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장례, 놀이와 의례의 반란
"사람은 죽는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아침에는 많은 사람이 눈에 띄지만, 저녁에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저녁에는 많은 사람이 눈에 띄지만 아침이면 어떤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젊다'고 생각할지라도 죽어야만 하는 인간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젊은 사람들도 죽어간다. 남자도 여자도 차례차례 죽어갈 뿐."
붓다 스스로의 감상을 적어놓은 우다나바가에서 이른 말이다. 그렇다. 인간은 차례차례 죽어갈 뿐이다. 죽음은 결코 생을 마감하는 당사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많은 이들과의 인간관계가 끝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 그 자체는 개인적인 일이지만 어느 죽음도 사회성을 잃지 않는다. 인간이 삶과 죽음의 메울 수 없는 간격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죽음의 세계는 늘 무섭고도 경외심이 가득 찬 곳으로 다가왔다. 선사 시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대로 내버리는 방법밖에는 몰랐다. 그러다가 차츰 장례라는 절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내세를 믿어 미라를 만들었고, 대지의 신 오시리스가 선행과 악행을 저울로 달아 망자를 심판한다고 믿었다. 이렇게 민족마다 죽음에 대한 그 나름의 의식이 형성되자 그에 따라 장례법을 만들어 나갔다. 우리의 선조들은 어땠는가. 중국측은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다양한 장례형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옥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을 하였으며 나무로 만든 덧널을 만들어 주검을 안치시켰다. 부여에서는 순장 풍습이 있었고 장례 기간이 매우 길었다. 고구려에서는 혼인하자마자 수의를 마련하였고, 장례 때는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후하게 치렀다. 물론 기록된 문헌만 보면,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다양한 장례풍습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죽음을 대하는 의식은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죽음을 달래는 인간 심성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망자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절차인 장례에서만큼은 각 민족마다 고유한 자기 성격을 드러낸다. 죽은 자에 대한 공경심과 공포심 따위가 어우러지면서 상장례 예법은 어느 민족에게나 가장 '보수적인 문화'로 자리잡았다. 그럼 우리의 사정은 어땠는가. 전통적 무속이나 불교의 례로 이루어지다가 주자가례 예법이 덧붙여지면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예법보다도 엄격한 절차를 갖추게 된다. 나는 매년 명절날이나 어른들의 제삿날 또는 주위에 장례가 있어 밤샘이라도 할 양이면 늘 우리의 상장례에 대한 작은 반란을 꿈꾸곤 한다. 좀더 심하게 말한다면, 전통에 대한 대대적인 반란, 모반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그 섬에 가면 비밀을 엿볼 수 있다
여러모로 풍부한 민속유산을 지니고 있는 남도 땅 진도. 유장한 씻김굿이 있는가 하면 질펀한 들노래가 있고, 마을마다 아낙들이 지정된 장소에 모여서 노래하는 우리식 '노래방'이 있어 전통시대의 노래가 아직도 이어지는 섬. 장례풍습도 독특하여 늘 세인의 관심을 끌어왔다. 1979년에 연극으로도 올린 <다시래기>의 한 대목을 보자.
가상주 : 장삿집에서 장사를 하지 않으면 어디서 장사를 하나? 산받이 : 무슨 장사? 뭘 팔아? 가상주 : 장삿집에서 팔 거라고는 뻔하지. 산받이 : 뻔하다니? 가상주 : (비밀 이야기 하듯이) 애비 송장을 팔아야지. 산받이 : 에끼 천하에...... 진짜 상주가 들었단 말이야! 가상주 : 그건 자네씨가 모르는 말씀이야! 내가 돈을 벌려고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아버지 값이 얼마나 나가는지 그걸 저울질 해 보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아버지 제사 밑천 삼고, 비석도 해드리고, 묘막도 짓고,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협조정신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니, 얼마나 효성 지극하고 건전한 장사냐 말이야?
