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성과 권력 - 권택영
제1부 무의식과 성이론
2.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여성들의 도전
2. 라캉의 상상계와 여성들의 도전
남녀가 성차를 의식하지 못하던 시절, 유아가 어머니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지닌 시절이 오이디푸스 전 단계이다. 이 단계는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로 세분되기도 하지만 흔히 성이론에서는 대략 '남근기'라고 불린다. 이때 남근은 생물학적인 남근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 유아가 어머니와 갖는 관계를 상징한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의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켜주는 남근이라 믿고 또 엄마도 자신의 남근이라 믿는다. 그러니까 이때 남근은 욕망을 완벽히 충족시키는 대상이요 라캉에게 옮아가면 인간이 평생 추구하는 어머니, 진리 초월기표이다. 그러므로 남근은 상상계에서나 있다고 믿는 오인의 산물이요, 상징계로 들어서며 영원히 포착할 수 없는 어머니다. 프로이트에게 남근기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단계, 혹은 유아기 성으로 대략 생후 4세까지를 잡지만 라캉에게 상상계는 이보다 좁은 생후 18개월이 된다. 라캉은 정신분석에 언어를 끌어들인 (후기)구조주의 정신분석자다. 그러기에 유아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시기를 중시했기 때문에 프로이트보다 시기를 빨리 잡은 것 같다. 프로이트에게 오이디푸스 단계는 유아가 행복한 남근기를 지나 거세위협에 의해 사회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 전단계란 현실원칙에 의해 억압되는 쾌감원칙이요, 의식에 의해 억압되는 무의식이다. 라캉은 의식과 무의식의 역동성이라는 프로이트의 발견을 억압하고 현실원칙을 지나치게 강조한 모던 정신분석에 반발하고 소쉬르 언어관을 끌어들인다. 그래서 무의식을 언어의 세계인 상징질서로 진입하기 전, 대상에서도 자신만을 보는 시절이라 하여 '거울단계', 혹은 착각이 개입된다는 뜻에서 상상계라 이름 붙이고 자아형성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는 '이상적 자아'로 상정한다. 유아는 어머니에 의지하지 않고는 혼자 설 수도 없이 흐물흐물한 상태인데 역설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자아로 오인하는 것이다. 이 오인은 자아형성에서 영원히 차지한 틈새다. 그가 인간을 결핍의 존재로 규정하고 욕망이론을 만든 것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가장 이상적인 총체성으로 착각하고 자아와 타자를 일치시켜 바라봄만 있는 시기에서 아이는 아버지의 법인 상징질서의 세계로 들어선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라는 라캉의 말은 주체가 언어를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언어에 의해 구조된다는 뜻이다. 언어는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지고 그 틈새는 무한히 열려 있다. 언어는 하늘에서 떨어진 절대적인 게 아니라 한 언어조직 내에서 그것만을 지칭하자는 사회적인 약속 즉 '차이'에 의해 기능하는 자의적 약속의 산물이다. 인간의 주체가 언어에 의해 지배받는 한 인간은 은유와 환유라는 언어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고 그것은 바로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정의한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꿈작용을 압축과 전치로 설명했다. 그렇다면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되었다는 말은 주체가 무의식이라는 암시이고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전복이다. 그래서 라캉은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고 말한다. 바라봄과 보여짐이 함께 있는 주체이기에 자의식적 이며 분열된 주체이다. 프로이트는 삶본능을 설명하면서 억압된 쾌감원칙이 현실원칙을 위해 완벽한 충족을 끝없이 미루며 오직 우회하여 충족되기에 반복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강박적인 반복충동은 그대로 라캉의 삶본능이 된다. 즉 상상계는 즉각적인 충족을 늦추고 우회한다. 대상이나 목표를 향해 다가설 때는 상상계적 오인을 하지만 대상을 쥐는 순간 그것은 남근(어머니)이 아니다. 그래서 라캉은 '햄릿'을 분석하며 남근이란 오직 베일에 가리웠을 때만 작동할 뿐 드러나면 아무 것도 아니(nothing)라고 말한다. 진리는 베일에 가리웠을 때만 진리로 작동할 뿐이라는 말과 같다. 데리다에게서 진리의 현현이 자꾸만 미루어지듯이 라캉에게도 욕망의 완벽한 충족은 죽음에 의해서일 뿐이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주체를 끝없이 순환시키는 실재계는 욕망의 미끼로 우리를 살게 하는 삶본능이다.
