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4장
산
산은 위로는 하늘과 통하고 아래로는 세상과 연결되는 곳이다. 하늘과 땅 중간에 우뚝 선 산. 이 자리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래로 인간은 하늘과 태양을 숭상하여 왔다. 하늘을 향한 산의 수직성은 이러한 숭천사상, 태양숭배사상과 밀접히 연관되어 인간은 산을 신앙의 대상, 수호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산이 깊으면 골도 깊다’라는 말이 있듯이, 산은 그 품이 한없이 깊고 아늑하다. 인간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산으로부터 모성으로서의 위안을 받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산은 멀리 떨어져 바라볼 때에도, 그리고 그 품속에 깊숙히 들어가 있을 때에도 인간의 마음을 한없이 편안하게 해주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만약 이 세상에 산이 없다면 우리는 심리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커다란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산은 마치 어머니처럼 인간을 수용하고 포용하며, 그 품속에서 우리들을 성숙시킨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많은 인물들이 산을 찾아 은거하며 탈속의 경지를 누렸고, 숱한 사연의 인물들이 속세를 떠나 산과 함께 삶을 영위하였다. 한편, 산은 그 민족이 강역 및 역사, 민족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여러 산악이 길게 뻗치어 줄기를 이룬 산맥은 그 민족의 약동하는 힘의 원천이다. 그 산에서 잉태되고 자라난 강은 그 민족의 생명의 젖줄이 되며, 산세에 따라 한 마을, 한 부족, 나아가서는 한 민족이 형성되기도 한다. 수천 년 역사의 소용돌이를 감싸오면서, 또는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면서 묵묵히 우리 민족을 지켜온 산. 조국에 대한 원초적인 사랑은 바로 이 산하에 대한 사랑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리 민족에게 투영된 산의 의미, 그 상징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그 품속에 있을 때에 느끼게 되는 ‘탈속과 은일의 상징’으로서의 산을 살펴보고, 멀리 떨어져서 보는 산, 그 수직성의 상징으로 형성된 ‘산악신앙과 산악숭배사상’, 그리고 우리나라의 독특한 산세와 지형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리체계로서의 산’의 상징성 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1. 탈속과 은일의 상징
1) 은거와 은일의 산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산에 수놓아진 인맥은 다채롭기 그지없다. 일찍이 산의 철학을 깨달아 산과 함께 삶을 산 많은 선각자들이 있었으며, 왕조가 바뀌거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혹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이를 한탄한 선비들은 산을 찾아 은거하였다. 그 밖에 숱한 민란의 주모자들이 산을 피신처로 삼았으며, 일제 때에는 징용, 징병을 기피한 청년들과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들이 산을 근거지로 숨어 살았고, 광복 후엔 파르티잔(빨치산)의 소굴이 되기도 하였다. 신라 때의 최치원을 비롯한 많은 법사와 선사들은 차치하더라도 유명 무명의 인물들이 산을 중심으로 역사의 수를 놓았다. 그런 뜻에서 산은 자연과 인생이 어우러진 무대이기도 하고, 바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산중생활을 영위한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현실생활의 도피장소로서 산을 택하여 산 사람들이다. 이들이 산중생활을 선택하게 된 데는 뚜렷한 현실적 이유가 있으므로, 그 문제가 해결되면 산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둘째는 완성된 자아실현의 장으로서, 산 그 자체에 순수한 즐거움을 느껴 스스로 찾아 들어가 사는 사람들이다. 즉 현실적인 조건에 관계없이 스스로 선택하여 산중생활을 영위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앞의 경우는 언제나 산 밖의 인간생활이 사고의 중심이 되어,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고, 또는 돌아가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 있는 사람들이 은신처나 도피처 등 ‘에서 벗어난 '장'으로서 산을 인식하고 있는 반면, 뒤의 경우는 산중생활 자체가 삶의 중심이 되어 산 밖의 세상일을 관망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형태는 뚜렷이 구별되는 것은 아니며 대개의 경우 복합된 양상을 띠고 있다. 예를 들면, 현실의 도피로 산을 찾아들었으나 산과 함께 생활을 하는 동안 새로운 철학과 인생관을 가지게 되어 초월과 승화의 경지에 이르는 경우이다.