'장삿집(상가)'이니 애비 파는 '장사'를 해야 한다? 아버님 영전에서 '애비 송장'을 판다는 것은 엄격한 유교적 관습에서 보면 놀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옛 진도의 풍습에서는 '애비와 에미'를 늘 장례식날 팔아왔기 때문이다. 다시래기는 장례식을 '애비를 팔 정도'로 웃기는 난장판으로 꾸미는 장례놀이다. 옛부터 우리에게는 양반집에 초상이 나면, 상민을 불러다가 상여를 메게 하고 단골이 소리를 메기는 전통이 있었다. 민촌에서는 마을민 모두가 상두꾼이 되어 상여놀이를 한다. 슬픔에 잠긴 유족들을 웃게 하는 다시래기를 보노라면, 도대체 상갓집에 와 있는지, 아니면 놀이판에 와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상갓집의 놀이 풍습은 진도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다. 섬보다 육지쪽이 일찍 소멸되었을 뿐, 장례와 놀이는 하나로 묶여 이어져왔다.
황해도에서는 생여돋음(상여돋음)을 놀았다. 해가 져서 밤이 이슥해지면 풍물을 치며 빈 상여를 메고 집집을 돌았다. 놀이 잘 하는 사람을 태우고 우는 시늉, 상제 시늉, 재산 나누는 시늉 등으로 사람들을 웃긴다. 상가에서는 이들에게 돈을 내주고, 닭 잡고 술 대접을 하는데, 술을 가져오면 안주를 내라는 식으로 아주 짓궂게 군다. 상여놀이로 돈도 벌어들여 모처럼 모두 모여 놀기도 하고, 공동기금을 조성하거나 상포계에 보태기도 한다. 상여놀이가 끝나면 상가로 돌아와 마당에서 시신을 상여에 안치하고, 상포계원들은 다시 선소리를 위시하여 각종 놀이를 한다. 그리고 곱새치기(투전)를 하면서 밤을 새운다.
경상도의 부유한 집에서는 장례놀이 대돋음을 행했다. 안동대 임재해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출상 전날 저녁에 상두꾼들이 모여서 빈 상여를 메고 앞소리를 메기며, 출상할 때처럼 상여소리를 낸다. "내가 너희들 자랄 때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려가며 잘 키웠다. 그러니 너희들이 나를 섭섭히 보낼 수 있느냐?"는 뜻으로 대돋움을 한다. 대돋움을 할 때 상주는 '사돈의 팔촌'까지 청하여 밤새도록 음주가무를 즐긴다. 경북 안동(서후면 저전동)의 경우, 짓궂은 사람은 안상주처럼 삼베치마를 차려입고 뒤뚱뒤뚱 걸으며 곡하는 척하다가 큰 소리로 넋두리를 하기도 한다.
"아이고 아이고 잘 죽었다. 잘 죽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그나 저나 잘 죽었다. 잘 죽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언제새나 병이 들어 그다지도 죽었는고." "뭐를 많이 벌어놔서 그다지도 잘 죽었노." "속이 다 시원하지!"
슬픔에 잠긴 초상집에 와서 잘 죽었다니...... 진도의 다시래기, 경북의 빈상여놀이, 충북의 대드름, 충남의 호상 놀이, 경기도의 상여놀이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나라 장례문화는 원래 놀이마당이 아니었을까.
장례의 축제성을 살린다면?
