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황두와 두레, '노동의 비밀'
"황두가 무엇인가." 가끔 학생들에게 묻는다. 그러나 아는 학생이 없다. "두레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는 그래도 몇몇이 어눌하게나마 답변한다.
황두와 두레, 모두 일찍이 사라진 풍습들이다. '금줄 없이 태어난 세대'는 물론이고 어른들조차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더욱이 황두는 학자들조차 아는 이가 드물다. 우리 문화에 대한 우리의 지적 수준을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삼천리 건갈이벌판의 황두
1950년대 후반의 일이다. 북한에서 사회주의 협동농장을 만들던 시절,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의 몇몇 민속학자들은 사라져가는 전래풍습을 조사하고 있었다. 당시 민속학 연구실장이었던 황철산은 청천강 건갈이 지역을 답사했다. 그는 문득 재미있는 현상에 주목하게 되었다. 왜 남쪽은 모내기를 하고 있는데 북쪽의 그곳은 넓은 벌판인데도 건답직파로 농사 짓고 있을까. 민속학자로서 의심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남쪽에서는 상부상조하는 두레로 농사를 짓는데 그곳은 '황두'라는 이름의 별난 조직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북쪽의 청천강 인근에서는 여전히 모를 내는 이앙법 대신 마른 땅에 직접 볍씨를 뿌리는 일명 건답직파법으로 농사 짓고 있었다. 안주.문덕.숙천.평원을 포괄하는 넓디 넓은 '열두삼천리벌'이 바로 그곳이다. 궁금증을 가지면서 조사를 거듭한 끝에 황두의 실체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황두는 마을마다 이삼십 명의 농민들이 '군대'같이 엄격한 작업 단위를 이루어 김매기를 수행한 조직이었다. 농사 경험이 많은 황두꾼 중에서 작업반장격인 계수, 부계수도 뽑았다. 새벽에 신호용 나팔인 박주라 소리를 듣고 한자리에 모여 계수의 점검을 받고 그날 작업에 들어갔다. 워낙 바삐 일을 했기 때문에 빨리 달리는 사람을 두고, "황두꾼 같다"는 속담이 전해질 정도였다. 황두꾼들의 소지품은 호미.늬역(짚으로 엮은 비옷).조삿갓(갈로 엮은 삿갓).겨블(담배불) 따위였다. 황두의 제초작업은 두레와 달랐다. 그 작업은 맨땅에서 하기 때문에 작업강도가 꽤 높았다. 그리하여 소를 이용한 제초도구인 '칼거'가 등장하였고, 다행히 중복 무렵에 비가 와서 물을 대게 되면 '물후치질'을 하였다. 황두꾼들이 일을 하며 부르던 호미매기 노래(평안북도 박천군 형팔리)를 들어보자.
빙혈냉수 길어다가 시원하게 먹자구나 에-헤이야 에-헤이야 호-호메가 논다 어떤 사람 팔자 좋아 금의호식 잘 먹고 잘 쓰는데 이 녀석의 팔자는 왜 이다지도 곤궁한고 에-헤이야 에-헤이야 호-호메가 논다
황두는 건갈이농법에 아주 적합한 조직이었다. 마른 땅에 그대로 볍씨를 뿌려 농사 짓는 건갈이는 일찍이 조선 전기 농서 <농사직설>에서 이미 향명으로 건삶이로 불린 농법이다. 그러나 모를 옮기는 이앙법이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조선 후기에는 남부지역의 경우 대부분 물삶이로 농사를 짓게 되었다. 다만 서북지방은 물이 잘 빠지는 토양이라 이앙법이 부적합하여 여전히 건갈이를 하고 있었다. 이앙법이 확산된 남부지방에서 두레가 새롭게 발달하는 동안, 전통적인 건갈이지역에서는 여전히 황두가 자리잡고 있었다. 북한학자들이 부지런히 현장을 뒤진 덕분에 황두가 향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라의 향도는 변화를 거듭하면서 황두에 흔적을 남긴 셈이다. 향도 - 향두 - 황두. 이 같은 음운학적 발전도식이 아니었을까.
