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성과 권력 - 권택영
제1부 무의식과 성이론
2.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여성들의 도전
여성이란 무엇인가와 여성성(Femininity)이란 무엇인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질문이다 우리는 생물학적 특성으로 여성과 남성을 나눌 수 있다. 인체를 해부하면 분명히 여성과 남성은 각기 다른 신체적 특성을 지닌다. 도대체 무엇이 다르기에 우리는 두 개의 성을 나누는가. 사회적 관습에 의해 나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문제에 이르면 이런 질문은 더욱 복잡해진다. 남성 같은 여성과 여성 같은 남성은 어느 쪽에 속하는가. 아니 동성애는 사회관습이 구별지은 성을 넘어 생물학적 차이도 관습에 의한 차이도 지워버리려 한다. 최근의 퀴어(queer) 이론은 성차의 문제를 종래의 관습이 규정한 성(gender)도 생물학적 차이(sex)도 넘어선 곳에서 남녀의 경계를 의심해본 다. 성을 이성간의 문제로만 규정해 온 사회적 관습을 의심해보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동성애 문제를 끌어들여 남성적인 여성과 여성적인 남성 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남성과 여성을 구별지어 온 성차가 얼마 나 인위적인 것인가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물론 여성끼리의 결속을 다짐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하면서. 성의 차이는 이토록 복잡한 문제여서 지금까지도 명쾌한 결론이 나지 않는 논쟁이다. 여자란 무엇인가, 그녀는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질문은 철학자들의 끊임없는 질문이었고 그것은 마치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기도 했다. 그리고 60년대 이후 여성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그런 물음은 이제 여성스스로의 것이 되었다. 지금까지 남성들이 규정 지어온 여성의 정의를 여성의 입장에서 다시 읽으려는 것이다.
생물학적 특성을 고려하면서도 심리적인 것에서 여성성을 찾으려 했던 사람은 프로이트였다. 그는 원래 해부학을 전공했다가 정신분석의가 되었다. 그래서 여성 히스테리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여성성을 성기 해부학과 심리적인 것이 결합된 영역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의 심리 분석은 당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던 환자들을 대상으로 했기에 사회 속 의 성 문제로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것이 오늘날 많은 여성 이론가들이 프로이트와 그를 재해석한 라캉에게서 여성성의 뿌리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프로이트만큼 여성성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낸 사람이 없으면서도 그것이 남성의 입장에서 쓰였고 또 당대 가부장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우선 프로이트가 어떻게 여성성을 풀어내는지 알아보고 프로이트의 사례연구 가운데 가장 유명한 도라(Dora)의 경우와 그 글에 대한 여성이론가들의 반발, 그리고 라캉의 이론과 여성이론가들의 대응을 살펴본다. 도라에 대한미국 페미니스트들의 대응과 라캉에 대한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대응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 있다. 특히 라캉으로부터 독창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를 보면 독창성이란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앞선 대가의 어떤 부분을 자기 시대에 맞게 조금만 수정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1. 도라 분석과 여성들의 다시 읽기
1900년 어느 날 18세의 소녀 도라가 프로이트를 찾아온다. 부유한 제조업자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히스테리 증상을 치료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로부터 약 3개월에 걸친 치료가 있었고 1901년 병상일지가 쓰였다. 그리고 1905년에 이르러서야 발표된 글이 유명한 도라에 관한 이야기, '히스테리 분석의 파편'(Fragment of an Analysis of Case of Hysteria)이다. 프로이트는 이 글의 서문에서 분석이 완벽치 못했음을 밝힌다. 병의 원인을 끝까지 파헤치지 못했으며 분석과정에서가 아니라 분석이 끝난 후 기록되었고 '전이'의 문제가 치료에 고려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꿈의 분석'을 발표하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막 고안해내던 당시의 프로이트이기에 이 글은 훗날 여성성을 밝히는 글들의 근원이 된다. 또한 그가 무의식을 파헤치면서도 남성이기에 볼 수 없었던 환자의 병인이 훗날여성이론가들에 의해 지적됨으로써 혁신과 보수, 해방과 억압의 모순된 프로이트를 드러내어 흥미롭다.
