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경험했던 유희를 성인은 공상 속에서 되풀이하지만 창조적인 작가는 이 꿈을 사회가 용납하는 내용으로 설득력있게 바꾸어낸다. 그렇다면 예술은 에로스를 현실에 맞게 변용시켜 관객의 에로스를 승화시키는 고안이다. 프로이트가 살았던 당시 그의 이론은 작품을 저자의무의식이 순조롭게 해방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는 저자가 어릴 적에 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압축하고(은유) 슬쩍 다르게 해서 (환유) 표현한 것이라고 읽는다. 마치 프로이트가 꿈을 분석하듯이 작품을 읽는다. 그러다가 모더니즘시대에 이르자 자의식적이고 자율성을 강조하게 되어 자아가 어떻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초자아를 내부에 의식하며 이드를 조정해 가는가에 관심을 둔다. 무의식이 초자아에 밀려 이드로 압축된 느낌이다. 그러다가 50년대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르러 라캉은 무의식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며 프로이트를 재해석한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꿈 해석이 소쉬르 언어학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은유와 환유였던 것에 관심을 두고,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와 관련시켜 종래는 후기 구조주의에 이른다. 모던 심리학이 축소시킨 나르시시즘이 얼마나 압도적인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선배가 인정하면서도 망설였던 부분을 과감히 끌어낸다. 무의식을 표층 위로 끌어내 정신분석을 근원을 캐어내는 것이라기보다 대화 속에서 서로의 욕망을 길들이는 과정으로 전환시킨다. 선배가 언급한 '전이'현상을 확대한다. 거울단계를 내세운 그의 이론은 선배의 나르시시즘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선배에게서 새 시대를 암시하는 새로운 사유를 끌어낸다. 여성들이 그토록 비난하던 남근선망이니 거세 콤플렉스니 하는 용어들을 없앰으로써 성차를 지우는 효과를 얻어낸다. 남녀 모두 언어의 세계(상징계)에서 풀려날 수 없기에 남근은 여성만이 갖지 못한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포착할 수 없는 실재요, 억압된 초월 기표, 즉 어머니가 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쾌감원칙과 현실원칙을 상상계와 상징계로 바꾸어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사회화를 피할 수 없는 언어의 세계로 대치한 그는 데리다보다도 앞서 새로운 사유체계를 암시한 것이다. 그러나 해체는 또다른 도전을 받는다. 축소된 나르시시즘을 복원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러다 보니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성차나 인종간의 억압을 개선할 길이 모호해 보인 것이다. 억압된 나르시시즘을 좀더 복원하라. 이제 억압된 계층들의 나르시시즘이 자신들의 것이 그 동안 지배계급의 나르시시즘에 의해 지워져왔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남성 혹은 제국에 의해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 혹은 식민지인들은 지배계급의 나르시시즘, 혹은 상상계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식민주의는 비록 제도적으로는 해결되었으나 무의식 속에 잠재한 문화적 식민주의는 지속되며 그것은 의식, 혹은 이성만으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는 욕망의 문제이기에 탈 현대의 해결방법은 그리 단순한 것이 될 수 없었다.
