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왜 하필 여신이었을까
섬과 강을 창조한 마고
성해방, 성차별의 철폐 따위가 우리의 일상적 화두가 된지 이미 오래다. 신들의 세계에서도 그런 화두가 있었을까. 그러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아프로디테에 대해서는 해박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여신과 남신의 역사를 아는 이는 드물다. 신화를 단순한 허구나 전설 같은 이야기로 여기는 풍조는 근대 이래의 지나친 계몽주의적 지식관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체코 출신의 저명한 신화학자 희브너가 갈파한 '신화의 명예회복'을 꿈꾸며, 우리들 신화 속에서 여신과 남신의 자리를 매김해 보자. 신화의 원형이야말로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 삶의 비밀을 보여주는 '청동거울'이리라.
참으로 오랜 옛날, 신화시대에 마고라는 여자 거인이 있었다. 그녀는 남해를 뚜벅뚜벅 걸어서 건너가고 있었다. 바람이 고요하여 풍랑이 일지는 않았지만 바다가 생각보다는 깊었다. 깊은 곳으로 발을 잘못 내딛어 빠지는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짝 젖었다. 워낙 큰 마고였지만 치맛자락이 젖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젖은 치마를 벗어서 월출산에 잠시 널어 두었다. 치마를 널자 산에 난리가 났다. 산 전체가 컴컴해져서 동물들은 갑자기 밤을 맞이한 듯했기 때문이다. 마고는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소피도 여러 번 보았다. 마고의 오줌은 물줄기를 이루어 곳곳에 강을 만들었다. 마고가 서해에서 몇 차례 변을 보자 곳곳에 섬이 만들어졌다. 저녁 찬이슬을 맞은 마고가 기침을 하자 갑자기 폭퐁이 일어나면서 풍랑이 일었고 산과 들의 나무들의 세차게 흔들렸다. 이윽고 밤이 왔다. 마고는 하늘의 별을 만지고, 달을 껴안으며 그렇게 외로운 밤을 지냈다. 아직 사람이 탄생하기 전이라 마고의 친구가 될 만한 이들의 없었던 탓이다.
마고가 얼마나 컸으면 겨우 치맛자락만 적셨겠는가. 거인 설화는 비단 마고에 그치지 않는다. 제주도에 가면 마고와 거의 흡사한 설문대할망이 있다. 이들 마고와 설문대할망은 우리 민족의 시작과 더불어 전해져 온 가장 오래 된 신화였다. 우리 민족 최초의 신은 남자였을 것 같지만 사실은 여자였다. 적어도 우리 신화의 첫 장을 장식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마고와 같은 여자였다. 마고는 서구 신화학 용어로 지모신이다. 우리말로 적당한 표현을 문헌에서 찾자면 신모를 들 수 있다. 마고 시대까지는 적어도 이들 신모들의 독무대였다. 어머니의 힘이 위대하듯 신화 시대의 초기도 여신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니, 여성들이 헤게모니를 잡았던 모계사회의 흔적이 아닐까. 중국 신화에서는 반고가 천지개벽을 이루고 나서, 여와가 인류를 탄생시킨다. 여와는 복희와 오빠 동생 사이였다고 하고 혹은 부자 사이라고도 한다. 오누이 사이였는데 부부관계를 맺었다는 설도 있다. 한대의 석각화상을 보면 사람의 머리에다 뱀의 몸뚱이를 한 복희와 여와의 그림이 자주 나타난다. 여와는 황량한 대지를 걷다가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지상의 진흙을 한 웅큼 파서 물과 반죽하여 어떤 형체를 만든다. 그리고 만든 물건을 땅에 내려놓자마자 신기하게도 살아 움직였다.
