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성과 권력 - 권택영
제1부 무의식과 성이론
1. 무의식과 성
보수성 : 거세 콤플렉스, 남근선망 그리고 초자아
1925년에 쓰인 '성의 해부학적 구분이 심리에 미치는 영향'(Some Psychical Consequences of the Anatomical Distinction between the Sexes)은 눈에 보이는 신체적 특징이 어떻게 인간의 심리에 영향을 주어 사회적 성차를 낳는가 설명한 글이다. 리비도가 적극성을 띠고 하나였던 남근기, 혹은 유아기 성에서 남녀의 차이는 없었다. 남성적 성향과 여성적 성향, 적극성과 수동성, 혹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라는 양성을 다 지닌 인간은 오직 애정으로 감싸주는 어머니의 손길을 온몸으로 느끼는 완벽한 자기성애의 시절을 누린다. 남근기의 남아는 아버지의 연인인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적 성향을 지닌다. 그리고 손가락 빨기, 수음, 침대 적시는 행위 등으로 차츰 성에 눈 떠간다. 이때 부모의 성행위를 목격한 아이는 훗날 그것이 상흔으로 남아 정상적인 성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이 '원초적 환상' (primal phantasies)은 '늑대 인간의 분석'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그런데 이때 남아는 여아의 성기가 자신과 다른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거세된 여아를 보며 공포와 승리감을 느낀다. 그리고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증오하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벗어나 자신이 또 하나의 아버지가 될 것을 꿈꾼다. 초자아를 길러 사회적 자아가 되려는 것이다. 그러나 남아는 결코 어머니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다른 여성으로 대치될 뿐이다. 억압된 원초적 욕망은 평생 다른 대체물로 나타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남아는 거세 콤플렉스에 의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며 추구하는 대상이 어머니인 것에서 일관성을 유지한다.
여아는 이와 조금 다르다. 자신이 거세되었음을 알게 된 여아는 그때까지 강렬히 사랑했던 어머니를 원망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남근을 가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아버지의 연인이 되어 그의 아기를 낳는 길이다. 남아와 반대로 여아는 거세 콤플렉스에 의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상의 추구에서 여아는 일관성을 갖지 못 하고 어머니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옮아가야 한다. 남아가 초자아에 의해 사회 속으로 편입되는 것에 비해 여아는 이보다 복잡한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우선 어머니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느낀 다. 유아기의 강렬한 애정과 거세되었음을 안 후의 강렬한 증오가 교차된다. 훗날 아버지의 이미지를 닮은 남편을 얻었을 때 어머니에 대해 억압했던 양가적인 감흥을 그대로 전이시키기도 한다. 또한 아버지에 의존 적이 되고 수치심이 강하며 열등의식에 차 있다. 여아는 남아보다 정의감이 약하고 수동적이고 모든 일을 감정적으로 판단하고 세상일에 소극적이다. 만약 이때 여아가 수치심을 수용 못하면 남성적인 여성이 되거나(레스비언) 모든 성행위를 경멸하고 거부하는 불감증에 걸린다. 프로이트는 이런 여성의 경향을 '남근선망' 이라는 단어로 요약하고 그 결과 일생 되풀이되는 현상으로 몇 가지 예를 든다. 여아는 질투심이 강하다. 구타당하는 환상에 쉽게 빠진다. 어머니와 멀어지고 남성과 달리 수음을 억제한다. 초자아를 형성하지 못하고 남성에 의존하는 여성성을 그려낸 '성의 해부학적 구분이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서 프로이트는 상당한 유보를 붙이기는 했다. '꿈의 분석'이나 '도라 분석'과 달리 검증해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서두와 양성성 때문에 자신의 이론은 확고한 증명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결말이다. "대부분의 남성들 역시 남성적인 이상에서 멀고 모든 인간은 양성성 때문에 적극성과 수동성을 다 지닌다." 그러나 '남근선망'과 '거세 콤플렉스'는 당대 여성운동가들을 분노케 했다. 이런 내용은 십년 후에 발표된 '여성의 성'(Female Sexuality, 1931)이나 '여성성'(femininity, 1932) 에서 되풀이되고 견고해진다.