모든 것은 향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향도는 또한 무엇인가. 향도는 이미 삼국 시대에도 널리 존재했다. 신라 지배층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귀족적이며 준국가적인 화랑제도를 만들었다. 향도는 바로 화랑집단의 조직으로 나타났으니, 용화향도 따위가 그것이다. 고려에 들어와서 향촌사회는 불교를 모시는 제의공동체인 향도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 자연촌이 성장하여 독립하게 됨으로써 군을 여러 개씩 묶은 거군적 규모의 공동체 모습을 보이던 향도는 변질되었다. 또한 향도 공동체를 낳은 불교의 쇠퇴도 향도의 변화를 이끈 요인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향도는 여전히 마을공동체의 성격 속에서 민중의 삶과 더불어 있었다. 성현이 <용재총화>에 쓴 모습 그대로였다. 조선 초기 지배권력은 민중의 생활조직을 보다 확고하게 통제할 수 있는 방략으로서 '향약'을 강구한다. 그에 따라 향도는 다시 한 번 변질된다. 그러나 마을마다 '향도결계'하여 늘 상부상조하는 생활기풍은 그대로 이어졌다. 물론 지역에 따라 향도가 변질되거나 없어지는 정도가 달랐다. <명종실록>권 29를 보자.
이항인들이 향약을 맺는 것을 시속으로 향도라 일컫는다. 새롭게 실시하는 향약마저 향도라고 부를 정도로 향도는 당대까지 보편적인 흐름이었다. 그러나 차츰 향도는 변화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향도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 중의 하나가 앞에서 살펴본 '상두꾼으로의 길'이었다. 또 다른 길도 있었으니, '노동조직으로의 길'이 그것이다.
그 동안 역사책에서 향도를 불교조직으로만 단순화시켜 다뤄왔다. 그러나 신라나 고려 시대의 향도는 함께 노동했던 노동조직에 대한 명확한 명칭이 전해지는 문헌은 없지만 향도의 성격이 단순한 상부상조 조직으로서만이 아니라 공동노동 조직으로도 병존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것은 향도가 황두로 변형해 간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듯 황두는 단순한 노동조직이 아니라 향도에 뿌리를 둔 유구한 역사성을 지닌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두레를 살펴보자.
두레, 공동체문화의 결정
"장목을 해 꽂은 깃대에는 기폭이 펄펄 날리었다. 그들은 정자나무 밑에다 농기를 내꽂고 우선 한바탕 뛰고 놀아보았다...... 저녁 때, 마을사람은 집집이 저녁을 치르고 나왔다. 여자들도 싸리문 밖으로 바람을 쐬러 하나 둘씩 나온다. 한낮에 쩔쩔 끓던 불볕은 저녁이 되어도 땅이 식지 않았다. 북소리가 둥둥 울리자 그들은 신이 나서 모두 정자나무 밑으로 몰키웠다. 풍물이 제각기 소리를 내니 마을에는 별안간 명절 기분이 떠돌았다. 어린아이들은 함성을 올리며 돌아다닌다...... 깽무갱깽, 깽무갱깽, 갱무깽, 깽무갱, 깽무갱깽......
아침해가 뿌주름이 솟을 무렵에 이슬은 함함하게 풀끝에 맺히고 시원한 바람이 산들산들 내 건너 저편으로 불어온다. 깃발이 펄펄 날린다. 장잎을 내뽑은 벼포기 위로는 일면으로 퍼렇게 푸른 물결이 굼실거린다. 그들은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이고 꽁무니에는 일제히 호미를 찼다. 쇠코잠방이 위에 등걸이만 걸치고 허벅다리까지 드러난 장단지가 개구리를 잡아먹은 뱀의 배처럼 뿔쑥 나온 다리로 이슬 엉긴 논두렁 사이를 일렬로 늘어서 걸어간다. 그 중에는 희준이의 하얀 다리도 섞여서 따라갔다. 두레가 난 뒤로 마을사람들의 기분이 통일되었다."