이렇듯 중국 신화에서도 여신의 손을 빌려 인류가 탄생했다. 여와는 바로 우리의 마고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마고는 독신녀이고 여와는 기혼녀였다. 또한 마고는 천지를 창조한 인물이고, 여와는 사람만 창조한 인물이다. 서해에 가서 마고가 빚었다는 섬을 바라보면 늘 서해 건너편의 여와도 떠오른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어머니들이 인류의 역사를 창조하였음은 중국뿐 아니라 인도, 그리스, 일본 등 여러 나라의 신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소한 신화의 들머리에서 남자들이란 참으로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아버지들은 나중에야 하늘의 이름으로 천신이 되어 하늘에서 강림하며, 국가권력과 결합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국조가 된 신모
단군신화에 이르면 남신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에서 신단수를 통하여 강림하고, 곰과 범이 사람이 되고자 환웅에게 빈다. 곰은 웅녀가 되었으며, 웅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는다. 동북아시아 전역에서 토템의 대상이었던 곰이 왜 하필 웅녀, 즉 여자일까. 통치적 주권을 상징하는 천제의 아들 환웅과 자연의 신인 웅녀의 결합은 가부장문화와 모계사회의 결합이 아닐까. 조동일 교수(서울대)는 웅녀가 단군의 어머니라는 설정을 신모신화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 웅녀가 단군을 낳았듯이 유화는 고주몽을 낳는다. 북부여왕 해부루의 왕위를 승계한 금와가 태백산(백두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누구인가를 묻는다. 여자가 대답한다.
"나는 하백의 딸로 유화라 하는데 여러 아우들과 노닐 때 한 남자가 나타나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나를 응신산 밑 압록강 가에 있는 집 안으로 꾀어내 남몰래 정을 통해놓고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 마침내 이곳으로 귀양을 보낸 것입니다."
금와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여인을 방 안에 가두니 햇빛이 방을 비췄다. 여인이 몸을 피하자 햇빛이 따라와 다시 비췄다. 그로부터 여인에게 태기가 있어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들이 만했다. 알에서 깨어 나온 사람이 바로 동명왕이었으니, <삼국유사>권1 고구려조에 나온 동명왕 탄생신화다.
하백은 틀림없는 수신이다. 반면에 유화는 고주몽을 낳은 신모로 보인다. 비록 가부장적인 천제 해모수에게 꼬임을 당했고 햇빛을 받아 알을 낳는 식으로 하늘과 결합 하나 지모신으로서 신모적 성격을 잃지 않는다. 고려 때 송나라 사신으로 있던 서긍의 <고려도경>은 신으로 숭배되는 유화를 잘 그려놓았다.
"동명사는 선인문 안에 있다...... 정전의 방은 동신성모의 당으로 쓰였는데 장막으로 가리고 사람에게 신상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나무를 깎아 여인상을 만들어놓았을 것인데 혹 부여처인 하신의 딸이라고 한다. 주몽을 낳아 고구려의 시조가 되게 했다 해서 이를 제사 지낸다."
지모신앙의 흔적이 국조신화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미미하게나마 이어지고 있던 여성들의 지위를 알 수 있다. 최숙경 교수는 <한국여성사>(이대출판사)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여신에게 농사 풍작을 비는 사상은 구석기 시대 비너스 이래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한편 농경에 있어서의 여신 숭배는 채집에 종사하던 여성에 의해 농경이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그 뒤 일정 기간동안 줄곧 씨 뿌리고 밭 갈아 백배, 천배의 수확을 올리던 농경의 주인공이 여성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풍요로운 여신 비너스로서만이 아니라 제의를 집행하는 사제권까지도 장악하고 있었다. 김두진 교수는 여사제가 고대사회의 유풍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가부장적 집단인 유이민이 이주해 오기 이전, 토착부족 세력들은 저마다 지모신 신앙을 가졌고, 대체로 여성들이 그 제사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삼국시대에까지 여사제의 유풍이 많이 남아 있었으며, 노구나 노모의 존재는 그런 유풍이었다. 그러나 국조신화로 편입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문명, 즉 철기문화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전일적인 지배를 의미한다.
