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 - 에리히 프롬 著 / 정성호 譯
제4장 사랑의 실천 (1/2)
이제까지 우리는 사랑의 기술에 대한 이론적 측면들을 다루어 왔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욱 어려운 문제, 즉 실천의 문제에 직면하 게되었다. 어떤 기술의 실천에 대해서 그것을 직접 실천하는 것 말고도더 배울 것이 있을까? 이 문제의 어려움은,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많은 독자들이 '기술을 어떻게 스스로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처방이 주어지길 기대하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매우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증대된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이 마지막 장을 읽으려는 사람들이 크 게실망하지 않을까 두렵다.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오직 혼자서 그리고 자기의 힘으 로겪게 되는 개인적인 경험이다. 사실상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거나 성인으로서 최소한 흔적만 남기는 방식으로라도 이러한 경험을 하지못한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의 실천에 관한 논의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의 기술에 대한 전제들을 살펴보고 사랑에 대한 접근을 있는그대로 검토하며 이러한 전제와 접근의 실천에 관해 논의 하는 것이다. 그 목표로 이르는 단계는 오직 혼자의 힘으로만 실천 할 수 있고 논의는 결정적인 단계가 취해지기 전에 끝난다. 그렇지만 나는 접근에 관한 검토는 최소한 '처방'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 들에게는 기술에 숙달하게되는 데 유용하다고 믿고 있다.
우리가 목공이나 의학의 기술, 혹은 사랑의 기술 등 무엇을 다루는가에는 관계없이 어떠한 기술도 몇 가지 일반적인 필요 조건들을 지니고 있다. 우선 기술의 실천에는 '훈련'이 요구된다. 만일 내가 그 기술을 훈련하지 않으면 나는 어떤 것에도 익숙하지 못하게 된다. 만일 내가 마음에 들기 때문에 하는 일이 좋은 혹은 즐거운 취미가 될지언정, 나는 결코 그 기술에 숙달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특정 기술의 실천에 있어서의 훈련뿐만 아니라(예를 들 면, 매일 몇 시간씩연습하는 것), 전 생애에 걸친 훈련이라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훈련보다 더 배우기 쉬운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현대인은 엄격하게 틀에 박힌 직업에서 고도로 훈련된 방식을 통해 하루 8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현대인은 작업이라는 측면을 벗어나서 자기 훈련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가 일하지 않을 때는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하고 빈둥거리며 지내고 싶어한다. 즉 좋게 표현하자면 긴장을 완화하고 싶어한다. 게으름에 대한 이런 소망은 대개는 틀에 박힌 생활에 대한 반발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목적을 위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방식으로 하루에 8시간씩 자기의 정력을 소비하기 때문에 그는 반항하며 그러한 반항은 유아적인 자기 방종의 형태를 취한다. 게다가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그는 모든 훈련을 불신하게 되며, 스스로 부과한 합리적인 훈련뿐 아니라 권위에 의해 부과된 불합리한 훈련에 대해서도 불신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린 훈련을 하지않게 되면, 인생은 파괴되고 혼란을 일으키게 되며 중심을 잃게 된다. 그러한 정신 집중이 기술 습득의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사실은 새삼스레 증명할 필요가 없다. 어떤 기술을 배우고자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안다. 그렇지만 자기 훈련 이상으로 정신집중은 우리 문화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반대로 우리 문화는 어떤다른 지역의 문화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분산되고 산란한 생활양식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당신은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당신은 책을 읽으면서 라디오를 듣고 이야기하며 담배 피우고 먹고 마신다. 당신은 그림, 술, 지식 등 모든 것을 삼켜 버리려 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소비자이다. 이렇듯 정신 집중을 못 한다는 것은 혼자 있지 못한다는 데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말을 하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또는 책을 읽거나 마시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신경질적이며 조바심을 내게 되고 입이나 손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담배 피우는 것은 정신 집중을 하지못하는 증상의 하나이다. 담배를 피우는 데는 손과 입, 눈과 코가필요하다).