도라는 아버지의 병으로 얼마 동안 요양지에서 보낸다. 그녀의 어머니는 철저한 가정주부로 집안을 쓸고 닦는 것밖에 모른다. 아버지는 K부인의 간호를 받았고 그녀와 밀회를 즐긴다. 그녀의 남편인 K씨는 도라에게 구애하고 도라는 그것을 거부한다. 도라는 아버지가 자신의 밀회에 대한 대가로 K씨에게 딸을 파는 것이라 생각하여 아버지를 미워한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도라의 이런 비난을 "타인에 대한 비난은 똑같은 내용으로 자신을 비난"하는 게 아닌가 의심한다. '꿈의 분석'에서 프로이트가 즐겨 쓰던 자리바꿈(전치)이다. 다시 말하면 도라는 자신이 K씨를 사랑하기 위해 아버지와 K부인의 밀회를 눈감아주면서 그것을 거꾸로 아버지에게 핑계 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도라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에 만 신경을 쓴 프로이트는 자신이 쓰고 있는 분석 속에 담긴 많은 사실들을 간과해버린다. 도라는 집안의 여자 가정교사가 아버지를 사랑하여 아버지와 K부인과의 관계를 헐뜯을 때도 K부인의 아이들을 돌보고 여전히 그 부인에게 헌신적인 숭배를 보낸다. 그리고 K씨를 사랑하는 도라는 어느 날 호숫가에서 그의 성적인 구애를 단호히 거절했다. 왜 그랬을까? 프로이트는 이 호숫가 장면을 원초적 상흔으로 보고 그것에 집착했다. 도라의 격렬한 거부 뒤에는 강렬한 성적 흥분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녀의 꿈을 분석해도 그렇고 목이 간질거리는 증상을 보아도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그녀가 아버지와 K부인의 성유희 장면을 그려보는 데서 비롯된 것들이다. 프로이트는 도라의 아버지가 발기불능이어서 성도착이었을 테고 그런 도착적인 장면들을 훔쳐본 도라가 흥분을 억압한 데서 히스테리 증상을 일으킨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환자가 기억해내는 과거와 그녀가 이야기하는 꿈의 내용을 듣고 성적인 유희와 연결시키는 프로이트는 혹시 자신이 K씨가 되어 분석에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거절한 도라를 꾸짖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이 든 그가 분석하는 성행위는 중년 남자인 자신의 것이지 어린 18세 소녀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프로이트는 지금 자신이 전이를 일으키고 있음을 모른다... 등등. 훗날 분노한 페미니스트들은 이 부분을 프로이트의 남근 중심적이고 억압적인 분석의 예로 든다. 프로이트는 파편적이고 미완성이며 중층적인 분석의 끝을 이렇게 내린다. 도라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증오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사랑한 가정교사나 K부인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기에 그 사랑에는 증오가 깃든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의 피해자인 K씨를 사랑하게 된 연유이다. 분석은 여기에서 프로이트가 결코 떠나지 못하고 맴돈 원초적 상흔인 호숫가 장면에 맞추어진다. 왜 도라는 K씨의 구애를 매몰차게 거부했을까. 그 행위를 성적흥분을 감추려는 것으로 본 프로이트는 그런 거절 밑에 숨은 가장 억압된 무의식을 밝힌다. 도라는 아버지와 동일시하여 K부인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갈등 밑에 K씨에 대한 사랑이 억압되어 있고 또 그 밑에는 K부인에 대한 흠모가 억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중층 억압의 맨 위는 딸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고 맨 아래는 K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동성애가 억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시 프로이트는 유혹이론에서 오이디푸스 이론을 막 고안해 냈고 훗날 여성성의 규정에서 강조되는 오이디푸스 전 단계, 즉 남근기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때 이미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되풀이될 주요 이론들이 파편화된 서술 속에 암시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펼쳐놓은 글 속에 그런 것들이 숨어 있는 것을 모른 채 분석을 마감해버린다. 그리고 분석에 덧붙인 후기에서 서로 솔직히 털어놓지 않았고 도라가 전이를 일으킨 것을 몰랐기에 분석이 실패했노라고 덧붙인다. 전이란 분석과정에서 환자가 억압된 감정의 대상을 분석자에게 투사시켜 제대로 속을 털어놓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과거의 감흥이 현재 상황으로 옮아오는 것이다. 