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장승은 어디서 왔는가
천하의 색골 옹녀가 천하의 오입쟁이 변강쇠에게 투정을 부렸다.
"건장한 저 신체에 밤낮 하는 것이 잠자기와 그 노릇뿐, 굶어죽기 고사하고 우선 얼어죽을 테니 오늘부터 지게 지고 나무나 하여옵소"
옹녀의 투정을 받고서 강쇠가 나무를 하러 갔다. 그런데 하라는 나무는 안 하고 장승을 빼내어 지게에 지고 왔다. 이를 보고 깜짝 놀란 옹녀가 말했다.
"에그, 이게 웬일인가. 나무 하러 간다더니 장승 빼어 왔네그려. 나무 암만 귀타 하되 장승 빼어 땐단 말은 듣도 보도 못했소. 만일 패어 때었으면 목신동증 조왕동증 목숨 보전 못할 테니 어서 급히 지고 가서 전 자리에 도로 세우고 왼발 굴러 진언치고 달음질로 돌아옵소"
그러나 강쇠는 도끼 들고 달려들어 장승을 패어 군불을 지핀다. 이에 함양장승 대방이 발론하여 통문을 보내 조선팔도 장승을 모두 소집하여 장승동증을 발동하여 강쇠를 공격한다.
변강쇠전의 한 대목이다. 장승 동티 난 변강쇠 이야기가 소설과 판소리로 두루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당대 사람들은 장승을 건드려서는 아니 되는 영물로 인식했던 것이 아닐까.
장승의 기원
장승은 무엇일까. 근대 민속학의 개조 남창 손진태 선생은 장승에 관해서도 첫 번째 관심을 표하였으니, 그가 내린 교과서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장생은 Devil Post 또는 천하대장군의 이름으로 외국인 사이에 가장 선전되어 있는 조선민속의 하나다. 지금은 점점 없어져가지만 왕년 이 목우는 도처에 건립되었다. 보통 장승이라고 하나 몇 개의 다른 이름도 있다. 대강 분류하면 1.목장승.석장승(물질상으로) 2.이정표로서의 장승.수호신으로서의 장승(성질상으로) 3.사원의 장승.읍촌 동구 장승.경계의 장승.노변의 장승(장소상으로) 등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장승의 기원을 추적해왔다. '옛부터 있어온 문화'라고 애매하게 말해서는 답이 풀리지 않는다. 장승의 출발은 어쩌면 대단히 복잡한 경로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초기 장승과 현존하는 장승이 똑같은 모습이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명칭부터 다양하다. 경기.서울지역의 장승, 관서.관북지역의 장승, 전라도나 경상도의 장승.벅수.법수.벅시, 충청도의 수살막이.수살목.장승.장신 등이 그것이다. 마을 신격을 나타내는 뜻으로 할아버지.할머니당산으로 부르기도 하며 미륵신앙과 결부되어 미륵으로도 부른다. 가장 보편적인 이름은 역시 장승이며, 그 다음이 벅수다. 일괄하여 장승이라 부를 뿐, 남도에는 벅수도 만만치 않게 많이 쓰인다. "왜 벅수같이 서 있냐"는 속담처럼 벅수는 매우 흔한 말이다. 장승의 기원을 추정하는 것은 애매하다. 신라와 고려 시대에 장생.장생표주.국장생석표 같은 이름으로 미루어 장승의 역사를 '장생'에서 구하려는 이들도 많다. 거대한 사찰 소유지를 보유하고 있었을 때 그 경계를 표시하는 의미에서 장승을 세웠다는 장생고표지설이 그것이다. 일찍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도갑사 장생이 등장하며, 후대의 허목(1595~1682년)은 <미수기언>에 다음과 같은 시도 남겼다.
장생의 돌 푯말 보이지 않으니 천고에 어찌하여 함부로 속여왔나 괴이한 일 아득하니 뉘라서 알아내랴 홀로 선 내 마음 슬프게 하네
그러나 단순한 경계표지석이 사람의 얼굴을 한 장승으로 바뀐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한 설득력이 약하다. 그 밖에 솟대, 선돌, 서낭당같이 한민족 고유의 토착신앙에서 기원했다는 설, 고대사회의 남근숭배에서 기원했다는 설, 더 나아가 퉁구스문화설같이 인근 지역과의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제기하는 설도 만만치 않다.
