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처가살이와 시집살이의 이중주
요즈음은 남자가 결혼할 때 '장가간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장가든다'고 흔히 표현했다. '든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어떤 것에 소속된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 속언에 처를 취하는 일을 장가든다라고 하니 장가는 처가를 말함이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처갓집으로 장가를 '들어가는'형세다. 왜 그러한 말이 생겨났을까. 우리 문화의 혼례사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은행에 갔다가 우연히 여성잡지를 들추어보니, '신세대의 결혼풍습도'에 관한 글이 있었다. 거기서는 시대 못지 않게 처갓집에 의존하는 경향을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풍습'이라며 신기한 듯 소개하고 있었다. 기사를 쓴 여기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새로운 풍습'으로 보였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처갓집과 변소는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1980년대 이래로 처갓집 근처에 집을 구하거나 아예 들어가 사는 경우도 생겨났다. '신 처가실이 풍습'이라고나 할까. 신처가살이 풍습은 결코 새롭거나 별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구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이 누려온 혼례풍습은 처가살이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조선 후기의 고단한 역사를 20세기 말기에 청산하면서 민족 고유의 처가살이로 되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조로 되돌아가 보자.
2천 년의 역사를 지닌 서류부가혼
혼인하기로 언약하면 여자집에서는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는데 이것을 사위집이라고 부른다. 남자는 저녁에 여자집에 찾아와서 문 밖에서 자기 이름을 대고 꿇어앉아 절하면서 여자집에 묵을 것을 재삼 청한다. 이때 여자의 부모가 청을 들어주면 그는 사위집에서 유숙한다. 한편으로 돈과 천을 준비하는데, 아이를 낳아 성장하면 그제서야 처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일명 서류부가혼이라고 하는 고구려의 혼례풍습은 남자가 여자집에 들어가 사는 것을 전제로 하였으며, 아예 사위집을 지어놓았을 정도다. 모권제의 발전으로 남자는 여자에게 장가를 들게 되었고 여자의 지배권은 강화되었다. 고구려의 '장가들기' 풍습은 고대사회에만 이루어지던 유풍이었을까. 13세기 초, 당대의 문인 이규보는 장인을 애도하는 제문에서 "처가에 의거하게 되니 처부모의 은혜가 친부모와 같다"고 하였다. 또 13세기 초 태부소경 자리에 있었던 정국검이 사위 두 사람에게 악당을 잡아 관청에 넘기도록 했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등장한다. 사위가 그만큼 늘 곁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거의 2세기 뒤인 1415년 <태종실록>권 29에서는 고려의 혼인풍습을 이렇게 말한다.
"고려 시대의 옛 풍습에 따르면 혼인의례가 남귀여가하고 아들과 손자까지도 외가에서 낳아 그들이 거기서 성장하게 되므로, 외가 친척을 더욱 은혜롭게 생각한다."
남귀여가란 남자가 여자집에 들어가 사는 것을 뜻한다. 조선 시대는 어땠을까. 조선 초기 <세종실록)권 40에서도, "우리 나라에서는 처가살이를 하기 때문에 한 어미의 자손들이 한집에 같이 살게 되니 서로 친애하는 풍속이 대단히 성하다"고 하였다. 또한 "남자가 처가살이를 함으로 조카가 아자비를 자기 아버지로 삼고, 또 아자비는 조카를 자기 친자식과 같이 여기니 이것은 전적으로 처가에 은혜를 입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의 개국을 주도한 신유학파는 가족제도 전반에 걸쳐 개혁을 추진하여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으려고 했다. 그들에게는 남자가 장가는 '드는' 풍습은 천륜의 도를 거스르는 행위로 보였다. 그들은 <주자가례>의 친영제도를 도입할 것을 강력하게 희망했다. 그렇다면 친영이란 무엇일까. 친영은 남자가 처갓집에서 사는 일없이 신부가 남자집으로 시집살이를 오는 것이다. 처가살이혼에 대응한 시집살이혼의 시작이 친영제도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보편화된 혼례규범집인 <사례편람>에 잘 드러난다. <사례편람>은 혼례 과정을 의혼, 납채, 납폐 그리고 친영의 네 단계로 나누었다. 의혼이란 중매를 시켜서 양쪽 집을 오가면서 허락을 받아내는 과정이다. 납채는 신랑집에서 청혼을 하고 신부집에서 허혼하는 절차다. 우리 나라 관행에서는 이것을 납폐로 대신하였다. 납폐는 신랑집에서 납폐서를 써서 사자에게 주어 신부집에 보내면 신부집에서는 이것을 받고 주인이 북향하여 재배한다. 그리고 음식, 술과 폐백으로 사례한 다음에 답장을 써준다. 마지막 절차가 혼례식을 실제로 거행하는 친영이다. 친영을 보면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드는 식의 '있을 수 없는 수치'는 면하게끔 되어 있다.
