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 - 에리히 프롬 著 / 정성호 譯
제2장 사랑에 관한 이론
3. 사랑의 대상 (1/2)
사랑은 근본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하나의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세계와의 관계를 결정 짓는'태 도'이며 '성격의 방향'이다. 만약 어떤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 대된 이기주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란 능력에 의해서 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있다. 심지어 사랑받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것이 사랑의 강도 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가앞에서 말했던 것과 똑같은 오류이다.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이라는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찾아야 할 것은 올바른 대상이 전부이며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저절로 진행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마치 그림을 그리려는 사람이 그 기술은 배우지도않고 단지 적당한 대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그것을 찾게 되면 멋지게 그리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태도에 비유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이 세계를,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있다면, 또 한 나는 "난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당신을 통해이 세계를,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한다. 그렇지만 사랑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하는 태도결정이 라는 주장은 사랑받는 대상의 종류에 따라 구분되는 여러 종류의사랑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ㄱ. 형제애
모든 유형의 사랑의 바탕에 깔려 있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사랑은 형제애이다. 형제애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책임과 보살핌, 존경, 지식과 더불어 그의 삶을 심화시키려는 소망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형테의 사랑이다. 형제애는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서, 배타성이 전혀없다는 점으로 특징지어진다. 만약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시켜왔다면, 나는 내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형제애를 통하여 모든 인간과의 일치, 인간적 유대의 경험이 가능해진다. 형제애는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재능이나 지능, 지식의 차이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인간적 내면의 동일성애 비하면 매우하찮은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주변에서 한가운데로 침투해들어 갈 필요가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주로 겉으로만 인식한다면 차이점, 그것도 우리를 갈라 놓는 차이점만을 인식하게 된다. 그렇지만중심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는 우리의 동일성, 즉 우리 모두는 형제라는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중심과 중심과의 관계는 주변과의관계와는 달리 '중심적 관계'이다.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가 이를 너무도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똑같은 말이라도 이를 들어 한 남자가 자기 아내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라고 말하는 것) 그 말을 듣는사람의 태도에 따라 평범한 것일 수도, 특별한 것일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의지 없이 진행되는, 인간 존재의 핵심에 있는 영역의 깊이에 따라 좌우된다. 또한 기이한 일치에 의해서이 말들은 이 말을 듣는 사람에게 있는 똑같은 영역에까지 도달한다. 따라서 듣는 사람은 약간의 분별력만 있다면 그 말의 가치를 파악할 수있다."
형제애는 동등한 존재간의 사랑이다. 하지만 아무리 동등한 존재라 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동등'하지가 않다. 우리가 인간인이상 우리는 모두 도움을 필요로 한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당신이 도움을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움의 필요성이 한 사람은 무력하고 다른 사람은 강력하다는 것을의미하지는 않는다. 무력함은 일시적인 상태이며, 혼자의 힘으로 서서 걸을 수 있는 능력은 영원하며 보편적인상태이다. 그렇지만 무기력한 사람, 가난한 사람, 낯선 사람을 사랑하는것이 형제애의 시작이다. 자기의 혈육을 사랑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동물도 자기 새끼를 사랑하며 돌보아 준다. 무력한 사람은 생명이 주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주인을 사랑한다. 어린이는 부모를 필요로하기 때문에 부모를 사랑한다. 오직 어떤 목적과 관계가 없는 사랑 속에서만 사랑 은 펼쳐지기 시작한다. 구약성서에서는 인간이 사랑해야 할 주요 대상은 가난한 사람과 이방인,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라의 적, 즉 이집트인과 에돔인이라고 나타나 있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무력한 사람에 대해 동정심을 가짐으로써 인간은 형제에 대한 사랑을 발달시키게 되며, 자신 에 대한 사랑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연약하고 위태로운 인간 존재를 사랑환다. 동정은 지식과동일시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구약성 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들은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이방인의 마음을 알고있다.......그러므로 이방인을 사랑하라 !"
