴 수 없기에 제국의 시도는 헛된 것이라는 암시다. 바바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이 저항을 간과했다고 말한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인의 지식과 권력의 산물이지동양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말한 사이드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그는 재현이 굴절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었을 뿐 억압된 것이 귀환하는 것은 보여 주지 못했다. 일사불란한 근원에의 욕망이 원주민의 나르시시즘에 의해 협박받는다는 것을 사이드는 간과했던 것이다. 사이드와 바바의 텍스트 분석을 비교해보면 후자가 더 역동적이고 저항적임이 드러난다. 바 바자신이 인도인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배들의 이론에서 끄집어낸 저항이기에 설득력이 강한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처럼 독창성이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앞선 것들을 아주 조금만 다르게 읽으면 되는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을 조금만 다르게 해석하고, 에로스를 권력과 살짝 연결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바로 그 "조금만"이라는 게 어려운 것이지만. '인도로 가는 길'에는 이 두 사람이 논의하지 않은 또 하나의 숨겨진 주제가 있다. 아델라의 선택이다. 영국 처녀인 그녀는 인도를 배우고 그곳에서 일하는 약혼자 로니를 정말 자신이 사랑하는지 알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었다. 로니는 영국 식민정책을 철저히 고수하고 신봉하는 제국주의의 실천자였다. 그러므로 마라바 동굴의 울림은 로니를 거부하는 울림이 기도 하다. 소설은 사랑의 주제와 식민정책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한번에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또 다른 차원의 에로스와 권력의 결합이다. 아델라의 선택을 제외시킨 사이드와 바바는 여성의 선택을 배제하는 남성 중심주의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논문의 주제가 되기에 여기 에서는 다만 아델라가 포스터의 눈이기도 하여 바바의 해석이 더 온당하다고 끝맺고 싶다. 아지즈를 더 공감 있게 그리지 못한 포스터가 제국주의에 대해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한다는 사이드의 해석은 소박한 느낌을 준다.
사악한 눈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아담의 뼈, 동화되지 않고 그저 '하는척' 하게 만드는 응어리. 바바의 저항하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프로이트의 언캐니나 라캉의 실재계나 데리다의 디페랑스의 'a'처럼 반복을 가능케 한다. 너와 나의 완전한 합일을 가로막는 '흘러넘침'이 우수리가 되어 자 꾸만 다르게 반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실원칙 밑에 억압된 쾌감원칙이 반복충동을 낳는 것처럼, 라캉의 욕망의 미끼, 'a'가 상상계와 상징계의 반복을 낳고 데리다의 차이 속에 숨은타자, 'a'가 '흔적'이나 산종을 낳듯이. 기표의 빠른 순환이 어떻게 정치적인 힘이 되는가. 바바는 세포이 반란을 그 예로 든다. 인도인들이 즐겨 먹는 납작한 밀가루 빵 차파티는 세포이 반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850년대 인도 중북부 원주민 보병대에서 엔필드 총과 악명 높은 탄환대가 소개된 직후 반란의 기미가 가득한 시골마을에 차파티가 급속히 퍼진다. 케이(Sir John Kaye)가 1864년에 쓴 글에 따르면 누군가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계속 인도인의 주식인 차파티를 돌렸다. 주민들은 무슨 큰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경고로 받아들여 준비를 하고 무조건 복종할 태세를 갖춘다. 빵은 사람들의 공포심을 불렀고 사람들은 뭉쳤다. 어떤사람들은 그건 힌두교인의 풍습으로 질병을 몰아내려는 미신이라며 웃어넘겼으나 그런 왈가왈부는 오히려 소문을 부추겨 흥분과 막연한 기대감까지 부른다. 불안은 확산되고 반란을 위한 전초기지가 마련된다. 차파티는 평범한 음식인데 점차 상징적인 기호가 되어 빠르게 순환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포가 확산되어 1857년 세포이 반란의 전초가 된다.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는 것에 두려운 원주민 군대는 전통에 매달리고 정부를 의심했고 드디어 5월 벵갈 원주민 보병 20사단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공포를 느낀 것은 원주민들만이 아니었다. 당국도 공포를 느끼게 되고 타협을 요구하게 된다. 사태가 발생하기 몇일 전 한 장교는 당국에 이렇게 쓴다. "불안이 고조되어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다. 그들의 종교와 믿음을 침해할 때 항거할 것이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모른다." 차파티는 인도인의 주식으로 하나의 상징이 되어 빠른 순환으로 영국인의 공포를 부른 기호가 된다. 차파티는 영국인의 개화에 굴종되지 않는 인도인의 '사악한 눈'이었고, 그것이 공포의 힘이 된 것은 순환되어지는 발화의 차원에 의해서였다. 바바의 문화의 혼혈성은 반복충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두 문화 사이의 덧칠해지기이다. 그리고 이런 문화의 산종을 가능케 하는 것이 원주민의 아담의 뼈인 저항하는 '사악한 눈' 이다.