특히, 근대 이전의 왕조시대에는 나라의 어지러움을 피해 일시적으로 혹은 오랜 기간 동안 산에 은거하였던 많은 선비들이 있었다. 이들은 초기에는 현실에 대한 고통과 소외감으로 유배의 심정을 맛보았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의 산중생활은 승화된 정신세계로 몰입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주옥 같은 글과 글씨, 그림 등을 남겨, 산중생활이 그들의 정신세계를 얼마나 풍요롭고 넓게 해 주었는가를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화가 허유가 그린「선면산수도」에는 수려한 산수의 그림과 함께 산중 선비들의 하루 일과를 담은 글이 적혀져 있다. 이 산수도는 부채에다 그린 것으로, 거기에 담은 내용과 함께 더욱 운치를 더하고 있다. 부채에 담긴 글을 읽어가는 동안 우리는 그들이 왜 산을 택하여 살고 있는지 저절로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내 집이 산속에 있으니 봄 여름 계절이 바뀌는 때가 되면 푸른 풀이 뜰에 무성하고 낙화가 오솔길에 만발하구나. 문에는 찾아오는 손님이 없고 소나무 그림자만 어른거리네. 높았다가 낮아지는 새소리에 편안한 낮잠은 절로 오누나. 샘물 긷고 솔가지 주워 차를 다려 마시며 「주역」과 「시경」의 국풍, 「좌씨전」, 「난소경」, 「사기」, 도연명과 두보의 시, 한유와 소동파의 문장을 읽어나간다. 조용히 산길을 걷기도 하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안고 어루만지며 아기사슴, 송아지와 더불어 우거진 숲과 풍성한 풀밭 사이에 누워 함께 숨을 쉬네. 냇가에 발을 담그고 않아 흐르는 시냇물을 희롱하기도 하고 양치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와 어린 아들이 대순과 고사리를 다듬고 보리밥을 짓누나. 한바탕 흥겹게 취하여 크고 작은 붓으로 수십 자를 적고 법첩과 묵적을 펴 책 끝까지 읽어나간다. 시내가 흐르는 산으로 다시 나가 전원의 늙은이와 시냇가의 벗을 만나 뽕나무와 삼농사를 묻고 기장과 벼 농사에 대해 이야기하네. 날씨의 맑고 흐림도 요량해 보고 전후를 헤아려 시절을 셈해 보며 서로 더불어 담론이 만발하여라. 집에 돌아와 사립문 아래에 지팡이를 세워 놓고 방에 와 앉으니 서산 노을의 자주빛, 푸른빛이 책상 위를 물들이는구나. 소 치는 목동의 피릿소리가 들려 오고 앞 시내엔 달이 흐르고 있으리라.
한편, 산중에 은거한 선비들은 현실세계와의 갈등을 끝까지 떨쳐 버리지 못하는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들은 대부분이 경국제민의 유학적 이념을 생활신조로 삼았던 사람들이었다. 현실의 주역으로서 현실에 참여해야 하는 자기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강한 자의식 때문에 산중생활에 젖고 심취하면서도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이들은 현실과 귀거래적 이상을 다같이 긍정하였다. 이러한 점은 선비들이 현실적 소외의 극복, 사유훈련, 심성수양 등을 위한 방편으로 불교의 청정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동경하고 좋아했으면서도 불교정신 자체에 대한 체득이나 그것에로의 완전한 귀의를 이루지 못한 태도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무심을 표방하고 산 밖의 세상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였으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임금을 그리워하고 조정사를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지은 시 한 수, 글 한 구절에서 그러한 심사를 역력히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조선시대 이전의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이 엮은 산중생활과 그들이 꽃피운 산중문화를 단편적으로나마 살펴보기로 한다. 어려운 때를 만나 세속을 피해 산을 찾은 선비들 중 가장 철저히 산과 함께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운 최치원을 들 수 있다. 그는 가야산 해인사와 지리산 쌍계사를 하루에 오가면서 많은 족적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은 그의 시가 전하기도 한다.