ㄴ. 모성애
우리는 이미 앞에서 모성애와 부성애의 차이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모 성애의 본질에 대해서는 다루었다. 거기서 말했던 것처럼, 모성애는 어 린이의 생명과 욕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러 한 정의에 대해 중요한 것올 한 가지 첨가해야 하겠다. 어린이의 삶에 대한 긍정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어린이의 생명을 보존하고 성장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보살핌과 책임이며, 다른 하나는 단순한 보존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이에게 삶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는,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것이좋고 어린 소년 혹은 소녀 라는 사실과 이 땅 위에 있다는 것이 좋다는 느낌을 심어 주는 태도이 다. 모성애의 이 두 가지 측면은 성서의 창조 이야기에 매우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단순한 보살핌 및 긍정과 일치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최소한의 요구를 초월한다. 매일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고 나서 하느님은"매우 좋구나" 라고 말한다. 이 두 번째 단계에서 모성애는 어린이에게 태어났다는 것은 좋은 일이며, '생명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살아있고자 하는 희망을 심어 준다. 이와 비슷한 사상은 다른 성서 구절에 나타난 상징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약속된 땅(땅은 항상 어머니의 상징이다)은 '젖과 꿀이넘치는 곳' 으로 묘사되어 있다. 젖은 모성애의 첫번째 측면, 즉보살핌과 긍정의 상징이다. 꿀은 생명의 달콤함, 생명에 대한 사랑과 살아있다는 행복감을 상징한다. 대부분의 어머니는 젖을 줄수있지만,오직 소수만이 꿀도 줄 수 있다. 꿀을 주기 위해서 어머니는'좋은 엄마'가 되어야 하며, 행복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어린이에 대한 영향은 거의 과장될 수 없다. 생명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불안과 마찬가지로 감염된다. 이 두 가지 태도는 어린이의 전 인격에 않은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사실 어른 아이 할것 없이 '젖'만 받은 사람과 '젖과 꿀'을 받은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 동등한 존재들 사이의 사랑인 형제애나 성애와는 달리, 어머니와자식 간의 관계는 성격상 불공평한 관계이다. 즉 한 사람은 전적으로도움을 필요로 하며 다른 한 사람은 도움을 준다. 모성애를 지고의 사랑이며 모든 정서적인 유대 가운데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이러한 이타 적이고 비이기적인 성격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모성애는 조그마한 아기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라는 어린이에 대한사랑에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아이가 작고, 여전히 자기에게 의존적일 때만 사랑을 주는 어머니이다. 대부분의 여자는 아이를 갖기원하며, 새로 태어난 아기를 보며 행복해하고 열심히 보살피고자 한다. 이 점은 어머니가 아기의 얼굴에 나타난 미소나 만족의 표현을 제외하고는 아기에게서 어떤 것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러한 태도는 여자뿐 아니라 동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본능적 장치에 부분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것 같다.하지만 이 본능적 요소가 얼마 나 큰 비중을 차지하건간에, 이러한 유형의 모성애에 해당되는 특별히 인간적인 심리학적 요소도 있다. 모성애에서 자아도취적 요소를 찾아볼 수도 있다. 아기가 아직 어머니 자신의 일부라고생각하는 한, 어머니의 사랑과 열중은 자아 도취적인, 만족일 수 있다. 또 다른 동기는 어머니의 힘 또는 소유에 대한 희망에서 찾아볼 수있다. 무력하고 어머니의 의지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어린이는 지배적이고 소유욕이 강한 여자에 게는 자연히 만족스러운 대상이다. 이러한 동기들이 아무리 흔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들은 아마초월을 향한 욕구라고 불릴 수 있는 것보다는 덜 중요하고 덜 보편적인것이다. 초월에의 욕구는 인간이 자기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 즉 인간은 피조물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으며 던져진 주사위로서의 자신을 인정할수 없 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인간은 창 조자로서, 즉 창조되었다는 주동적인 역할을 초월한 존재로서느낄 필요가 있다. 이러한 창조의 만족을 느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가강 자연스럽고 가강 쉬운 방법은 어머니의 창조물에 대한, 즉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보호와 사랑이다. 어머니는 아기를 통해 자신을 초월 하고, 아기에 대한 사랑은 어머니의 삶에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해 준다 (아이를 낳음으로써 자신을 초월할 수 없는 남자에게있어서는 사물이나 사상을 창조함으로서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충동이있다). 하지만 어린이는 자라나게 마련이다. 어린이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 와 이머니의 젖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결국 완전하게 분리된 인간 존재가 된다. 