나는 장승 역시 그 기원은 멀리 선사 시대로 올라간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 문화의 역사를 지나치게 한반도 내부에만 편협하게 묶어두는 모순을 범하곤 한다. 우리는 북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져 있는 다양한 신상들에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특히 축치.고리약.유가키르.길리약.골디.오로치 등 시베리아 일대의 고아시아족 목각 신상은 우리의 장승과 너무도 비슷한 영감을 던져준다. 원시사회의 신상이 오늘날의 장승으로 그대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존 장승은 특히나 조선 후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중세사회에서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손 치더라도 상고 시대에 이미 어떤 원형이 있었음은 부정하기 어렵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며 미완의 장이기도 하다. 장승 기원은 어느 하나만의 설로써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다. 모든 민속현상이 그렇듯이 고유의 전래설과 더불어 비교문화설을 함께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기원문제야 어찌되었든간에 우리 민족의 생활과 풍습 속에서 유전하는 독자적인 문화틀로서 나름의 변화발전을 거듭해온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장승에 담겨 있는 전형적인 표정은 그 자체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다. 또한 해학과 분노, 기괴와 웃음을 함께하는 이 땅의 주인공들의 것이다. 장승의 기원문제와는 별도로 '조선 토종'임을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 조선 토종을 서양인들은 어떻게 보아왔을까.
이교도들의 생활풍습, 우상을 만나다
백여 년 전의 일이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러 왔던 오페르트는 장승을 접한 첫 서양인의 하나다. 그는 1982년 라이프치히에서 펴낸 <조선기행>에서 '우상'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사람이 수백 명이나 살고 있는 꽤 큰 마을에서 나는 벌써 여러 번이나 키가 서로 틀리지만 나무로 만든 막대기가 여러 개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는데, 과연 이것은 특별한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자세히 보았을 때 나의 놀라움은 얼마나 컸던가! 자세히 알고 보니 이것은 바로 동리의 우상신이었으며, 사원 혹은 기도소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것을 보호할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행길 가의 땅바닥에 그냥 박아놓았을 뿐이지 그 이상은 아무 의식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키가 대강 두 자에서 네 자 가량 되는 통나무 토막에 하느라고 하였다는 장식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사람들이 그 나무껍질을 벗기고 그 위쪽 끝에다가 가장 원시적인 기술로 기분 나쁘게 찡그린 얼굴을 새긴 것이 곧 모든 장식이다.
오페르트가 장승에게서 '우상'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서양인들이 제3세계 문화를 처음 대할 때, 문화적 상징물을 대개 '우상'으로 보는 탓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들어온 선교사 게일의 말을 들어보자.
당시 조선의 큰길이나 샛길에서 마주치는 장승들. 그들의 얼굴에 드러난 이빨과 이글거리는 눈을 보면 무의식중에 이스라엘인들이 숭배하는 다곤, 몰록, 그모스, 발과 같은 신이나 우상들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미국인들은 우상에 관해 들었고 박물관이나 성경책을 통해 그런 것을 보았다. 그러나 우상을 실제 자기 눈으로 볼 수 있으리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듯 장승은 외국인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우리 문화의 상징물이었다. 그들은 조선에서 '우상'을 직접 본 셈이다. 성경책과 박물관에서나 보던 '우상'이 한국의 길가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감격스럽게 기술하고 있다. 외국인들은 예외없이 '이교도의 생활풍습'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장승의 여러 가지 자리잡음
장승은 세운 장소에 따라 그 기능이 다양하기만 하다. 가장 크게는 마을과 사찰 그리고 읍성을 수호한다. 때로는 이정표 기능만을 담당하기도 한다. 장승을 단독으로 세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남녀를 상징하는 2기가 마주보거나 나란히 서 있다. 동.서.남.북.중앙의 오방에 다섯 장승이 서 있는 경우도 있어 음양오행사상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승에는 대개 기문이 씌어져 매 장승마다에 임무를 부여해 주기도 한다.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축귀대장군.토지대장군.방어대장군.상원주장군.하원당장군..... 주종은 역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다. 장군 명칭을 뒤에 붙인 것은 용맹한 '무장적 수호신'이 마을을 지켜주리라는 기대심리 때문이 아닐까. 가장 보편적인 장승은 역시 마을장승이다. 수구신.노신.거리신.오방지신 등이 마을장승 신격에 가장 근접한 명칭일 것이다. 오가는 자리에 자리잡은 거리신으로 신의 서열에서는 아랫자리다.