산신이 된 신모
우리 나라는 참으로 산이 많다. 그래서인지 산신신앙의 역사가 깊고 넓게 분포되었다. 신모가 산신과 결합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신모의 흔적은 곳곳의 산신에서도 확인된다. <삼국유사>권 5의 "선도성모가 불교행사를 좋아하다"는 기사가 그렇다. 진평왕 시대의 여승 지혜의 꿈에 선도산 신모라 부르는 선녀가 나타나는 것으로 신화는 시작된다. 신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다. 일찍이 우리 나라의 변한 땅에 와서 신선의 술법을 체득하여 오랫동안 머물면서 돌아가지 않았다. 어느 날 신모는 소리개를 만난다. 황제가 기르던 소리개가 우리 나라까지 날아온 것이다. 소리개의 발목에는 편지가 있었는데, "소리개가 머무는 것을 따라 집을 삼으라"는 내용이었다. 소리개가 날아서 산에 앉자 그 산을 서연산이라 하였다. 신모는 오랫동안 서연산에 자리를 잡고 나라를 보위하니 신령한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 신모가 신령한 아들을 낳아 동쪽나라의 첫 임금으로 삼았으니, 혁거세와 알영 두 성인의 시초가 된다. 그는 일찍이 하늘 신선들을 부려 비단을 짜게 하고 붉은 물감을 들여 관복을 만들어 그 남편에게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의 영험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지모신인 신모는 어느덧 산신이 된다. 산신이 된 선도성모는 혁거세와 알영을 낳아 신라를 개국한다. 이것은 신화 체계에서 여성의 힘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러나 <삼국유사>의 다른 편에서는 혁거세가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고 처리하고 만다. 신모 역할이 거세된 것이다. 같은 <삼국유사>의 기록인데도 서로 다른 것은 여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신화체계와 남성을 강조하는 신화체계가 상호 대립하며 병존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여신이 산신도 되고 나라를 여는 주인공으로서의 역할도 잃지 않아서, 산신이 된 지모신이 국가를 창조하였다는 신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29권 고령현조에도 나온다.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곧 천신 이비가에 응감하여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 청예는 수로왕의별칭이라 하였다.
기록자는 "가락국 옛 기록의 여섯 알 전설과 더불어 모두 허황된 것으로서 믿을 수 없다"고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허황된 것'이야말로 신화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가야를 개국한 정견모주도 산신이 된 여성이다. 산신이 된 여성들인 지리산성모, 치술령신모, 운제산신모 등은 곳곳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나라를 연 신과 무관하게 단순히 산신이 되어 무속화된 여성의 이야기로는 지리산성모가 대표적이다.
조선 성종 3년(1472년) 음력 8월 15일 김종직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천왕봉에 오른다. 그리고 천왕봉 성모사 작은 신상 앞에서 제를 올린다. 그 신상이 지리산 성모였으니 눈과 눈썹이 선명하고 머리에 쪽을 지고 화장까지 짙게 했다고 김종직은 기록하였다. <유두유록>에 나온 기사다. 그로부터 520여 년 뒤, 나는 천천히 천왕봉에 올랐다. 1학기 한국 민속학 중간 시험을 답사로 대체하고서 버스 두 대를 빌려 90여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산을 오른 것이다. 성모상은 현재 시천면 중산리 중턱의 천왕사라는 조그마한 암자에서 쓸쓸히 여생을 보내고 있다. 설명을 들으니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단다. 푸른색의 특이한 돌멩이인 성모상은 다부지게 살아온 인생역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은 석상이다. 또 성모상은 여느 불상들과 결코 닮은 꼴이 아니다. 일설에는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라고도 하나 김종직은 이미 "서천서역이 우리 나라와 천백여 세계나 떨어져 있는데 어디 이 땅의 신이 될 수 있느냐"고 지적하였다. 완벽하게 독자적인 조각솜씨를 보여주는 여신상일 뿐이다. 신모신화를 연구해 온 전문가들은 이들 신모신화의 흔적이 다양한 신화들 속에 아주 교묘하게 파편 박히듯 각인되어 있다고 본다. 아직 초기의 신화 속에서만큼은 여성의 힘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는 증거다. 그런데도 신화 시대 여성의 힘이 가려져 있음은 남성 연구자의 시각이 지배적인 상황 때문이 아닐까.
바리 모두 바리데기에게 박수를!