네가 하나의 해결책일지라도 네가 바로 또하나의 문제이니... 아무리 멋진 계획이 있더라도 그것이 수행되는 과정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 계획은 의미가 없다. 인류는 얼마나 멋진 계획을 세웠던가. 그러나 그것은 한결같이 또다른 문제를 낳고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가곤 했다. 그렇다면 계획보다 실천과정이 중시되고 인식론적 추구보다 그것을 수행하는 주체의 욕망이 중시되어야 한다. 인간의 주체에 대한 탐색, 언어가 발화되는 과정에서 일으키는 굴절, 타자와의 대화 의미의 끝없는 산종... 바바는 이런 것들을 강조한다. 논리와 그것을 수행하는 데서 일어나는 간극은 수행의 주체인 인간의 욕망 때문이고 그것은 또 시간과 공간의 문제 와 결부된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나 욕망이 중시된다. 문화란 인식론적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무의식으로부터 따로 떼어낼 수도 없고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산뜻한 이론도 발화의 순간 넌센스로 바뀐다. 바바의 문화의 혼혈성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영국 의회에는 "보충질의"라는 게 있는데 실제로 수상의 답변지에 오르는 것은 이 보충질문들이다. 그렇다면 보충이 더 주인이 아닌가. 데리다의 보환(Supplement)은 중심을 해체하는 주변이다. 그리고 바바는 쌀의 뉘처럼 푸대접받는 주변인이 주인의 총체성을 와해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보환은 바바의 표현으로 '하나보다 크고 두배보다 적은 것'(less than one and double)이다. 그것은 너와 나의 하나됨을 막는 라캉의 흘러 넘침(jouissance)이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반복을 멈추지 않는 프로이트의 반복충동이다.
영국인들이 "눈에는 눈"(an eye for an eye)이라고 가르치면 인도인들은"an eye for a I"라고 따라한다. 소리로는 똑같이 "아이"인데 글로 썼을 때만 "I"라고 다르게 나타난다. 억압된 원초적 나르시시즘 I가 글쓰기에서만 나타난다.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왜 열등하냐고 묻던 데리다의 '디페랑스'가 생각난다. 이것이 욕망하는 주체가 수행과정에서 드러내는 저항이다. 주인의 계획은 실천과정에서 하인의 무의식을 통과하며 eye가 I로 바뀌는 변모를 겪는다. 이것이 '사악한 눈'이다. 이런 위장과 '하는척하기'로 식민지는 제국이 바라듯이 질서와 문명의 장소가 아니라 혼돈의 장소가 된다.
뒤부아(J. A. Dubois)는 1815년 마드라스(Madras)에 이렇게 썼다. "비록 기독교인이 되어도 원주민들은 결코 그들의 미신을 버리지 않고 깊이 간직했으며 이런 인도인들 사이에 꾸미지 않은, 위장하지 않은 기독교인이란 없었다." 그들은 미신을 꾸짖으면 예의 바르게 응대하며 그걸 버리는 척했다. 식민주의 담론에 위배되는 원주민의 문화는 지식의 저장소에 양가적으로 새겨진다. 그리고 정신적 불구가 된 그들은 자꾸 거짓을 말하게 되고 제국은 원주민의 실상을 은폐하기 위해 또 거짓을 말한다. 말로우는 어둠의 심장부에서 벨기에 정원으로 옮아갔을 때 거짓을 말한다. 그는 커츠의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 제국의 연인에게 "당신의 이름"이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가 "공포"를 연인의 이름으로 바꾸어 말할 때 의식의 양피지는 얼룩덜룩해진다. 이렇듯 원주민의 에로스와 제국의 에로스는 서로 충돌하며 식민지는 깊은 혼동에 빠진다.