피지배계급의 나르시시즘은 어떤 식으로 저항할 것인가? 우선 역사적으로 피지배 계급이었던 사람들이 말을 한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했던 짓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의 상상계가 또다른 계급의 상상계를 지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그들은 조심스럽다. 해체 이후에 세워지는 정치성은 본질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기에 전략이 되고 타협이 될 수밖에 없다. 지배계급의 상상계가 무엇을 착각했는가. 그들의 나르시시즘이 간과한 것을 짚어주자. 소위 탈 식민주의 문화비평이라는 범주로 등장하는 이론들은 주로 과거 영국의 식민지인 이었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 가운데에서도 실천비평에 강한 스피박(Gayatri Spivak)은 인도 출신의 여성으로 프로이트를 비롯한 서구의 선배들이 인간의 고통을 덜어보려고 혁신적으로 사유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무의식중에 지배계급의 사유가 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프로이트가 현실이 억압하고 있는 무의식을 드러내 인간의 독선과(나치즘과 같은) 정치적 폭력을 경고했지만 그 역 시 여성이나 당시의 빈민층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즘 신화 속에 엄연히 등장하는 에코를 지워버린 서구의 상징 질서에서 프로이트 역시 벗어나지 못한다. 스피박은 나르시시즘을 지배층의 상상계로 보고 그것에 억압되어온 에코를 흔적, 혹은 의미의 산종 (dissemination)으로 복원해낸다. 자신의 음성을 갖지 못하고 오직 타인 의 말을 끝부분만 반복하는 에코의 미덕을 대상 속에서도 자기 얼굴만을 보는 나르시시즘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스피박은 서구의 텍스트를 분석해온 남성 비평가들이 어떻게 제국의 에로스를 간과했는가 드러낼 뿐 아니라 백인 여성 비평가들조차 남성에 억압되어온 여성은 고려했지 만 백인 여성에게 억압되어온 제3세계 여성은 간과했음을 들춘다. 제3 세계 여성이라는 자신의 에로스로 지배계급의 에로스를 해체하고 그들 이 제시해온 남근선망 대신에 자궁선망과 같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대안은 앞의 것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공존하는 타협이다. 지금까지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어온 것들은 다르지만 결코 못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바(Homi Bhabha)의 '문화적 차이'가 등장한다.
영국의 식민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식민지인의 나르시시즘으로 증명하는 호미 바바는 프로이트의 전이와 에로스에서 문화이론과 저항이론을 만든다. 제국은 원주민을 교화시켜 문명인을 만든다는 명목 아래 원주민의 땅에 들어선다. 그러나 그들의 이성 속에는 타자가 있었다. 물자와 노동력을 얻어내려는 이기적 욕망이 숨어 있었다. 원주민은 어떤가. 그들 역시 제국의 교화를 따르는 척하지만 자신들의 문화와 충돌하는 부분은 결코 변화되지 않는다. 이 녹지 않는 알맹이가 바로 원주민이 지닌 나르시스적 주체다. 교화는 둘 사이의 나르시시즘이 충돌하면서 이성에서 멀어지고 혼동만 깊어진다. 그리고 얼룩덜룩한 닮음은 저항이 되어 완벽한 닮음이라는 환상을 무너뜨린다. 바바는 원주민의 녹지 않는 알맹이를 '사악한 눈'이라고 표현한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이기적인 자아보존 본능으로 보았다면 바바는 그 자아보존 본능이 제국의 문화에 저항하여 자국의 문화를 보존하려는 본능으로 본다. 이 본능이 제국에 의해 억압되어도 결코 제거되지 않고 다른 형태로 되돌아오기에 식민주의는 거대한 혼동을 낳고 실패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둘 사이의 전이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한 프로이트에게서 바바는 문화적 차이 혹은 문화적 혼혈성이라는 저항이론을 만든다. 문화는 늘 타협이다. 그것은 두 문화가 지닌 자아보존 본능에 의해 시간에 따라 덧칠해지는 혼혈적인 것일 뿐,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순수하게 동화되는 일은 없다. 국경이 엷어지는 다문화시대에 무조건 외국문화를 수용하는 일도, 그렇다고 자국의 문화만 순수하게 보존하는 일도 환상임을 바바는 보여준다. 문화는 녹지 않는 알맹이를 갖고 있으면서도 두 개가 충돌하는 현실원칙에 의해 서로의 욕망을 나누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우리 삶과 세상을 어떻게 설명해나가는지 살펴보았다. 의식이 감지하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의식은 삶이 지닌 고난과 궁경을 일깨워 주면서 낙원이 아닌 세상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일깨워준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해석됨으로써 새로운 사상의 바탕이 되곤 한다. 저자의 무의식 자아의 조정능력 , 읽기는 반복일 뿐이라는 해체비평 , 그리고 최근의 문화비평에 이르기까지 나르시시즘은 현실에서 다르게 귀환한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후배들은 바로 그가 발견한 반복충동을 실천하고 있는 셈은 아닌가. 억압된 것은 늘 다르게 되돌아온다는 가설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