그 동안 우리는 주자가례에 지나치게 주눅 들어 기 죽으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공자님 말씀만 따지다 보니 우리 민족 고유의 장례풍습은 철저하게 무시해왔다. 전문 연구자들조차 민중의 장례문화 풍습을 도외시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다. 앞의 임 교수는 그의 '장례관련 놀이의 반의례적 성격과 성의 생명상징'이란 글에서 민중의 진정한 장례풍습을 바로 봐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우선 지배층의 관점에서 사대적인 발상 아래 진행되고 있는 장례 연구의 고정관념을 효과적으로 깨뜨리기 위해서도, 사대부 중심으로 형성되어 위에서부터 밑으로 주어진 예학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밑에서부터 위로 치받치는 민중적 요소들을 주목하고, 큰 나라 중심의 관점에서 형성되어 밖에서부터 안으로 치고 들어온 외래적인 요소와 인류학적 방법에 맞서서 안에서부터 맞받아 버티는 민족적 양식들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한 두 가지 요소들을 함께 갈무리하고 있는 대상이 바로 장례 현장에서 연행되는 민속놀이들이다. 단적으로 오늘날의 상갓집 풍습은 엄숙한 예법이 분위기를 압도하여 혹시 웃기라도 할 양이면 '불효'로 징벌을 받을 판세다. 미국의 인류학자 울프가 "농민문화는 축제로 통한다"고 쓴 글이 떠오른다. 영남대 박현수 교수의 유려한 번역으로 일찍이 1970년대에 소개된 <농민>(1966년)이란 작은 책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계 각지의 농민들은 여러 가지 축제를 통하여 자기네의 유대감을 앙양하고 이 유대감에 금이 가지 않도록 규율을 지킬 것을 다짐한다. 이런 축제의 형태는 스페인의 수호성자 예배로부터 중국 일부 지방의 수호신을 찬양하기 위한 불꽃놀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또한 이런 축제 중에는, 예컨대 장례식처럼 개인적인 가정 사건을 계기로 열리는 것도 있다. 프레드 기어링은 그리스의 카르다밀리 마을 사람들이 장례에서 그들의 공동의식을 다지는 모습을 기술한 바 있다. 장례식에는 죽은 사람의 친지나 친척뿐만 아니라 그의 적들도 참석하며 적들은 정중한 대접을 받는다."
장례식이란 단순하게 죽음을 애도하는 가족들끼리의 통과의례가 아니라 사회적인 단합과 축제문화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장례의 축제성'을 상실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상갓집에서는 화투짝이나 만지면서 밤샘하는 게 고작이다. 그렇다면 주자가례가 강화되기 이전에 이미 성립되었을 것이 틀림없는 축제형식의 장례풍습은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 <수서> 고구려전을 보면, "처음 상을 당했을 때는 곡을 하고 울지만, 장사를 지낼 때는 북을 치고 풍악을 울리면 장례를 치른다"고 하였다. 후대의 유교식 장례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민족 고유의 전통이었다. 그로부터 천여 년이 흐른 뒤, 조선왕조 <태조실록>권 15에 이르길, "외방 백성들은 부모의 장례일에 인근 향도를 모아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조금도 애통해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향도의 전통을 잘 알 수 있다. 1504년 성현의 <용재총화>는 향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지금은 풍속이 날로 야박해졌지만, 오직 향도만은 아름다운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 대체로 이웃의 천인들이 모두 모여서 회합을 하는데 적으면 7.8.9인이요, 많으면 혹 1백여 인이 된다. 매월 돌아가면서 술을 마시고, 초상을 당한 자가 있으면 같은 향도 사람들끼리 상복을 마련하거나 관을 마련하거나...... 이는 참으로 좋은 풍속이다."
"인제가면 언제오나,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건너 안산이 북망이로세......" 꽃상여는 서서히 미끄러지듯 간다. 차디찬 침대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서양식 죽음'이 아니라 친척은 물론이고 사회성원들의 잔치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장례식의 축제성을 알지 못하는 외국인들은 우리의 장례풍습을 이상한 눈으로 보기도 했다.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에 주재했던 카를로 로제티 이탈리아 총영사가 1904년 이탈리아에서 출간한 <꼬레아 꼬레아니>(서울학연구소 번역)에서도 이렇게 적고 있다.