라캉의 욕망하는 주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주체형성에서 최대치로 끌어냈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 전 단계를 중시하라는 여성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셈이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남근선망과 거세 콤플렉스라는 남성우월주의적 용어들을 남녀 모두에게 적용시켜버린다. 일찍이 1920년대에 어니스트 존스는 프로이트의 거세 콤플렉스에 반발하여 거세란 남근의 유무가 아니라 성희를 영원히 상실케 하는 위협이라고 해석했다. 카렌 호나이 역시 남녀 모두 자신의 내적 본질을 지키기 위한 거세 공포가 있다고 말했다. 여아는 아버지 혹은 남성이 그녀를 강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근원적 여성 불안을 갖는다. 여아 역시 남근이 있고 그것은 자아보존본능 같은 것이다. 이 둘은 거세공포를 인간이자 신을 지키기 위해 겪는 불안으로 해석하여 여성 역시 거세에 저항하는 남성성이 있음을 주장했다. 이들에게 거세는 인간이 지닌 실존적인 불안(anxiety)과 흡사한 것이었다. 이제 라캉은 언어와 지배를 받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결핍으로 거세를 받아들인다. 즉 유아가 상징계로 들어서는 순간이 거세이다. 그러므로 만성이든 여성이든 언어의 지배를 받는 한 아무도 남근을 갖지 못한다. 남근이란 인간 모두가 돌아가기를 꿈꾸는 어머니요, 대지요, 진리요, 초월기표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전 단계를 확장시킨 라캉에 의해 페미니스트들의 소망은 이루어졌는가. 그렇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크리스테바처럼 그의 이론을 충실히 계승하여 여성이론을 만드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라캉 역시 남근 중심주의자라는 비난이 특히 프랑스 여성이론가들에게서 일어난다. 라캉이 남녀를 동등하게 만든 것 같지만 성차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결핍의 존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현실을 그대로 고착시키는 결과를 낳는 게 아니냐는 우려였다.
여성의 반발과 수용
프랑스 페미니스트인 루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는 라캉이 여전히 여성만을 결핍으로 본다고 주장한다. 비록 남근이란 더 이상 남성만이 가진 남근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는 성차를 해결할 수 없는 결핍이라는 보편주체를 물고 늘어진다. 여성이여,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 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남성의 것이고 그 대답은 들을 수 없다. 크리스테바와 달리 이리가레이는 성차를 분명히 하고 여성은 표현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여성과 남성의 육체가 다른 것을 우월로 보지 않고 다름으로 본다. 이 다름은 지금까지 단음조였던 가부장제 사회에 저항하는 여성적 대안이 된다. 여성의 육체를 지식 생산의 근거로 하여 여성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 그녀는 해체론을 끌어들이고 정신분석을 시도하면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 양성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남성이 닫힘이요 동질성을 강조한다면, 여성은 열림이요 이질적이다. 타자를 품는 열림과 모순이라는 여체의 특성을 닫힌 상징질서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남녀가 다르지만 우월의 관계가 아니라 공존의 관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리가레이는 라캉의 보편주체가 여성문제를 흐려놓고 여전히 남성의 기준에서 '희열'이란 단어를 만들뿐이라고 반박한다. 여성의 '희열'은 오직 남성의 동일시 기준으로는 알 수 없고 들을 수 없다. 여성은 결코 남성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여성적 글쓰기는 이 다름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문장은 시작과 끝이 없고 상징계의 질서를 거부하듯 논리를 거부한다. 어머니와 딸의 사랑이 허락되던 상징계 이전인 오이디푸스 전 단계에서 유아는 흉내, 리듬, 옹알이만을 읊었다. 그녀의 문장은 남근기의 문장처럼 경계가 지워지고 합리적인 질서를 전복하고 물 흐르듯 리듬이 충만하다. 데리다의 보환(Supplement : 보충된 것이 주된 것을 전복한다는 중심주의 해체의 용어)처럼 가부장제 상징질서를 위협하는 언어다. 논리적이 아닌, 느끼고 만지는 감성의 언어는 오이디푸스 전단 계의 글쓰기다. 이리가레이는 라캉이 지워버린 생물학적 성차를 되살려낸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정반대로 되살려낸다. 여성을 거세된 존재로 보는 게 아니라 타자를 품을 수 있는 열림으로 보아 양성성을 강조하는 해체론의 분위기 에 더 적합한 육체로 읽어낸 것이다. 그리고 여성만이 지닌 생산능력과 비옥한 자양분으로 가부장제 사회에 저항하는 상징질서 이전의 언어를 복원시키려 한다.
