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5장
새
1. 새와 상징
선사시대의 유물과 삼국시대의 고분벽화 등에는 새의 형상을 새긴 문양이나 그림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 벽화에 나타난 그림에서 새와 관련되거나 새의 깃을 꽂은 사람이 상류계급의 귀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고대인들은 새를 숭배하는 특별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인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는 설화에 새가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례가 많으며, 조류의 이상이나 변칙적인 행동에 대하여 여러 가지 암시성 혹은 상징성을 부여한 기록이 많이 있다. 이는 고대인들이 조류에 대하여 신성시하고 나아가서는 예시적인 영물로 인정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고대인들이 이처럼 새를 숭배하고 신성시하며 새에 대하여 영험성을 인정하였던 사상적 배경은 무엇일까? 이러한 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새에 관한 인간의 느낌이나 생각은 시대나 지역에 관계 없이 공통 분모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새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상징과 초점은 ‘날개’이다. 즉 날 수 있다는 점이다. 높고 넓은 창공을 자유롭고 아름답게 날아다니는 새를 보며 느낄 수 있는 공감대는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영원한 이상인 하늘에 가장 가까이 사는 생물, 그것은 높고 신비스러우며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누구나의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다. 특히 의식세계가 미분화된 고대인들은 자연의 모든 현상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여 왔으므로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새,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날개에 대하여 큰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고대인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독특한 관점으로 새를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왔다.
먼저 태양숭배사상과 관련된 것으로, 그들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예를 들면 평남 용강군 사신총이나 쌍영총의 벽화 등에서 해와 달을 새와 토끼의 상으로 대신하여 나타낸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관에 새 깃을 꽂고 다닌 복식풍속이 생활화되었으며, 백제 무녕왕의 고분에서 발견된 금관도 깃을 꽂은 조관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이처럼 삼국시대에는 머리나 관에 새 깃을 꽂고 다녔는데, 이 때 조관은 귀인을 표시한 것이며 그 이유는 새가 태양을 상징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고대인의 영혼불멸사상과 관련된 점이다. 옛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육체를 떠난 영혼이 새를 타고 공중을 날아다닌다고 생각하였다.「위지」동이전에서 ‘이대조우송사’라 하여 큰 새의 날개로 영혼을 실어 보낸다는 기록이 있으며, 진한의 장의풍속에 큰 새의 날개를 시체와 함께 부장하였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혼백을 모셔두는 혼백틀에도 위에다 새의 모양의 조각하여 놓았으며 무덤과 관련된 각종 부장품, 특히 관식에 새의 형상이 많이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고대신앙을 반영하는 한 요소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습속은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아프리카의 요루바족과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장송행진시에 죽은 새의 날개를 공중에 날리는데, 이 새를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길의 안내자’라 불렀다. 인도차이나의 샴족은 장송시 상실을 만들고 그 관의 뚜껑에 죽은 자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새나 동물의 지형으로 꾸미는 습속이 있으며, 흑태족은 화장 때 날개가 달린 목마를 함께 태우는 장속이 있다.
이와 같이 고대인들은 인간이 죽으면 그 영혼이 공중을 비행하는 것으로 믿고, 영혼의 비행을 위해서는 새나 새의 날개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즉 새는 천상의 영혼과 육신의 세계를 내왕하는 연락을 담당하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히 새를 신성시 또는 영물시하는 관념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인간과 영혼과의 접촉을 위한 중매자로서 흔히 새의 깃이 등장하게 되었다. 깃을 신통의 상징으로 여기는 풍습은 오늘날에도 무당사회에서 전승되고 있다. 무당들이 굿을 할 때는 반드시 모자에다 새 깃을 꽂는데, 이는 무당의 영혼이 새 깃을 타고 다른 세계(저승)의 영혼과 접촉 또는 교류할 것을 상징하기 위한 ‘신탁’의 징표인 것이다. 또한 고대의 칼은 칼자루가 두 마리의 오리나 새, 닭 모양을 하고 있음이 세계의 공통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으로, 관련 학자들의 관심을 끈 바 있다. 우리나라의 출토품으로는 평양에서 출토된 동검과 대구에서 나온 동검 등을 들 수 있다. 이 새 모양의 자루가 달린 칼을 ‘안테나식 검’이라 하여, 무기로서의 칼이 아닌 신탁용의 칼로서 천체의 빛을 받아내리는 주도로 보고 있다. 때로는 칼에 새 모양이 새겨져 있기도 하는데, 이 때의 새는 모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자’로서 선택된 것이다. 보다 민간습속적인 차원에서 새에 관한 신령성 또는 주술적 믿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출산풍속에서는 임산부가 닭고기와 새고기를 먹을 수 없도록 하였다. 병자를 위한 푸닥거리에는 닭이 쓰이는데, 닭의 양 날개 안에 ‘대수대명’이라 써서 넣고 굿을 하면 닭이 역신을 물리칠 수 있다고 본 데서 나온 것이다. 이 때 ‘푸닥거리’란 말은 ‘푸닭거리’에서 온 것으로, 닭으로 풀어준다는 뜻이라 한다. 또한 솟대 위에 나무로 만든 새를 두어 마을을 지키고 재앙을 물리치고자 하는 기원을 담기도 하였다. 혼례 때 역시 닭을 사용하는데, 이는 혼례의식이 하늘에 고하는 고천의식이므로 두 개의 성이 합해지는 것을 천신에게 전하는 무속적인 기능을 지닌 것이다. 지금도 혼례식 때 고천문이라 하여 혼인의 성립을 천신에게 고하는 절차가 있다.