"장례식의 주된 분위기가 분명 슬픈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들의 감정을 가장하려는 극동아시아 모든 민족들의 기질인 것이다. 상여꾼들은 종종 청중의 웃음을 자아내는 노래를 부르며 보조를 맞춰 진행하고, 가족들을 둘러싼 친지들은 농담이나 웃음짓으로 가족들을 흥겹게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쓰는데, 우리들의 관점에서 볼 때는 매우 어색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외국인이 우리 민족 고유의 장례풍습을 어색하게 보았듯이 현재의 우리들도 장례식에서 웃는다는 것을 어색하게 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상두꾼이 사라지면서 이제 우리들도 병원 침대의 창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죽음조차도 축제로 받아들였던 선조들의 풍습은 영영 사라지고 만 것인가. 상부상조하는 풍습의 전범으로서 향도를 꼽는데, 성현의 표현대로 '참으로 좋은 풍속'이 아닐 수 없다. 그 향도에서 놀이하는 장례풍습과 상두꾼 전통이 나왔다. '향도 > 향두 > 상두'로의 변화발전이 그것이다. 조선 초부터 엄숙하기를 요구하는 유교식 장례가 강요되면서 향도식의 떠들썩한 장례는 거세되었다. 다행히 진도, 제주도 같은 '변방'에는 그 전통이 이어진 셈이다. 상두꾼 행렬은 죽음을 대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원초적 풍습이다. 함께 어울려 마시고 놀면서 죽음의 슬픔을 털어내는 행위들에서 달관의 경지마저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북망산길로 떠나는 이를 달래는 그 기막힌 가락의 상두가를 들으면 죽음은 두렵고 먼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친숙한 어떤 것처럼 느껴진다.
천년의 역사를 지닌 화장풍습
초상만큼이나 중요한 일은 묘지를 구하는 치산이다. 우리는 시신을 묘지에 묻는 것만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화장을 하는 것은 불효로 취급받기도 한다. 국토가 비좁은 탓에 묘지난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화장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지만 그렇게 권장하는 사람부터도 화장을 기피한다. 왜 그럴까. 우선 장법의 역사부터 들추어보자. 맹자 등문공장귀를 보면 장사 제도를 역설한 대목이 나온다.
예전에 부모가 죽어도 장사를 지내지 않는 시대가 있었는데, 부모가 죽자 시체를 들어다가 구덩이에 버렸다. 뒷날 그곳을 지나다가 여우와 살쾡이가 시체를 뜯어먹고, 파리와 모기가 엉겨서 빨아먹는 모습을 본 그는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눈길을 돌리고 바로 보지 못했다. 그 식은땀이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흘린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얼굴로 나타나 흐른 것이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곧 들것과 가래를 가지고 돌아와 흙으로 시체를 덮었다. 부모의 시체를 흙으로 덮는 것이 진실로 옳은 일이라면, 효자나 인한 사람들이 자기 부모의 시체를 장사 지내는 데에도 반드시 법도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선조들 역시 애초에는 시신을 들에 버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차츰 장례풍습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장사풍습은 유교가 발생하기 훨씬 전부터 생겨났으며 민족고유의 것이 되었다. 고인돌 유적은 선사 시대 장례풍습을 잘 말해주는 증거물이다. 전세계적으로 장례풍습은 땅에 묻기와 불에 태우는 화장, 물에 떠 내려보내는 수장, 새나 들짐승에게 시신을 먹이로 주는 조장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대개 땅에 묻거나 화장했다. 그러나 시체를 들에 유기하는 풍습이나 나뭇가지에 시체를 걸쳐놓았다가 나중에 매장하는 풍장, 탈육시킨 뒤에 뼈만 다시 장사를 지내는 초분 같은 독특한 풍습도 근대에까지 이어졌다. 불교 전래 이래로 우리 장례풍습에서 일대 변화를 일으키며 나타난 것은 화장이다. 불교에서는 이승의 사연 많던 '더러운' 육신을 태움으로써 인간이 저승으로 미련없이 떠나간다고 믿는다. 이승을 떠나는 마당에 티끌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일단 불교가 대중의 삶에 깊숙이 파고들면서 화장이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국가적으로도 화장을 솔선하였다.