엘렌 식수스(Helene Cixous)는 이리가레이보다 라캉을 수용하는 쪽이 다. 그녀는 생물학적 특성이나 정신분석보다 데리다와 라캉의 중심주의해체를 여성의 입장에서 끌어들여 글을 쓴다. 지금까지 서구 사회는 이분법적 우월의 체계로 남성과 여성, 말하기와 글쓰기, 이성과 감성, 빛과 어둠을 규정지어 왔다. 남성의 억압된 타자였던 여성은 이제 차이를 가진 타자로서 공존한다. 어머니와의 완벽한 상상적 일치의 단계에서 성차는 없었다. 성차는 오직 가부장제 사회로 편입되면서 생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남성 우월주의의 산물인 성차를 지우는 길은 중심주의에 억압된 것을 복원하는 길이다. 말하기 못지 않게 글쓰기를 중지하자는 것이다. 논리와 총체성을 거부하는 글쓰기를 하여 상징질서에 저항하자. 이리가레이가 라캉에게 반발하여 여성 리비도를 남성과 분리시켜 여성적 재현을 강조한 것에 비해 식수스는 라캉을 데리다와 같은 해체론의 입장에서 본다. 그리고 그것을 여성의 입장에서 읽어 정치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녀의 글쓰기는 데리다의 보환적 글쓰기이고 라캉의 타자로서의 글쓰기이다. 정신분석에 대한 여성의 거센 반발을 잠재우고 적극적인 수용으로 물꼬를 튼 사람은 줄리엣 미첼이었고 여성의 입장에서 재창조한 사람은 크리스테바였다. 60년대 말 케이트 밀렛은 '성의 정치학'에서 프로이트를 여성은 수동적, 남성은 능동적이라고 갈라놓고 남성지배를 당연시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1974년 미첼은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에서 남성에 대한 적의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한다. 프로이트는 당대의 남성주의 사회를 설명한 것이지 그것을 추천한 것이 아니다. 여성억압을 이해하고 도전하려면 프로이트를 무시하기보다 그를 여성 이론에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미첼은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전 단계를 강조한 것에 주목하고 그가 성적인 것을 사회적이고 이념적인 것으로 바꾼 것에 주목한다. 미첼이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어떻게 되살려내는지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논의한다.
곧 이어 미첼은 재클린 로즈와 함께 라캉의 여성이론들을 영어로 번역하고 긴 소개의 글을 실어 남근 중심주의 해체를 영어권에 소개하는 데 크게 공헌한다(Feminine Sexuality,1982). 라캉의 분열된 주체는 남근을 허상으로 만들고 남녀의 성차도 허상으로 만든다. 주체를 결핍으로, 여성을 '희열'(jouissance)로 본 라캉의 이론은 여성적이다. 프로이트가 결핍으로 규정한 여성성을 라캉은 주체 전체의 문제로 만든다. 라캉에게"여성적인 것"은 프로이트를 다르게 귀환시킨 것이다. 그것은 상징계의 질서, 명령, 단일한 주체에 항거하는 오이디푸스 전 단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첼의 긍정적인 해석에 힘입어 낸시 초도로우(Nancy Chodorow)는 경험주의적 입장에서 프로이트를 풀어낸다. 행동양식과 취향으로 사회 속의 성차별을 설명하면서 여성이든 아니든 여전히 남성중심 사회에 종속됨을 보여준다. 그녀는 오이디푸스 전 단계에 초점을 맞추어 아버지와 아들보다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강조한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추상적인데 비해 출산과 육아와 가정 돌보기에서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자녀의 인격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성차를 극복하는 길은 남아에게도 육아나 가정 일에 참여케 하는 것이다. 초도로우는 프로이트를 미국적으로 해석하여 가족관계의 개선이 사회구조 개선으로 나갈 것을 암시한다. 그녀의 책 '모성의 재생산'(The Reproduction of Mothering, 1978)은 사회적인 평등권 확보에는 성공했으나 개인의 특수한 상황이 간과되는 한계를 지닌다. 프로이트와 라캉을 따르면서도 여성의 입장에서 그들을 다시 읽는 이론가는 크리스테바이다. 프랑스에서 기호학자로 출발한 그녀는 남녀의 성차별이 있기 전인 오이디푸스 전 단계를 언어 이전, 상징계로 들어서기 이전으로 '기호계'라 이름 붙인다. 기호계는 모성이요 무의식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한다. 상징계는 부성이요, 사회질서로 너를 위해 말한다. 그리고 주체는 기호계와 상징계가 상호 대화함으로써 구성된다. 모성과 부성이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처럼 상호 접촉하여 언어가 생성된다. 언어는 늘 정반의 경계상에 있기에 갈림이요 다성성(heteroglossia)이고, 주체는 과정으로서만 존재한다.