새에 관한 옛사람들의 이러한 관념에 따라 새의 행동이나 울음으로 앞일을 예측하는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즉 조류가 정상적인 궤를 벗어나 변태적인 이상을 나타낼 때 그것을 앞일에 대한 암시나 전조, 혹은 상징으로 간주하였으며 거기에서 어떤 예시성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구체적인 예로는 백제가 멸망하기 한 해 전인 의자왕 19년(659년)에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는 기록이「삼국사기」권18에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기이한 일이 발생하고나서 1년 뒤에 국가가 망하자, 그들은 태자궁에서 있었던 괴사가 이를 암시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평원왕 25년(583년)에는 궁궐에 처음 보는 이상한 새가 모여들었는데, 그로부터 두 달 후에 대홍수가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때의 기이한 새는 홍수를 예시하는 하나의 전조로 등장한 것이라 본 것이다. 새에 부여한 이와 같은 암시성과 예시성은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고 까마귀가 울면 사람이 죽거나 불길한 징조라는 속언이 전해오고 있으며, 새에 의한 농사점이나 새점 등이 많이 성행하고 있다. 이처럼 새에 관한 갖가지 의미 부여와 함께, 새를 중심으로 하여 독특한 문화권이 형성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새가 자유로이 그리고 높이 날 수 있다는 데서 고대인들의 숭천사상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모든 불안과 공포, 재난과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영생에 대한 희구, 이러한 모든 갈망이 새가 되어 자유로이 훨훨 날아다니고 싶은 본성으로 모아져, 새를 신성시하고 동경하며 커ㅏ란 의미 부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개별 새를 중심으로, 옛사람들이 그 새에 대해 부여한 상징과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우리 민족의 사상과 정서의 일면을 함께 느껴보고자 한다.
2. 까치
까치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친근한 새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언제나 산골 외딴집, 궁궐의 처마 할 것 없이 어느 곳에서나 함께하면서 우리의 삶에 정감과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함께 사는 다정한 이웃처럼 새벽에 눈을 뜨면 밤새 함박눈이 소복이 쌓인 토담 용마름 위에서 눈이 왔다고 ‘깍깍깍’, 낯선 손님이 온다고 ‘깍깍깍’ 울어대는 까치. 소박하고 간결한 흑백의 배경, 경쾌하고 명료한 소리는 화려하고 기교적인 것보다는 담백하고 단아한 것을 선호하는 우리 민족의 기질과 매우 잘 부합되고 있다. 이러한 국님의 뜻이 모아져서 까치를 우리나라의 국조로 삼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 겨레의 삶 속에서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아온 까치는 그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우리에게 길조로 환영을 받고 있다. 또한 까치는 높고 멀리 날아다니지 않고 언제나 사람들의 주위에서 친근하게 지내는 새이므로, 까치에 대한 우리 민족의 관점은 신성시, 영물시하는 측면보다는 인간의 생활과 관련지워 그 의미와 상징으로 인간세상의 기복과 교훈으로 삼고자 한 면이 크다. 즉 까치를 통해 길상과 기쁨을 나타내고 옳고 그른 것의 분별을 깨우쳐 주고자 하는 의미를 담았다. 한편, 까치는 마을을 수호하고 민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서낭신의 사자로서, 신탁을 맡은 영물로 인식되기도 한다.