화장은 엄밀히 말하여 두 번 장례를 치르는 셈이다. 한번은 시신을 태우는 일이요, 두 번째는 유골이나 사리를 안치하는 것이 그것이다. 동해 감포 앞바다에 가면 그 유명한 대왕암이 나온다. 일명 문무대왕의 수중릉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수증릉이 아니라 화장한 대왕의 뼈를 뿌린 산골처였으리라. <삼국사기>에도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 불로 태워 장사 지낼 것이요, 초상 절차는 힘써 검소와 절약을 좇아라"고 하였다. 토장이 보편적인 풍습이었는데, 불교 전래 이래로 토장과 화장이 병행되었다. 화장의 경우에도 뼈를 단지에 넣어 무덤에 묻었기에 무덤풍습은 보편적으로 이어졌다. 고려 시대에도 불교식에 따라 널리 화장을 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신진 유학자들에 의하여 성리학이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화장법도 변하게 된다. 충렬왕 16년(1290년) 안향에 의해 성리학과 성리학적인 주자의 가례가 도입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조선 초기의 여러 문집에 화장풍습을 금지하고 성리학식 상장례를 권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으로 볼 때 상층부에서는 성리학적 의례를 시행하려고 했지만 민중은 여전히 불교식 화장을 선호하고 있었다.
주자가례가 널리 배포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규모와 절차가 복잡한 데다가 비합리적인 요소도 많아 일반은 물론이고 사대부계층에서조차 실질적으로 실행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던 탓이다. 체제 안정을 지향하려는 지배층의 의도에 따라서, 민중교화책의 일환으로 주자가례 보급이 늘 강조되었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화장 풍습이 많이 사라지고 매장 풍습이 보편화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상장례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면 매장과 화장 풍습이 늘 병존하고 있었고, 화장에 대한 비판은 조선 시대에 강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화장을 비판적으로만 바라보는 사고방식의 밑바닥에는 조선 시대 주자가례의 성리학적 세계관이 뿌리 깊게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화장이 기피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는 근 1천여 년 동안 화장을 해오지 않았던가.
국립묘지부터 화장터로
나는 국립묘지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 국가 지도자의 장례식부터 화장을 해야지 민중이 따라가지 않을까. 지도층은 화려한 매장을 선호하면서 민중에게만 화장을 하라면 누가 따르겠는가. 우리는 언제나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지금의 호화 분묘가 말썽이 되듯, 예전에는 왕릉 때문에 민중의 고통이 컸다. <연려실기술>에 서경덕이 상소를 올린 대목이 나온다.
"지금은 모두 풍수설에 따라 왕마다 따로 능을 씁니다. 왕릉이 이루어질 때마다 비록 왕실과 외척의 무덤이라도 모두 파냅니다. 또 산 밖 백성들의 논밭도 모두 묻게 될 뿐 아니라 한 능을 들이는 데 매우 넓은 땅을 차지하므로 풀 뜯고 소 먹이는 곳마저 없어집니다. 나라 운세가 크게 일어나 멀리 천년에 이르면 왕릉이 서로 이어져 논밭과 들이 모두 묻고 땅이 남지 않을 것임, 백 리 안에 사람의 흔적이 없어질 것입니다. 폐해가 여기에 이르면 신은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도 옛 임금의 화려한 장례풍습 못지않게 풍수를 따지고 명당 찾기에 골몰하고 있으니 역사의 시계바늘이 중세사회로 되돌아간 것일까. 화장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기왕이면 화장터를 좀더 아름답고 격조있게 만들어 마지막 죽음의 길을 장엄하게 꾸며주어야 하지 않을까. 종교계부터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믿는다. 교회에서도 무덤을 장려할 것이 아니라 교회 차원에서 화장을 권장해야 한다. 화장이 종교적 율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많은데, 부활은 정신적인 것이지 죽은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화장에 관한 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불교계가 화장문제에 관한 사회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종교고유의 '직무유기'에 속한다. 문제는 방법이다. 나는 일본의 납골당 방식도 권장할 만하다고 본다. 그 동안 정부에서 보급하였던 납골당은 민중의 정서와 전혀 맞지 않는다. 사서함 박스와 같이 빼곡히 들어차도록 만든 납골당은 민족의 생활정서를 모르고 시행한 탁상물림 행정의 대표격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봉분을 큼지막하게 만들고 그 위에 금잔디도 심고 봉분 밑에 유골을 넣는 가족형 납골묘는 어떨까. 봉분을 큼직하게 만들고 커다란 비석을 세우더라도 수십 기를 함께 넣을 수 있으니 토지문제 해결의 묘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무덤이 후손들에게 소외되어 방치되는 일도 없어질 것이 아닌가.