본격적인 역사 시대가 열리면서 나름의 새로운 신들을 요구하게 된다. 민중의 세계관에 자리잡은 신들은 주로 무속신들이 태반을 차지한다. 기독교가 보편화되면서 헬레니즘적 신관이 쇠퇴한 것과 다르게, 외래종교인 불교가 토착화에 성공함으로써 오히려 전통적인 토속신앙이 근세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따라서 무속신의 존재는 중요하기만 하다. 무속신의 반열에도 여성들이 대거 윗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무속신이 된 여성들은 바리데기나 당금애기에서 압권을 이룬다.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난 죄로 아기는 궁전에서 쫓겨난다. 생년월일시를 옷고름에 매고 함에 넣어 자물쇠를 채운 후 강가에 아기를 버린다. 아기는 다행히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비리공덕 할아비와 비리공덕 할매의 손에 건져져서 무럭무럭 자라난다. 어느 날 국왕의 병이 위독하여 백양이 무효라는 소문을 듣게 된다. 바리데기는 비록 자신을 버린 아버지이지만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약수를 찾아 먼길을 떠난다. 바리데기가 겪은 고생을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으리오. 심지어 무장승을 만나 일곱 아들을 낳기까지 한다. 천신만고 끝에 서천서역에서 얻어 온 약수를 부왕의 입에 넣는다. 그 순간 죽었던 부왕이 깨어난다. 그 후로 바리공주는 언월도와 삼지창, 방울과 부채를 손에 든 무당이 되어 죽은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게 된다.
딸이 아버지를 구하는 대목은 다분히 효심을 자극하는 묘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딸이 아버지를 구한다는 설정은 영원한 생명수의 원천이 여자에게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들은 이 탁월한 서사문학으로서의 바리데기 신화를 그 동안 너무 잊고 살아왔다. 어찌된 영문인지 호머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를 읽으면서 무릎을 치는 사람들이, 똑같이 영웅적인 고난을 거쳐가는 우리의 딸에게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우리 모두 바리데기에게 박수를 치자. 그리고 버림 받은 딸이 죽은 사람조차 되살리는 무조의 여신이 되어 우리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준다는 아름다운 서사를 사랑하자. 그리스 신화의 난잡방탕한 여신들, 남신에게 성추행을 당하여 가부장적 제우스 독재체제에 편입된 올림프스의 여신을 기억하고 아낄 것이 아니라 고난의 연대를 거쳐간 영웅서사시의 늠름한 주인공 바리데기를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도 우리는 많이 슬퍼해야 한다. 그녀가 버림받은 이유가 일곱 번째 딸이라는 죄였기에......
남성의 성기를 바치던 부근당
역사 시대로 들어오면 신화는 보다 현실성을 띠게 된다. 마을의 신으로 자리잡은 마을신들은 대개 남녀를 함께 모신다. 수탑과 암탑, 남근과 여근,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여사낭과 남서낭, 용왕과 용궁 부인 식으로 남신과 여신이 음양조화를 이룬다. 음양조화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신에서 압권을 이룬다. 당산할머니와 당산할아버지, 골매기할머니와 골매기할아버지가 그것이다. 부부관계의 친화력은 인격신의 경우에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서해 조기잡이의 신인 임경업 장군 옆에는 '임장군 마누라', 개성 덕물산의 최영 장군 옆에는 '최영 장군 마누라'가 따라붙는다. 신들의 세계에서도 부부관계를 반드시 고려했음은 무속의 신관이 그만큼 현실적이었다는 반증이며, 음양의 상생조화에서 유래했음직하다.
부부가 금실이 좋은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부부가 신이 되어 같이 앉아 있게 된 것은 일부일처제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일부일처제는 역시 남성 우위에 기초한 제도로 귀착하였다. 조선 시대 제의에서 남성 우위는 보다 확실해진다. 여신보다는 남신이 먼저 상을 받는다. 당할아버지에게 제상을 먼저 올리고 난 다음에 당할머니에게 차리는 식이다. 남성우월사회에서는 신들도 남신에게 우선적이었음을 뜻한다. 신들의 세계에도 가부장적 권위가 은연중 반영된다. 심지어 여성신을 남성 신격으로 바꾸어버리는 일까지 발생한다.
서울.경기지역에는 부군당신앙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부군당은 예로부터 남자의 성기를 깎아서 여신에게 바쳤던 곳이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서울의 음사중 각 사에 신사가 있어 부근당이라 한다. 이것이 와전되어 부군당이라고 하기도 한다. 한 번 제사에 드는 돈은 누백금에 이른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도하 각 관부에 으레 작은 사우를 두고 여기에 지전 등을 걸어놓고 부군이라 하여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관아에서 모시던 부군당은 기실 민간성신앙으로서의 부근신앙을 포섭하여 모시던 것이 이후에 다시금 민간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까지 서울에만도 한강 가인 동빙고동이나 서빙고동, 당산동 등에 부군당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부군신앙이었던 서울 원효로 부군당의 주신이 송씨인데, "부근은 송각씨가 실려 있고 사방 벽에 목경물을 달아 지나치게 음설하였다"는 지적과 연결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남자 성기를 신이 된 여자에게 바치는 것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부근'은 '부군'이 되면서 '관료화'된다. 부근신을 여성의 그림으로 모시기도 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 성기를 제물로 받아오던 강력한 여신을 사라진 셈이다.
