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3장
꽃
4. 사군자
4) 국화
국화는 뭇 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 여름을 지나 늦가을에 서리를 맞으며 홀로 피어난다. 이러한 모습에서 국화는 절개를 지키며 속세를 떠나 고고하게 살아가는 은자에 즐겨 비유되었다.「종회부」에서는 국화를 다음과 같이 말하여 그 소중히 여김을 알 수 있게 한다.
"국화에는 다섯 가지 미가 있으니, 동그란 꽃송이가 높다랗게 달려 있음은 천극을 모양한 것이요, 섞임이 없이 순수한 황색은 땅의 빛깔이요, 일찍 심어 늦게 핌은 군자의 덕이요, 서리를 이겨 뚫고 꽃을 피움은 경직한 기상이요, 술잔에 동동 떠 있음은 신선의 음식이라."
예로부터 국화는 오상고절이라 일컬어졌으며 송나라의 주돈이는 “국화는 은일이요, 모란은 부귀요, 연꽃은 군자”라 하였다. 이처럼 국화는 군자 가운데서도 은둔하는 선비의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범석호는「국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산림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국화를 군자에다 비유하여 말하기를, 가을이 되면 모든 초목이 시들고 죽는데 국화만은 홀로 싱싱하게 꽃을 피워 풍상앞에 거만스럽게 버티고 서 있다. 그 품격은 마치 산인과 일사가 고결한 지조를 품고 비록 적막하고 황량한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오직 도를 즐기어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국화가 이와 같은 은일지사의 상징으로 위치를 굳힌 것은 진나라의 도연명에 의해서였다. 도연명은 한때 관직에 있었으나 관리란 직책이 생리에 맞지 않아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왔다. 이 때 지은「귀거래사」에서 집에 와보니 폐허가 된 골목에 아직도 소나무와 국화가 그대로 있음을 반기고 있다. 그 외에도 국화심기를 좋아하고 국화를 읊은 많은 시를 남겨, 중국 역사상 가장 전형적인 은사 도연명과 국화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의 시「음주」는 전원생활을 주제로 하여 탈속한 선비의 풍류세계를 나타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 중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꺾어 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라는 대목의 시정은 그의 도가적 모습을 나타내는 데 즐겨 인용되며, 회화에서도 이 부분을 화의로 취택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시가문학은 당, 송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당, 송의 문학은 도연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자연스럽게 도연명의 시취에 빠져들어 이와 연관된 그림을 많이 남겼다. 정선의「동리채국도」와 「유연견남산도」에는 한 선비가 국화를 꺾어 옆에 놓거나 들고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반면, 이한복은 상황의 설명이나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국화 화분을 그린 정물화 형식의 그림을 남기고 있는데, 화제를「동리가경」으로 한 것을 볼 때 국화와 관련된 도연명의 시취를 인용하여 그린 것임을 알게 해준다.
국화는 ‘국유걸사지풍’이라 하여 호걸의 풍모를 가졌다고 표현되며, 일명 절화, 여절, 여화, 여경, 갱생, 음성 등이라고 한다.「양화소록」에서도 높고 뛰어난 운치를 취하여 단연 1등, 1품으로 꼽고 있다. 국화의 색깔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예로부터 국유황화라 하여 황국을 으뜸으로 치고 있다. 이처럼 국화의 높은 기개를 사랑하여 회화에서는 필묵으로, 문학에서는 글로써 그 불굴의 기상을 표현하였다. 국화는 특히 고려자기와 이조백자, 나전칠기 등 도예품과 공예품에 문양으로써 많이 나타나고 있다. 고려자기 등에 나타나는 국화문이 비록 회화적인 면보다는 도안화된 양상을 띠고 있지만, 한국의 정취를 물씬 나타내고 있는 야국의 그림은 고려청자의 푸른 바탕에 신비스러운 조화를 이루어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 주고 있다. 한편, 국화는 노장사상에 의하여 신선의 초화라 일컬어졌다. 더욱이「포박자」의 내편에 기록하기를, “감곡수에는 국화의 물이 떨어져 자액이 되어 있어 이 물을 마시면 장수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국화가 불로불사의 영초라는 사상이 고려시대에도 충만하고 있었으므로 청자, 술잔, 술병, 거울 등에 국화문이 많이 쓰여졌다. 이처럼 오랜 옛날부터 국화에 대한 신비한 효능이 전래되었고,「신농서」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국화는 성품을 기르는 가장 좋은 약으로 능히 장수하고 몸을 가볍게 한다. 남양사람들은 국화의 담수를 마시고 다 백세를 살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음력 9월 9일의 중양절에 국화주를 가지고 등고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국화주는 예로부터 궁중의 축하주로 애용되었고, 민간에서는 9월 9일에 국화주를 먹으면 무병하고 장수한다 하여 즐겨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고려가요 「동동」9월령에는 “9월 9일애 아으 약이라 먹논 황화고지 안해 드니 새셔가만 흐얘라 아으 동동다리”라고 하였으니, 고려 때 이미 중양절에 국화주를 담가 먹었고, 그것을 약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양지방의「각설이타령」에도 “9월이라 9일날에 국화주가 좋을씨고”라는 구절이 있고, 경상북도 성주지방의 민요에도 “뒷동산 쳐다보니/국화꽃이 피었고나/아금자금 꺽어내여/술을 하여 돌아보니/친구하나 썩 나서네”라는 구절이 있다. 국화는 선조들이 남긴 시조에서 도화, 매화와 함께 자주 제재로 등장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널리 회자되고 있는 이정보와 송순의 작품을 음미하여 보자.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풍상이 섯거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꽃인냥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
정선(鄭敾)의 동리채국도(東離採菊圖) 선면-지본 담채 / 22.7 × 59.7 cm / 국립중앙박물관