<동이전> 동옥저 전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새로 죽은 사람을 땅 속에 우선 가매장하였다가 살이 모두 빠진 뒤에 뼈만 추려서 곽 속에 넣어두므로 결국 한집안 식구들이 한 곽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나무를 새겨 신주처럼 만들어 죽은 사람의 수를 헤아렸다"고 하였다 한집안 식구들이 한 곽에 들어가는 전통이 이미 2천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핵가족화하는 우리 시대에 3대, 4대의 후손들이 무덤을 자주 찾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이름없는 무수한 무덤들이 방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무작정 무덤만을 선호할 필요가 있을까. 화장을 하여 가족 납골묘를 만드는 것은 앞서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에 거부감이 있다면 일단 매장을 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파묘하여 뼈를 추려 화장하여 납골묘에 다시 안장하는 방식을 국가적으로 추진해야 옳지 않을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립묘지부터 화장터로 변하는 솔선수범을 보여야 할 것만 같다. 조상숭배는 유교식만이 전부였을까? <근사록>을 보면 승냥이와 물개조차 제사 지내는 시늉까지 한다고 하였다.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 주자는 제사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오직 이 천지음양의 기는 사람과 만물이 모두 얻은 기이다. 뭉치면 사람이 되고 흩어지면 귀가 된다. 그러나 그 개체 기는 비록 이미 흩어졌을지라도 이 천지음양의 이치는 늘 생겨나고 생겨나서 궁색한 법이 없다. 조상의 정신과 영혼은 비록 흩어졌을지라도 자손의 정신과 영혼은 스스로 여기 있으니 조금은 서로 이어지는 것이다."
조상 제사로 조상과 후손이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상에 대해 공경지심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조상을 모시는 것을 모두 유교에서 나온 것으로 착각한다는 점이다. 전라도 위도에 가면 마룻방 윗목에 시렁을 달고 조상의 위패를 달아 맨 모습이 쉽게 눈에 띈다. 이것은 기존의 조상신에 대한 제사와 주자가례가 서로 타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명절 차례를 올릴 때도 시렁 앞에서 올리고, 마루의 성주독 위에도 조상상을 차려 올린다. 제주도에서는 심방이 와서 '조상본풀이'를 구송하면서 가운가업의 수호신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유교적인 제사법이 전일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제 사정은 이처럼 전혀 달랐다. 21세기를 앞둔 지금까지도 이 같은 토속적인 조상숭배가 일부 지역에서나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토속적인 의례의 생명력이 끈질기다는 것을 반증한다. 민중의 의례를 유교식으로 바꾸려는 노력은 조선 시대 개국과 더불어 본격화되었다. 일찍이 사찰을 중심으로 행한 불교의식이나 무가를 중심으로 행하는 음사를 혁파하기 위한 첫 과제는 각 집마다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미 고려 말에 정몽주나 문익점 같은 신진 유교세력이 건의하기는 했지만, 고려가 멸망한 뒤 과제는 조선왕조로 넘어간다. 조선왕조를 세운 지 2개월 후인 태조 원년 9월, 가묘를 세우고 음사를 엄단할 것을 도평의사사의 배극렴.조준 등이 왕에게 건의하였다. 그 뒤 풍속을 규정하는 소임을 맡은 사헌부가 중심이 되어 주자가례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음사라고 하면 오신행위와 야제를 통한 재화예방이 대종을 이루었다. 오신행위는 장례 전일에 무격을 초청하여 밤낮으로 음주작락케 하였다. 그것은 조상신을 위로하는 것으로서 당시 세속에서는 그 같은 행사를 하지 않으면 부모를 박대하는 불효라고 생각했다. 세종 13년 사헌부의 장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무식한 무리들이 요사스런 말에 혹하여, 질병이나 초상이 나면 즉시 야제를 행하며, 이것이 아니면 이 빌미를 풀어낼 수 없다고 하여, 남녀가 무리를 지어 무당을 불러모으고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차린다. 또는 중의 무리를 끌어오고 불상을 맞아들여 향화와 다식을 차려놓으니 노래와 춤과 범패가 서로 섞이어 울려서, 음란하고 요사스러우며 난잡하여 예절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상하는 일이 이보다 심함이 없으니 수령들로 엄하게 다스리되......"