거센 물결 바위치며 산을 울리어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하네 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까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감쌌네
그는 쇠망해 가는 신라의 국운 속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음을 깨닫자 벼슬을 던져 버리고 뜬구름처럼 소요자적 길을 떠났다. 가야산, 지리산, 금강산, 청량산 등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남긴 그의 산중생활의 자취는 그와 대화하려는 후학들에게 청정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선조 24년(1591) 어느날 산사를 찾아가던 노승 한 분이 지리산 골짜기를 헤매다가 바위 틈에서 여러 권의 책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시 18수가 수록된 그 책에서 고운의 정교한 필적을 본 노승의 손은 일순간 멎을 수밖에 없었다. 달빛에 적막한 산능선을 바라보며 지리산 골짜기 골짜기를 돌다가 시흥이 솟아나면 그대로 적어 아무 바위틈에나 시첨을 꽂아놓았을 그의 풍류를 생각할 수 있다. 지리산에는 또한 세이암이 있다. 그가 세상을 등지고 소요하던 중 국왕이 신하를 보내 국정을 논의하자는 뜻을 전하자, 못들을 말을 들었다 하여 귀를 씻었다는 곳이다. 산에 들면 다시는 속세에 내려오지 않을 것을 말하고 이 곳을 건너며 손을 씻었다는 가야산 무릉교, 가야금을 타면서 시와 풍류로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학사대, 그가 짚던 지팡이를 거꾸로 꽂은 것이 자라 고목이 된 해인사의 천년고목, 곳곳의 바위에 쓰여진 시... 이렇게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던 고운은 어느 날 가야산의 한 숲속에 갓과 신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 아무도 그의 자취를 찾지 못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매월당 김시습은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면학을 힘쓰던 수양대군에 의한 단종 폐위의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으로 3일간을 지낸 뒤 모든 책을 불사르며 통분에 몸을 떨었다. 항시 세사의 어리석음과 부조리에 한탄하던 그로서는 너무도 큰 충격과 절망이었던 것이다. 본시 산수를 벗하며 명리를 구하지 않던 그는 방랑의 길을 떠날 것을 결심하였다. 이 때부터 평생을 미친 이처럼 행세하고 울음으로 시를 지으며 천하를 주유하였다. 금강산, 오대산을 비롯하여 내장산, 무등산, 조계산, 가야산, 북한산 등을 유랑하면서 처처에 명시 1만여 수를 남겼다. 31세 되던 해에는 경주 금오산(지금의 남산) 용장사에 금오산실을 짓고 6년 동안 칩거하면서 불후의 명작인「금오신화」를 탄생시켰다. 또한, 그는 아침에 일어나 예불을 올린 뒤 통곡을 하고 하늘을 우러러 노래를 불렀다. 시를 지은 뒤에는 시를 쓴 종이를 태워버리고, 나무를 깎아 그 위에 시를 쓴 뒤 다시 그것을 불살라 태우고 통곡하는 신산의 일과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금오산실, 매월폭포, 매월동굴, 매월대, 매월동 등 그가 남긴 산중생활의 자취마다 천재의 유랑이 남긴 그의 탈속행각을 그려 볼 수 있다. 그는 “남아가 성세를 만다 도를 행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굳이 자기의 안일과 이름을 위하여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나, 도를 행할 수 없는 난세를 만나면 차라리 세상을 멀리하여 자기 일신이라도 깨끗이 하는 것이 현자의 도리”라고 하였다.