5) 대나무
사군자 중 제일 먼저 시와 그림에 나타난 대나무는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성질로 인하여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강희안은 꽃의 품계를 정하면서 높고 뛰어난 운치를 취하여 매화, 국화, 연꽃과 함께 대나무를 1등으로 삼았다. 대나무의 높은 품격과 강인한 아름다움, 실용성은 일찍부터 예술과 생활 양면에서 선조들의 많은 아낌을 받아 왔다. 대는 소나무와 함께 난세에서 자신의 뜻과 절개를 굽히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지사, 군자의 기상에 가장 많이 비유되는 상징물로 나타내고 있다. ‘대쪽 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대를 쪼갠 듯이 곧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곧 불의나 부정과는 일체 타협하지 않는 지조 있는 사람을 말한다. 윤선도는 오우가에서 다음과 같이 대나무를 노래하였다.
나모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이는 대나무의 성격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시경」의「위풍에서 위나라 무공의 높은 덕과 학문, 인품을 대나무의 고아한 모습에 비유하여 칭송한 시가 있는데, 이것이 대나무가 군자로 지칭된 최초의 기록이다.
기수 저 너머를 보라. 푸른 대나무가 청초하고 무성하니 고아한 군자가 바로 거기 있도다. 깎고 갈아낸 듯 쪼고 다듬은 듯 정중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여, 빛나고 뛰어난 모습이여. 고아한 군자가 바로 저기 있도다. 결코 잊지 못할 모습이여.
선비들의 풍류로 유명한 육조시대는 대나무와 군자의 사이가 더욱 밀착되는 시대이다. 죽림칠현이 대나무 숲을 은거지로 삼은 것이든지 왕휘지가 대나무를 가리켜 “차군없이 어찌 하루라도 지낼 수 있느냐”고 한 일화들이 이를 입증하여 준다. 특히 죽림칠현의 고사에서 유래하여, 그 이후로 대밭은 문학작품 등에서 은거지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삼국사기」등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설화와, 전설 등에서도 대나무는 신비한 영물로 등장하여, 우리 민족이 오랜 옛날부터 대나무의 가치를 높이 산 것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때 이미 삼죽, 향삼죽 등 대로 만든 악기가 있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중 미추왕과 죽엽군의 내용을 보면, 신라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는데 신라군이 당해내지 못하였다. 이 때 귀에 댓잎을 꽂은 이상한 군사들이 나타나 신라군을 도와서 적을 물리쳤는데, 적이 물러가자 그 군사들은 간 곳이 없고 미추왕의 능 앞에 댓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에 미추왕이 도운 것인 줄 알고 그 능호를 죽현릉이라고 하였다 한다.
「만파식적」은 신기한 피리에 대한 설화이다. 신라 신문왕 때 동해에 작은 산이 하나 떠내려왔는데, 그 산에는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신기한 대나무가 있었다. 신문왕은 용의 계시에 따라 그 대를 베어 피리를 만들었는데,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마다 그 피리를 불면 평온해졌다. 이 피리를 만 가지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라 해서 만파식적이라 하였다. 구전설화로는 엄동설한에 부모가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므로 대나무 밭으로 달려가 울면서 애원하니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죽순이 솟아올라 그것을 잘라서 부모를 공양한 효자의 이야기가 전라북도 완주군과 경기도 강화군 등에 채록되었다. 대나무는 주기적으로 꽃을 피우는데 그 간격은 종류에 따라 5년에서 60년 주기까지 다양하다. 대개 꽃이 피면 모족은 말라죽게 되고, 대밭은 망한다. 이는 개화로 인하여 땅속 줄기의 양분이 소모되어 다음해에 발육되어야 할 죽아의 약 90%가 썩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머지 10%만이 회복죽이 되므로 개화 후에는 죽림을 갱신하여야 한다. 이에 따라 대밭이 망하면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 하여 불길하게 생각하는 속신이 있으며, 꿈에 죽순을 보면 자식이 많아진다는 속신은 죽순이 한꺼번에 많이 나고 쑥쑥 잘 자라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회화에서는 대나무가 독립된 화목으로 등장하기 이전에 송죽도, 죽석도 등의 배합, 또는 화조화의 일부로 나타났으며, 그 뒤 대의 상징성과 기법의 특수성 등으로 인해 문인 수묵화의 소재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때로 달방에 창호지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를 그대로 베껴서 묵죽을 그린 낭만적인 화법을 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도화서의 화원을 뽑는 시험에 관한「경국대전」의 기록을 보면, 시험과목 중 대나무 그림이 제일 점수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과목으로 되어 있어 산수화나 인물화보다 더 중요시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상감창자에 새겨진 문양에는 국화문과 함께 죽문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도자기의 대나무 그림은 대개 주악선인 등의 인물과 연꽃, 국화, 매화, 학, 새 등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자연의 경관을 이루고 있고, 때로 흑상감한 대나무와 백상감한 군학을 같이 구성하여 매우 평화로운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18세기경의 주병류에서는 대체로 대나무 그림만을 주제로 시문하여, 당시 유행한 사군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 짐작된다. 이처럼 대나무는 그 상징성과 고아함, 실용성 등으로 인해 예술분야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설화 등에서도 교훈적, 길상적 의미를 간직한 주된 소재로 아낌을 받아 왔다.