도라는 K씨에 대한 감정을 분석자인 자신에게 투사시켜 대화가 지속될 수 없었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훗날 프로이트는 전이는 양쪽에서 일어나고 전이가 결코 분석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분석을 도와준다고 말했지만 이 초기의 글에서는 환자의 전이만을 나무라고 전이가 분석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잠깐 '오이디푸스 전 단계'(Pre-Oedipal Phase)라든가 '남근기'에 대해 언급해보자. 성 이론에서 이 두 용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여성의 히스테리를 분석하면서 최면요법보다 자유연상법을 선호했다. 그는 환자의 기억을 되살려 무엇이 인간의 논리적 사고를 가로막는지 알아내려 했다. 어릴 적에 겪은 아버지 혹은 남성으로부터 겪은 성적인 유혹이 상처로 남아 그후 그것을 연상시키는 상황에 의해 공포를 느끼거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믿은 그는 환자의 기억과 이야기를 듣고 그 속에서 병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환자의 기억은 사실로 증명될 수가 없었고 다분히 환상에 기인하는 것 같아 그는 이 유혹이론에 의심을 품게 된다. 그는 기억에 남은 과거의 유혹보다 좀 더 견고하고 보편성을 지닌 기준이 필요했다. 인간의 의식에는 떠오르지 않지만 억압된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은 아마 가장 원초적인 좌절 혹은 상흔이 될 것이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상흔과 소망은 무엇일까. 바로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 대지로부터 헤어진 것, 연인과의 이별이다. 이 세 가지를 합한 것이 아주 어릴 때 자신을 돌봐주는 어머니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이다. 유아기는 이 세상에서 자신과 어머니만 있고 그 둘 사이에 틈새가 없는 어떤 기간이다. 너와 내가 하나인 시기 그 절대적인 감흥은 그후 틈새가 벌어지고 아버지, 형제, 사회가 들어서도 마음의 고향이 되어 늘 돌아가기를 꿈꾼다. 현실에 의해 억압되지만 사라지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을 무의식이라 부르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바로 인간이 늘 꿈꾸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소망을 충족한 데서 온 비극이 아닌가. 오이디푸스는 그런 결과를 피하려고 애썼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 일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그는 눈을 찌르고 사치로부터 추방된다. 인간의 무의식을 우회하지 않고 그대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오직 죽음뿐이었기에 오이디푸스의 추방은 현실에서 추방되는 것이요, 장님이 되는 것은 바라봄만 있고 보여짐을 모르는 것을 뜻한다.
프로이트는 아마 이런 맥락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만들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결코 단념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부적응이다. 프로이트는 유아가 어머니를 단념하라는 아버지의 법을 모르는 시절을 여러 가지 용어로 언급하는데 남근기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오이디푸스 이전의 단계는 보통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로 세분되기도 하는데 대략 아이가 남녀의 차이를 모르고 어머니와 헤어지기 전이다. 이때 리비도는 하나였고 그것은 남성적이었다. 이때 남성적이란 남자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리비도는 원래 공격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의미다. 유아는 사회 속으로 들어설 때 남녀가 구분된다. 남아는 여아가 남근이 없는 것을 보고 거세의 위협을 느낀다. 이 거세 콤플렉스에 의해 남아는 어머니를 단념하고 또 하나의 아버지가 되며 여아는 어머니를 미워하고 아버지를 흠모하여 남근을 얻으려 한다. 거세 콤플렉스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남아에 비해 여아는 오히려 거세 콤플렉스에 의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진다. 이렇듯 프로이트에게 거세 콤플렉스는 인간이 사회화되는 계기이다. 그리고 생물학적 차이와 사회적 관습이 묘하게 뒤얽혀 성차가 생겨난다. 