장승은 비단 마을 지킴이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짐대(당간)처럼 불이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수문장같이 우뚝 서서 불법을 수호한다. 예천 용문사 호법대장군.삼원대장군, 함양 벽송사의 호법대신.금호장군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고을의 읍성이나 진성.병영.해창에 장승을 세워 공공의 시설을 보비하는 기능도 지닌다. 부안읍성이나 장흥 관산읍성.순창 남계리 등의 장승이 바로 그것이다. 강진 병영의 하고마을에는 병영성을 수호하기 위한 한 쌍의 벅수가 전해지면(아깝게도 1984년에 도난당함), 해미읍성에는 동서남북에 미륵장승이 전해지고 있다. 부안읍성에는 현재 동문과 서문에 각각 당산이 전해진다. 읍성 중앙에는 성황산이 자리잡고 동문에는 돌짐대가 1기 서 있다. 보조 하위신으로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이 있는데, 이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바로 장승이다. 서문 안에는 주신인 돌짐대 1기와 그의 부인이 서 있고, 수문장 역할을 담당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장승이 서 있다. 명문으로 미루어보아 1689년(숙종 15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1795)를 보면, "후자는 이정을 표시하기 위하여 흙, 돌을 쌓은 것으로 옛날의 장정, 단정이던 것이 오늘날 와전되어 장승, 장생, 장성이 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같이 이정표 역할을 담당하던 장승을 이름하여 노표장승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노표장승은 전해지지 않으며 간혹 목장승 하반신에 '한양 50리, 과천 30리'하는 식으로 리수를 기록한 장승이 전해질 뿐이다. 이들 각각의 장승을 자리매김하다 보면 어떤 것이 먼저 발생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가령 사찰장승이 먼저인가, 아니면 마을장승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이다. 대개의 민속문화가 그렇듯이 이 경우에도 어떤 물적 증거는 없다. 다만 나는 마을장승이 먼저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민간에서 널리 존속되어온 장승이 무불융합을 거치면서 사찰에 수용된 것이 아닐까. 물론 아직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장승문화의 르네상스
'험악한' 얼굴, 차라리 친근하고 우스꽝스런 얼굴, 위엄과 권위를 지키려는 안간힘, 왠지 웃음기가 배어 나오는 표정, 시집 장가 가는 총각 처녀의 옷차림새, 위압감을 줄 정도로 험상궂은 표정, 우락부락한 거인, 비쩍 마른 놈, 오동통하다 못해 비만에 걸린 놈, 왕방울처럼 불거져 나온 눈망울, 어울리지 않는 관모, 기괴하게 찢어지거나 배꼽을 잡도록 웃기는 모습으로 벌어진 입...... 이들 천태만상의 차림새는 우리 민중의 얼굴 그대로가 아닐까. 한평생 노동에 찌들면서도 그 웃음과 낙관적 세계관을 잃지 않았던 민중의 따스한 체온이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변강쇠 타령에서처럼 기어히 엄벌을 내리는 데서 민중적 수호신의 권위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장승 얼굴에 그러한 민중의 표정이 담기게 되었을까. 그 배경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16세기 임진.병자 양난을 겪으면서 민중은 전례 없던 전쟁의 참회를 겪어야 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사회적 모순은 무수한 민란을 야기하였으며 각성된 민중은 보다 구체적으로 자기들의 사회정치의식을 조형물로서 담아내기 시작하였다. 민중의 수호신상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진 장승이 대거 출현하였고 동시에 민중 스스로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순박한 장승들을 같이 세웠다. 물론 이들 장승들은 전래의 장승 모체로부터 변화.발전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조선 후기에 이룩된 장승 창작의 치열성은 가히 '장승문화의 르네상스'라고 지칭할 만하였다.
운흥사지 입구에는 1719년에 세웠다는 명문을 새긴 석장승이 전해져 사찰장승의 연도를 분명히 해준다. 무안의 법천사, 총지사, 월출산 도갑사, 상주 남장사, 합천 북방사의 장승들도 모두 조형미가 뛰어난 조선 후기의 사찰장승으로 알려진다. 이들 사찰장승은 석장승이 다수이며 조형감각이 뛰어나다. 미술사가 유흥준 교수(영남대)는 실상사 돌장승에서 위엄과 권위의 형상을, 남원 운봉 돌장승에서는 민중의 자화상을, 부안의 당산과 불회사 장승에서는 전형적인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형상을, 진도 덕병리 장승에서는 미소년의 모습을, 광주 엄미리 장승과 선운사 장승에서는 나무장승의 단순미와 자연미를 발견했노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장승문화의 르네상스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인가?