상장례 전문가 정종수 박사(국립민속박물관 학예관)는 조선 전기에는 무불식 상장례 풍습이 보편적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상 주자가례를 따르는 일은 유교의 교화는 물론이고 경제력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었기에 민중은 대개 전통적인 관행을 지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음사를 유교적인 의례로 변화시키는 데는 거의 백여 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그나마 완전하지도 못했다. 민중교화책은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삼강행실도>, <소학> 등의 윤리서와 향사례, 향음주례의 보급운동으로 계속 이어졌다. 따라서 유교적인 조상숭배 의례가 보편화되면서도 민중생활 곳곳에는 여전히 토착적인 조상숭배가 존속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우리들의 조상신은 대대손손 이어져온 집안의 조상들이다. 집안의 흥망성쇠도 조상 탓으로 보며, 조상의 음덕이 후손들의 제반사를 돌보아주고 집안의 풍요를 지켜준다고 믿는다. 이능화는 고려 시대에 신주를 무가에 맡긴 유풍이라고 지적한다. 흔히 안방의 윗목에 모셔두고 어떤 굿에서나 조상을 모신다. 전라도에서는 조상단지.신주단지.제석오가리.시조할미단지라고도 부르며, 경상도에서는 조상단지.세존단지.시조단지.조상할배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부르독이나 부르단지라는 이름도 보인다.
제주도에서는 군웅.일월 등 타지방에서 볼 수 없는 조상신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씨족수호신을 모시는 신앙이 강하다. 조상신은 조상.삼신.곡령신이 서로 중복되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상신에 제석이나 세존이라는 말이 결부되는 것은 불교적 요소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조상지킴이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신으로서의 속성 및 장손집에 모시는 조상숭배성, 술과 고기를 바치지 않는다는 불교적 속성이 잘 결합되어 있다. 신체는 단지로 된 경우와 별다른 신체 없이 건궁인 경우도 있다. 차례 때 조상상을 차려 제사를 지내고, 햇곡식이 나면 성주신과 함께 천신한다. 집안의 대를 잇는 장손집에서 집중적으로 행하며, 굿을 할 때 조상상을 따로 차려 제사 지내며 별식이 나면 조상에게 바치고 먹어야 한다. 주자가례가 강화되면서 차츰 양반층을 중심으로 조상숭배가 관철되어 나간 것에 비해, 조상신은 고래의 전통적인 조상숭배 유습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조상숭배를 무조건 유교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여성들의 제의 소외, 남성들의 제사 독점
상장례 풍습에서 여자들의 제사 참여문제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많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변하여 집에 따라서는 여자들도 제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에서 제삿날 여자들이 하는 일이란 부엌에서 음식을 마련하는 게 고작이다. 나는 이런 현상을 '남성의 제사 독점'이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슬퍼하는 이가 어찌 남자뿐이겠는가. 그래도 딸만 낳은 남자들은 후사를 이을 사람을 걱정한다. 여기서 그렇듯 중요하게 여기는 후사 문제란 제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남녀의 성비가 깨어져서 사회문제가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남성들의 제사독점 때문이다. 애초에는 주자가례에서도 부부공제가 보편적이었다. 남자가 첫 술잔을 올리는 초헌을 행하면, 아내는 아헌을 행하였다. 그러나 아헌의 몫을 같은 남성들인 형제들이 빼앗아가면서 여성들은 제의에서 밀려났다. 전통적인 무속식 조상숭배에서는 오히려 여성들이 조상신을 모셨다. 토속신앙에서는 오히려 조상숭배에서 남성들이 소외될 정도로 여성들이 주도권을 지녔던 것이다.