남근이 있느냐 없느냐는 생물학적 차이이고 그것이 성차를 낳는 순간은 현실로 들어서는 것, 곧 인간이 사회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도라의 분석에서 바로 도라에게 오이디푸스 단계 이전의 남근기가 억압되어 있다는 가설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라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가장 표면적인 것이고 사실은 깊숙이에 같은 여성을 흠모한 동성애가 억압되어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동성애는 성이 사 회화되기 이전의 순수한 성이었다.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빠는 순간이나 어머니가 몸을 씻겨줄 때, 기저귀를 갈아줄 때, 키스해줄 때 느꼈던 성은 평화롭고 아늑한 쾌감으로 오늘날 남녀 사이의 성기 중심의 성이 아니었다. 이성간의 생식기 중심의 성은사회가 필요에 의해, 가정을 꾸미기 위해, 교육을 통해 길들여진 관습일 뿐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암시가 여 기에서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동성애에 바탕을 두고 성차를 와해시키는 최근의 '퀴어 이론'을 프로이트와 연결 지을 수도 있다. 사실 무의식과 성 이론에서 '도라 분석'은 같은 해에 나온 '꿈의 분석'보다 훨씬 더 혁명적 인 글이었다. 그러나 글이 발표되던 때 프로이트도 독자도 그런 혁명성을 알 리 없었다. 아니 일을 벌인 프로이트야말로 뭔가 석연치 않게 느낄 뿐 자신이 벌여놓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도라 분석'은 곧 이어 여성이론가들에 의해 비난과 재해석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분석과정에서 프로이트가 보인 남근중심적이고 억압적인 태도, 어머니를 미워하고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한 여성 히스테리 설명, 그리고 더 나아가서 프로이트는 결국 도라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등의 비난이다. 분석자의 글은 환자의 히스테리 못지 않게 논리가 결여된 파편이다. 그는 도라와의 무의식적 대립에서 도라와 동일시를 일으키고 있다. 거세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프로이트는 진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도라의 진정한 여성성을 간과해버린다. 도라의 병인은 아버지에 대한 흠모나 남근선망이 아니었다. 가장 억압된 병의 원인은 도라가 어머니, 바꾸어 말하면 같은 여성인 K부인을 사랑했던 것에 있다. 어머니에 대한 딸의 사랑을 현실이 수용하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아버지를 사랑하도록 만들었기에 이 강요에 의해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것이다.
사실 프로이트는 위의 분석에서 본 것처럼 그런 사실을 펼쳐놓고는 보지 못한다. 그는 도라의 전이 때문에 분석이 실패했다고 믿어 제목에서도 "파편"이란 단어를 썼다. 그의 이런 맹목은 어디에서 오는가. 도라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깊이 잠재한 인물이었다. 그토록 모호하고 실패한 기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 생애에 걸쳐 이룩한 무의식의 탐색과 오이디푸스 전 단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묻혀 있었고 신기하게도 프로이트 자신이 그걸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역설적으로 그것이 훗날 이론가들 사이에서 논쟁을 일으키고 자신의 분석을 유명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 도라는 아버지와 K씨에 대한 애증 얽힌 복수를 분석자인 자신에게 옮겨 자기를 버리고 3개월만에 떠나버렸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도라의 전이 때문에 실패했고 그것을 몰랐기에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훗날 그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도라의 전이보다 오히려 프로이트 자신의 '역전이' 때문에 분석이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그것을 맨 처음 지적한 사람이 라캉이었다. 원래 1951년에 쓰인 라캉의 글 '전이에 있어서의 간섭' (Intervention on Transference)은 1970년에 이르러서야 영어로 번역이 되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영미 쪽의 이론가나 페미니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라캉의 '역전이'에 관한 글은70년대 중반부터 논쟁의 쟁점이 된다.