1407년 태종은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파격적인 혼례를 거행한다. 세자로 하여금 김한로의 딸을 친영의 예로 맞아들이게 한다. 세종 역시 왕세자의 친영을 결의하고 의식절차를 정하였는데 이를 둘러싸고 궁정에서는 격론이 벌어진다. 온건파들은 국왕이 친영을 솔선수범해서 자연스럽게 백성이 따르게 하자는 주장을 폈고, 급진론자들은 무조건 친영을 강행하자고 했다. 온건파는 무엇보다도 풍습이란 일조일석에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친영 반대 의견을 제기한 김종서는, "우리 나라 풍속에 남자가 여자집으로 장가드는 일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여자가 남자집으로 시집간다면 몸종.의복.가장집물을 모조리 여자가 장만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꺼려 한다. 남자집에서도 가정이 빈한한 자는 신부를 맞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남자집에서도 꺼려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이 어린 처녀를 시집보내는 것이 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예의범절을 몰라서 실패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친영을 주장하는 이들은 친척간의 남녀 상간이 많은 원인을 처가살이혼에서 찾기도 하였다. 이유야 여러 가지를 댈 수 있겠지만, 가부장사회에서는 남자가 장가를 '들어간다'는 사실 자체가 큰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이미 15세기 초에 처가살이혼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영문제는 15세기 말-16세기 초에 다시금 불거져 나온다. 당시 친영 지지론자들은, "친영의 예는 훌륭한 제도이며 그 뜻이 아름답다. 그런데 사대부들이 아직도 낡은 습속에 매달리고 이것을 거행하지 않는다. 법을 세우지 않고서는 능히 실행되지 않을 것이니 사법기관으로 하여금 규찰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할까"(<증보문헌비고>)라는 강경책을 내놓는다. 또 부부의 도가 무너지고 천도를 역행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정광필 등은 "남귀여가 풍속은 폐단이 없지 않으나 풍속이란 스스로 변하는 것이지 위에서 강제할 것은 못된다"는 이유로 입법 시행을 반대한다. 삼국 시대 이래로 내려온 민속을 갑자기 바꾸는 데 반대했으며 고유한 민속의 지속성을 지지하였다.
혼례사 전문가 박혜인 교수(계명대)는 친영강행론 입장을 예속과 예제를 혼동한 것으로 본다. 서류부가혼을 주자가례의 친영 예로 바꾸자는 것인데, 이것은 혼속을 혼제로 이끌고자 하는 지배층의 생각일 뿐이다. 친영 지지론자들은 우리의 전래 서류부가혼 풍습이 대단히 뿌리 깉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익(1682-1763년)도 <성호사설>에서 "백년 전만 하여도 아직 처가살이혼 풍속이 숭상되었다"고 하였다. 이익이 살던 시기로부터 백년 전이면 16세기경이다. 사대부들의 희망대로 민중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정책적으로 친영을 의도하였지만 민중의 생활에서는 처가살이혼 풍습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논쟁사가 아닐까.