조선 전기의 상속제도를 다시금 생각해보자. 자녀들은 누구나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았다. 심지어 시집 온 여자들이 가지고 온 친정 재산이 있으면 당연히 장부등재를 다르게 하여 여자 소유로 하였다. 아들이 없다고 양자 들이는 법도 없었고, 여자도 당연히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재산권의 균등은 제사에서도 균등한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여자들의 재산권도 사라지고 장자상속에 따른 가부장체제가 보다 강화된다. 조선 전기의 제사풍습만을 놓고 본다면, 지금보다 훨씬 남녀평등이 지켜진 것이 아닐까. 나는 조선 시대 성리학이 지닌 건강한 정신을 굳게 믿는 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주자학은 지나칠 정도로 번잡스럽게 격식을 따지기 시작했으며 남녀의 관계를 너무 엄격하게 가르고 공리공담에 숱한 노력을 허비했다. 이런 풍조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여성들이 제의에서 소외된 것은 주자학의 잘못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사회를 위해 만든 예법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번쇄하게 되면 형식으로 흐르는 법이다. 조선 시대의 예법은 아무리 좋게 봐주더라도 인간을 위한 예법을 넘어서서 예법에 인간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여자들의 제의 소외 역시 지나치게 번쇄한 일이 아니었을까. 나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아주 단호하게 외친다. 여자들이여! 당당하게 조상님께 제사 지낼지어다. 남자들이여! 그대들은 그 동안 '조선 후기식'의 잘못된 제사 독점을 포기하고 예전에 해왔던 대로 공생의 길로 모색할지어다.
고정관념을 깬다면?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하게만 생각해왔던 상장례 풍습 중에서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을 몇 가지만 추려보았다. 인간이면 누구나 당면하는 죽음이란 문제, 그 죽음의 문제에서조차 역사적 진실을 방기하면서 지나치게 편향된 생활방식에만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옥스퍼드 대학교의 에드워드 쉴즈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란 부제가 붙은 <전통>이란 역저를 낸 적이 있다. 그는 과거의 포착, 과거 사물의 잔존, 과거 관례의 지구력으로서의 전통과 그 전통의 안정성에 주목한다. 그렇지만 전통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놓치지 않는다. 전통은 변화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합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전통'이라고 했을 때, 민족생활사의 장강대하 같은 유구한 흐름을 망각하고 조선 후기 풍습에만 매몰되는 감이 있다.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민족 고유의 것을 많이 상실하였고, 그 반대급부가 '조선 시대의 것'을 되찾게 하려는 것으로 작용했다는 점도 어느 정도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21세기를 앞둔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조금 더 진지하게 조선 후기의 생활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필요하다고 본다. 진보적인 삶의 방식이 있다면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그릇되게 고착된 삶의 방식은 마땅히 버려야 한다. 냉정하고도 단호한 취사선택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전통을 지나치게 오늘의 사회과학과 과학주의로 재단하는 우매함은 나 자신도 반대한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상하게도 좋은 것은 버리고 나쁜 것은 이어가는 잘못된 전통관에 빠져 있다. 서로 돕고 사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은 흘려보내고 불필요할 정도로 엄격한 격식만을 이어가는 것이 올바른 전통의 계승인 양 치부하는 것 따위가 그것이다.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전통은 삶의 무기는커녕 한낱 자신을 옭아매는 밧줄이 될 뿐임을 상장례 풍습에서 톡톡히 배울 수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