프로이트의 역전이
모던 정신분석은 프로이트가 도라의 사춘기 감흥을 간과했고 도라가 어떻게 자아를 형성해 가는지 무시했기에 분석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라캉은 자아의 조정능력을 중시한 모던 정신분석이 프로이트의 본래 의도를 잘못 읽었다고 보고 프로이트의 무의식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시대의 논의인 소쉬르 언어학과 구조주의를 결합시켜 (후기) 구조주의 정신분석을 만들어낸다. 주체는 언어를 구사하여 진실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언어에 의해 구조된다. 그 언어는 주체에 의해 통제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 는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진 자의적인 약속이다. 그래서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해온 까닭에 오염되었다. 아담과 이브만 살았던 낙원에서 는 둘 사이가 완전히 일치했지만 사탄이 끼여들어 낙원에서 추방된 후 기 표와 기의도 인간의 타락처럼 추락한다. 오직 상상계에서만 일치하는 기표와 기의의 틈새는 한없이 넓어져 하나의 기표는 무수한 기의를 지닌 다. 언어가 계속 옆의 것을 짚듯이 주체도 대상을 바로 짚지 못하고 계속 옆의 것을 짚는다. 언어도 주체도 환유적이다. 투명한 이성이나 투명한 언어란 없다. 그러므로 분석자는 환자를 독자적으로 꿰뚫어볼 수 없다. 언어를 매개로 하는 정신분석은 상흔을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찾아내는 게 아니라 담론과정에서 얻어낼 뿐이다. 분석은 두 욕망하는 주체 사이 의 대화와 전이에 의해 이루어지는 과정의 산물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도둑맞은 편지'에서 편지가 어딘가에 깊숙이 숨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도둑의 코앞에 드러나 있듯이 해답은 표층 위에 떠있다. 라캉이 포의 단편에 반한 것은 바로 편지가 깊은 곳에 숨겨진 게 아니라 벽난로 위에 버젓이 있고 그것이 주체를 훑고 지나가는 텅빈 기표라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도라가 자신을 K씨나 도라의 아버지로 생각하여 복수했다고 불평하지만 그러면 프로이트 자신은 담론 밖에서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입장이 될 수 있었는가. 라캉은 '도라분석'에서 전이가 일련의 변증법적 도치의 형식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를 향해 전이를 일으킨 도라의 말은 프로이트 쪽에서 역시 자신의 입장으로 도치되어 역전이를 일으킨다. 도라는 프로이트에게 아버지를 기소한다. 그녀는 일체의 조서를 꾸민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것에 속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 누군가에 대한 비난은 자신을 향한 그와 똑같은 비난을 억압하고 있는 증거다. 도라는 아버지와 동일시하여 K부인에게 매료된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프로이트와 동일시하듯 K씨와 동일시한다. 프로이트가 가장 억압된 부분으로 암시했던 도라의 양성성을 라캉은 표층에서 담론의 만남 속에서 보여준다. 프로이트에게 깊은 무의식은 라캉에게 표층으로 떠올라 언어요, 주체가 된다. 왜 그럴까. 혁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원칙에 충실한 프로이트는 동성애를 용납할 수 없었다. 당대 사회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혁신성은 도라를 앞에 놓고 지극히 보수적이 된다. 그러기에 그는 거절당한 K씨에게 동정을 느끼고 그 자신이 K씨가 되어 도라를 꾸짖는다. 게다가 K씨는 도라의 아버지를 프로이트에게 끌고 온 장본인이다. 고객유치자로 돈을 벌게 해준 사람이다. 이제 프로이트는 계속 K씨의 사랑 문제에서 맴돈다.
'전이'는 분석자의 편견, 욕망, 불충분한 정보, 넘치는 열정 등이 투명한 분석을 가로막는 것으로 분석이 자신의 입장을 완전히 떠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아무리 혁명적인 프로이트였지만 성의 문제에서는 남성의 입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전이란 데리다의 '흔적'이나 '산종'과도 같으며 포스트모던 소설이 즐겨 쓰던 '입장 서술'을 떠올리게 한다. 라캉은 전이를 일으키는 두 주체가 공을 던지듯 자기 입장에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변증법적 도치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도라 분석'에서 도라의 전이를 나무랐던 프로이트도 훗날 전이가 잘 되어야만 분석이 잘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라캉은 이 부분을 좀 더 힘주어 말한다. 전이는 피할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역전이'조차 피할 수 없다고. 프로이트와 라캉의 차이다. 라캉의 역전이에 따르면 '도라분석'에서 계속 맴도는 호숫가 장면은 도라의 원초적 상흔이 아니고 프로이트 자신의 원초적 상흔이 된다. 도라에게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라고 묻는 것은 프로이트 자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그러면 이제 라캉의 역전이 이후 '도라 분석'에 대한 비판의 글들을 읽어보자.