오이디푸스 상황에서 여성이 취할 수 있는 세 가지 입장이 있다. 부권적 질서와 동일시할 수 있고 모계적 질서와 동일시할 수 있고 이 양극의 공존을 취할 수 있다. 여성이론의 발달 단계가 위와 같기도 한데 크리스테바는 이 가운데 세 번째를 택한다. 극단은 또 다른 중심주의가 되므로 항상 양극의 경계상의 언어, 경계상의 주체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와 라캉이 주목했던 오이디푸스 전 단계를 기호 계, 모성, 혹은 코라(Chora)라고 부른다. 그것은 무의식, 쾌감원칙, 그 리고 라캉의 거울단계이다. 그러기에 그녀의 모성은 반드시 여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차가 없는 코라는 남근을 가진 어머니와 상상계적 아버지를 포함한다. 어머니에 대한 유아의 사랑은 나르시스적이어서 숨이 막힌다,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인 사랑은 너무도 강렬하여 죽음과 같다. 이때 중계자가 필요하고 역시 남근을 가진 상상계적 아버지가 제 삼의 공간으로 사랑을 주고받게 만든다. 가부장제 속으로 들어서기 전의 아버지는 유아에게 이상적인 사랑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나 라캉과 달리 원초적 억압이 코라의 단계 이전에 있었음을 가정한다. 성차가 없는 상상계에서 어머니와의 나르시스적인 사랑은 에로스요, 아버지의 사랑은 아가페이다. 그러므로 기호계는 프로이트의 양성성이다. 코라는 어머니, 상상계적 아버지, 여성성, 그리고 기호계이다. 라캉의 주체가 분열적이고 결핍이며 욕망하는 것임에 비해 크리스테바의 주체는 저항과 수용이 공존하는 대화적인 것이어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문맥으로 확장된다 선배와 달리 원초적 억압을 기호계 이전에 두기에 상상계는 이미 반쯤 상징계로 들어선 '상징적 상상계'이다. 주체 속의 타자를 인정하는 것은 선배와 같으나 그 타자는 결핍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획일성을 전복하고 갈림적이고 다성적인 것을 낳는 동인이다. 그녀가 리얼리즘보다 모더니즘과 같은 문학의 실험성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도 그것이 상징계의 동일화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단음조에 저항하는 주체가 크리스테바의 주체다.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은 '도라 분석'을 기점으로 많은 여성들의 반발과 재해석을 낳았다. 무의식을 발견한 혁명적인 프로이트가 무의식중에 내보이는 보수적인 여성성을 지적하고 동시에 그가 암시한 도라의 동성애에서 많은 담론이 생산된다. 동성애는 여성의 남성성이라는 남근기, 혹은 오이디푸스 전 단계로 가는 길이고 여성들은 이것을 확장시켜 갖가지 저항담론들을 마련해왔다. 다음 장에서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여성의 입장에서 다시 읽어낸 줄리엣 미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이어서 '도라 분석'에서 암시된 동성애가 어떻게 발전되는지 보기 위해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의 문학세계를 살펴본다. 최근의 쥬디스 버틀러를 중심으로 한 '퀴어 이론'으로 가는 길목에서 리치의 동성애는 중요한 징검다리가 된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 보수적인 사람도 여성끼리의 사랑이 얼른 생각하듯 그렇게 죄악이거나 급진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이해하게 된다. 결국 여성이론도 성차를 해결하려는 정치적인 운동이고 여성끼리의 결속과 사랑은 그것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주춧돌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