셋째 요소는 '인내'다. 다시 말하지만 기술을 습득하려 노력해 본 사람은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면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만일 어떤사람이 성급히 결과를 추구한다면 그는 결코 기술을 익히지 못한다. 그렇지만 현대인에게 있어서 인내는 훈련이나 정신 집중만큼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모든 산업 체계는 정확히 그 반대의 자질 즉 신속성을 조장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기계들은 신속성에 맞게 설계되어있다. 자동차와 비행기는 우리를 목적지까지 신속하게 데려다 주며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같은 양을 같은 시간의 절반 안에 생산해 낼 수있는 기계는 더 낡고 더 느린 기계보다 두배나 좋다. 물론 이에는 중요한 경제적 이유가 있으나 다른 여러 가지 측면처럼 인간의 가치는 경제적인 가치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 기계에 이익이 되는 것은 인간에게도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논리가 전개된다. 현대인은 그가 일을 빨리 하지 못하면 무엇인가 를, 즉 시간을 잃는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그가 얻은 시간을 그냥 허송하는것 이외에는 그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어떤 기술을 배우는 조건은 그 기술의 습득에 대한 '최고의 관심'이다. 만일 그 기술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견습공은 그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기껏해야 애호가 의수준에 머무르게 될 것이며, 결코 명장이 되진 못할 것이다. 이 조건은다른 어떤 기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기술에 있어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명장과 애호가 사이의 비중은 사랑의 기술에 있어서 다른기술들과 달리 애호가 쪽으로 훨씬 더 기울어지는 것 같 다.
기술을 배우는 일반적인 조건들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언급해야겠다. 사실 사람들은 기술을 직접적이 아닌 간접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즉 기술 그 자체를 배우기 전에 다른 것들, 때로는 외견상으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들까지 배워야만 한다. 목공 기술을 배우는 사람은 나무를 어떻게 깎는가를 배움으로써 비로소 기술을 익히기시작한다. 피아노 연주 기술을 배우는 사람은 음계 연습부터 시작한다. 궁술의 선(禪)적인 기술을 배우는 사람은 우선 호흡 연습부터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떠한 기술에서든 대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의 전생애를 기술에 바쳐야 하며 최소한 기술과 관계를 맺어야한다. 자기는기술의 실천에 있어서 도구가 되며 기술이 필요로 하는 특별한 기능에따라 자신을 적합하게 유지해야 한다. 사랑의 기술에 있어서 이는 사랑의 기술에 익숙해지고자 열망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생에의 모든 면을 통한 훈련과 정신 집중과 인내의 '실천'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훈련을 하는가? 우리의 조상들보다 이 문제에 대 한해답을 더 잘 제시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권고는 아침 일찍일어나서 불필요한 사치에 탐닉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라는 것 이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훈련은 명백한 결점을 지니고 있다. 이런 훈련은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이며, 근면과 절약의 덕에 집중되어 있고 여러 가지면에서 인생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훈련에 대한 반발로써 '어떠한' 훈련이든 의심하며 훈련받지 않고, 생활의 여가에서는 8시간을 근무하는 동안 자기에게 부과된 일상화된 생활방식에 반대되는 것에 탐닉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하려 는 경향이 점차증대되어 왔다.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는 것, 낮 동 안의 일정한 양의시간을 명상이나 독서, 음악 감상 등에 사용하는 것, 최저의 한도를 넘지 않고 탐정 소설이나 영화 등 도피주의적 행동에 몰입하지 않는것, 과식하거나 과음하지 않는 것 등은 분명 히 초보적인 규칙들이다. 그렇지만 훈련은 외부에서부터 자기에게 부과된 규칙처럼 실행되어서는 안되며, 자신의 의지의 표현이 되어야 하고, 즐거운 것으로 느껴져야하며, 훈련을 그만두게 되면 곧 그리워지도록 자신을 서서히숙련시킴이 기본적인 것이다. 훈련을 한다는 것이 뵌지 모르게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고 또 고통스러워야만 이익이 된다는 것은훈련에 대한 서구식 개념의 불행한 측면 가운데 하나이다.