'여성의 성'에서 프로이트는 여아가 남아보다 더 양성적이라고 말한다. 거세 콤플렉스에 의해 남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은 여전히 어머니이다. 다만 아버지처럼 초자아를 길러 어머니와 닮은 연인을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 비록 원초적 대상은 포기했지만 남아에게 어머니는 여전히 억압된 무의식이다. 이처럼 남아는 일관된 성격을 유지하지만 여아는 다르다. 자신이 거세된 것에 수치심과 분노를 느낀 여아는 그토록 강렬했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아버지를 택한다. 대상을 바꾸어야 하기에 그녀의 성격은 일관성을 잃고 분열을 초래하기 쉽다. 또 그녀의 사랑과 집착에는 강렬한 증오가 숨겨진다. 이 양가적 성향에 의해 여성은 남성보다 더 양성적이고 갈등이 심하며 사회에서 중요한 일을 수행하기 어렵다. 여아의 오이디푸스 전 단계는 남아보다 길다. 그런데 이 양성성은 여성이 적극적인 남근기에서 소극적인 여성성으로 변모되는 과정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레스비언처럼 한층 더 강렬히 남성성을 밀고 나가는 경우, 성을 혐오하여 불감증이 되는 경우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는 경우이다. 물론 세 번째 단계가 사회에 적응하는 정상인이다.
위와 같은 프로이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무의식과 유아기 성을 강조하던 혁명기의 프로이트가 참으로 많이 후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당대 가부장제 현실을 설명하다보니 오이디푸스 상황을 강조하는 꼴이 되었고 수동적인 여성성을 설명하다보니 혁명적인 가설은 흔적만 남는다. 다른 모든 면에서는 혁신적인 프로이트도 여성에게만은 보수적인가. '여성의 성'에서 언급되는 양성성은 '성이론에 대한 세 글'에서 언급된 양성성과는 다르다. '유아기 성'에서 양성성은 남아나 여아가 똑같이 적극성과 수동성, 남성적 성향과 여성적 성향을 지닌다. 이때의 양성성은여성이론가들에게 인간이 원래 하나의 리비도로 이루어졌고 성차는 단순히 가부장제 사회에 의한 것이라는 적극적 해석을 낳는다. 그러나 후기의 프로이트는 양성성을 남아보다 여아가 지닌 열등한 속성으로 보고 그 의미도 초자아를 발전시키지 못한 양가적 감흥으로 해석한다. 여아는 사랑의 대상을 바꾸는 데서 적극성에서 수동성으로 옮아가며 그 결과 성격의 일관성을 잃는다. 한마디로 '여성성'이란 남근이 없다는 열등의식에서 오는 수동성, 의지의 박약, 보상심리에서 오는 허영심 등으로 풀이된다. 그러기에 여성은 역사상으로도 인류의 문명에 공헌한 발견이나 발명 같은 적극적인 일을 거의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성은 강하다 라든가 남성도 마조히즘과 같은 수동성을 지니기에 남녀를 가름짓는 것은 힘든 일이다. 또 여성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다만 여성이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되는지 밝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프로이트의 겸손한 유보가 붙어 있지만 그는 분명히 이 글에서 초기와 달리 현상을 설명하는 데서 멈춘다. 그는 해부학에 근거를 두고 남성의 남근에 가치의 기준을 둔다. 그것이 없는 것을 결핍으로 보는 거세콤플렉스나 남근선망은 그 이후 여성이론가들에게 두고두고 원망의 근거가 된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한 우월주의에 빠져 있다는 해체론자들의 비난, 진정한 거세는 남근의 유무가 아니라 남녀 모두 성본능을 충족할 수 없다는 불안이라는 어니스트 존스나 카렌 호나이의 비판 등 프로이트의 현실에 대한 보수적인 해석은 여성들의 불만을 낳는다.