신라시대의 명필 김생은 평생을 태백의 웅기가 가득한 청량산의 토굴에서 글씨를 쓰며 살았다. 김생이 이 굴에서 초서를 완성하여, 후세 사람들에 의해 ‘김생굴’이라 이름지어졌다. 청량산은 36봉 36대 36암자가 있었다고 하며, 이 중 경일봉에 위치한 김생굴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 오른쪽에 의상봉과 왼쪽에 금탑봉, 건너편의 축령봉이 둘러싸고 있어 비가 오는 날이면 온통 암벽으로 된 봉우리마다 폭포수가 흘러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또한 맑은 날에는 둘러쳐진 폭포가 바위로부터 흩어 떨어져서 물방울을 날리면 나무를 쪼개어 그것을 받아 마실 물을 삼았다 하니, 가히 그의 풍류와 멋은 신선의 경지와 멀지 않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중국의 명필체본을 구해다가 이 굴에서 40여 년 동안 글씨공부를 하였다. 종이로는 날마다 연습하는 양을 당해 낼 수가 없어 바위에다 연습을 하였는데, 커다란 바위에 글씨를 써서 가득 차면 다시 물로 씻고 또 쓰곤 하여 하루에 몇 번씩 되풀이하여 썼다고 한다. 따라서 처음 쓸 때는 까끌까끌하던 바위가 몇 년을 쓰고 나니 표면이 반들반들해졌다고 한다. 또한, 그는 주변에 있는 나뭇잎에도 빠짐없이 글씨연습을 하여, 비가 오면 골짜기의 물이 온통 먹물로 흘러내렸다고 전한다. 이렇게 닦여진 글씨는 신품에 달하여, 이황은「퇴계집」에서 “우리 동쪽나라 천 년 동안에 김생이 태어났으니 괴기한 필법은 바위와 폭포에 남겨 있도다. 사람 마음과 똑같다 감탄치 마소”라 하였고, 홍양호는 ‘동방서가의 조종’이라 극찬하였으며, 홍경모의 글과 주세붕의 시에서도 그의 필체는 실제 깍아지른 바위와 무리지어 솟은 봉우리를 옮겨놓은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40여 년 동안 토굴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 결과이니, 그의 산중생활은 초인적인 정신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곳 김생굴과 김생이 사용하던 우물, 그의 연고지에 지어진 김생사 등에는 천여 년을 내려오면서 김생을 만나려는 세인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다산 적약용은 천주교도로 박해 받아 전남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에서 18년간 유배상활을 하였다. 그는 다산초당의 산객이며 은자였고 산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고적한 귀양객이었다. 이 다산초당에서의 생활은 다산 개인에게는 일면 불행한 일이었지만, 여기에서「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심서」등 방대한 경세제민서의 저술을 하고 경학과 문학, 과학 등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겨 후손과 우리 민족에게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산 윤선도는 귀양살이, 벼슬살이, 은거생활을 되풀이하였다. 유배지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과 소외감은 고산으로 하여금 문학이라는 승화된 정신세계로 몰입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명 조식은 벼슬보다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였다. 그는 철저한 은일의 선비로, 몇 번이나 간청에 못이겨 벼슬에 않았다가는 며칠을 넘기지 못하였고, 지리산 덕천동에 산천재를 짓고 자연과 함께 생활하면서 제자를 가르치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지리산을 배워 평생을 그 속에서 살았으며, 남명에 의해 지리산은 온통 시화로 장식되었다. 그가 지리산을 읊은 시는 수백 수를 넘었고, 지리의 산수 속에서 일생을 마쳤을 때 그 향년은 72세였다. 김만중은 남해군 용문산의 유배지에서 혈흔과 함께 인생의 유서처럼 불후의 명작「구운몽」을 남겼다. 조선시대의 명필 김정희의 서체는 유배생활 동안 더욱 무르익어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초기의 정도를 주장하던 틀에서 벗어나 예절과 형식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유배생활 동안 산수를 벗하고 넓고 깊어진 그의 정신세계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도 많은 선비들이 산중생활을 통하여 깊고 풍요로운 정신세계를 가꾸어 나갔으며, 그러한 정신세계의 결정체로 창조해 낸 주옥 같은 작품들이 후세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유산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