동양에서는오래 전부터 인간에게, 즉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도움이 되는 것은, 초기 단계에 몇 가지 제한들을 극복해야 하지만, 즐거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정신 집중은 우리 문화에서는 더욱 실천하기가 어려우며 우리 문화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정신 집중을 할 수 있는 능력에 방해가 되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정신 집중을 익히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책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혹은 담배를 피운다거나 술을마신다거나 하는 일 없이 혼자 있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정말로 정신집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귀중한 조건이 된다. 만일 내가 혼자 내 발로 설 수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집착 한다면, 그는 생명의구원자는 되겠지만,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 된다. 누구든 홀로 있으려 노력하는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초조하고 조바심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고 심지어 상당한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는 정신 집중이 아무런 가치도 없고 어리석은 것이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등의 이유로 그 훈련을계속하고 싶지 않다는 자기 생각을 합리화할 것이다. 그는 또한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온갖 생각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관찰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날 오후의 계획에 대해, 또는 그가 하고 있는 일의 몇가지 난점에 대해, 혹은 저녁에 어디를 갈 것인지 등의,자기 마음속을 비운다기보다는 오히려 꽉 채우는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몇 가지 매우 간단한 연습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편안한 자세로(너무 처지거나 딱딱하지 않은 자제로) 앉아서 눈을 감는다든가 또는 자기 앞에 있는 하얀 장막을 쳐다본다든가 하여 모든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고 자기 호흡을 따라가는 것, 그러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도 말고 강요하지도 않고 단지 호흡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호흡을 느낄 수 있게 되고 더나아가 내 힘의 중심으로서 내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자기를 인식하려는 것 등은 도움이될 것이다. 최소한 매일 아침과 잠자리에 들기 전의 20분 정도씩(길어도좋다)은 정신 집중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런 연습과 더불어 자기가 하고 있는 일, 즉 라디오를 듣고 책을 읽는 것,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경치를 보는 것 등에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바로 이 순간에 하고 있는 활동이 중요한 문제가 되어야 하고 그것에 전념해야 한다. 만일 집중을 하고 있다면 무엇을 하는가는 별문제가 되지 못한다. 중요하지 않은 것뿐 아니 라 중요한 것도 새로운차원의 현실성을 띠게 된다. 왜냐하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기때문이다. 정신 집중을 배우는 데는 가능한한 사소한 대화, 즉 진실되지 못한 대화를 피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있는 나무의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혹은 지금 막 먹어본 빵의 맛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혹은<그들 직업의 공통적인 경험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면, 그런 대화는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경험하고, 추상적으로 다루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적절한 대화가 될것이다. 반면에 정치나 종교 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것이보잘것없는 대화가 될 수도 있 다. 이것은 두 사람이 진부한 표현으로말하고 있을 때, 그들의 마음이 지금 말하는 것에 있지 않을 때 일어난다. 여기서 쓸데없는 대화를 피하듯 나쁜 친구를 피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나쁜 친구라는 것은 단지 악하고 파괴적인 사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생활 과정이 문란하고 음울한 친구들은 피해야 한다. 또한 잠비교의 마술사 같은 친구들, 육체는 살아있으나 영혼이 죽은 친구들, 사고나 대화가 보잘것없는 친구들, 대화하는 대신 조잘거리는 친구들, 사고보다는 진부한 주장을되풀이하는 친구들도 피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친구가 되지않는 것이 항상 가능한 것도 아니고 또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다. 만일 기대한 대로, 즉 상투적으로 보잘것없는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들은 예기치 못했던 충격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행동을 변화시킬 것이다. 타인과 관련하여 정신 집중을 한다는 것은 우선 들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말로 듣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심지어 충고를 하기도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대답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대화는 그들을 지루하게 만든다. 그들은 자기가 정신집중을하고 들으면 더욱 지루해질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 혀 있다. 