나무와 돌은 느낌부터 다르다
민중적 조형물로서 장승을 바라볼 때, 재질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목장승은 중부지역에 많고 석장승은 영호남과 제주도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나 이 점도 일률적이지는 않다. 목장승은 10년을 넘기지 못하므로 매년 혹은 몇 년에 한 번 씩 새 장승을 세워야 한다. 이전에 세웠던 장승은 비바람에 썩어 무너져내리고 새롭게 단장한 장승이 그 자리를 물려받는다. 목장승은 매번 새롭게 창조되는 탓으로 전대의 장승과는 조금씩 다르게 변해왔다. 장승은 그것을 빚는 당대 사람들의 의식과 취향, 조형 솜씨의 차이에 따라서 대단히 불규칙하게 변해왔다. 오늘날 전해지는 경기도 광주의 엄미리 장승은 목장승의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지역에 따라서는 아주 형편없는 조형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수명이 오래 가기로는 역시 석장승이다. 특히 전라도나 경상도에 산재하는 벅수라고 불리는 석장승들은 그 뛰어난 조형성과 유구한 역사성으로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다. 바로 이들 석장승에서 조선 후기의 장승이라고 정확히 지칭할 수 있는 증거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돌이 지닌 특유의 질감과 내구성, 세월이 지나면서 풍상에 씻긴 형체, 연륜이 쌓인 이끼에서 완숙해질 대로 완숙해진 장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 솜씨 좋은 장인은 바로 당대 민중의 모습 그대로였다.
광주 성촌마을의 돌벅수 중에 할아버지벅수는 머리에 탕관을 쓰고 타원형의 눈, 세모난 코, 한일자로 다문 입, 굽은 팔자형 수염 등이 근엄하기만 하다. 곡성 가곡리 여자장승의 경우 어여머리 형태에 삼산관을 쓴 것처럼 세 부분을 돋음새김으로 표현하여 이채롭기만 하다. 반면에 남자장승은 당당한 장부의 기상이 엿보인다. 곡성 탑동의 대장군장승은 휘어진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아주 해학적인 표정이 재미있다. 무안 법천사 석장승은 목 부분만 뚜렷하게 파내어 상하를 구분하는 조각수법을 썼다. 얼굴의 눈, 코, 입 등은 주위만을 파내어 사실적인 입체감이 부족한 편이나 해학과 기괴스러움을 아울러 갖춘 벽사의 상징성이 잘 표현된 장생이다.
장승의 생김새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체구, 머리와 이마, 눈매, 귀, 코, 입, 이, 표정, 턱, 수염, 어깨, 옷 등을 일일이 눈여겨보아야 한다. 웃는 얼굴이면서도 근엄하고 성이 나 있으면서도 노기를 숨기고, 때로는 볼이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참고 있는 지혜로움을 담고 있다. 도깨비를 닮았거나 부처님, 문무관, 시골노인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등 천태만상이다. 남장승과 여장승을 구분하여 신랑과 각시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들 장승의 민중적 조형성은 바로 민중적 미의식의 압권으로 그 자체가 '토종 조선사람'의 얼굴이자 시대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각시장승과 신랑장승의 혼례식
장승을 어떻게 깎아 세우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린이들을 위하여 써둔 짧은 글을 소개해 주곤 한다. 몇 년 전 '어린이 민족문화 그림책 솔거나라'를 기획하면서 <장승>이란 그림책을 낼 때 써둔 밑글이다.
사람들이 톱을 들고 숲으로 왔습니다. 동네사람들이 나무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서 어느 나무를 선택할까 고민했답니다. 그때였어요. 젊은이 한 사람이 총각참나무를 톡 건드리며 말했어요. "여기 있군그려. 키도 크고, 멋지게 생긴 나무로군. 요놈을 베어다가 장승을 만드세." 총각참나무는 눈물이 와락 쏟아졌어요. "이제는 영낙없이 끌려가는구나. 아! 이왕 장승 재목감으로서 선택되기 했지만 나의 각시는 누가 될까." 요행히 총각참나무의 마음을 달래주려는지 아주 어여쁜 참나무가 각시참나무로 결정되었답니다. 사람들은 나무를 베기 시작했어요. 참나무는 아팠지만 꾹 참아야 했어요. 숲 속의 친구들이 보는데 눈물을 보일 수는 없잖아요. 사람들은 참나무를 베내어 팔과 다리를 자르고, 껍질을 벗겨내서 말끔하게 만들어 지게에 지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답니다. "모셔가세 모셔가세, 천하대장군 모셔가세, 우리마을 지켜주실, 천하대장군 모셔가세." 노랫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숲 속의 친구들은 손을 흔들며 두 그루 참나무와 헤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답니다. 산 아래에는 동네사람들이 모두 모였답니다. 베어온 참나무를 마당에 뉘여놓고 마을 목수가 능숙한 솜씨로 끌과 망치를 들고 깎아내기 시작했어요. 각시참나무는 비명을 질렀어요. 신랑참나무가 달래기 시작했지요. "조금만 참아. 장승어른이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잖니." 하지만 총각참나무도 아프기는 마찬가지였어요. 