국가의 서사는 가르쳐서 끌고 가려는 힘과 실제로 인간이 느끼는 본능사이의 긴장을 오가며 중첩적으로 엮어진다. 전체 속으로 흡수되는 매끄러운 총체성은 욕망하는 주체가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다. 수행은 끊임없이 교육을 방해하고 간섭한다. 총체적 서사를 향해 나아가는 현실원칙은 그것을 틈틈이 와해하려는 반대서사인 쾌감원칙에 의해 방해를 받고 서사는 두 가지 힘이 엇갈리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에로스와 문명의 엇갈림이요, 쾌감원칙 너머에 존재하는 반복충동이다. 사회가 균등하고 단음조여서 개발과 교화의 서사가 아무런 저항없이 펼쳐지리라 믿는 중심주의 혹은 계몽주의적 이성을 상상계적 사회라 한다면 실제 그런 서사를 개인이 실천할 때 일어나는 역행과 전복은 상징계적 어긋남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개인의 무의식이 사회의 의식과 엇갈리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틈틈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식을 전복한다. 정신분석이 전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분석자는 환자와 대화를 통해 상흔을 밝히는데 그 상흔은 환자의 욕망과 분석자의 욕망이 부딪치며 이루어내는 타협의 산물이다. 그것은 과거를 방문하면서 앞으로 계속 나아가기에 과거와 현재가 타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적 서사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삶본능과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죽음본능이 교차되면서 이루어내는 다르게 반복하기이다. 그러기에 단음조가 아닌 혼혈적인 것이다. 제3의 공간이라는 타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전이적 주체를 마르크스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해석해보자. 분석자와 환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길들임을 제국과 식민지인의 대화로 옮겨보자. 우열의 관계가 그대로 유지되는가. 아니었다. 제국만 응어리가 있는 게 아니라 식민지인에게도 응어리가 있기에 문화는 둘 사이의 욕망길들이기 이지 한쪽이 다른 쪽을 동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문화적 차이를 일으키는 주체는 프로이트의 전이적 주체에 마르크스의 계급론을 합친 게 된다. 이것이 에로스와 권력의 연합이다.
문화적 차이란 축적되고 발전되는 변증법적 합이 아니라 첨가되고 덧칠해지는 열림이다. 나라와 나라사이의 경계가 엷어지고 자본과 노동력과 두뇌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지금 문화사이의 충돌은 비록 식민시대가 끝났다 해도 여전히 계속된다. 아니 제도적으로 식민주의가 끝났기에 더욱 은밀하고 무의식과 의식의 갈림으로 나타난다. 문화적인 식민주의란 제도적인 것보다 더 끈질기고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때 무조건 외국의 것을 거부하는 배타적인 것도 착각이고 외국의 것이 더 좋다 해서 그것이 그대로 옮겨지리라는 것도 착각이다. 착각에서 비롯되는 계획은 혼란을 불러일으킬 뿐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 우리 것은 무조건 좋고 남의 것은 막아야 한다는 배타적인 자세는 실제로 그리 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저질 문화만 확산시키는 셈이 된다. 또한 잘못된 모든 현상을 실천하는 주체는 쏙 빼고 남의 문화 탓이라고 쉽게 돌려버리는 구실을 제공한다. 실상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 부르는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 많다는 것을 고려할 때 문화적 식민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리 단순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문화가 고정불변의 고립체가 아니고 실천하는 주체의 욕망에 의해 덧칠해지는 것이라면 좋은 문화를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만들고 이미 우리 것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지켜나가는 일관되고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나 그것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리 해석되는지 알아보는 것도 결국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너그럽게 직시하고 어떤 선택을 내려야 혼란을 줄이고 우리 문화를 세계문화 속에서 제대로 지킬 수 있는지 생각해보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문화가 외국 문화와의 타협을 외면한다고 어느 한 쪽이 제대로 지켜진다는 것은 오산임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나 그 이후의 해석들은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