어떠한 활동이고 집중된 양식으로 행해진다면 더욱 각성 시키게 되지만(비록후에는 자연스럽고 유익한 피로감이 생기지 만), 집중되지 않은 모든 활동은 졸리게 만들고 동시에 그날 밤 잠자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정신 집중을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에, 즉 여기에 지금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동안 다음에 무슨 일을 할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 집중은 우선 서로사랑하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은 관습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여러 가지 방식에서 달아나지 않고 서로 접근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정신 집중 훈련은 처음에는 어려 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전혀 달성할 수 없는 목표처럼 보일 것이 다. 이는 곧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것을 모르고 억지로 그 일을 한다면 정신 집중은 물론 사랑의 기술에서도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인내가 무엇 인가를 알기위해서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를 보면 된다. 아기는 넘어지고 다시 넘어지고 또다시 넘어지나,넘어지지 않을 때까지 계속하며 점차 나아진다. 만일 어른이 자기에게 중요한 일을 추구하면서 그런 아기의 인내와 정신 집중을 갖고 있다면 무슨 일을 성취 하지 못하겠는가? 자신에 대해 민감해지지 않고는 정신 집중을 배울 수 없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루 종일 자기에 대해 생각하고 자기를 분석 해야한다는 말인가? 만일 우리가 어떤 기계에 대해 민감하다고 말 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 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차에 대해 민감하다. 아무리 작은 귀에 익지않은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모터의 가속 장치의 작은 변화도 곧 알아차린다. 마찬가지로 운전사는 도로 표면상의 변화에도 민감하며, 자기 앞뒤에 있는 차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민감하다. 그렇지만 이 모든요소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의 마음은 긴장을 푼 상태에 있으며 그가 집중하고 있는 상황 즉자동차를 안전하게 운전해야 한다는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대해 열려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민감해진다는 상황에 대해 살펴본다면, 우리는 자기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민감함과 반응성에서 가장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어머니는 특정 신체적 변화, 요구, 불안 등이 겉으로 나타나기도 전에 알아차린다. 어머니는 아무리 큰소리가 들려 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지만 아기가 울 때는 금방 깨어난다. 이는 곧 어머니가 자식의 삶의 표현에 민감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는 불안해하거나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서 오는 어떠한 중요한 의사라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는 빈틈 없는 균형 상태에 있는것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는 자신에 대해 민감해 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루함이라든가 좌절감 등을 의식하며, 그에 기분을 내맡기고 항상 있을 수 있는 우울한 생각에 사로 잡히는 대신 "무슨일이지?", "내가 왜 이렇게 우울하지?"라고 자문할 수 있다. 조바심이 난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혹은 백일몽을 꾸거나 기타 도피적인 행동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경우에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인식하고 결코 그것을 합리화시키지 않는것이다. 더 나아가 왜 화가 나고 우울하며 조바심을 내는지를 말해주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은 자기의 신체적 상태에 대해 민감하다. 그는 변화를 알아차리며 아무리 작은 고통이라도 직감한다. 이런 신체적 민감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안한 상태를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를 알기때문에 상대적으로 경험하기가 쉽다. 자신의 정신 상태에 대한 똑같은 민감성은 훨씬 더 어려운데,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기 능하고 있는사람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부모나 친척 혹은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 집단의 정신적 기능을 규범으로 받아들 이며, 이들과 다르지않은 한 자기는 정상적이라고 느끼고 다른 경우를 살펴보는 데 관심을두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이나 성실성이나 용기나 정신집중을 하고 있는 사람을 못 본 사람 들이 많이 있다. 자기에게 민감해지기 위해서는 완벽하고 건전한 인간의 기능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매우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에 혹은 성장한 후에라도 그런 상을 갖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런 경험을 체득할 수있겠는가? 확실히 이문제에 대해서는 간단히 답을 내릴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문제는 우리의 교육체계에 있어서 매우 위급한 요인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지식을 가르치고 있지만 인간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가르 침, 즉 성숙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있기만 해도 주어질 수 있는 가르침을 잃고 있다. 우리 문화의 이전 시대에 그리고 중국과 인도에서는 가장 가치 있는 인간은 뛰어난 정신적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심지어 교사도 우선은 지식의 근원이지만 더 나아가 그 의기능은 인간적인 태도를 전달해 주는 것이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뿐아니라 러시아 공산주의에 있어서도 찬양과 경쟁심을 불러 일으키는사람은 중요한 정신적 자질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갖추 고 있었다. 그들은 대중적인 측면에서 볼 때, 평범한 사람들에게 대리 만족을제공하는 사람들이다. 