한여름 농촌의 두레패 김매기.
일제 시대 식민지 농촌문제를 매우 정확하게 파악한 민촌 이기영의 소설 <고향>의 한 대목이다. 소설에서 두레는 식민지 농민을 단결시키는 '전통적인 무기'이다. "두레가 난 뒤로 마을사람들의 기분이 통일되었다"는 대목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레는 농사일의 어려움을 상부상조로 극복했던 가장 전형적인 공동체 조직이다. 두레박.용두레.두레길쌈 따위에서 보이듯 두레 자체가 고유의 우리말이며, 고대사회에서도 이미 공동노동은 존재했다. 그리하여 후대에 생동감 넘치는 노동공동체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두레는 농사.농계.농상계.농청.계청.목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일감에 따라서 초벌두레.두벌두레.만물두레 등의 농사두레뿐 아니라 꼴을 베는 풀베기두레, 여자들만으로 조직되는 길쌈두레도 있었다. 두레는 초여름에 조직을 정비한다. 모내기가 끝나면 시원한 정자나무 그늘에 모여서 두레를 이끌어 나갈 일꾼을 뽑았다. 좌상, 영좌, 총각대방 등의 지도자들이 뽑혀 김매기를 이끌게 된다. 사실상 집중적으로 김을 매는 여름은 매우 더운 철이다. 게다가 뙤약볕에서 일시에 많은 논을 맨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두레꾼들은 풍물을 꾸려서 악기를 치고 신명을 잡으며 논두렁으로 들어갔다.
나는 두레를 모르고는 농민문화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음력 2월 1일 머슴날(혹은 하아드렛날) 농군들의 볏가리 쓰러뜨리기 축제, 호미를 모두어 일꾼들의 의식을 거행하는 호미모둠, 머리에 지고 온 참을 먹는 공동식사의 한마당, 칠월 칠석날 두레잔치를 벌이면서 결산하는 호미씻이(혹은 호미걸이), 두레의 풍물패가 벌이는 합굿, 두레패들끼리 선후를 정하여 인사를 하는 기세배, 있는 힘을 다하여 치고받고 싸우는 두레싸움...... 구한말에 한 외국인 선교사는 "한국의 농민들은 일은 하지 않고 놀이와 술로 시간을 보낸다"고 비웃었는데 이는 우리 농민의 세계를 전혀 모르고 한 소리가 아닌가.
두레, 모내기가 가져다준 늦자식
두레를 낳은 장본인은 모내기였다. 모내기는 17세기 후반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농사직설>에 '삽앙'이란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도 모내기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내기철만 되면 가뭄이 드는 특유의 몬순기후 탓에 모를 내지 못하여 농사를 작폐하는 일이 있었다. 그 뒤로 모내기를 국가적으로 금지시켰다. 이렇게 금지했는데도 모내기가 소출이 많았기 때문에 농민들은 완강히 모내기 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인 17세기 후반쯤에 이르면 남도 전역은 거의 모내기를 했다. 모내기는 이모작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때쯤이면 보리도 패여서 배고픔을 달래주게 된다. 모내기철과 보리 수확이 맞물려서 일년 중 가장 분주한 농번기가 찾아든다. 그래서 두레 같은 강력한 노동조직이 필연적이지 않았을까. 일제 시대에 들어올 때까지도 두레는 북쪽으로 계속 퍼져 나갔다. 북쪽에서는 여전히 황두로 농사를 짓고 있었으나 두레의 북상으로 말미암아 차츰 세력을 잃게 되었다. 그 결과 황두는 일부 지역에만 남았다. 나는 늘 이들 황두와 두레의 교체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곤 한다.