모성애의 주요본질은 자라는 어린이를 보살핀다는 것이며, 그것은 어린이를 어머니에게서 분리시키기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성애와 근본적 차이를 드러낸다. 성애에서는 분리된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 모성애에서는 하나였던 두 사람이 분리된다. 어머니는 참아야 할뿐만 아니라 그분리를 원하고 도와 주어야 한다. 바로 이 단계에서 모성애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 되며 비이기심 즉, 모든 것을 주고 사랑받는 아이의 행복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능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자아도취적이며 지배적이고 소유욕이 강한 여자는 어린이가 어릴 때만'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오직 진실로 사랑을 주는 여자, 받는 것보다 주는 데서 더 행복감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를바탕으로 확고히 서있는 여자만이 분리 의 과정을 밟고 있는 어린이에게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자라는 어린이에 대한 모성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않는 사랑은 아마도 가장 성취하기 어려운 사랑일 것이다. 어린아기만을 사랑 할 수 있다는것은 그일이 쉽기 때문에 자칫 기만적인 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때문에 어머니가 사랑할 수 있을 때만, 즉 남편, 다른 아이들, 이방인, 모든 인간 존재를 사랑할 수 있을 때만 진실로 사랑 을 주는 어머니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사랑을 할 수없는 여자는 어린이가 아주 어릴 때만 다정한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분리를 인내하는 의지, 즉 분리된 이후에도 계속 사랑을 줄 수 있는 의지를 시험받을 때는 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될 수 없을 것이다.
ㄷ. 육체적 사랑
형제애는 동등한 사람 사이의 사랑이고, 모성애는 무기력한사람에 대 한 사랑이다. 이 양자는 서로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한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만일 내가 내 형제를사랑한다면, 나는 내 형제들 모두를 사랑한다. 내가 내 자식을사랑한다면, 내 모든 자식들을, 아니 더 나아가서 모든 어린이들을, 내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이 두 가지 형태의사랑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성애'인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융합,다른 한 사람과의 일치를 갈구하는 것이다. 성애는 성격상 배타적이며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성애는 아마 존재하는 여러형태의 사랑 가운데가장 기만적인 형태일 것이다. 우선 성애는 사랑에 '빠진다'는 폭발적인 경험, 즉 그 순간까지도 존재했던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갑자기 무너져 버리는 것과 흔히 혼동되 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지적했던 바와 같이 갑자기 친밀해진다는 경험은 기본적으로 단명한 것이다. 낯선 사람이 친밀하게 아는 사람이되고 나면 더 이상 극복해야 할 장벽도 없고, 갑작스런 친밀감도 더 이상 없게 된다. '사랑받는'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잘 알게 된다. 혹은 거의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상대방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경험을 한다면, 그의 인격의 무한성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 상대방 은 그렇게 친밀하지 않을 수 없을것이며, 장벽을 극복하는 기적은 아마 매일 새롭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타인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곧탐구되며 철저히 규명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친밀성은 기본적으로 성적인 접촉을 통해 형성된다. 사람들은 우선 물리적으로 분리된 것으로써 타인의 분리를 경험하기 때문에, 육체적 결합은 분리를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돌에게 분리의 극복을 나타내 주는 다른요소들이 있다.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 자신의 희망과 불안에 대해이야기하는 것, 자신의 순진한 혹은 유치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 세계에대해 공통의 관심을 형성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분리를 극복하는 것으로 받아들 여지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의 분노, 증오, 자제심의 완전한 결여를 드러내 보이는 것도 친밀감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부부가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변태적인 매력을 설명해 주는데 그 부부는 잠자리에같이 있거나 서로간의 증오나 분노를 터뜨릴 때만 친밀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친밀성은 모두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축소된다. 결과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낯선 사람과의 사랑을 찾는것이다. 다시 낯선 사람이 '친밀한'사람으로 변하고, 다시 사랑에빠지는 경험이 흥겹고 강렬해지며, 다시 점차 그 강렬함이 누그러져새로운 사랑은 이 전과는 다르리라는 환상에 젖어 새로운 정복,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는 희망으로 끝난다. 이러한 환상은 성욕의 기만적성격에 의해 크게 조장 된다.