유아기의 성에 대한 혁신적인 글을 쓸 당시 프로이트는 '문명화된 성도덕과 현대 신경증'(Civilized Sexual Morality and Modern Nervous Illness, 1906-08)에서 문명이란 우리가 믿는 대로 과연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켜 왔는가라고 반문한다. 20세기 초반부 정신적 황무지를 절감하며 그는 문명과 성의 관계를 조명한다. 그토록 사회가 규제하지만 암암리에 존재하는 성도착들, 매춘행위 , 강간... 인간이 더 평등해지고물자가 더 풍부해지는데 왜 불안은 증가하고 신경증 환자는 늘어나는가. 프로이트는 이 글에서 인간의 자연스런 성이 문명의 요구에 의해 규제되는 측면들을 고찰하고 다분히 원시적 사회나 유아기에 향수 어린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후기에 쓰인 '여성성'에서는 초자아가 문명을 창조하는 것에 찬사를 보내고 여성이 역사나 문명의 창조에 공헌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성 본능이 억제되고 승화된 것이 문명이라는 관점에는 변함이 없으나 문명을 보는 시각이 보수적으로 바뀐다. 초기에 강조하던 쾌감원칙이 후기에 현실원칙 쪽으로 기운 것은 아마 당시의 지적 분위기 때문이었으리라. 초기에는 인간은 동물로부터 진화했다는 다윈의 사상과인간의 심리를 과학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후기에는 추상적 논리보다 구체적 현실에 적응하는 실존주의와 개인의 감흥을 보편질서 속에 편입시키는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현실원칙과 초자아를 강조했을 것이다.
정신분석이 한 시대의 문화적 흐름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은 프로이트 이후사상가들이 그의 이론을 어떻게 응용하는가에서 잘 드러난다. 프랑스의 자크 라캉은 50년대 구조주의 혹은 후기 구조주의 입장에서 프로이트를 다시 보았다. 해부학적 관점으로 본 성과 거세 콤플렉스를 디딤돌로 삼아 초자아를 강조함으로써 모더니즘의 자율성과 같은 맥락에서 프로이트를 해석한 모던 정신분석은 자아의 조정능력을 중시했다. 저자의 심리를 중시하던 초기의 비평에서 자아가 대상을 어떻게 수용하는가를 중시한 모던 정신분석에 이르면 프로이트의 후기 글들이 사회성과 현실을 더 인정했듯이 그를 해석하는 사람들도 보수적인 경향을 띤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으로 되돌아가 그의 혁명적인 부분을 재조명한다. 그는 해부학적인 결정론 대신 구조주의 언어학을 끌어들여 남녀의 성차를 지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라는 그의 명제는 무의식과 소쉬르 언어학의 핵심인 '차이'를 결합시켜 욕망하는 주체로 가는 팻말이었다. 욕망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인간은 결코 절대 논리(남근)를 가질 수 없는 차이의 존재라는 것이다. 거세는 이미 상징계 이전에 상상계가 있음으로써 시작된다. 언어의 세계 이전에 억압된 거울단계가 있었고 그것은 늘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결핍'은 인간 모두의 비극이지 결코 여성만의 것이 아니다. 거세 콤플렉스는 남근의 유무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거울단계로부터 언어의 세계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라캉의 이런 혁명적인 프로이트 재해석은 모던 정신분석에 저항한 것으로 20세기 후반부의 지적 흐름인 '해체' 혹은 후기 구조주의 사상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성이론은 이런 혁명성에 주목하게 되고, 영어권에서는 줄리엣 미첼이 프로이트를 다시 읽는다. 영국의 마르크시스트였던 그녀는 프랑스에서 일고 있는 해체론의 정치성을 간파해내고 무의식이 성차를 전복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라캉의 상상계에 해당되는 무의식은 상징계인 가부장제를 전복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1974년에 출판된 그녀의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은 케이트 밀렛의 '성의 정치 학'에서 절정에 이른 프로이트 비난이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물론 해체론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 정신분석은 다양하게 응용된다. 루스 이리가레이, 엘렌 식수스, 크리스테바등은 프로이트와 라캉을 딛고 비판과 재해석을 하면서 여성이론을 모색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가설에 불과하지만 성의 문제에서 많은 현상들을 설명해내고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여지를 남긴다. 남녀의 성이나 심리의 문제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재해석은 앞으로도 새로운 사상이 출현할 때마다 다르게 되풀이될 것이다. 마치 그 자신이 발견해낸 '반복충동'처럼 사색이 종말에 이르는 순간까지 다르게 되풀이되며 비난과 이해를 반복할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가설은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내며 삶의 이곳저곳을 더듬고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