1) 길상의 새
우리나라 민화의 화제중 길상을 상징하는 길상화로서 봉황, 용, 거북, 기린의 그림과 함께 까치그림인 군작도를 꼽고 있다. 봉황이 상상 속의 새인 것을 고려하면, 새 중에서 길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존재로 까치가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까치의 길상적 그림을 문자로 도안화하여 공예품이나 의복의 장식 또는 무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즉 예로부터 까치는 기쁨을 가져다 주는 새라 하여 ‘화작’이라 불리어 왔다. 회화에서 한 쌍의 까치를 그린 쌍작도는 쌍희의 뜻을 나타내며, 반가의 부녀자들은 치맛단에 희자를 무늬로 수놓아 기쁘고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또한 뒤주나 곳간의 자물쇠에도 쌍희자의 문양을 넣어 항상 양식과 재물이 넉넉한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바람을 나타내었고, 베갯모나 필통 등 각종 생활용품에 이러한 문양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오동나무에 까치가 앉아 있으면 동희라 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오동의 ‘동’자가 ‘동’과 음이 같아 길함이 겹친다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나 소식이 온다고 하였다. 또한 설날 새벽에 까치소리를 들으면 ‘청참’이라 하여 그 해 농사가 잘되고 행운이 온다고 하였다. 경기도, 충청도 등 중부지방에서는 까치가 물을 치면 날이 개고, 정월 열나흗날 까치가 울면 수수가 잘되며, 까치집 있는 나무 밑에 집을 지으면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호남지방에서는 까치둥우리가 있는 나무의 씨를 받아 심으면 벼슬을 한다는 속신이 있으며, 충청도에서는 까치집을 뒷간에서 태우면 병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까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잘 반영된 내용으로, ‘까치사람’이라 전해 오는 일화가 있다. 조선시대의 9대왕 성종은 어느날 밤 평복으로 변장을 하고 미행을 나섰다. 대낮처럼 밝은 달을 쳐다보며 막 어느 외딴 동네를 지나는데 멀리 사립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나오더니, 문 앞의 나무 밑으로 다가가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깍깍 깍깍’하며 까치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무 위에도 사람이 있었던지 남자 목소리로 ‘깍깍깍’하는 까치소리가 났다. 이 괴이한 광경에 성종이 ‘에헴’하고 인기척을 내자 여인은 황급히 사립문 안으로 사라졌고, 이어 나무 위에서 내려온 남자도 서둘러 여인의 뒤를 따랐다. 성종이 따라 들어가서 곡절을 물었다.
“젊어서부터 과거공부를 하여 나이 50이 가까웠는데도 낙방만 거듭해 왔답니다. 일찍이 들으니 집의 남쪽 나무에 까치가 집을 지으면 과거에 합격한다기에 10년 전 아내와 이 나무를 심었습죠.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까치가 집을 짓지 않아, 내일 모레 과거시험을 앞두고 아내와 같이 희롱삼아 까치소리를 내면서 화답해 본 것입니다.”
성종은 빙그레 웃으면서 자신을 ‘지나가는 길손’이라 밝힌 뒤 집을 나왔다. 이틀 뒤 과거시험장에서 제목을 받은 전날 밤의 선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목은 다름아닌 ‘인작’이었던 것이다. 다른 선비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채 붓을 들지 못하였지만 이 선비는 단숨에 글을 써내려갔으니, 급제하였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까치는 반가운 사람이나 소식을 알리는 길조의 새, 부자가 되거나 벼슬을 할 수 있게 하는 행운의 새로 인식되어 왔다. 옛 시가중에는 이러한 까치의 상징을 잘 나타낸 작품들이 있다. 조선시대의 명승 서산대사가 벗을 기다리다가 빨리 오기를 재촉하여 간접적인 표현을 담은 시를 띄웠는데, 그 벗이 이를 받고 즉시 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새벽의 까치소리에 헛점을 친 것이 몇 번이던가. 어흠 하며 문 두드릴 날이 어느 날인지 모르겠네.
또한 조선시대의 여류시인 이옥봉은 조원의 소실이 되었는데, 그의 작품 중 조원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지은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약속이 있었는데 어이 이리 더딘지요. 정원의 매화가 지려 할 때인데 홀연한 나뭇가지 위의 까치소리에 헛되이 거울 앞에 앉아 눈썹만 그립니다.