처가살이와 시집살이의 대타협인 반친영
그런데 처가살이혼은 좋은 점만 있었을까. 양반 부호집에서는 몇 명이나 되는 사위가 한 울타리 안에서 살며 매우 호화롭게 생활할 수 있었던 반면에 가난한 층에서는 신랑 친구들이 무리를 지어 신부집에 찾아가서 주식을 강요하는 남침 풍습이 유행하기까지 했다.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폐습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함을 들여갈 때 신랑 친구들이 때로는 행패에 가까운 무리수를 범하는 폐습도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전통에서 이어진 것이 아닐까. 또한 몇 년씩 계속되는 처가살이 동안 빈번하게 왕래할 때마다 드는 선물비, 향연비, 게다가 사위의 의식비는 여자집에 큰 부담이었다. 인습을 어길 수 없어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처가살이를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처가살이혼의 개혁안과 친영 강행론은 계속 평행선을 달리기만 했을까. 양자의 대다협과 절충이 반친영으로 일단락 된다. 남자가 여자집으로 가서 3일만 자고 오는, 3일 친영이 16세기 후반 서울지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백성들은 처지에 따라서 2일 친영, 3일 친영 등 머무는 기간을 다양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그 반친영이란 것도 처가살이혼 유풍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반친영이란 것도 남자가 여자집에 체류하는 기간을 3일 이내로 단축하였을 뿐이지 결혼하자마자 여자를 데려오는 풍습은 아니었다. 처갓집에 여자를 그대로 두고 남자가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아기를 처갓집에서 낳아서 기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타협의 산물인 반친영조차 민중에게 널리 보급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들어오면서 가부장제적 봉건질서는 더욱 확고해졌고 모계제의 유습이었던 처가살이혼도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3일 나들이 풍습은 여전히 남아서 일제 시대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처가살이혼은 '데릴사위' 풍습에도 그 잔영을 남겼다. 일찍이 <동국통감>에 고려 충혜왕 4년 원나라 어사대에 보낸 소에 이르길, "아마도 신랑으로 하여금 신부를 데려가게 해야 할 터인데도 그 풍속은 신부를 내놓지 않으니 마치 진나라의 데릴사위 풍습과 같다......" 운운하였다. 처가살이혼과 데릴사위제가 비슷하다고 느낀 것이다. 가난한 집의 남자가 여자집에 들어가서 머슴을 겸하며 노동력을 제공하여 사위가 되는 데릴사위 풍습은 상당 기간 존속하였다. 비록 형식은 바뀌었을지라도 지금도 데릴사위 제도는 이어지고 있다. 모계사회의 처가살이혼 풍습이 데릴사위혼에 일부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21세기, 신처가살이혼 풍습의 만개
처가살이가 되돌아오고 있다. 처가살이의 반대말이었던 시집살이가 줄어들고 처가살이의 유풍이 널리 퍼지고 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아내를 취한다고 하지 않고 장가를 든다고 한다. 이것은 양이 음을 좇는 것이니 남녀의 예의를 크게 잃는다"고 하였다. 양이 음을 좇는, '불알 달린 사내로서 할 짓이 아니라'고 했던 처가살이가 지금 만개하고 있다.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맞이하는 지금 나는 우리 문화의 급격한 변모를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처가살이혼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시집살이혼이 쇠퇴해 모권제로 이행할 것이라고. 조선 후기의 성리학적 질서는 어떤 의도에서였건간에 시집살이혼을 국가적으로 요구하였고, 그 폐단은 여자의 혹독한 시집살이로 귀착되었다. 단순하게 맞벌이부부의 등장, 탁아시설 미비 등을 이유로 들어 20세기 말에 새롭게 시작된 처가살이 풍조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본다. 마치 유전인자처럼 오랜 세월 잠복해 온 처가살이 풍습이 다시 때를 만나 되살아나는 것은 아닐까. 남자들이여! 그렇게 놀랄 것은 없다. 시집살이혼은 문화적 헤게모니를 차지한 기간이 고작 3백여 년에 지나지 않음을 생각해 보라.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만을 기준으로 친다고 하더라도 고구려 이래로 어언 2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민족 고유의 혼례방식은 처가살이혼이지 않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