나무를 깎는 일이 거의 끝났어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 한 분이 나서서 붓을 들고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어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부디 궂은 일 물리쳐 주시고 오곡이 풍성하길 비옵니다." 숲 속의 참나무가 신랑장승과 각시장승이 된 것이지요. 마을풍물패들이 굿을 치고 아주머니들은 온갖 음식을 차려들고 장승을 모시고서 동구 밖으로 나갔답니다. 길가에 신랑과 각시를 세워놓고 결혼식이 시작되었어요. 몸에는 짚으로 만든 금줄을 치고 한지도 걸쳐놓았지요. 신랑 각시에게 절을 하고 두 손 모아 여러 번 빌고 나자 결혼식은 곧 끝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차려놓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장승 앞에서 결혼식 피로연을 푸짐하게 펼쳤답니다. 장승에게는 북어대가리를 매달아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이내 마을로 되돌아갔지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오고...... 그렇게 여러 해가 흘렀답니다. 사람들은 해마다 나무를 베어다가 장승제를 올려주었습니다. 장승동네 식구들도 차츰차츰 늘어나서 아예 장승백이란 지명도 생겨났습니다. 오고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장승백이 장승님께 두 손 모아 빌면서 아무 탈 없이 해 달라고 빌었고, 장승들도 마을을 잘 지켜주었답니다.
이렇게 장승제를 통해서 세운 장승은 사계절 비바람을 맞으면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된다. 일개 나무에 지나지 않던 살아 있는 자연물이 사람의 손을 거쳐서 하루 아침에 마을의 수호신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우리 선조의 소박한 세계관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장승을 지명수배하며
유구한 역사 속에서 민중의 생활과 더불어 호흡해온 장승은 어디로 떠나갔는가. 많은 장승들이 일찍이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고향을 떠나온 장승은 우선 음식점이나 민속촌 입구에 서서 손님을 마중하는 관광장승으로 새 살림을 차렸다. 아니면 지방자치단체에서 이정표를 겸하여 고갯마루 같은 길목에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들 장승은 거개가 신랑 각시를 나타낸 형상으로, 사모관대에 연지를 찍은 모습이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한결같은 것은 모두 '못난이장승'이라는 점이다. 어떤 것은 달려가서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조형성이 조악하기 이를 데 없다. 국가기관에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아예 돌로 깎아 세운 장승도 곳곳에 들어서고 있는데 '장승제작 금지령'을 내려야 할 판이다. 단순하면서도 미적 감각이 뛰어났던 미적 감각이 민중적 창조력은 어디로 갔는가. 더 큰 수난은 장승들이 대거 도둑 맞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유보다는 개인소유가 앞서고, 공동체보다는 개인이 앞장 서고, 정신보다는 물질이 승한 시대에 진정한 문화유산을 이어 나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 아닐까.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불멸의 진리를 우리 시대는 망각하고 말았다. 반가운 소식도 있다. 일부에서나마 장승이 되돌아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마을장승이 이제는 학교 같은 사회집단을 지켜주는 장승으로 새 살림을 차린 것이다. '민족통일대장군, 민족해방여장군' 따위의 시국장승에서 장승문화의 미래를 읽어본다. 그러나 세련미는 넘치지만 왠지 민중적 조형성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음은 웬일일까.
보설 : 잃어버린 장승을 찾습니다.
이 글에 덧붙여 나는 잃어버린 장승을 전국에 '지명수배'하고자 한다. 주위에서 비슷한 장승이 확인되면 즉각 연락을 기다린다. 우리들 공동체의 희망이 되돌아 오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잃어버린 장승을 되찾아야만 하지 않을까(사진 황헌만).
지명수배1. 도갑사 장승 도갑사를 지키던 도갑사의 호법장승. 길목에 한쌍이 서 있었는데 1989년무렵에 사라졌다. 조선 후기 호남 일대에 널리 세워진 전형적인 돌장승이다(전남 영암군 월출산). 지명수배2. 덕병리 장승 마을의 안녕을 빌던 장승으로 해마다 장승제를 지내고 소뼈를 목에 매달았다. 역신과 악귀를 쫓는데 효험이 높았다고 한다(전남 진도군 덕병리). 지명수배3. 율촌리 할아버지 장승 1991년 무렵 밤 사이에 돌장승이 없어졌다. 골동품상이 다녀간 후 사라졌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 장승만 홀로 둘 수 없어 다시 할아버지 장승을 세웠다(전남 곡성군 오산면 율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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