스티븐 마커스(Steven Marcus)는 1974년에 쓴 글 '프로이트와 도라 :스토리, 역사, 사례연구'에서 '도라분석'의 글 자체를 모더니스트 픽션으로 읽는다. 절대 진실에의 접근을 시도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병력일지는 문학이다. 다중적이고 다성적인 그의 저술은 나보코프나 보르헤스의 픽션을 떠올리게 한다. 모호성으로 가득 찬 '히스테리 분석의 파편'에서 주인공은 도라가 아니고 프로이트 자신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모르는 프로이트는 "믿을 수 없는 화자"이다. 마커스는 나보코프와 보르헤스처럼 프로이트의 실재에 대한 탐색이 얼마나 모호하고 자 의적인지 지적한다. 대상에 대한 해석은 자신의 입장을 떠나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맥락에서 도라 분석을 읽는 것이다. 닐 허츠(Neil Hertz)는 프로이트와 도라를 헨리 제임스와 그의 여주인 공 메이지('메이지가 아는 것')에 비교한다. 그리고 실패의 원인은 도라의 전이뿐 아니라 프로이트의 역전이, 즉 자신이 도라와 동일시한 것을 모른 것에 있다고 말한다. 파편적인 서술도 도라의 히스테리와 닮았고 도라의 틈새로 가득 찬 이야기처럼 분석도 틈새로 가득 차 있다. 둘이 똑같이 근원적 상흔에서 맴돈다. 그는 총체성을 구현하려는 남성적 욕망에도 불구하고 틈새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신의 여성성에 저항하는 프로이트의 남성적 항의가 아니겠는가.
허츠는 라캉의 역전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의 입장에서 프로이트의 역전이를 해석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도라가 아버지와 동일시하여 K부인을 흠모했다고 동성애를 암시했다. 도라의 내부에 가장 깊이 억압 된 남성성을 짚어서 인간의 양성성을 암시한 것이다. 라캉은 프로이트 역시 전이를 일으켜 K씨의 입장이 되어 도라의 상흔에서 맴돌았다고 말했다. 이제 허츠는 라캉이 지적한 것처럼 프로이트가 역전이를 일으킴으로써 바로 도라와 닮은꼴이 되는 측면을 짚어낸다. 남성의 내부에 잠재 한 여성성을 지적한 것이다. 남성중심적 서술이 논리적이고 틈새 없는 닫힘이라면 여성의 글은 모호하고 다층적이고 틈새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도라 분석'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속에 억압된 여성성이 도라에 의해 표출된 글이다. '도라 분석' 에서 뭐니뭐니해도 프로이트가 가장 질책을 받는 부분은 그가 역전이로 인해 도라의 동성애, 즉 남근기를 간과했다는 데 있다. 프로이트는 1931년에 이르러서야 어머니와 딸의 강렬한 사랑인 오이디푸스 전 단계를 인정했다. 그러나 1900년에 이미 그것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역전이로 인해 그 부분을 놓친 것이다. 자신의 여성성 못지 않게 여성이 무의식 속에 간직한 동성애적 남성성을 그가 간과했음을 지적하는 글들은 여성의 히스테리를 이렇게 해석한다. 히스테리란 여성이 단순 히 사회에 적응치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병이라기보다 남성 우월주의가 여성의 억압된 욕망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에 저항하는 병이다.
토릴 모이(Toril Moi)는 라캉의 역전이에 관한 글을 이념적인 것으로 확장한다. 프로이트가 실패한 것은 도라의 무의식 속에 깊숙이 잠재한 K부인에 대한 사랑을 간과한 것인데 이것은 단순한 역전이가 아니라 이념적인 것이다. 19세기 말 억압적인 가부장제 이념에 깊이 침잠된 프로이트는 여성에게 능동적이고 독립적인 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성애 부분을 파헤치지 않는다. 이 점은 라캉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는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도라는 치료를 거부한다. 그러나 패배의 선언이었던 저항은 프로이트에 의해 기록되어 끝없는 해석을 낳는다. 포라의 승리가 아닌가. 정신분석을 담론 사이의 권력 싸움으로 연장시키는 토릴 모이의 글에서도 핵심은 역시 '오이디푸스 전 단계'를 간과한 프로이트의 이념적 편견이었다. 그러면 여성들이 그렇게도 중시하는 오이디푸스 전 단계는 무엇일까. 라캉은 바로 이것을 강조함으로써 선배를 다시 일으키고 동시에 선배를 이겨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