신들의 세계에서 여전히 강한 여성의 힘
아, 그러나 여신들의 권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강릉 단오제에서 모시는 대관령국사성황의 여성황은 절대적 힘을 지닌다. 최영이나 임경업 장군의 '마누라'는 매우 별난 힘을 지녀서 간혹 남편이 미처 챙기지 못하는 일도 도와주는 탓으로 여성들이 끔찍이도 모신다. 변산반도 칠산바다로 나가 보자. 나는 답사회 회원들과 변산반도를 갈 때마다 격포의 수성당을 찾아간다. 자그마한 수성당은 깎아지른 절벽에 서 있는데, 그곳에는 수성당할머니 이야기가 전해온다. 여러 답사회에 소개한 덕분에 이제는 안내책자에도 오르고 제법 알려진 명소가 되었다. 얼마 전까지 군부대 벙커가 지키고 있던 요새였는데, 전주박물관에서 이곳 일대를 발굴한 결과 마한시대 제사터임이 확인되었다. 수성당할멈은 일명 '개양할미'라고도 부르는데, 딸 일곱을 거느리고 칠산바다를 지켜준단다. 수성당 바로 옆에는 여우골이란 지명이 붙은 협곡이 바다로 치닫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여우골로 몰려오는 것을 할머니가 무찔렀단다. 민중적 수호신이 여신으로 설정되어 있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여신이 노하면 무섭기가 한이 없다. 총각은 죽어서 몽달귀신이 되지만, 처녀가 죽으면 '오뉴월 서릿발' 같이 무섭기만한 왕신이 된다. 삼척 해랑당의 여성낭에게 남자 성기를 매년 바쳐야만 마을에 아무 일도 없게 된다는 이야기도 처녀 귀신이 대단히 무섭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현실세계에서는 약한 여성이 신들의 세계에는 강하게 나타나는 역전의 드라마도 종종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조선 시대의 여성들은 현실세계의 한을 풀기 위해 신들의 세계에서나마 여성의 위력을 강하게 설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성이 지닌 임신과 출산의 힘은 그대로 세상 창조와 풍요의 다산으로 반영된다. 농사의 풍요와 마을의 안녕을 찾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식은 여성의 승리를 꿈꾸도록 만든다. 줄다리기에서 암줄이 이기도록 하거나 윷놀이에서 여자가 이기면 풍년이 온다고 믿는 점풍 따위가 그것이다. 시대가 바뀐 뒤에도 신모신화는 지속되어 여신에게 힘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캘리포니아 의과대학의 볼린은 <우리들 안에 있는 여신들>이란 책에서 여신들을 몇 그룹으로 나누었다. 제1그룹은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추구하는 원형으로서 아르테미스.아테나.헤스티아 세 처녀 여신을 그렸다. 제2그룹은 헤라, 테메테르, 페르세포네로서 상처받기 쉬운 여신들로 분류했다. 우리의 여신은 어느 유형에 속할까. 애초에는 제1그룹의 세 처녀 여신으로 살다가 나중에는 어머니, 딸, 아내를 상징하는 제2그룹으로 바뀐 것이 아닐까. 그녀는 다른 책<우리들 안에 있는 남신들>에서 남성에의 순응을 요구하는 가부장제 문화는 강제로 키를 맞추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와 같은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하늘과 땅의 통치자, 올림프스 신들의 왕인 제우스의 가부장제 신화를 우리 역시 답습하고 있는 중이다. 21세기의 새로운 여신은 어떻게 설정될 것인가. 혹시 '간 작은 남자'들은 꿈에서라도 남신이 주인이 되는 신들의 세계를 꿈꾸거나 않을까. 그러나 이 땅은 아직까지 '간 큰 남자'들이 살고 있는 가부장적사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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