영화 배우와 연예인과 컬럼니스트, 중요한 사업가나 정부 관리 등은 경쟁의 표본이 된다. 이런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들이 갖춘 자격은 그들이 뉴스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것이다. 그렇지만 상황이 전적으로 절망적인 것 같지는 않다. 만일 알버트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미국에서 유명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만일 현대의 젊은이로 하여금 인간이 오락을 주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 는 수준을 보여주는생활이나 역사적 인물들과 친숙하게 해줄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생각하게 한다면, 만일 모든 시대의 뛰어난 문학 작품이나 예술 작품에대해 생각해 본다면 훌륭한 인간적 기능 상을 창출하고 따라서 잘못기능하는 데 민감해질 수 있는 기회는 남아 있는 것 같다.만일 우리가 성숙한 삶에 대한 안목을 유지하는 데 실패한다면, 정말로 우리는우리의 모든 문화적 전통이 무너져 내릴 가능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근본적으로 특정 지식의 전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 특성의 전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만일 다음 세대가 이러한 특성을 더이상 보지 못하게 된다면, 그 지식이 전수되고 더 발전된다 하더라도 5천 년이나 된 문화는 무너져 버릴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기술의 실천에 필요한 것들에 대해 논의해 왔다. 이제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특히 중요한 자질에 대해 논의 해보겠다. 사랑의 본질에 대해 앞에서 내가 말한 것에. 따르면, 사랑의 성취를 위한 중요한 조건은 자아 도취의 극복'이다. 자아 도취적방향은 오직 자기자신 내부에 있는 것만을 현실적인 것으로서 경험하는 것이며, 외부 세계의 현상은 현실성을 갖지 못하며 그것들은 자기에게 유익한가 혹은 위험한가 하는 관점에 따라 경험 된다. 자아도취의 정반대되는 것이 객관성이다. 이는 사람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즉 객관적으로 보며 그러한 객관적인 상을 자기의 욕망이나 공포에의해 형성된 상과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모든 형태의 정신 질환은 극단적인 정도까지 객관적일 수 없는 무능을 보여준다. 미친 사람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유일한 실재는 자기내부에 있는 것이고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의 실재일 뿐이다. 그는 외부세계를 자기의 내면 세계의 상징으로, 자기의 창조물로 본다. 우리가 꿈을 꾸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꿈 속에서 우리는 사건을 만들고 우리의 소망과 두려움의 표현인(때로는 우리의 통찰력 과 판단의표현이기도 하다) 연극을 연출한다. 그리고 잠자고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꿈이 만들어 낸 것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현실 이라고 생각하는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이라고 확신한다. 미친 사람이나 몽상가는 외부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견해를 갖는 데 완전히 실패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도 약간은 미쳤거나 졸고 있다.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객관적이지 못한 견해, 즉 우리의 자아 도취적방향에 의해 왜곡된 견해를 갖고 있다. 과연 내가 예를 들 필요가있을까? 누구든 자기 자신과 이웃을 바라보거나 신문을 읽어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한 비객관적인 견해는 현실에 대한 자아도취적 방향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가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 오후에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의사는 그때는 시간이 없으니 다음날 보자고 대답한다. 그녀의 대답은 이렇다. "하지만 선생님, 저는 선생님 병원에서 5분밖 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살고 있어요." 그녀는 그렇게 가까운 곳에 사는데도 자기를 위해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의사의 설명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녀는 이상황을 자아도취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즉 그녀가 시간을 내기 때문에 의사도 시간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유일한 현실은그녀 자신이다.
대인 관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왜곡은 덜 극단적인 혹은 덜 명백한 것이다. 어린이가 스스로 느끼는 것을 알아차리거나 관심을 두는 대신에 순종적이며, 자기들에게 기쁨을 주고 그들에게 신뢰를 준다는 등의 방식으로 자식의 반응을 경험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집착으로 어떠한 요구도 자유의 구속이 라고 생각하기때문에 자기 아내를 지배적이라고 생각하는 남편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린 시절에 상상했던 빛나는 기사의 환상에 맞춰 살지 못한다하여 자기 남편이 무능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아내들이 얼마나 많은가? 외국 민족에 관한 한, 객관성의 부족은 악명이 높다.어느날부터 어느 날까지 자기 민족은 매우 선량하고 고귀했지만 다른 민족은 전적으로 비열하며 잔인했다고 생각한다. 적의 모든 행동과 자기의 모든 행동은 각기 다른 기준에 의해 판단된다. 적의 아무리 선량한 행위라도 그것은 특별한 흉악성의 징표로 여겨지며 우리와 세계를 속이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우리의 나쁜 행동은 필요한 것이었으며, 우리의 고상한 목적에 의해 판단된다. 참으로 개인간의 관계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를 살펴본 다면, 객관성은 예외적인 문제이고, 점점 더해 가는 또는 덜해 가는 자아 도취적왜곡이 규칙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곧 '이성'이다. 이성의 뒤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이다. 객관적이고 이성을 사용한 다는것은 겸손한 태도를 취할 때만, 어릴 적에 가졌던 전지전능의 망상에서벗어날 때만 가능하다.