6) 사군자의 상징성
이제까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각각에 나타난 옛사람들의 생각과 거기에 부여한 의미와 상징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이들 네 식물은 각자 높은 품격과 지조를 가진 뚜렷한 자연물로 인식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개별 꽃이 갖는 특성과 아름다움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다. 즉 꽃잎, 잎사귀, 줄기, 뿌리 등으로 이루어진 각 식물의 구체적이고 독립적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이들이 공통된 특성으로 갖는 의미를 취하여 사군자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옛사람들이 이들을 사군자라 하여 사랑하게 된 것은 어렵고 험난한 환경 속에서 뜻을 굽히지 않고 더욱 꿋꿋하고 아름답게 서 있는 그 성품을 높이 산 것이다. 선비들이 이들을 보며 스스로의 인격을 함양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였다. 따라서 시와 그림으로 그리고 실제로 꽃을 가꾸며 늘 곁에 두고 그 뜻을 새기고자 하였다. 은일지사들은 사람과 교류하지 않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이러한 뜻있는 자연물로서 벗을 삼았으며, 이름 높은 지사들이 이들을 시와 그림으로 노래한 작품과 일화들은 후대의 선비들에게 영향을 미쳐 더욱 사군자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사군자를 함께 여러 가지 비유로 칭송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전한다.
"매화의 운치, 난초의 향기, 국화의 윤택한 기운, 대나무의 청아함이 없으면 역시 군자라 할 수 없다." "매화는 선비의 아취를 지니고, 난초는 제왕과 같고, 국화는 호걸과 같은 풍치를 지니고, 대나무는 대장부의 기백을 지녔도다."
또한 사군자를 벗에 비유하여 봄에 피는 매화를 고우(오랜 벗), 섣달에 피는 매화를 기우(진기한 벗)라 하였으며, 난을 방우(꽃다운 벗), 국화를 일우(뛰어난 벗) 또는 가우(아름다운 벗), 대나무를 청우(맑은 벗)라 하여 차군이라 불렀다. 그리고 맑음과 고아함을 취하여 매, 죽을 쌍청 또는 2아, 추위를 견디는 인내를 취하여 매, 죽, 송을 세한삼우라 하였다. 매죽, 난죽, 매국, 국죽, 세한삼우 등이 배합을 이루어 그림, 문양, 시 등에서 즐겨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연년세세 영구불변하는 우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외에도 사군자끼리의 배합뿐만 아니라 상징성이 유사한 소나무, 돌, 연꽃, 학, 달, 술 등과 함께 어우러지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고시조에 자주 등장하는 정다운 짝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사군자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국화에는 술과 벗이 짝하고, 매화에는 달이 가장 즐겨 짝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주된 소재에 가장 어울리는 짝을 더함으로써 시적 운치를 높이고 주제를 더 깊게 해주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 사군자의 그림은 시, 서와 함께 전인격을 투영하고 있다고 믿어, 문인 사대부들 사이에 더욱 환영받는 소재가 되었다. 그림의 형태나 기법이 간단할수록 그 소재 자체에 부여하는 상징적 의미가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이는 사군자화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 꽃과 식물의 정신을 나타내야 하므로 그리는 이의 인품과 정신이 중요하다고 본 것과 맥이 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군자는 선인들의 벗으로서, 교훈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그 상징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왔다. 꽃 자체의 순수한 아름다움보다는 거기에 담긴 의미를 우선으로 한 전통시대의 관념적인 명분론의 일면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꽃 속에 담겨진 의미나 정신을 망각한 채 지나치게 외적이고 감각적인 미만을 추구, 화려함을 우선으로 취하는 현대인들의 흐름 또한 큰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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