'신진세력'인 두레가 세력을 팽창하면서, '구세력'인 황두를 밀어냈다. 두레는 중남부지방을 장악하였고, 황두는 건갈이지역에서나 목숨을 부지하였다. 황두는 분명 '향도의 숨겨둔 자식'이었다. 나중에야 황두의 정체가 드러남으로써, 전혀 무관할 것 같았던 향도.두레.황두의 친족관계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두레는 황두보다 늦게 태어났다. 따라서 두레는 '향도의 늦게 본 자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두레가 먼저 태어난 형님뻘인 황두를 밀어내고 남도땅을 접수한 것이다. 두레는 서서히 북상하여 북쪽의 논농사지역에서는 대개 두레가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 전후시기까지만 해도 전해지던 두레는 제초제가 들어오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다만 풍물패의 풍물굿에만 일부 '유전자'가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노동의 비밀, 일과 놀이의 화두
돌이켜보면, 두레는 1970-1980년대 민중연희운동의 화두이기도 했다. 수미일관하게 '일과 놀이'를 추구했던 놀이패들은 당시대의 이상향으로 '대동세상'을 꿈꾸었으며, 두레에 천착했다. '공동체사회, 공동체문화, 공동체정신' 따위의 말들이 자주 거론되는 시대였다. 또한 두레패.두레꾼.두레조직.뜬두레.두레방.두레정신.한두레.두레농장 등의 '두레가족'이 태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1980년대의 민중판화운동을 살펴보면 유난히도 악기를 치는 그림이 많다. 작고한 오윤이 남긴 그림에도 대동세상을 이룰 것만 같은 무리들이 등장, 대동의 춤을 연출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지난 1970-80년대에 즐겨 읽던 시몬느 베이유의 수상집(이화여대 민희식 교수의 손을 거쳐 1977년에 나온 작은 문고본) <사랑과 죽음의 팡세>를 다시 꺼내서 먼지를 털고 '노동의 신비'란 글을 읽었다. 플라톤은 한 선구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예술이나 스포츠에는 익숙했지만 노동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주인이 노예의 노예라는 것은, 노예가 주인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그렇다. 역사를 끌어간 주인은 바로 농민들 자신이었다. 1909년 파리에서 태어나 아주 어린 나이에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가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나 일생을 낡은 사회와 '레지스탕스'를 벌였던 시몬느 베이유. '아는 것'과 '온 정신을 기울여서 아는 것' 사이에서 절망적 거리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그 거리를 체험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 그녀는 나에게 진정한 주인과 노예가 누구인가를 가르쳐주었다.
누구 하나 시대의 주인공들인 농민들이 조직했던 황두나 두레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레와 향도, 황두, 심지어 상여소리를 내면서 장례를 치르는 상두꾼까지도 하나의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다. 이제 그 속에 숨은 '노동의 비밀'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겉으로 보았을 때,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풍습들에서 짜임새 있는 연결고리가 밝혀진다면 우리 문화의 속알맹이를 벗겨내는데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리들은 역사적으로 명멸해간 사회문화적 현상들을 독립적으로 떼내어서 사고하려는 잘못된 학문적 전통을 지니고 있다. 우리 문화를 탐구할 때 사람들은 곧잘 불상의 계보나 탑의 계통 같은 귀족적인 유형문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민중의 생활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생활양식들, 더군다나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황두나 두레 같은 민중조직에 대해서는 무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심하다. 나는 우리 문화에 대한 탐구가 깊어질수록 이들 민중의 생활사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이 고조될 것을 굳게 믿는다. '15세기의 농민과 황두', '16세기의 농민과 두레' 따위의 주제는 '1980년대의 도시민과 직장생활'만큼이나 중요하지 않을까. 두레와 황두.향도의 관계에서 그 연결고리의 끈을 찾다 보니 그것들이 결코 독립된 개별현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노동과 신앙, 놀이 따위를 모두 '축제화'하여 종합적으로 묶는 힘을 지녔던 농민들의 숨은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두레와 황두, 향도는 몸통은 하나이되 팔과 다리가 각각인 셈이다. 향도라는 하나의 몸통에서 가지가 갈라진 것이다. 장구한 세월을 겪으면서도 민중의 생활 속에 살아 남아 그 힘을 보여주던 이 '혈연가족'! 남북학자들의 공통된 노력이 없었다면 그 '혈연가족'마저 밝힐 수 있었겠는가. 얼굴도 모르는 황철산 씨에게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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