성욕은 융합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결코 육체적인 욕망이나고통스러 운 긴장에서 탈피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욕은 사랑에 의해서 자극 되는 것처럼, 고독으로 인한 불안과 정복하거나 정복당하려는 희망, 허영과 상처를 주고 파괴시켜 버리려는 희망에 의해서도 자극된다. 성욕은 강렬한 정서와 쉽게 결합되며, 그것에 의해 자극되어지고 사랑을 단지 그 강렬한 정서의 하나로 만들어 버리는 것같다. 성욕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생각과 짝을 짓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를 육체적으로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있다는 잘못된 결론으로 쉽게 나가게 된다. 사랑은 성적인 일치를 향한욕구를 고양시킬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있어 육쳬적인 관계에는 탐욕이나, 정복하고 또는 정복당하고 싶은 욕구는 존재하지 않고부드러움이 결합되어 있다. 만일 육체적 일치를 향한 욕구가 사랑에 의해서 자극되지않는다면 그 것은 도취적이며 순간적인 감각을 넘어서는 일치로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성적 매력은 순간적으로 일치의 환상을 만들어 내는데, 만일 사랑이 없다면 이 '일치'는 두 사람을 예전처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로 남겨 둘 것이다. 또한 때로 그 환상이 사라지게 되면 그들은 이전보다 더 현저하게 떨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 대해 부 끄러워하고, 심지어 서로를 미워하게 되기도 한다. 부드러움은 프로이트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성적 본능의 승화는 아니다. 그것은 형제애의 직접적인 결과이며, 비육채적 형태의 사랑에서 뿐만아니라 육체적 형태의 사랑에서도 존재한다. 성애에는 형제애나 모성애에서는 볼 수 없는 배타 성이 있다. 성애의 이러한 배타적 성격에 대해서는 좀더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성애의 배타성은 흔히 소유적 애착을 의미하는 것으로 혼동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결코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서 서로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찾아 볼수 있는데, 그들의 사랑은 사실 서로간의 자기 중심주의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신을 상대방과 동일시하며 하나의 개인을 둘로 확대함으로써 분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두 사람이 다. 그들 두 사람은 고독의 극복을 경험하지만,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서로에게서 분리되어 있고 소외된 상태로 남는다. 결국 그들이 갖는 일치의 경험은 환상인 것이다. 성애는 배타적이지만, 상대방을 통해 모든 사람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 다. 성애는 내가 오직 한 사람과 전적으로, 강렬하게 융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배타적이다. 성애는 깊은 형제애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생의 모든측면에서의 완전한 위임, 즉 성애적 융합이라는 의미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을 배제한다. 성애도 그것이 사랑이라면 하나의 전제를 갖고 있다. 즉 나는 내 존재의 본짙에서부터 사랑하고 있고 상대방을 그의 존재의 본질에서 경험한다는 전제를 지니고 있다.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 존재는 동일하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는 하나이다. 따라서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는가는 큰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의지의 행위, 즉 내 인생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위임하겠다는 결심의 행위이다. 이것은 혼인은 파기할 수 없다는 사상의 배경이 되며, 두 배우자가 서로를 선택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 선택되어 서로 사랑할 것을 기대하는 여러 형태의 전통적인 혼인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현대 서구 문화에서는 이러한 사상은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랑은 자발적이고 정서적인 반응의 결과로 저항할 수 없는 감정에 의해서 갑자기 묶여 버린 결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모든 남자는 아담의 일부이며 모든 여자는 이브의 일부라는 사실보다는 관계를 맺은 두 사람의 특수성만을 볼 뿐이다. 우리 는 성애의 중요한 요인인 '의지'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은 아니다. 그것은결정이며 판단이 고 약속이다.사랑이 단지 감정이라면 서로를 영원토록 사랑하겠다는 약속의 근거는 사라지고만다. 감정은 생겼다가 없어질 수있다. 만일 내 행위 속에 결정과 판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이사랑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견해를 고려하면 우리는 사랑은 전적으로 의지와 위임의 행위이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결혼이 다른 사람에의해 주선되건 개인적 선택의 결과이건 간에, 일단 결혼이 성립되면 의지의 행위는 사랑의 지속을 보장해 줄 것이다. 이런 견해는 인간본성과 성애의 모순적 성격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이다. 그렇지만 우리들 각자는 독특하며 복사할 수 없는 실체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에서도 똑같은 모순이 반복된다. 우리가 모두하나인 한,우리는 형제애 라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할 수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다른 존재인 이상, 성애는 모든 사람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특별하고 매우개인적인 요소를 필요로 한다. 성애를 완전히 개인적인,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매력으로 보는 견해나 성애는 의지의 행위에 불과하다는 견해는 모두 옳다. 그러나 좀더 적절히 표현 하자면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사랑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쉽게 해체될 수 있는 관계로 보는 생각이나 어떤 상황에 서도 해체되어서는 안되는 관계로 보는 생각은 모두 잘못된것이다.