동심의 세계에서도 까치는 정답고 반가운 새로 친근한 대상이 되어왔다. 아이들이 이를 갈 때 빠진 이를 지붕에 던지며 “까치야, 까치야, 헌 이 물어가고 새 이 다오”라는 동요를 불렀다. 또한 섣달 그믐날을 까치설날이라 하고, 이 날에 입는 어린이 설빔을 까치두루마기라 하였다. 까치설날은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그 하루 전날인 섣달 그믐날에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는 까치의 이름을 붙여 설날의 기쁨을 기대하고 누리게 하려는 정겨운 배려에서 생겨난 것이다.
2) 보은과 정의의 새
까치는 또한 은혜를 알고 이를 갚을 줄 알며, 정의를 실현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까치와 관련된 설화나 전설에서는 까치가 인간에게 도움을 받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는 내용이 많이 다루어져 오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까치의 보은」이라는 설화의 내용을 보기로 한다.
옛날에 어느 선비가 길을 가던 중에 뱀 한 마리가 둥지 안의 새끼까치를 삼키려 하는 것을 보았다. 선비는 재빨리 활을 쏘아 뱀을 죽이고 까치들을 구한 디 다시 길을 떠났다. 날이 어두워 산 속의 빈 절간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가슴이 답답하여 눈을 떴더니 뱀이 몸을 감고서 “낮에 남편을 죽인 원수를 갚으러 왔다. 만약 절 뒤에 있는 종이 세 번 울리면 살려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였다. 이에 선비는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세 번 울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뱀은 스르르 몸을 풀고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기이하게 생각한 선비는 날이 밝자마자 종각으로 가보았더니 종 아래에 까치들이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다. 까치들은 은혜를 갚기 위해 머리로 종을 받아 종소리를 낸 뒤 죽었던 것이다. 또한 뱀에게 잡혀먹히게 된 까치를 구해준 사람이 그 뒤 뱀의 독이 있는 딸기를 먹고 죽었는데, 까치가 온 몸을 쪼아 독을 제거하여 은인을 살렸다는 내용도 있다. 까치의 정의의 심판관으로 표현된 ‘까치의 재판’이라는 설화를 살펴보자.
아득한 옛날에 참새와 파리가 자주 싸웠다. 이 때 까치가 이들을 불러 인간에게 해가 됨을 들어 꾸짖었다. 파리가 재빨리 참새의 악행을 낱낱이 고해 바치자 까치는 이를 옳게 여겨 참새의 종아리를 때려 주었다. 참새는 아파서 톡톡 뛰며 파리가 인간에게 끼치는 악행이 더함을 고하였다. 이에 까치가 파리의 종아리를 때리려 하자 파리는 앞발로 싹싹 용서를 빌었다. 까치는 참새와 파리에게 다시는 싸우지 말고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명하고, 이를 명심하도록 하기 위해 그 뒤에도 참새는 톡톡 뛰어다니게 하고, 파리는 앞발을 싹싹 빌고 있게 하였다. 한편, 세시풍속과 관련된 아름다운 전설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견우와 직녀 이야기가 있다. 음력 칠월 칠석에 견우와 직녀는 수천 수만 마리의 까치와 까마귀가 서로 꼬리를 물고 은하수에 길게 다리를 놓은 오작교를 건너서 만나게 된다. 칠석이 지난 가을에는 까치와 까마귀의 머리털이 벗겨져 있는데, 이는 견우와 직녀가 새의 머리를 밟고 지나갔기 때문이라는 재미있는 해석도 있다. 근래에 발견된 고구려 고분인 덕홍리벽화 고분에서도 이러한 견우직녀도가 그려져 있어, 견우와 직녀의 설화가 당시에도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러한 설화나 전설들은 까치가 그만큼 우리 겨레에게 사랑과 아낌을 받아 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또한 옛사람들은 가장 친근한 길조인 까치를 통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은혜를 아는 바른 마음씨를 가질 것을 시사하고자 하였다. 도심의 콘크리트 건물숲 속으로도 곧잘 날아들어 ‘깍깍깍’ 울어대는 까치. 흑과 백의 단아한 자태, 경쾌하고 명료한 울음소리. 바쁜 일손을 멈추고 날렵하게 앉아 있는 까치를 보노라면 왠지 반갑고 즐거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공감대이리라. 자연에 대해 무심코 보아 넘기기 쉬운 오늘날. 까치에 담겨져 있는 우리 겨레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되살려 보는 것도 오늘의 삶을 윤택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