사랑의 기술의 실천이라는 논의와 관련지어 볼 때 그 말은, 사랑은 자아 도취의 상대적 부재에 의존하고 있으며, 겸손과 객관성 그리고 이성의 발달을 필요로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전 생애를바쳐야 한다. 겸손과 객관성은 사랑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내가 이방인에 대해 객관적일 수 없다면 내 가족에 대해서도 진실로 객관적일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내가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서 객관성을 갈구해야하며, 내가 객관적이지 못한 상황에 대해 민감해 져야한다. 나는 자아 도취적으로 왜곡된, 어떤 사람과 그의 행동 에 대한나의 인상과 나의 관심이나 욕구 또는 두려움 등과는 관계 없이 존재하는 그 사람의 현실 사이의 차이점을 찾아내고자 노력해야 한다. 객관성과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는 것은 사랑의 기술을 얻기 위해 가는 길의 절반을 온 샘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접촉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 획득되어져야 한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객관성을 유보하려 하고, 나머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객관성 없이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느 경우에나 실패할거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자아 도취에서, 어머니와 친척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것은 성장하는,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산적인 방향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 이러한 탈피와 탄생과 각성의 과정은 한 가지 자질, 즉 '신념'을필요로 한다. 사랑의 기술의 실천은 신념의 실천을 필요 로 한다. 신념이란 무엇인가? 신념이란 반드시 신이나 종교적인 교리에 대 한믿음의 문제인가? 신념이란 필연적으로 이성이나 합리적 사고와 는정반대 되는 또는 동떨어진 것인가? 신념의 문제를 이해하려면 '합리적신념'과 '비합리적 신념'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비합리적 신념이란 비합리적 권위에 복종하는 인간의 혹은 사고의 믿음을 의미한다. 반대로합리적 신념은 자신의 사고나 감정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는 확신이다. 합리적 신념은 근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 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확신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견고성이다. 신념은 특별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전인격에 퍼져 있는 성격 특성이 다.
합리적 신념은 생산적 지성과 정서적 활동에 뿌리박고 있다. 신앙은 끼어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생각되는 합리적 사고에서 합리적 신념은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예를 들어 과학자는 새로운 발견에 어떻게도달하는가? 그는 발견하리라 생각하는 것에 대한 아무런 통찰없이 실험을하고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는가? 어떠한 분야에서고 그런식으로 이루어진 참으로 중요한 발견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단지환상을 쫓을 때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인간 노력의 어떤분야에서도 창조적 사고의 과정은 '합리적 통찰'이 라 불리는, 상당한 사전 연구와 반성적 사고 그리고 관찰의 결과로 시작하게 마련이다. 과학자가 충분한 자료를 모으거나 자기가 애초 에 지녔던 생각을 더욱신뢰할 수 있게 해주는 수학공식을 찾아내 는 데 성공했을 때, 그는 임시적인 가설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 다. 그 가설이 지닌 의미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그 가설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많은 자료의 축적으로 그것은 더욱 적절한 가설이 되고 결국 넓은범위의 이론에 이용될 것이다. 과학의 역사는 이성과 진리의 통찰에 대한 신념의 예로 가득 차 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튼 등은 모두 이성애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것 때문에 브루노는 화형을 받았고 스피노자는 파문당했던 것이다. 합리적인 통찰의 개념화에서부터 이론의 정식화에 이르기까지 한 걸음씩 나아갈 때 마다'신념'이 필요하다. 최소한 그 타당성에 대한 일반적인 동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추구해야 하는, 합리적으로 타당한 목적으로서의 통찰에 대한 신념과 가능성 있고 믿을 수 있는 명제로서의 가설에 대한 신념 그리고 궁극적 이론에 대한 신념이 필요하다. 이러한 신념은 자신의 경험에, 자신의 사고력과 관찰력 그리고 판단력의 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비합리적 신념은 권위나 다수가 진실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인정하지만, 합리적 신념은 다수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산적인 관찰과 사고에 바탕을 둔 독립적인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