ㄹ. 자기애
사랑의 개념을 여러 가지 대상에 적용시키는 데는 아무런 반대도나타 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덕이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라는 신념이 널리 퍼져 있다. 이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며, 자기 사랑은 이기심과 같은 것임을 가정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서구 시상에서는 멀리까지거술러 올라간다. 캘 빈(Calvin)은 자기에를 '페스트(pest)'라 말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자기애를 정신 의학적인 용어로 기술하고 있지만, 그의 가치 판단은 캘빈과 다를 바가 없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자기에는 자아도취, 즉 성욕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하는 것과 같다. 자아 도취는 인간의 발달에 있어서 최초의 단계이며, 나중에 이 자아 도취단계로 되돌아오는 사람은 사랑을 할 수가 없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미치기까지 한다. 프로이트는 사랑은 성욕의 표현이며 성욕이 타인을 향하고 있는 경우는 사랑이고,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경우가 자기에라고 가정한다. 사랑과 자기에는 한쪽이 커지면 커질수록 다른 쪽은 작아진다는 의미로 볼때 서로 배타적이다. 만일 자기애가 나쁘다면, 비이기적인 것이 덕이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생긴다. 즉, 심리학적인 관찰로써 자기에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한다는명제를 뒷받침할 수 있을까? 자기에 대한 사랑이 과연 이기심이라는 것과 동일 한 현상인가? 아니면 반대인가? 게다가 과연 현대인에게 있어서 이기심 이란 자신의 모든 지능적이고 정서적이며 감각적인 능력을 가진 개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관심'인가? 그는 자기의 사회 경제적 역할의 부속품 이 되지 않았는가? 그의 이기심은 자기애와 동일한가? 그렇지 않으면 이기심은 자기애의 결여로 생기는 것이 아닌가? 이기심과 자기애의 심리학적 측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기에 대한 사랑이 서로 배타적이라는 표현 속에 담긴 논리적 오류를 강조해 두어야 한다. 만일 내 이웃을 인간존재로서 사랑하는 것이 덕이라면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악이 아니라 덕이 되어야한다. 왜냐하면 나도 역시 인간 존재이기 때문이다.나 자신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인간 개념은 있을 수 없다. 나 자신을 배재하는 원리는 그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 하라'는 성서의 사상은 자기 자신의 통합성 특이성에 대한존경,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이해는 다른 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그리고 이해 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한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끊어질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논의의 결론이 근거하고 있는 기븐적인 심리학적전제에 도달했다. 일반적으로 그 전제들은 다음과 같다. 타인뿐 아니라우리 자 신도 우리의 감정과 태도의 '대상'이다. 타인에 대한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태도는 결코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해 온 문제와 관련시켜 보면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와 반대로 자신에 대한 사랑의 태도는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안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상'과 우리 자신 사이의 관계 가 문제시되는 한, 사랑은 원칙적으로 분할할 수 없는 것이다. 진실한 사랑은 생산성의 표현이며, 보살펌과존경과 책임, 그리고 지식을 포함 한다. 그것은 타인에 의해 생겨나는'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근거한, 사랑받는 사람의 성장과 행복을 능동적으로 갈구하 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할 수 있는 힘의 실현이며집중이다. 사랑에 내포되어 있는 기본적인 긍정은 본질적으로 인간 성질의구현으로서 사랑받는 사람을 향하고 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그 자체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James)가 말하는 일종의 '노동의 분업', 즉 우리는 이를 통해서 우리의가족을 사랑하지만 '낯선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지 않게 되는데, 이는 사랑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기본적인 표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흔히 생각되어지는 것처럼 특정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추상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